< 돌아가는 길 3 >
제논 백작을 찾는 건 금방이었다. 사실 고작 그 일 하나 하고 이렇게 많은 돈을 받아도 되는지 불안할 정도였다.
“켄드릭. 나 너무 불안해. 우리 이래도 되는 거야?”
크랑의 말에 켄드릭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한숨을 푹 내쉬었다.
“그분한테 고작 그 정도는 돈 취급도 못 받아. 괜찮아. 그걸로 조직이나 잘 다듬어 놔. 나중에 분명히 또 중하게 쓰실 테니까.”
“그, 그럴까?”
“그 많은 돈을 그럼 그냥 다 탕진하라고 줬겠어? 내가 확신하는데, 그거 그냥 대충 썼다간 나중에 아주 호된 꼴 당할 거다.”
크랑은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켄드릭의 말이 너무나 그럴듯했기 때문이다.
솔직히 자신도 그런 식으로 생각하긴 했다. 그저 약간의 확신이 더 필요했을 뿐이다.
“그럼 그건 그렇게 하면 되겠고…… 제논 백작은 어쩌지?”
“우리가 먼저 찾아가야지. 지금 크란시스 저택은 완벽하게 포위되어 있는데 거길 어떻게 들어가?”
“그렇다고 제논 백작이 그쪽으로 가기나 할까? 그리고 간다고 해서 뭐 달라지기나 할까?”
“쟤들 저렇게 다 모여서 저택 안으로 한 발짝도 못 들어가는 거 보면 몰라? 그분이 마음먹고 나오는 순간 다 끝이야.”
“뭐…… 강한 거야 알지만…….”
크랑은 그럼에도 고개를 갸웃거릴 수밖에 없었다. 솔직히 그는 현석이 얼마나 강한지 제대로 실감하지 못했다.
또 현석의 일행이 어느 정도인지도 명확히 파악하지 못했다.
그저 막연히 강하구나 할 뿐이었다.
크랑이 보는 현석은 강하고 돈도 많고, 그리고 마탑의 주인이고, 베를루니를 완벽하게 장악한 사람이다.
하지만 그 강함이 과연 이 도시에 몰려온 그 많은 병사와 기사를 상대로 얼마나 통할지 확신이 서지 않았다.
“저택에 몇이나 들어갔지? 계속 정보는 보고받고 있지?”
켄드릭의 물음에 크랑이 고개를 끄덕였다.
“당연하지. 지금까지 30명이 추가로 들어갔어. 다들 한가락 하는 기사들인데 다시 나오지 않고 있다고 하니 안에서 죽었겠지.”
“안 죽었어.”
“안 죽었다고?”
“아직 한 명도 안 죽이고 다 제압해서 어디 가둬놨을 거야.”
“그게 무슨 의미가 있는데? 그냥 싹 죽여버리는 게 낫지 않나?”
크랑의 말에 켄드릭이 심각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봤다.
“아무래도 그분은…… 크락실리아를 비롯해서 여기 발을 담근 도시들을 다 집어 삼키시려는 것 같아.”
크랑이 피식 웃었다.
“그게 그렇게 쉽나?”
“그럼 마탑의 주인이 되는 건 쉽나? 베를루니를 거의 피해 없이 꿀꺽 삼킨 건?”
그렇게 말하니 또 할 말이 없었다. 하지만 크랑은 그럼에도 그건 절대 쉽지 않을 거라고 여겼다.
크락실리아야 이제 제논 백작을 만나고 난 다음 어찌어찌 잘 하면 얻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나머지 도시들은 얘기가 전혀 다르다.
“다 왔다.”
어느새 제논 백작이 숨어있는 곳에 도착했다.
제논 백작은 자신은 물론이고 크란시스 가문의 모든 병력을 분산해서 도시 곳곳에 잘 숨겨뒀다.
아마 그 병사들을 찾는 건 절대 쉽지 않을 것이다. 다들 평범한 시민으로 도시에 녹아들어갔으니까.
강한 기세를 가진 기사들이 문제였는데, 그들은 그렇게 녹아든 병사들의 도움으로 은밀한 곳에 숨어 있었다.
크란시스 가문이 수백 년에 걸쳐 도시 곳곳에 만들어 놓은 비밀거점의 위력이었다.
그리고 제논 백작이 숨어있는 곳은 그 중에서도 가장 화려한 장소였다.
“진짜 이런 데 잘 숨어 있는 것도 능력이야.”
