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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눈 뜨고 레벨업-236화 (236/326)
  • < 돌아가는 길 1 >

    현석은 크락실리아가 보이기 시작하자 고도를 낮췄다. 굳이 용을 타고 날아다니는 모습을 사람들에게 보이고 싶지 않았다.

    낮게 날아가던 용은 크락실리아에 가까이 다가가자 허공에 잠시 멈췄다. 마력을 이용해 몸을 띄웠기에 허공에서 움직이거나 멈추는 것이 자유자재였다.

    그 상태로 서서히 아래로 내려가자 용에 매달린 금속판이 바닥에 닿았다.

    그러자 거기에 타고 있던 사람들이 모두 내렸다.

    용을 돌려보낸 현석은 다시 크락실리아로 향했다. 아직 거리가 제법 되지만, 한 시간 안에 도착할 수 있을 것이다.

    현석이 빠르게 걷기 시작했다. 그러자 일행들이 황급히 뒤를 따랐다.

    이동 속도가 점점 빨라졌다. 현석의 마음을 반영하기라도 한 것처럼.

    * * *

    “분위기가…… 좀 묘한데요?”

    류지혜가 현석에게 바짝 붙으며 조용히 말했다.

    지금 그들은 크락실리아의 대로를 걷고 있었다. 한데 예전에 왔을 때와는 분위기나 상황이 뭔가 많이 달라졌다.

    일단 성문을 통과하는 것이 그리 어렵지 않았다. 예전처럼 철저히 통제하는 느낌이 아니었다.

    들어오는 건 마음대로 들어오라는 식이었다. 대신 나가는 사람은 철저히 관리했다.

    그리고 사람이 많이 늘어났다. 어딜 가나 북적였다. 더구나 무기를 든 사람의 비율이 상당히 높아졌다.

    “그 잠깐 사이에 뭔가 일이 터진 모양인데?”

    라이언도 눈을 빛내며 사방을 둘러봤다. 다들 긴장감을 끌어올렸다.

    분명히 평범한 상황은 아니었으니 무슨 일이 벌어지더라도 이상할 게 없었다.

    이럴 때는 그냥 조심해야 한다. 조심하고 또 조심하지 않으면 언제 죽을지 모르는 것이 던전 생활이니까.

    “용병들인가?”

    “저 사람들은 용병이라기엔 너무 복장이랑 장비가 통일되어 있는 것 같지 않아요?”

    “그러게. 저쪽에 있는 사람들은…… 좀 강한 것 같기도 하고.”

    몇몇 부류를 짚으며 일행들이 나름대로 평가와 대화를 이어갔다.

    그렇게 내린 결론은 이곳 크락실리아에 상당히 많은 병력이 유입되었다는 것이다.

    “크란시스 가문의 병사들은 잘 안 보이는 것 같지 않아요?”

    “아예 없는 건 아냐. 저쪽이랑 저쪽에 있잖아.”

    하지만 다른 병사나 용병들에 비하면 없다고 해도 별로 이상하지 않을 정도로 수가 적었다.

    “나머지는 다 성벽이랑 성문에 있겠지. 원래 그쪽을 담당하는 가문이잖아.”

    일행들이 이런 대화를 나눌 수 있는 건, 이곳에 오기 전에 켄드릭으로부터 크락실리아에 대한 정보를 자세히 들었기 때문이다.

    일단 말이 통하기 시작하니 켄드릭은 일행에게 있어선 지식과 정보의 화수분 같은 존재가 되었다.

    마치 이곳 던전 세상에 대해서 모르는 게 없는 사람 같았다. 뭘 묻든 거침없이 대답해주었다.

    켄드릭이 모든 걸 다 알지는 못하지만 베를루니나 크락실리아를 비롯해 근처의 몇 개 도시 정도에 대해서는 웬만한 실무자보다 빠삭하게 알고 있으니 일행에게 해줄 말이 상당히 많았다.

    어쨌든 그런 상황이니 그렇게 나름 토론을 하던 일행의 시선이 결국 켄드릭에게 모이는 건 당연한 귀결이었다.

    “제가 보기에는…… 크락실리아와 가까이 있는 도시 몇 군데에서 병력을 파견한 것 같습니다.”

    그 말에 다들 놀란 표정을 지었다.

    “분위기를 보니 전쟁은 아닌 것 같고…… 뭔가 중대한 일이 있는 모양입니다. 힘을 써야할 만한 상황 말입니다.”

    “힘을 써야할 상황…… 마수나 마족이 온 게 아니라면 전쟁밖에 없는데?”

