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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눈 뜨고 레벨업-235화 (235/326)

< 베를루니의 진정한 주인 3 >

마탑에서 나온 현석 일행은 거의 파김치가 되어 비틀거리며 걸었다.

제대로 몸을 가눌 수조차 없었다. 마탑에서의 3일은 그야말로 지독했다.

“끝났다…….”

추광열이 평소의 그답지 않게 감격한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반쯤은 울먹이고 있었다.

그의 말에 나머지 사람들도 격하게 공감하며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오늘부터 그 자식을…… 원수로 규정한다.”

라이언이 이를 갈며 중얼거렸다.

그 말에 남은 사람들이 일제히 그로부터 한 발 떨어졌다.

“야, 뭐야. 지금 나 혼자 죽으라는 거야? 안에서는 이러지 않았잖아!”

“좀 힘들긴 했지만 그래도 원수로 여길 것까지야…….”

추광열이 한 발 빼자, 라이언이 입만 뻐끔거리면서 황당한 눈으로 그를 바라봤다.

“좀 힘들어? 그게 그냥 좀 힘들고 넘어갈 수준이었어?”

“그래도 덕분에 많이 강해지긴 했잖아요. 솔직히 전 지금 고마운 마음이 더 큰걸요?”

류혜연의 말에 라이언은 즉시 고개를 다른 사람에게로 돌렸다. 그녀에게서 현석에 대한 불만은 듣는 건 불가능한 일이라는 걸 아니, 이럴 때는 그냥 무시하는 게 상책이었다.

“너희는? 너희들도 그래? 진짜 그런 거야?”

나머지 사람들을 보며 윽박지르듯이 말하는 라이언의 모습에 다들 슬그머니 시선을 돌렸다.

“우린 불만 없습니다.”

라이언은 문득 그들의 말과 태도에서 위화감을 느꼈다. 예전이라면 절대 이런 사소한 변화는 못 알아차렸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의 그는 예전과 많이 달라졌다.

슬그머니 고개를 돌려 뒤를 확인한 라이언이 흠칫 놀랐다. 하지만 금세 평온을 되찾았다.

누군가 있긴 있었는데, 그게 현석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켄드릭이었다. 그의 얼굴에 드러난 억지 미소를 보면 자신의 말을 들었음이 분명하다는 걸 알 수 있었다.

라이언은 되도록 담담하게 말했다.

“왔으면 왔다고 말을 하지. 언제 온 거야?”

“그…….”

수십 번이나 표정과 눈빛이 바뀌던 켄드릭이 결국 솔직한 게 낫겠다는 결론을 내리고 말했다.

“주군께 새로운 원수 한 명이 생겨났을 때부터 있었습니다.”

라이언은 그 말에 표정이 굳었다. 그의 머릿속으로 무수한 생각이 스쳐지나갔다.

‘죽여서 입을 막아? 아니, 그럼 일이 더 커져. 그럼 협박이라도 할까? 아니, 그보다는 구슬리는 게 나을 것 같기도 하고. 아니야. 저놈은 그런 거에 넘어갈 것 같지가 않아. 뭘 어째야 하지?’

“염려 마십시오. 절대 말하지 않을 테니까요.”

켄드릭의 말에 라이언을 뺀 모두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누가 들어도 거짓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저런 말투와 표정으로 그런 말을 해봐야 누가 믿겠는가.

“너, 일부러 이러는 거지?”

라이언이 켄드릭에게 다가가며 물었다. 어느새 켄드릭의 목덜미가 라이언의 손아귀에 들어갔다.

“왜, 왜 이러십니까?”

“확실하게 하려고. 왠지 그냥 여기서 널 죽여 묻는 게 나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드네.”

라이언의 말에 켄드릭의 안색이 창백해졌다. 그러자 그때까지 지켜보고만 있던 류지혜가 나섰다.

“장난은 이제 그만 하시고 들어가서 쉬죠. 너무 힘들어서 장난칠 여유가 없네요.”

류지혜는 그렇게 말하고는 켄드릭을 쳐다봤다. 그는 어느새 자유로워진 목덜미를 매만지며 류지혜에게 살짝 고개 숙여 감사를 표했다.

그리고는 일행을 둘러보며 환한 표정으로 말했다.

“아주 끝내주는 곳으로 모시겠습니다. 따라오시지요.”