크랑의 말에 켄드릭이 고개를 끄덕이며 앞에 서 있는 건물을 바라봤다.
그곳은 고급 술집이었다. 그것도 그냥 술집이 아니라 여자들이 시중을 드는 술집이었다.
술 한 잔 마시는 데 몇 골드는 우습게 나가는, 웬만한 사람은 갈 엄두도 못 내는 장소였다.
그렇기에 아무리 제논 백작이라도 이런 데에 있을 거라고는 생각하기 어려웠다.
여긴 지위가 제법 되는 사람들이 자주 드나드는 곳이다. 그러니 다들 제논 백작의 얼굴을 알 테니 금방 드러나게 된다.
또한 이곳의 여자들은 입이 무겁긴 하지만 그렇다고 계속 눈에 띄면 위치가 발각될 확률이 높아지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그런데도 제논 백작은 아직까지 여기서 잘 숨어 있었다.
사실 이곳도 이미 샅샅이 수색을 하긴 했다. 하지만 수색을 한 누구도 제논 백작을 발견하지 못했다.
켄드릭와 크랑은 술집으로 들어갔다.
슬슬 어두워지고 있었기에 의심할 만한 구석은 없었다. 두 사람은 그냥 자연스럽게 술 한 잔 하러 온 손님이 되었다.
문을 열고 들어가자마자 아름답게 치장한 여자들이 다가와 사근사근하게 인사했다.
“어서 오세요.”
“혹시 더 오실 분이 있나요?”
여자 두 명이 두 사람 옆에 바짝 붙어서 안으로 안내했다.
긴 복도가 이어졌다. 그리고 그 복도 중간 중간에 다른 복도가 나 있었다. 아마 그 복도의 끝에 각각 넓은 방이 있을 것이다.
아니나 다를까, 여인들이 두 사람을 다섯 번째 복도로 데려가 그 끝에 있는 넓은 방으로 안내했다.
크랑은 자리에 대충 앉자마자 말했다.
“지배인부터 불러줘.”
“지배인님을요?”
여인들의 눈이 살짝 커졌다. 이런 경우는 거의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손님의 비위를 잘 맞춰주는 것이 그녀들이 할 일이었다.
“잠시만 기다려주세요.”
여인들이 나가고 잠시 시간이 지났다. 두 사람은 한 마디도 하지 않고 앉아 있었다.
이 방이 특별한 아티팩트에 의해 도청된다는 사실을 아주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아무 말이나 섣불리 해선 안 된다.
이내 지배인으로 보이는 사내가 들어와 정중히 인사했다.
“절 찾으셨다고 들었습니다.”
크랑은 쪽지 하나를 내밀었다.
그것을 들어 확인한 지배인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거기에는 세 개의 단어가 쓰여 있었다.
‘그림자, 인장, 약속?’
크랑은 지배인에게 손을 내저었다. 이만 가보라는 뜻이었다.
“그분께 전해줘. 지금이 만날 시간이라고.”
지배인은 알쏭달쏭한 표정으로 고개를 갸웃거렸다. 하지만 이들이 어떤 의도로 여기 왔는지는 충분히 알 수 있었다.
‘저자가 크랑이지?’
어쨌든 움직이긴 움직여야 한다. 물론 이 쪽지를 그대로 전할 생각은 없었다. 이건 폐기될 것이다. 쪽지의 내용은 자신이 직접 입으로 전할 것이다.
크랑과 켄드릭은 할 일을 모두 마쳤다는 듯 홀가분한 표정으로 그날 밤 아주 진탕 먹고 마시고 즐겼다.
그리고 그 깊은 밤 은밀하게 술집에서 빠져나가는 사람이 하나 있었다.
* * *
현석은 저택 한가운데쯤 자리한 응접실 소파에 편안히 앉아 있었다.
현석 옆에는 류지혜만 남아 있었다.
나머지는 혹시 쳐들어올지 모를 적을 감시하기 위해 사방에 흩어져 있었다.
사실 방어는 거의 박승희 혼자서 하고 있었다.
그녀의 스킬 중에 적에게 타격을 주기보다는 뒤로 밀어버리는 넉백샷이 있었다.
그녀는 저택 꼭대기에 자리 잡고서 다가오는 적을 향해 넉백샷을 무한정 쏴대고 있었다.
