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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눈 뜨고 레벨업-234화 (234/326)
  • < 베를루니의 진정한 주인 2 >

    세 가문을 이끄는 가주들이 한 자리에 모였다. 사실 한 번 모이기도 쉽지 않은 사람들이었다. 한데 모인 지 얼마나 되었다고 다시 모인 것이다.

    이렇게 자주 모일 수 있을 정도로 한가한 사람들이 아니었지만 상황이 상황이니만큼 어쩔 수가 없었다.

    사실 지금 벌어진 일보다 더 중요하고 급한 것이 어디 있겠는가.

    파비안 후작이 안톤 후작과 사무엘 후작을 한 번씩 바라보고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이제 어쩌면 좋겠소? 난 좀처럼 좋은 생각이 떠오르지 않는 걸 보니 이제 머리가 굳은 모양이오.”

    안톤 후작과 사무엘 후작도 딱히 떠오르는 생각이 없었다.

    사실 여기 오기 전에 머리 좀 쓴다는 가문의 인물들과 충분히 논의를 하고 나왔다. 하지만 그들이 내놓은 대책도 정말 별 게 없었다.

    마탑은 힘과 정보에서 세 가문을 압도했다. 아니, 이 도시, 베를루니의 모든 가문을 압도했다.

    그런 곳과 싸우는 데 답이 있을 리 만무하다.

    “다른 가문들의 분위기는 어떻소?”

    사무엘 후작의 물음에 나머지 두 후작이 한숨과 함께 고개를 저었다.

    “반감이 이만저만 아니오.”

    “평소 같으면 입도 뻥긋 못할 놈들이…….”

    마탑주의 등장이 그만큼 충격적이었다. 그냥 등장한 게 아니라 다섯 사령관을 자신의 사람으로 갈아치우면서 등장했다.

    그리고 그 일 자체에 세 가문이 얽혀들면서 얘깃거리가 무수히 양산되었다.

    일단 그때 마탑주를 죽이기 위해 세 가문의 기사단이 출동한 것도 문제였지만, 그들이 호텔에 있던 다른 사람을 안중에도 두지 않았다는 점이 더 심각한 문제가 되었다.

    그때 호텔에 머물던 자들과 관계된 모든 가문과 상단이 들고 일어난 것이다.

    원래라면 정말 입도 뻥긋 못했겠지만, 마탑의 힘을 등에 업으니 무서울 게 없었다.

    세 가문도 그들을 함부로 힘으로 핍박할 수가 없었다. 힘 자체가 반 토막 난 상황이었으니까.

    이래저래 세 가문의 입장만 난처해진 것이다.

    “마탑 측에 잡힌 우리 기사들을 되돌려 달라고 정식으로 요청했소.”

    파비안 후작은 그렇게 말하며 더욱 표정이 굳어졌다. 그걸 본 나머지 두 후작의 표정도 함께 굳어졌다.

    굳이 얘기를 다 들을 필요도 없었다. 표정만으로도 상황을 충분히 유추할 수 있었다.

    기사 없이 마탑과 싸우는 건 말도 안 된다.

    특히나 세 가문의 기사나 병사들은 다섯 사령관이 부리는 병력 때문에 다른 도시의 기사나 병사들에 비해 실력이 좀 떨어지는 편이었다.

    보통은 도시 주변에 출몰하는 마수와 싸우기 때문에 병사나 기사들의 실전 경험이 풍부하고 훨씬 거칠었다.

    하지만 베를루니에 있는 보통 귀족 가문의 병사나 기사들은 치안 유지에 힘을 쓰기 때문에 범죄자를 다루거나 사람을 윽박지르고 협박하는 쪽으로 능력이 발전했다.

    그런 상황이니 베를루니의 방어를 책임지던 그 막강한 병력과 싸움이 될 수 없었다.

    하물며 그나마 강한 기사들마저 없는 상황이니.

    “시간이 별로 없소. 어서 대책을 마련하지 않으면…….”

    현석은 베를루니의 모든 귀족을 한 자리에 모이도록 통보했다.

    아마 아무 대비 없이 그 자리에 나가면 세 가문이 그동안 쌓아왔던 기득권은 물거품처럼 사라져 버릴 것이다.

    아니, 어쩌면 가문이 조각조각 해체될 수도 있었다.

    “마탑주가 원하는 게 대체 무엇인 것 같소?”

    안톤 후작의 물음에 나머지 두 후작이 잠시 고민하다가 입을 열었다.

    “아무래도…… 혼자 이 도시를 집어 삼키겠다는 거 아니겠소?”