켄드릭이 앞장서서 걷기 시작하자, 일행이 터덜터덜 그 뒤를 따랐다.

사실 다들 너무 힘들어 누군가가 손가락으로 톡 건드리기만 해도 쓰러질 것 같았다.

강해지긴 강해졌는데, 그걸 제대로 체감하려면 한 이틀 정도는 죽은 듯이 자야 할 것 같았다.

“어라? 그러고 보니 저 자식 방금 영어 썼잖아. 그렇지?”

라이언이 동의를 구하듯 주위를 둘러봤다. 하지만 돌아오는 반응들은 그렇지 않았다.

“한국어로 말하던데요?”

“영어 맞아.”

“제가 듣기엔 제국어였어요.”

세 가지 다른 답이 들려오자, 앞장서서 걷던 켄드릭이 뒤돌아보며 씨익 웃었다. 그리고는 손을 들어 손가락을 보여줬다.

“마탑에 딱 세 개밖에 없는 보물입니다. 의사소통의 반지라고 하지요.”

착용자와 상대방 간의 의사소통을 원활하게 해주는 굉장한 수준의 아티팩트였다.

“그런 게 가능해?”

다들 살짝 욕심 나는 눈으로 그것을 바라봤다. 저것만 있으면 앞으로 그 골치 아픈 제국어 공부를 더 이상 할 필요가 없다는 뜻 아닌가.

하지만 이내 고개를 저으며 포기했다. 고작 세 개밖에 없는 아티팩트를 과연 자신들이 얻을 수 있을까?

‘그리고…… 왠지 순순히 내버려 둘 것 같지가 않아.’

현석이 결국 어떻게든 제국어를 익히게 만들고야 말 것 같은 불길한 예감이 스멀스멀 기어 올라왔다.

켄드릭이 다시 걷기 시작하자, 일행이 또 똑같은 분위기를 풍기며 터덜터덜 따라갔다.

켄드릭의 뒤를 따라가는 동안 류지혜는 주변의 분위기를 유심히 살폈다.

원래는 그럴 생각이 없었는데, 뭔가 묘한 느낌이 들어서 신경이 살짝 곤두섰다.

“언니, 무슨 신경 쓰이는 일 있어?”

류혜연이 다가와 묻자, 류지혜가 고개를 저었다.

“아니, 그냥…… 그냥 분위기가 좀 이상한 거 같아서.”

그 질문의 답은 앞장서서 걸어가던 켄드릭의 입에서 나왔다.

“시선이나 표정이 상당히 조심스럽지 않습니까? 좀 겁먹은 것 같기도 하고요.”

“아!”

류지혜는 자신이 느낀 묘한 분위기가 어떤 건지 켄드릭의 말을 듣고서야 깨달을 수 있었다.

지금까지는 자신들이 지나가면 그냥 지나가다보다 하며 쳐다보거나 아예 시선조차 주지 않았다.

한데 지금은 단 한 명의 예외도 없이 모두가 일행이 지나갈 때까지 시선을 거의 떼지 않았다.

그들의 눈빛에 깃든 감정은 딱 켄드릭이 말한 대로였다.

“저러는 게 당연하지요. 그분께서 이 도시의 왕이 되셨으니까요.”

“예? 뭐라고요?”

“왕이 되셨습니다.”

“왕?”

켄드릭이 씨익 웃었다.

“이제 사방에 난립한 모든 도시들에 그분의 그림자가 드리워질 겁니다.”

류지혜가 켄드릭을 빤히 쳐다보다가 물었다.

“그분이라는 게, 설마…… 우리 대장, 그러니까 현석씨를 말하는 건 아니죠?”

“왜 아니겠습니까. 그분 말고 왕의 재목이 또 누가 있다고 말입니까. 하하하하!”

켄드릭이 웃는 모습을 가만히 쳐다보던 류지혜는 자신이 어느새 걸음을 멈췄다는 것도 깨닫지 못했다.

‘왕? 왕이라고?’

정말 뭐가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 건지 전혀 알 수 없었다. 그건 류지혜뿐 아니라 켄드릭의 말을 들은 일행 모두가 같은 생각이었다.

* * *

“그냥 이렇게 돌아가도 되는 거예요? 정말로?”

류지혜가 현석에게 바짝 붙으며 걱정스러운 얼굴로 물었다.

