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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눈 뜨고 레벨업-233화 (233/326)
  • < 베를루니의 진정한 주인 1 >

    벤테케는 섣불리 움직이지 않았다. 그리고 다른 기사단장들도 그러길 원했다.

    다행히 다들 벤테케의 눈짓을 알아듣고 가만히 상황을 주시했다.

    지금 그들의 관심은 다섯 사령관들이었다. 돌아가는 분위기를 보니 마탑주는 정말 무서운 사람이었다.

    “호텔에 우리 말고 다른 사람들도 있다는 거 알면서도 전투를 벌이려고 했지?”

    현석은 다섯 사령관에게서 시선을 돌려 벤테케를 보며 말했다.

    벤테케는 뜨끔했지만 이내 말도 안 된다는 듯 굳은 표정을 지으며 대답했다.

    “그게 무슨 소리요? 우린 시민의 안전을 최우선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이오. 한데 그랬을 리 있겠소? 처음부터 싸울 계획 따위는 없었소. 그저 대화로 해결하고 싶었을 뿐이오.”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하는 거짓말에 현석이 피식 웃었다.

    “이제 와서 그렇게 말해봐야 별로 소용없을 것 같은데?”

    현석은 그렇게 말하며 작은 구슬 하나를 벤테케의 발치에 툭 던졌다.

    그 구슬은 바닥에 떨어지자마자 소리를 토해냈다.

    -호텔에 있는 다른 사람들은…….

    -신경 쓰지 마라. 대를 위한 소의 희생이다.

    -그래도 신경 쓸 만한 사람이 혹시 있는지 확인하는 편이 낫지 않겠습니까?

    -이미 대충 확인했다.

    -그럼 안심하고 진행하겠습니다.

    구슬이 토해내는 소리를 들은 벤테케의 안색이 시커멓게 죽었다. 대체 이 얘기를 어떻게 수집했단 말인가.

    베를루니라는 도시 자체가 마탑의 아티팩트로 도배되어 있다는 사실을 제대로 인지하지 못한 벤테케의 실책이었다.

    “이 얘기를 과연 나만 들었을까? 저 호텔에 누가 머물고 있는지 정말 제대로 확인한 거 맞아?”

    현석의 말이 이어질수록 벤테케의 안색이 급변했다. 시커멓게 죽었다가 이제는 새하얗게 질렸다.

    당연히 제대로 확인했다. 하지만 만일 마탑주도 제대로 처리하지 못한 상황에서 저 호텔에 있는 자들이 들고 일어나기라도 하면 세 가문은 정말로 버거운 싸움을 벌여야 한다.

    상황이 돌아가는 꼴을 지켜보던 쿠르트와가 벤테케를 향해 냅다 소리쳤다.

    “지금 뭐 하는 거요! 저자만 잡으면 끝난단 말이오! 코앞에 있는 먹이를 그냥 놔줄 생각이오? 그랬다간 나중에 세상의 비웃음을 면치 못할 거요!”

    그러자 벤테케도 짜증을 담아 외쳤다.

    “그럼 당신이 먼저 움직이면 되지 않소! 왜 남에게만 모든 일을 미루는 거요! 병사들부터 불러 모으시오!”

    쿠르트와의 표정이 굳었다.

    벌써 해봤다. 한데 병사들이 꿈쩍도 하지 않았다. 아니, 사실은 그럴 필요도 없었다. 몸이 무거워진 순간 그냥 느꼈다. 아니, 그냥 알 수 있었다. 자신은 이제 더 이상 보병부대의 사령관이 아니라는 사실을.

    그래서 마탑주인 현석을 죽이고 싶었다. 그렇게 하면 혹시나 원래대로 돌아올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서 말이다.

    하지만 그럴 리 없지 않은가. 이미 다른 사람에게 사령관 자리가 넘어갔는데 말이다.

    ‘아니, 아직 자리가 넘어간 건 아닐지도 몰라. 그저…… 내 직위만 박탈당한 걸지도 몰라.’

    그게 마지막 희망이었다. 만일 정말로 그렇다면 마탑주의 죽음과 동시에 다시 모든 것이 본래 자리를 되찾을지도 모른다.

    그런 희망을 갖고 현석을 바라보던 쿠르트와의 눈에 저 멀리서 다가오는 다섯 사내가 보였다.

    “마침 오네.”

    현석의 말에 다들 불안한 눈으로 현석과 다가오는 사내들을 번갈아 바라봤다.