    다들 표정이 심각해졌다.

    “혹시 베를루니를 침공하려고 손을 잡은 건 아니겠지?”

    베를루니는 이 근처 도시들이 손을 잡았다면 가장 먼저 노려야 할 도시였다.

    일단 베를루니부터 장악을 해야 안전하게 뒤를 확보하고 나머지 도시들을 공략할 수 있기 때문이다.

    달리 말하면 베를루니를 넘지 못하면 이곳 던전 세상의 도시들로 진출하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뜻이기도 했다.

    하지만 그 의견에 켄드릭은 고개를 저었다.

    “그건 아닌 것 같습니다. 제가 보기에는 왠지 문제가 외부에 있는 게 아니라 내부에 있는 것 같은데…….”

    켄드릭은 그렇게 말하며 성문 쪽을 힐끗 쳐다봤다. 성문에는 나가려는 자들이 길게 줄을 서 있었다.

    들어오는 건 쉽지만 나가는 건 정말로 철저하게 확인하고 있었다. 가끔 제대로 확인이 어려운 사람은 아예 못 나가기도 했다.

    그걸 보니 켄드릭이 무슨 말을 하는지 대충 이해를 했다. 라이언은 고개를 끄덕이며 중얼거렸다.

    “누군가를 찾고 있네.”

    “네. 맞습니다. 게다가 성문을 지키는 자들, 크락실리아의 병사나 기사들이 아닙니다.”

    “아니라고?”

    “예. 복장이나 장비를 봤을 때…… 세 개 정도의 도시에서 나온 병력이 섞에 있군요.”

    크락실리아가 근처에서 손을 잡을 만한 도시 자체가 셋뿐이었다.

    그러니 모든 도시가 손을 잡았다고 봐도 된다.

    그 모든 상황을 듣고 확인한 현석이 결론을 내렸다.

    “아무래도…… 서두르는 게 좋을 것 같군.”

    이곳 크락실리아에서 가장 힘이 강한 가문은 단연 크란시스 가문이었다.

    그러니 크란시스 가문을 찾아가 대화를 나누는 것이 가장 쉽고 빠른 길이었다.

    현석은 크란시스 가문으로 향하며 왠지 일이 그렇게 간단히 풀릴 것 같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 이곳 크락실리아에서 벌어지는 일들이 크란시스 가문과 많이 얽혀있을 것이 너무나 당연했으니까.

    * * *

    현석은 크란시스 가문의 저택 앞에 도착했다.

    저택을 지키는 자들은 안면이 있는 병사와 기사들이었다. 그들이 현석을 보고는 눈을 빛냈다. 하지만 섣불리 아는 척을 하거나 다가오진 않았다.

    현석은 가만히 서서 저택을 쳐다봤다. 여기까지 가까이 오니 자신이 왜 크락실리아에 오고 싶었는지 알 수 있었다.

    ‘저것 때문이었구나. 그런데…… 좀 이상한데?’

    현석은 저택에 가까이 다가갈수록 크란시스 가문의 보물인 인페르노의 존재감을 점점 명확히 느낄 수 있었다.

    한데 이상한 점이 있었다.

    지금 현석은 사방에 마력을 잔뜩 깔아놓은 상태였다.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모르니 조심하자는 차원에서였다.

    그래서 평소보다 더 명확하게 마력의 흐름이나 존재감을 느낄 수 있었다.

    한데 지금 인페르노를 착용하고 있는 사람은 플레이어가 아니었다. 마력을 보유하지 않은 일반인이 인페르노를 착용하고 있는 것이다.

    인페르노의 현 주인은 크란시스 후작이었다. 그리고 아마 그가 죽으면 다음으로 제논 백작이 그걸 인계받을 것이다.

    한데 전혀 다른 사람이 그걸 차고 있는 것이다. 쓰지도 못할 사람이 말이다.

    “뭐 하십니까? 일단 들어가셔야지요.”

    기다리다 못한 켄드릭이 다가와 조심스럽게 말했다.

    현석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정문으로 다가갔다. 어차피 어떤 상황이 오건 그걸 부수고 몸을 보호할 능력은 있으니 두려울 건 없었다.

    현석이 마음을 정하고 다가가자, 그때까지 지켜보며 기다리고 있던 병사들이 정중히 인사를 했다.

    그리고 병사를 지휘하는 기사가 한 발 다가와 말했다.

    “안쪽에 기별을 넣었습니다. 일단 안으로 드시지요.”

    기사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정문이 천천히 열렸다. 현석은 일행과 함께 열린 문 안으로 들어갔다.