    “나라도 그렇게 할 거요. 이 도시의 왕이 되고 싶은 거겠지. 누구도 자신의 권력을 넘보지 못하게 충분한 조치를 하고 말이오.”

    두 사람의 말을 들은 안톤 후작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 충분한 조치라는 게 대체 무엇이겠소? 귀족들의 병력을 해체하는 건 지금 상황에서 별 의미가 없어 보이는데…….”

    베를루니의 병력 자체가 귀족들의 힘을 압도한다. 귀족들이 아무리 별 짓을 다해도 솔직히 보병부대만 나서도 싹 밟아버릴 수 있다.

    “글쎄요…… 뭔가 외부로 병력을 돌렸을 때 뒤가 불안하면 안 되니 정리하는 게 맞지 않겠소?”

    “그러니까 외부로 병력을 내돌릴 일이 뭐가 있겠소? 마수나 마족이 나타난다고 해도 모든 병력을 외부로 내돌릴 필요는 없지 않겠소? 대규모로 군대를 이뤄 쳐들어오지 않고서야…….”

    말을 하던 안톤 후작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설마 정말 마수나 마족들이 군대를 이뤄 진격 중인 건 아니겠지요?”

    나머지 두 후작의 표정도 굳었다. 하지만 이내 고개를 저었다.

    “그건 아닐 거요. 아니, 그래선 안 되오. 그렇게 되면…… 마탑이고 뭐고 다 끝장이오.”

    이런 논의 자체가 아무 의미도 없어지는 일이 되어 버린다. 마수나 마족이 군대를 이뤄 쳐들어오는 건 이 세상의 종말을 의미하는지도 모른다.

    “그럼 그건 일단 논외로 칩시다. 사실 상황이 그 지경이 되었다면 마탑주도 이런 식이 아닌 좀 더 다른 방식으로 나왔을 확률이 높을 테니 말이오.”

    두 사람이 고개를 끄덕이자 안톤 후작이 눈을 빛내며 말을 이었다.

    “베를루니의 병력을 잔뜩 이끌고 나갈 만한 상황이 또 하나 있소.”

    나머지 두 후작이 눈을 빛내며 동시에 외쳤다.

    “전쟁!”

    공허의 산맥이 뚫렸다고 한다. 아직 그쪽으로 제대로 된 탐사대를 보낸 도시는 없는 모양이었다. 거기까지 가는 길 자체가 참으로 험난하니 준비가 많이 필요할 것이다.

    아무튼 그쪽에는 이쪽과는 다른 세상이 펼쳐져 있을 확률이 높았다.

    아니, 전설에 따르면 그쪽에도 이쪽과 비슷한 세상이 있을 확률이 높았다.

    어쩌면 그쪽은 단일 국가로 힘을 꾸준히 축적했을 가능성도 낮지 않았다.

    그렇다면 이쪽도 그렇게 해야 한다. 더 늦기 전에 말이다.

    “마탑주가 이 세상의 왕이 될 가능성이 얼마나 될 것 같소?”

    다들 서로를 바라보며 눈을 빛냈다.

    “우리 도시의 병력이라면…… 그 불사의 군대라면 모든 도시를 통틀어 최강 아니겠소?”

    “일단…… 마탑주가 왕이 되면, 그 다음은 우리에게도 차례가 오지 않겠소?”

    세 후작의 입가에 음흉한 미소가 맺혔다.

    이제 그들은 확실한 노선을 정했다. 마탑주를 왕으로 추대하고 떠받들기로 말이다.

    그리고 그들은 새로운 왕국의 일등 공신이 되어 지금까지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거대한 부와 권력을 거머쥐게 될 것이다.

    그리고 그 다음은 그들 중 하나가 그 자리에 앉게 될 것이다. 물론 그때부터는 잡았던 손을 놓겠지만 말이다.

    그렇게 희망에 찬 세 가문의 수장은 의미심장한 눈으로 서로를 바라봤다.

    그리고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자리에서 벌떡벌떡 일어나 밖으로 나가 버렸다.

    * * *

    거대한 홀, 백 명에 가까운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그들은 베를루니에서 방귀깨나 뀐다는 사람들이었다. 귀족도 있었고, 상단의 주인도 있었다. 그리고 무력이 뛰어나다고 소문난 자유기사나 용병도 있었다.

    그들 중에서 가장 눈에 띄는 사람은 단연 파비안, 안톤, 사무엘 가문의 주인들이었다.

    세 후작은 무리의 중심에 있었다.