어차피 진짜 화살을 쏘는 게 아니라 마력을 이용해 만든 마력화살이었고, 쏘는 데 별로 힘도 들지 않아서 마력만 남는다면 아무리 쏴도 끄떡없었다.
굳이 죽이지 말라고 해서 그냥 밀어내기만 했는데, 아무리 그렇다 하더라도 타격은 상당했기에 한 번 밀려난 자들은 다시 달려들지 못했다.
최소한 어디 한 군데 부러지거나 피를 토할 정도의 내상을 입었으니까.
그녀가 쉬거나 자야 할 때 나머지 일행이 도와주면 되는데, 아직까지는 쉴 때가 되지 않아 밤이 되었음에도 그녀가 지붕에서 적을 상대하고 있었다.
물론 달려드는 적은 이제 하나도 없었지만 여전히 포위망은 풀리지 않았다.
류지혜는 가만히 앉아 있는 현석을 보며 조심스럽게 물었다.
“굳이…… 이렇게 하실 필요 있나요? 상대의 피해를 조금만 감수하면 금방 정리할 수 있는데…….”
현석이 그녀를 힐끗 쳐다봤다.
“피해를 굳이 감수하지 않아도 마음만 먹으면 당장 끝낼 수는 있지.”
“한데 왜…….”
“이 도시의 주인공은 내가 아니니까.”
“예?”
그녀가 의아한 표정으로 현석을 바라봤다. 그 순간 현석이 눈을 빛냈다.
“드디어 왔군.”
현석이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제 원하던 대로 할 시간이 됐다.”
“원하던 대로요? 그럼 지금 싸우러 나가는 건가요?”
현석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다 불러.”
“예!”
류지혜가 반색하며 급히 달려 나갔다.
그리고 온몸이 결박당한 채 그 광경을 노려보던 쥬크가 이를 갈며 말했다.
“여기 얼마나 많은 병력이 왔는지 아느냐? 너희가 그들을 다 상대한다고? 웃기지 마라. 이제 다 죽을 거다. 나도 굳이 살 생각 없어. 어차피 그놈들도 날 살려둘 생각이 없는 것 같긴 하지만. 큭큭큭큭.”
현석이 그런 쥬크를 보며 피식 웃었다.
“조금만 기다려라. 널 처벌할 자격을 가진 사람을 데려올 테니까.”
“흥.”
쥬크는 코웃음을 쳤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눈알을 이리저리 굴리고 있었다.
현석이 자리를 뜨려 한다는 걸 알기에 그 사이 여기서 탈출할 방법이 없을까 머리를 굴려 보는 것이다.
물론 그런 방법이 있을 리 없다. 누군가 도와주러 오지 않는 한 말이다.
‘부디…… 그놈들한테 아직 내 쓸모가 남아있어야 할 텐데…….’
그래야 나중을 기약할 수 있다. 이 굴욕은 언젠가 모두 갚아 주리라.
쥬크는 속으로 그렇게 중얼거리며 어금니를 부서질 정도로 갈았다.
그리고 그런 쥬크의 계획은 잠시 후 등장한 사람으로 인해 완전히 박살 났다.
쥬크의 안색이 시커멓게 죽었다.
“제, 제논……!”
응접실로 들어온 사람은 제논 백작이었다.
쥬크를 보자마자 사납게 얼굴을 일그러뜨린 제논 백작은 득달같이 그에게 달려들어 멱살을 잡고 위로 들어올렸다.
“네놈이…… 네놈이!”
쥬크는 제논에게 잡혀 대롱대롱 매달린 채 사색이 되어 말을 더듬었다.
“그, 그러려고 그런 게 아니야. 나도 할 말이 있다고!”
“들을 가치도 없다. 아마 자기 생각이 아니라 뒤에서 누가 충동질했다고 하겠지.”
뒤이어 방에 들어온 현석의 말에 쥬크는 말문이 막혔다. 정확히 저렇게 말하려 했으니까.
제논이 쥬크를 휙 던졌다.
쿠당탕!
바닥을 꼴사납게 구른 쥬크가 바둥거리면서 다시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는 제논 백작을 향해 악을 썼다.
“너보다 내가 가문에 한 일이 많아! 네놈이 강해지겠다고 밖으로 나돌아 다닐 때 가문을 간수한 게 누군데! 고생은 고생대로 다 하고 가문은 너한테 갖다 바치라고? 어떤 호구가 그딴 걸 인정해!”
제논 백작은 그걸 들으며 허탈한 표정으로 멍하니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한심한 눈으로 쥬크를 보며 말했다.