    안에는 안내를 위한 기사 세 명이 기다리고 있었다. 그들은 현석에게 정중히 인사를 하고는 저택 쪽으로 일행을 안내했다.

    크란시스 가문의 저택은 상당히 컸다. 당연히 정원도 넓었고, 건물도 굉장히 높았다.

    예전에는 별채에 머물렀는데, 오늘은 본채로 데려가는 모양이었다.

    그렇게 본채 안으로 현석 일행이 들어갔다.

    그러자 저택 전체에 흐르던 분위기가 급변했다.

    마력 흐름이 변했고, 사람들이 보여주던 기질도 변화했다. 정말 마법 같은 일이 벌어진 것이다.

    아니, 진짜 마법이었다.

    다들 갑자기 달라진 분위기에 깜짝 놀랐다. 하지만 현석만은 그 어떤 동요도 없이 담담했다.

    어차피 어느 정도 예상했던 일이었기 때문이다.

    일행도 당황하다가 현석의 모습을 보고는 빠르게 안정을 되찾았다. 생각해보면 그들이 여기서 곤란을 겪을 만한 상황이 벌어지기가 참으로 쉽지 않았다.

    다만 켄드릭은 불안한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그는 최대한 목소리를 억눌러 일행에게만 들리도록 말했다.

    “크란시스 가문에는 아주 무서운 보물이 있습니다. 마족이건 마수 군단이건 단숨에 궤멸시켜버릴 수 있을 정도로 강력하다고 합니다. 그러니 조심하셔야 합니다.”

    켄드릭이 이런 얘기를 하는 건 최근 그 보물이 힘을 한 번 선보였다는 소문이 나돌고 있기 때문이었다.

    전설 속에서 나오던 그대로의 성능을 가졌다고 하니 소문이 사실이라면 크란시스 가문은 정말 무시무시한 힘을 가진 셈이었다.

    현석은 불안에 떠는 켄드릭을 힐끗 쳐다봤다. 하지만 거기에 대해 뭐라 얘기해주지 않았다. 그저 평소와 다름없는 담담한 표정만 보여줬을 뿐이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도 켄드릭은 왠지 모르게 마음이 급격히 안정되는 걸 느꼈다. 이건 참으로 신기한 경험이었다.

    ‘진짜…… 보통 사람이 아닌 건 확실해.’

    그렇게 일행이 안정을 되찾았을 때, 정면에서 누군가 등장했다.

    일곱 명이나 되는 기사의 호위를 받으면서 등장한 사람은 다름 아닌 쥬크였다.

    “하하하하! 일단 만났으니 반갑다고 인사를 해야 하나? 하하하하!”

    쥬크는 통쾌하게 웃었다. 지금 이 상황이 어지간히도 마음에 드는 모양이었다.

    “아버님과 형님을 만나러 왔나? 한데 이걸 어쩌나? 그 두 사람은 이제 여기 없는데? 하하하하하하!”

    쥬크는 또 한 번 크게 웃었다. 이번 웃음에는 통쾌함보다는 비열함과 비웃음이 한껏 담겨 있었다.

    현석은 쥬크의 손목을 확인했다. 역시 인페르노는 쥬크가 갖고 있었다.

    “이걸 보고 있었나? 어때? 잘 어울리지?”

    현석이 피식 웃었다.

    “장식이야?”

    쥬크의 표정이 순간 굳었다. 하지만 이내 빙긋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그럴 리가. 다 쓸 수 있는 방법이 있으니까 이렇게 했지. 이게 꼭 마력을 가진 사람만 쓰라는 법이 없더란 말이지.”

    쥬크는 그렇게 말하고는 현석을 보며 히죽 웃었다.

    “한 달 전에도 내가 이걸 썼거든. 아주 확실하던데? 그때 날 죽이겠다고 달려들던 놈들을 모조리 날려 버렸으니까.”

    쥬크가 직접 그걸 썼다는 말에 현석이 살짝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마력도 없이 저걸 쓰려면 뭔가 편법이 필요하다.

    하지만 이내 현석은 고개를 끄덕였다. 쥬크가 쓴 편법이 무엇인지 대충 알 것 같아서였다.

    마력수였다. 물론 마력수만으로 되는 건 아닐 것이다. 마력수에 제법 큰 마정석도 필요할 것이다.

    그 두 가지를 잘 이용하면 어떻게든 인페르노를 쓸 수는 있을 것이다.