    이내 다섯 사내가 현석 옆에 나란히 섰다.

    현석은 씨익 웃으며 말했다.

    “소개하지. 베를루니의 새 사령관들이야.”

    그 말이 끝남과 동시에 다섯 사내가 일제히 손을 번쩍 들었다. 순간 그들의 손가락에 끼워진 반지에서 빛이 번득였다.

    그러자 사방에서 병사들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들은 더 할 나위 없이 완벽하게 세 가문의 기사들을 포위했다.

    벤테케의 얼굴에 절망이 어렸다. 변변히 싸워보지도 못하고 모든 게 끝났다.

    이제 세 가문의 시대도 함께 끝날 것이다. 이 도시의 주인인 마탑주에게 칼을 들이댔으니 말이다.

    도망칠 생각이나 싸워 포위를 뚫을 생각 따위는 아예 하지도 않았다.

    이곳에 있는 기사단장들은 베를루니의 병력들이 가진 힘을 그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벌써 몇 번이나 싸우는 모습을 지켜보고 그들의 힘을 겪어봤으니까.

    고작 이곳에 있는 기사들의 힘으로는 죽었다 깨나도 포위망을 뚫을 수 없었다.

    정말 운이 좋으면 포위망 일각에 생채기 정도는 낼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걸로 끝이다. 그 성과를 얻고 죽음이라는 결론을 얻게 될 테니까.

    “다들 호텔로 들어가도록.”

    현석은 기사들과 예전 사령관들을 호텔로 몰아넣었다.

    사실 이미 이 호텔은 현석이 구입했다. 물론 세부적인 진행은 켄드릭이 했고 말이다.

    그래서 벌써 호텔에는 기사들이 갇혀 지낼만한 방이 미리 마련되어 있었다.

    현석은 기사들을 호텔에 가두기 전에 그들의 힘과 마력을 제한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이젠 그 정도는 정말 간단히 할 수 있었다. 마력과 마법을 이용하면 불가능한 일이 이 세상에 존재할 것 같지가 않았다.

    하고자 하는 일에 들어갈 충분한 양의 마력과 그 마력을 정교하고 세밀하게 컨트롤 할 수 있는 능력만 있다면 무엇이든 할 수 있을 것 같은 믿음이 생겼다.

    물론 아직 현석이 마력을 통해 그런 전능한 힘을 발휘하려면 훨씬 더 많은 경험과 지식, 그리고 마력 컨트롤 능력과 막대한 양의 마력이 있어야한다.

    ‘아직 멀었어.’

    현석은 호텔로 터덜터덜 걸어 들어가는 기사들을 보며 속으로 그렇게 되뇌었다.

    그런 현석에게 라이언을 비롯한 동료들이 다가왔다. 다들 약간의 욕구불만과 답답함, 그리고 주변을 둘러싼 수많은 병사들을 보며 느끼는 신기함이 뒤섞인 복잡 미묘한 표정이었다.

    “우릴 너무 오랫동안 방치해 놓은 거 아냐?”

    라이언이 먼저 불만을 토해냈다. 나머지 사람들도 대부분 그 말에 수긍하듯 고개를 끄덕였다.

    현석은 그런 일행을 슥 둘러본 다음 라이언을 보며 제국어로 말했다.

    “마탑 쪽에 생각보다 할 일이 많아서. 지금까지 무슨 일이 있었는지 대충 설명해주지.”

    현석은 그렇게 말하고는 제국어로 지금까지의 일을 비교적 자세하게 얘기해 주었다.

    일단 마탑의 주인이 된 것과 마탑이 사실은 제국의 세 번째 황제가 만든 건물형 아티팩트라는 것을 말했다.

    그리고 마탑의 주인은 자동으로 이곳 베를루니의 주인이 된다는 것도 말했다.

    새 사령관들을 임명했고, 이 자리에 함께 있는 다섯 명이 바로 그들이라는 것을 설명한 현석은 일행을 한 번 둘러봤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방금 이 자리에서 벌어진 일에 대해 주변 상황까지 더해 자세히 풀어주었다.

    워낙 빠르고 길었는지라 다들 멍하니 현석의 얼굴만 바라보고 있었다.

    “질문 있는 사람 있나?”

    현석이 여전히 제국어로 일행을 둘러보며 물었다. 다들 멀뚱멀뚱 현석을 바라보다가 혹시 누가 알아들은 사람이 없는지 궁금해 동료들을 둘러봤다.