“어차피 난 가주가 될 생각도 없었다. 네가 그따위로 나오지만 않았어도 그저 곁에서 도움만 줄 생각이었어.”
“거짓말 하지 마!”
쥬크가 제논 백작을 사납게 노려보며 소리쳤다.
제논 백작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믿든 말든 상관없지. 넌 어차피 죽을 테니까. 애초에 네게 기회 자체를 주지 말았어야 했다고 계속 후회했다. 가문과 도시를 이 꼴로 만들 줄이야.”
쥬크가 또 뭐라고 소리 지르려는 찰나, 제논 백작이 검을 뽑았다.
슈각!
쥬크의 목이 피를 뿜으며 날아갔다.
제논 백작은 씁쓸하게 쥬크의 시체를 바라보다가 이내 냉정한 표정을 되찾으며 돌아섰다.
“이제 전 뭘 하면 좋겠습니까?”
크락실리아에 들어온 다른 도시의 병력은 모두 제압이 끝났다.
일단 현석이 작정하고 나서니 그 어떤 수작도 소용이 없었다. 도망도 못치고 모조리 당해 지하감옥에 갇혀 있었다.
그 수가 어마어마해서 그들을 먹이는 것만 해도 보통 일이 아니었다.
그렇게 많은 병력이 빠져나갔으니, 근처 도시의 방어 상태가 그리 훌륭하진 않을 것이다. 이런 기회를 그냥 날려 버릴 수는 없지 않은가.
“혼자서 나머지 도시를 다 정리할 수 있나?”
제논 백작이 단호히 고개를 저었다.
“불가능합니다.”
크란시스 가문의 병력은 거의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제논 백작이 몸을 피하면서 병력도 산개시켜 숨겼기 때문이다.
크란시스 후작이 죽으면서 함께 날아간 기사들을 제외하면 병력 손실이 거의 없다시피 했다.
하지만 그것만으로 이곳을 넘보던 세 도시를 동시에 상대하는 건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현석은 그런 제논 백작에세 팔찌 하나를 내밀었다. 인페르노였다.
제논 백작은 조심스럽게 그것을 받은 다음, 그래도 안 된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이건 한 달에 한 번 쓸 수 있는 게 고작입니다. 적 병력으로부터 도시를 방어하는 데에는 쓸 수 있겠지만 공격하는 건 무리입니다.”
현석은 자신도 그 정도는 안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커다란 보석 하나를 꺼냈다.
붉은 빛이 맴도는 보석이었는데, 척 보기에도 마정석을 특별한 방법으로 가공해서 만들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불의 마력만 담긴 마정석이다.”
현석은 그렇게 말하고 인페르노를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붉은 선이 보이나?”
그 말에 인페르노를 확인한 제논은 고개를 끄덕였다. 팔찌에 붉은 선으로 그려진 특이한 패턴이 두 개 있었다.
“그것이 꽉 차면 마법을 쓸 수 있다.”
하나는 인페르노 애로우의 게이지고 다른 하나는 인페르노 스톰의 게이지였다.
게이지는 둘 다 절반밖에 채워져 있지 않았다.
현석이 불의 마정석을 인페르노에 갖다 댔다. 그러자 두 개의 게이지가 쭉 차올랐다.
제논 백작이 놀란 눈으로 인페르노와 마정석, 그리고 현석을 번갈아 바라봤다.
“이거 하나면 20번 정도는 채울 수 있을 거다. 당연히 시간이 지나면 마정석에 불의 마나가 채워질 테고.”
제논 백작의 눈에 열기가 어렸다.
이거면 할 수 있다. 이 힘을 이용하면 굳이 많은 사람을 죽이지 않아도 세 도시를 크락실리아 아래에 놓을 자신이 있었다.
“그럼 맡기지.”
현석은 그 말을 남기고 방에서 나갔다. 그러자 잠시 눈치를 살피던 일행이 우르르 따라갔다.
아직 밤이었지만 현석 일행은 크락실리아를 떠났다.
어쨌든 여기서 더 이상 낭비할 시간은 없었다. 그렇지 않아도 이미 너무 많은 시간을 여기서 썼다.
물론 충분히 그럴 가치가 있었지만 말이다.
어쨌든 그렇게 현석은 일행을 이끌고 다시 던전 밖으로 돌아갔다.
< 돌아가는 길 3 > 끝
ⓒ 김강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