    이곳은 마탑에서 제공한 홀이었는데, 마탑의 6층에 있었다.

    이들은 마탑의 6층을 방문한 최초의 외부인들인 셈이었다. 다들 그 사실에 더없는 만족을 표했다. 뭔가 대접 받는 기분이 들었던 모양이었다.

    곳곳에서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자신들을 이렇게 한데 모은 마탑주의 의도를 나름 짐작하고 서로 얘기를 주고받는 중이었다.

    각자 구한 정보를 풀어놓기도 하고, 또 상대의 의중을 떠보면서 슬쩍 정보를 채가기도 했다.

    그 중에서 세 후작은 한 마디도 하지 않고 앉아서 마탑주가 오기만을 기다렸다.

    그들은 이미 자신들이 어떤 행동을 하고 어떤 식으로 얘기를 이끌어 나갈지 철저히 준비했다.

    어떤 상황이 벌어지더라도 충분히 대응할 수 있다고 자신했다.

    그렇게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홀의 거대한 문이 천천히 열렸다.

    열린 문을 통해 빛이 쏟아져 들어왔다.

    다들 눈이 부셔 눈살을 찌푸리며 손으로 빛을 살짝 막았다. 하지만 그렇다고 눈을 감거나 시선을 문에서 떼지 않았다.

    빛 속에서 검은 음영이 아지랑이처럼 흔들리며 움직이고 있었다.

    누군가 안으로 들어오고 있었다.

    쿠웅!

    다시 문이 닫혔다. 빛도 사라졌다. 문 앞에는 빛에서 걸어 나온 한 사람, 현석이 홀로 고고하게 서 있었다.

    현석은 저벅저벅 걸어 홀의 중앙으로 향했다.

    지금 홀에 있는 사람들은 문의 반대편 쪽에 반원을 그리듯 위치해 있었다.

    현석이 홀의 중심에 서자, 자연스럽게 현석을 절반 정도 감싸 안듯 사람들이 앉아있는 모양이 만들어졌다.

    모든 사람이 현석에게 집중할 수 있었다. 그리고 현석도 그저 시선을 슬쩍 돌리는 것만으로 사람을 모두 확인할 수 있었다.

    현석은 긴장한 채 자신만 바라보고 있는 사람들을 슥 둘러봤다. 그의 눈이 서늘한 빛을 뿌렸다.

    그 상태로 한 마디도 하지 않고 좌중을 둘러보는 현석의 옆르로 켄드릭이 슬그머니 나타났다.

    켄드릭은 애초에 이 방 안에 함께 섞여 있었다. 그래서 다른 사람들과 함께 앉아 있다가 조용히 일어나 현석에게 다가간 것이다.

    현석이 하는 일은 그저 존재감만 한없이 뿌리는 것뿐이었다. 다들 아주 명확하게 현석의 모습과 존재감을 뇌리에 새겼다.

    그저 쳐다보기만 하는 건데도 두려운 마음이 들 정도였다. 이 정도면 충분했다.

    이제부터가 진짜 시작이라는 건 다들 눈치챘다. 그리고 남은 모든 일은 저기 선 켄드릭이 할 거라는 것도 알아차렸다.

    켄드릭이 어찌나 교묘한 자리에 존재감 없이 앉아 있었는지 그가 여기 함께 있다는 걸 알아차린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이곳에 있는 모든 사람은 켄드릭의 방문을 받았다. 그러니 이렇게 함께 섞여 있으면서도 그걸 몰랐다는 건 켄드릭이 그만큼 대단하다는 뜻이었다.

    좌중의 시선을 현석 대신에 한몸에 받게 된 켄드릭은 속으로 상당히 감탄했다.

    ‘진짜 대단하긴 하네. 이 정도면 정말 해볼 만하겠어.’

    다들 켄드릭이 대단하다고 여겼지만 사실 켄드릭이 대단한 게 아니라 그가 가진 아티팩트가 대단한 거였다.

    마탑에서 베르딘이 제공해준 존재감과 기척을 크게 줄여주는 아티팩트였다.

    어쨌든 사람들에게 인상적인 순간을 남겨줬으니 그걸로 됐다. 첫 단추가 잘 끼워진 것이다.

    “시간이 많지 않으니 좀 서두르겠습니다.”

    켄드릭은 의미심장한 눈빛을 번득이며 좌중을 다시 한 번 둘러봤다.

    “모두 자리 아래에 놓인 것을 확인해 주시기 바랍니다.”

    켄드릭의 말에 다들 아래를 확인했다.

    “아래? 이걸 말하는 건가?”