    인페르노 자체는 훌륭한 아티팩트이지만, 거기에 걸린 보안 수준은 아주 낮았으니까. 아니, 아예 없다시피 했으니까.

    “어때? 한 번 확인해볼까?”

    쥬크가 손을 들어 현석 일행을 가리켰다. 그리고 다른 손으로 작은 금속상자를 꺼냈다.

    그것이 쥬크가 인페르노를 쓸 수 있도록 해주는 장치인 모양이었다.

    “그것만으로는 안 될 텐데? 먹는 것도 있지 않나?”

    현석의 말에 쥬크가 굳은 표정으로 노려봤다. 하지만 이내 여유를 되찾고 피식 웃었다.

    “뭐, 상관없지. 어차피 이제 다 끝날 테니까. 너만 사라지면 제논도 더 이상 숨어 다니지 않고 포기하겠지.”

    역시 성문의 감시가 강화된 건 제논 때문이었던 모양이다. 성문을 지키던 기사의 수준이 예전보다 훨씬 높아져서 의아했었는데, 상대가 제논이라면 그 정도로도 사실 모자란 감이 있었다.

    “내게 죽는 걸 영광으로 여겨라. 아버지도 이걸로 보내드렸으니까.”

    쥬크의 말에 현석이 한숨을 내쉬었다. 패륜도 이런 패륜이 없었다.

    “후우. 그래서 고작 가문의 후계자가 되겠다고 다른 도시의 힘을 빌어서 아버지를 죽이고 혼자서는 쓰지도 못할 보물을 차지한 건가?”

    “고작이라니! 내겐 그게 전부야!”

    현석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사고를 한 번 칠 거라고는 생각했다. 하지만 크란시스 후작이나 제논 백작 선에서 정리될 거라고 여겼다.

    설마 쥬크가 다른 도시를 끌어들여 크란시스 후작을 죽일 줄은 몰랐다.

    “그래서 날 죽이고 제논을 잡아 죽이고 나면 뭘 하려고? 다른 도시를 공격해 왕이라도 되려고? 주변 도시의 귀족들이 그렇게 만들어 주겠다고 하던가?”

    “그래! 잘 알고 있구나! 새로 세워질 나라의 왕은 나야!”

    현석이 그 말에 고개를 저었다.

    “네가 아니라 나다.”

    “뭐?”

    쥬크가 어이없는 눈으로 현석을 노려봤다. 그리고 코웃음을 치고는 입으로 알약 하나를 털어 넣었다.

    그의 몸에 순간적으로 마력이 가득 찼다. 하지만 그 마력은 빠르게 밖으로 빠져나가고 있었다.

    마력수를 마셨을 때와 동일한 반응이었다.

    쥬크가 금속상자를 인페르노를 찬 쪽 손으로 쥐었다.

    “헛소리는 여기까지다.”

    쥬크는 인페르노를 작동시켰다. 금속상자에서 순간적으로 밝은 빛이 뿜어져 나왔다.

    현석을 제외한 일행들은 그걸 보며 저마다 막을 준비를 했다. 피할 수는 없었다. 자기 혼자 살자고 피하면 동료들은 어쩌겠는가.

    그들의 몸에서 어마어마한 마력이 휘몰아쳤다.

    하지만 그걸로 끝이었다. 인페르노가 작동하지 않은 것이다. 인페르노에서는 아무런 마력의 움직임이 없었다.

    “뭐, 뭐야! 이거 왜 이래!”

    쥬크는 이를 악물고 다시 인페르노를 작동시켰다. 작동법은 틀리지 않았다. 그리고 인페르노를 작동하기 위해 만든 금속상자도 잘못되지 않았다.

    금속상자에서 눈부신 빛이 뿜어져 나왔다. 하지만 그게 전부였다.

    인페르노는 여전히 작동하지 않았다.

    “이익! 왜 안 나가는 거야! 나가! 나가라고!”

    쥬크가 발작하며 소리쳤다. 하지만 아무리 애써도 인페르노는 요지부동이었다.

    현석은 일행을 슬쩍 돌아봤다.

    “가만히 있을 거야? 저놈 우릴 전부 죽이려고 했는데?”

    라이언이 씨익 웃으며 몸을 날렸다. 그동안 얼마나 좀이 쑤셨는데, 이제 제대로 한 번 몸을 풀 수 있게 되었다.

    안 그래도 인페르노를 막기 위해 끌어올린 거대한 마력이 이젠 강력한 힘으로 바뀌어 쥬크 일당을 향해 날아갔다.

    < 돌아가는 길 1 > 끝

    ⓒ 김강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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