    한데 그 중 다른 사람들과 다르게 눈을 반짝반짝 빛내고 있는 사람이 한 명 있었다.

    류혜연이었다.

    “그럼 이제 뭐 하실 건가요? 기사들을 잡았으니 그쪽 가문들이 가만히 있지는 않을 것 같은데요.”

    그녀 역시 제국어로 말했다. 현석은 그걸 보며 눈을 빛내고 나머지 일행을 둘러봤다.

    역시 류혜연의 말을 제대로 알아들은 사람은 한 명도 없었다. 그나마 류지혜와 박승희가 긴가민가한 표정을 짓고 있는 걸 봐서 가장 진도가 많이 나간 모양이었다.

    “이제부터 이 도시에 있는 지배층을 모조리 불러 모을 생각이다.”

    현석의 말에 류혜연보다 켄드릭이 더 놀랐다.

    “그래서 어쩌실 생각이십니까? 설마 다 죽여 버리려고 하시는 건…….”

    “내가 살인마도 아니고 그럴 리가 있나. 그저 앞으로 잘 협조해 달라고 좀 타일러볼 생각이다.”

    켄드릭은 입을 다물었다. 여기서 더 얘기해 봐야 입만 아프다. 말이 타이른다는 것이지 사실상 협박이나 다름없었다.

    아마 다들 현석의 말에 굴복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이곳의 귀족들은 생각보다 강력한 힘을 가지지 못했다. 도시를 지배하는 세 가문으로 힘이 집중되어 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 힘 중 절반이 기사단이었다.

    나머지 절반이 나름의 병사들이었는데, 그건 사실상 숫자 늘리기일 뿐 진짜 싸움에서는 별 의미가 없었다.

    물론 작정하고 싸우기 시작하면 베를루니도 제법 피해를 감수해야할 것이다.

    하지만 그들은 절대 그렇게 나오지 않을 것이다.

    승산이 아예 없고, 시작하면 파멸밖에 얻지 못하는 싸움을 왜 하겠는가.

    “당장은 힘에 굴복하겠지만, 장기적으로 보면 독이 되지 않을까요?”

    류혜연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현석은 그녀를 대견한 표정으로 쳐다봤다.

    이렇게 제국어를 잘 구사하는 걸 보면 정말 엄청난 노력을 했을 것이다.

    제국어는 쉽지 않은 언어였다. 지구상에 있는 웬만한 언어보다 몇 배는 더 익히기 어렵고, 발음도 어려운 언어였다.

    한데 그걸 그 짧은 시간에 저 정도로 능숙하게 구사하는 걸 보면 그녀의 노력이 어느 정도였는지 굳이 보지 않아도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어차피 이곳은 이제 격변기를 맞이했다. 지금 당장의 칼이 더 중요한 시기가 되었어. 아마…… 조만간 도시들이 통합을 논하게 될 거다.”

    공허의 산맥이 열렸다. 다른 세상으로 통하는 길이 생겨난 것이다.

    ‘그리고 결국은 나머지 산맥도 다 사라지겠지.’

    분명히 그렇게 될 것이다. 그것은 왠지 신의 파편이라는 퀘스트와 연결이 되어있는 듯했으니까.

    이제 남은 파편은 세 개다.

    ‘어쩌면…… 그 세 개는 한꺼번에 해결될지도 모르겠어.’

    왠지 모르지만 강한 예감이 들었다. 확신에 가까울 정도로 강한 예감이 말이다.

    현석은 그런 생각을 하며 켄드릭을 물끄러미 쳐다봤다. 그러자 나머지 사람들도 다들 그를 바라봤다.

    켄드릭은 갑자기 자신에게 모이는 시선에 살짝 당황했다. 대체 뭘 어쩌란 말인가.

    그러다가 문득 떠오르는 것이 하나 있었다.

    “제가 하라고요?”

    현석이 고개를 끄덕이자 켄드릭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다른 귀족 가문들이야 그렇다 치고 베를루니를 지배하던 세 가문이 얼마나 벼르고 있을 텐데 거길 찾아간단 말인가.

    현석은 사령관 중 기사단을 지휘하는 사내를 쳐다봤다.

    그가 현석에게 정중히 고개를 숙이고는 뒤를 슬쩍 쳐다봤다.

    열 명의 기사가 앞으로 나와 켄드릭을 호위하듯 둘러쌌다.

    기사들은 하나같이 특수한 금속으로 만든 전신갑옷을 입고 있었다. 그래서 얼굴이고 살이고 하나도 외부로 드러나지 않았다.