“괜찮다.”

“아니, 그래도 왕이 이렇게 함부로 자리를 비우면…….”

“어차피 베르딘이 잘 할 테니 상관없다.”

그리고 뼛속 깊은 두려움을 새겨 휘하에 거둬들인 세 가문의 수장들도 뼈가 부서져라 일을 할 것이고 말이다.

“안 그런가?”

현석이 켄드릭을 보며 묻자, 켄드릭이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예. 당분간은 별 일 없을 겁니다. 뭐…… 병력으로 베를루니를 어떻게 해볼 만한 세력은 아예 없다고 보시면 되니까요. 그나마 크락실리아가 좀 강한 편인데…… 거긴 괜찮다고 하셨으니까요.”

돌아가는 길에 크락실리아가 있으니 들러서 말만 전하고 가면 된다. 크락실리아도 바보가 아니라면 굳이 만나지 않아도 베를루니에 싸움을 걸 일은 없겠지만 말이다.

“그리고 원래 진짜 주인은 한 발 물러나 있는 법이다. 그저 방향만 정해주면 일은 아래에서 알아서 하는 게 정상이야.”

그 말은 맞다. 왕이 이래라 저래라 자꾸 참견하면 나라가 제대로 돌아갈 리 없다.

세상 대부분의 일이 그렇다. 심지어 회사도 마찬가지다.

사장이 회사의 모든 일에 일일이 간섭하다보면 회사가 제대로 돌아가지 않는다. 일하는 직원들의 사기도 급감하고 말이다.

류지혜는 새삼스러운 눈으로 현석을 바라봤다. 대체 저런 건 어떻게 아는 걸까?

경험에서 우러나지 않으면 저런 일을 결정해서 행동으로 옮기는 건 절대 쉬운 일이 아니었다.

‘나이를 생각하면…… 정말 천재인데…… 풍기는 느낌은 절대 그렇지도 않고…….’

그녀가 보기에 현석은 참으로 묘한 사람이었다. 뭔가 이질적인 양면성을 가지고 있었다.

그것이 참으로 묘한 느낌을 풍긴다.

어쨌든 아무리 그래도 류지혜는 살짝 걱정이 되었다. 아니, 류지혜뿐 아니라 이곳에 있는 모든 사람의 뇌리에 걱정이 들어 있었다.

심지어 괜찮을 거라고 자신만만하게 말한 켄드릭에게도 일말의 불안감은 있었다.

그녀는 마탑의 수련장에서 나오고 난 다음, 꼬박 이틀을 잤다. 중간에 깨서 간단히 식사를 하고 또 자는 걸 반복해 완벽하게 체력을 회복하고 피로를 풀었다.

그렇게 몸이 완성되자마자 이곳을 떠나게 된 것이다.

“제가 알기로 도시를 장악한 지 아직 일주일도 안 되지 않았나요? 그 정도 시간으로는…….”

“어차피 저 도시에서는 절대 딴짓이나 딴생각을 할 수 없어. 뭔가를 하려면 나가야 한다.”

그리고 나가서 부릴 수 있는 수작에는 한계가 있는 법이다. 더구나 지금 당장은 아마 누구도 움직이려 하지 않을 것이다.

현석이 심어둔 공포가 워낙 대단했으니까.

그게 희석되기 전에는 아마 다들 각자의 자리에서 어떻게 하면 현석에게 잘 보일 수 있을지 고민하면서 맡은 일에 충실할 것이다.

현석의 말과 태도가 워낙 단호했는지라 다들 더 이상 이 문제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기로 했다.

일단 그렇게 마음을 정하고 나니 이제 남은 건 신기함과 경이로움이었다.

던전에 와서 왕의 칭호를 받는 사람이 나올 줄은 진짜 몰랐다. 뭐, 던전 속에 이런 세상이 있다는 것 자체가 신기한 일이긴 하지만 말이다.

“이제 나가시면 뭐 하실 건가요?”

류지혜는 그렇게 물으며 눈을 빛냈다.

이제 더 이상 퀸급 던전을 도는 건 일행에게 별 의미가 없었다.

던전을 도는 건 아티팩트를 얻고 돈을 벌기 위함도 있지만 가장 중요한 건 더 높은 레벨로 성장하기 위해서다. 더 강해지기 위해서다.