    그들이 중얼거리며 집은 것은 손잡이가 달린 작은 구슬이었다. 엄지손가락 한 마디만 했는데, 귀에 꽂으면 딱 맞을 듯했다.

    “척 보시면 아시겠지만 손잡이를 잡고 귀에 꽂으시면 됩니다.”

    파비안 후작이 눈살을 찌푸리며 말했다.

    “뭘 믿고 이걸 귀에 꽂으라는 거지?”

    “아! 그거 정말 별 거 아닙니다. 소리를 저장했다가 들려주는 아티팩트일 뿐이니까요. 이곳에 계신 마탑주님의 명예를 걸고 자신있게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그 말에 다들 떨떠름한 표정을 지으면서도 그걸 귀에 꽂았다.

    그리고 모두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그렇게 다들 놀라고 있을 때, 유령처럼 그들 뒤에 나타난 사람들이 있었다.

    정확히 한 사람당 한 명씩이었다. 검은 옷을 입고 눈만 드러난 검은 복면을 쓰고, 짧은 비수를 든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일제히 비수를 앞에 있는 사람의 목에 갖다 댔다.

    아무도 그들이 나타났다는 걸 알아차리지 못했다. 심지어 상당히 능력이 뛰어난 자유기사나 용병들도 마찬가지였다.

    다들 충격과 공포로 몸이 경직되었다.

    “이곳 베를루니에는 다섯 사령관과 다섯 부대의 특별한 병사들이 있다는 건 아주 유명한 일이지요. 하지만 다들 틀렸습니다.”

    켄드릭은 눈을 빛내며 말을 이었다.

    “다섯이 아니라 여섯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마지막 여섯 번째는 암살부대입니다. 여러분 뒤에 선 자들이 바로 그 부대의 특별한 병사들이지요.”

    모두의 눈에 암담함이 어렸다. 이들이 지금까지 여기 숨어있다는 사실조차 알아차리지 못했다. 만일 여기서 살아 나간다고 해도 끝까지 도망칠 자신이 없었다.

    “다들 아티팩트를 통해 저장된 소리를 들으셨으니 자신이 왜 죽어야 하는지는 아주 잘 알고 계시리라 믿습니다.”

    켄드릭의 말에 다들 눈을 질끈 감았다.

    슈가가각!

    사방에서 피가 터졌다. 피비린내가 자욱하게 깔렸다.

    한데 전부 죽은 게 아니었다.

    파비안을 비롯한 세 가문의 수장들은 자신이 아직까지 살아있다는 사실에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주위를 둘러봤다.

    아직 죽지 않은 사람들이 절반 이상이었다.

    그들은 의아함과 두려움, 그리고 황망함이 뒤섞인 눈빛으로 시선을 돌려 켄드릭과 현석을 번갈아 바라봤다.

    “지금 죽은 사람은 이 도시를 전복시키고자 들어와 온갖 쓰레기 같은 짓을 벌이며 혼란을 조장하던 놈들입니다. 일종의…… 스파이라고 할까요?”

    그러니까 간자를 색출해 죽였다는 뜻이었다. 하지만 누구도 긴장을 풀지 않았다. 자신들 역시 죄가 없는 게 아니었으니까.

    “남은 분들도 사실 썩 좋은 사람이라고 하기는 어렵습니다만…… 인간 말종까지는 아닌 것 같아서 말입니다.”

    남은 자들의 눈에 희망의 빛이 맴돌기 시작했다.

    켄드릭은 이제 자신의 일은 다 끝났다는 듯 뒤로 물러났다.

    그러자 현석이 한 발 앞으로 나섰다. 그리고 특유의 담담한 눈으로 좌중을 둘러봤다.

    “앞으로 좋은 활약과 협조, 기대하겠다.”

    현석은 그 말을 끝으로 돌아서서 나가 버렸다.

    그러자 켄드릭은 남은 자들에게 정중히 허리 숙여 인사했다.

    “살펴 돌아가시기 바랍니다.”

    켄드릭까지 나가 버리자 그제야 긴장이 풀린 사람들이 그 자리에 축 늘어졌다.

    사방에서 피비린내가 진동했지만 그런 것에 신경 쓸 여유나 정신이 남아있지 않았다.

    모두의 뇌리에는 딱 한 가지만 남아 있었다.

    ‘마탑주의 눈밖에 나면 그냥 죽는 걸로는 안 끝난다.’

    실로 무시무시한 공포가 뇌리 깊숙한 곳에 각인되었다.

    < 베를루니의 진정한 주인 2 > 끝

    ⓒ 김강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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