    그들은 롱소드를 허리에 차고 거대한 양손검을 등에 매달고 있었는데, 그저 보는 것만으로도 기가 질릴 정도로 다들 덩치가 컸다.

    그런 기사 열 명이 사방에서 호위하니 그렇게 든든할 수가 없었다.

    켄드릭의 입가가 슬그머니 올라갔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이런 대접을 받는데 기분이 나쁠 리 없었다. 아니, 약간 과장하면 정말 날아갈 것 같았다.

    현석이 굳이 다시 묻거나 지시를 또 내릴 필요가 없었다. 켄드릭은 알아서 부동자세를 취한 다음 크게 말했다.

    “그럼 즉시 명령을 이행하겠습니다!”

    켄드릭은 절도 있게 돌아서더니 손을 앞으로 쭉 뻗으며 말했다.

    “가자!”

    켄드릭이 척척 걸어가자, 열 명의 기사가 철걱거리는 발소리를 내며 그의 속도에 맞춰 걸어갔다.

    기사들의 모습을 보니 웬만한 암습은 아예 통하지도 않을 듯했다.

    전신갑옷을 입고 있었지만 그들의 속도는 맨몸의 뛰어난 기사보다도 빨랐고, 그들이 휘두르는 검은 웬만한 마수의 팔다리 정도는 단숨에 잘라낼 수 있을 정도로 강력했다.

    그들만으로도 충분하겠지만 사람 일이라는 게 어떻게 될지 모르니 안전을 더 추구해서 나쁠 건 없었다.

    요소요소에 숨어있던 마법병단의 마법사 셋이 은밀히 따라붙었다.

    그들은 마법사임에도 몸놀림이 암살자 못지않게 빠르고 은밀했다.

    그렇게 켄드릭이 떠나가자, 이제 현석과 일행들, 그리고 사령관들만 남았다.

    현석은 사령관들을 보며 말했다.

    “저 안에 갇힌 사람들 철저히 지키도록.”

    “예. 맡겨 주십시오.”

    사령관들은 현석에게 더없이 깍듯했다. 그들의 눈에서는 충성의 불꽃이 이글이글 타오르고 있었다.

    현석은 그런 그들을 한 번씩 쳐다보고는 이내 몸을 돌려 걸음을 옮겼다.

    그동안 호텔에만 갇혀있느라 답답해 죽을 것만 같았던 일행들이 반색하며 그런 현석을 따라갔다.

    “어디 가는 건가?”

    “마탑.”

    현석의 말에 모두의 표정에 어린 기대감이 두 배로 늘어났다.

    특히 아까 현석이 해준 모든 말을 알아들은 류혜연의 기대감이 훨씬 더 컸다.

    그녀는 마탑의 그 대단한 힘을 직접 눈으로 보고 가까이서 그것을 고스란히 느껴보고 싶었다.

    어쩌면 그걸 통해 능력이 좀 더 성장할 계기를 만들 수도 있을 것 같았다.

    그런 막연한 예감과 기대감을 안은 일행들의 발걸음이 점점 빨라졌다.

    그리고 이내 마탑에 도착했다.

    “높긴 정말 높네.”

    라이언이 고개를 들고 마탑 꼭대기를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현석도 마탑이 높다는 걸 새삼스럽게 느꼈다.

    저길 그냥 걸어서, 그것도 마력의 흐름을 파악하고 함정을 피하면서 올라갔으니 대체 얼마나 시간이 많이 걸렸겠는가.

    “자자, 얼른 들어가자고. 대체 안에는 뭐가 있을지 궁금해 죽을 것 같으니까.”

    라이언의 재촉에 일행은 좀 더 서둘러 마탑으로 들어갔다.

    마탑의 마법사들이 현석 일행을 반가이 맞아 주었다.

    그들은 마탑에 들어갈 때 지은 현석의 미소를 봤어야 했다.

    현석은 일행만 마탑에 던져놓고 혼자 빠져나왔다.

    일행이 다시 마탑에서 나온 건 꼬박 3일이 지난 다음이었다. 퀭하게 죽은 얼굴로 말이다.

    어쨌든 그건 3일 뒤의 일이고, 현석은 일행을 마탑에 내팽개치고 켄드릭에게 미리 지시해둔 장소로 향했다.

    이제 베를루니에서의 긴 일정을 모두 마무리할 시간이 되었다.

    < 베를루니의 진정한 주인 1 > 끝

    ⓒ 김강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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