류지혜는 마탑의 수련을 통해 확실히 느꼈다. 그냥 던전에서의 성장보다 이곳에서의 성장이 훨씬 빠르다고 말이다.

‘물론 훨씬 위험하기도 하지만.’

류지혜는 속으로 그런 생각을 하며 현석의 답을 기다렸다. 그녀뿐 아니라 나머지 일행, 심지어 켄드릭까지도 현석의 대답을 기다리고 있었다.

현석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입을 열었다.

“일단 상황 돌아가는 걸 봐야지. 아마…… 쉬운 상황은 절대 아닐 테니까.”

현석이 이곳 던전 세상에 들어온 지 제법 오랜 시간이 지났다.

마탑에서 바벨의 시험을 통과하는 데에 걸린 시간만 해도 엄청났다. 체감상으로는 하루도 채 지나지 않은 것 같았는데, 실제 흐른 시간은 열흘이 넘었으니까.

그렇게 오랜 시간 동안 렉스턴 에너지에서 그저 가만히 상황을 지켜만 보고 있었을 리 없다.

아마 무슨 행동을 해도 했을 것이다. 그리고 그들이 무엇을 했건, 그건 평범치 않았을 것이다.

원래 이 던전에서 현석이 하려던 일은 확인이었다. 이 세상이 다른 세상과도 연결되어 있을 가능성을 확인하고 싶었다.

그리고 그 확인은 공허의 산맥을 열면서 끝났다. 마수왕의 탑에 있는 카이로스의 영혼을 하나로 합해 두 던전 세상을 연결시킨 것이다.

이제 남은 건 지구에 있는 다른 화이트홀에 들어가 그곳을 돌아보는 것이다.

‘그러면서 투명던전도 되도록 많이 해결을 해야 하는데…….’

현석의 직감이 끊임없이 얘기하고 있었다. 화이트홀의 세상을 하나로 연결하기 전에 투명던전에 연결된 마계지역을 제대로 토벌해야 한다고 말이다.

물론 지금은 돌아가자마자 렉스턴 에너지가 무슨 수작을 부리고 있는지, 또 미래산업과 볼텍스 암시장이 제대로 돌아가고 있는지 확인하는 것이 먼저였다.

“그럼 속도를 좀 높여볼까?”

현석의 말에 일행의 안색이 창백해졌다. 저 말은 또 토가 나올 정도로 달려야 한다는 뜻이었으니까.

일행은 일제히 켄드릭을 쳐다봤다. 과연 켄드릭이 그 살인적인 달리기를 쫓아갈 수 있을지 걱정이 되어서였다.

하지만 그런 걱정을 할 필요는 없었다.

일행 앞에 용이 나타났으니까.

켄드릭은 갑자기 나타난 용을 보고는 기겁을 하며 뒤로 후다닥 물러났다. 그러다가 엉덩방아까지 찧었다.

“이, 이, 이게 뭐, 뭐, 뭡니까!”

“뭐긴. 용이지. 보아하니 저기에 매달려서 갈 모양이네. 그나마 달리는 것보다는 좀 나은가?”

“훨씬 낫죠. 속도도 더 빠를 테고.”

그리고 은근한 자신감도 있었다. 아마 마탑의 수련으로 제법 강해졌으니 이번엔 예전보다 훨씬 편안하게 느껴질지도 모른다.

일행의 시선이 다시 켄드릭에게로 향했다. 과연 용에 매달린 금속판에 앉아서 균형을 제대로 잡을 수 있을까?

‘어쩌면…… 올 때보다 더 힘들지도 모르겠네.’

어쨌든 켄드릭을 보호해야 할 테니 훨씬 신경이 쓰일 것이다.

일행의 입에서 한숨이 흘러나오는 횟수가 조금씩 늘어나기 시작했다.

그리고 눈치 빠른 켄드릭은 그 한숨이 자기 때문이라는 걸 알고는 이리저리 눈동자를 굴리기 바빴다.

어쨌든 일행은 그렇게 날아 일단 크락실리아로 향했다.

현석은 용을 타고 크락실리아로 가면서 살짝 묘한 느낌을 받는 중이었다.

아무래도 크락실리아에 자신과 인연이 닿은 뭔가가 기다리고 있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 베를루니의 진정한 주인 3 > 끝

ⓒ 김강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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