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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눈 뜨고 레벨업-231화 (231/326)
  • < 사령관들 2 >

    “마탑의 주인은 이래도 되는 거요? 허락도 없이 남의 집무실에 들어오다니!”

    쿠르트와의 호통에도 현석의 표정은 조금도 변하지 않았다.

    사실 지금 현석은 그런 데 별로 신경 쓰고 싶지 않았다. 방금 심안으로 확인한 쿠르트와의 반지를 확인하는 게 더 중요했다.

    [바벨의 보병부대 막사]

    [바벨이 말년에 제작한 보병부대가 머무는 장소. 공간의 빈틈을 이용하는 방식으로 제작되었다. 2천의 보병이 잠들어있다. 증표에 소속된 아티팩트. 사용자가 죽으면 자동으로 새 사용자를 구해 계약을 진행한다.]

    현석은 설명을 확인하고는 빙긋 웃었다. 역시 예상대로였다. 그리고 이제야 답이 보이기 시작했다.

    ‘사령관이 전부 다섯이었지?’

    바벨의 증표가 제어할 수 있는 아티팩트의 수는 모두 일곱, 그렇다는 얘기는 베를루니의 병력을 흡수한 다음에도 두 개의 아티팩트가 남는다는 뜻이다.

    그것 역시 이 던전 속 세상 어딘가에 있을 것이다.

    현석은 왠지 그것이 나중에 상당한 즐거움을 줄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잠시 바벨의 증표, 그러니까 팔찌를 만지작거리던 현석은 쿠르트와를 쳐다봤다.

    사실 이 건물에 가까이 다가오며 바벨의 증표가 주는 어떤 느낌 때문에 어느 정도 예상은 했다.

    그래서 베를루니의 병력을 장악하는 데에 별로 어려움이 없을 거라 예상했고 말이다.

    “왜 대답이 없는 것이오!”

    쿠르트와가 또 한 차례 호통을 쳤다. 그러자 옆에 있던 벤테케가 동조하듯 검을 살짝 뽑았다.

    스릉.

    아직 검집에서 모두 뺀 건 아니지만 번득이는 칼날을 보여주는 것만으로 충분한 위협효과가 있었다.

    켄드릭의 표정이 살짝 굳었다. 그리고 설마설마 하는 표정으로 현석을 바라봤다.

    ‘설마…… 정말 아무 대책도 생각도 없이 그냥 온 건 아니겠지?’

    그럴 리 없다고 생각하면서도 계속해서 짓누르는 불안감을 떨쳐낼 수가 없었다.

    모두의 시선이 현석에게로 향했다.

    “그거.”

    현석이 손가락을 들어 쿠르트와의 반지를 가리키며 말했다. 모두의 시선이 마치 조종이라도 당하는 듯 그쪽으로 향했다.

    쿠르트와의 얼굴에 살짝 당혹감이 떠올랐다.

    “그 반지. 계약 내용이 비밀유지와 도시의 방어. 그리고 또 한 가지가 뭡니까?”

    현석의 물음에 쿠르트와의 얼굴이 경악으로 물들었다.

    “그, 그걸 어떻게…….”

    쿠르트와의 얼굴이 창백하게 질렸다. 그리고 머릿속이 온통 헝클어졌다.

    사실 생각해보면 마탑주가 아무런 대비 없이 이렇게 왔을 리 없다. 그게 무엇이 되었건 믿을만한 구석이 있으니 온 것이다.

    ‘그게 이거구나!’

    하지만 쿠르트와는 이내 안정을 되찾았다. 이것만 빼앗기지 않으면 된다. 비밀이 누설되면 자신을 죽이려는 시도가 있을지 모르지만 상관없다. 병사들을 부르면 되니까.

    바벨의 보병은 정말로 강력했다. 병사 하나하가 힘과 속도, 그리고 싸움에 대한 능력과 경험은 물론이고, 그 경이로운 회복력, 그리고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용기까지 갖췄다.

    게다가 명령을 절대적으로 수행하는 충성심은 또 어떠한가. 그들만 있다면 그 무엇도 두려울 게 없었다.

    그러니 이 반지, 바벨의 보병부대 막사만 빼앗기지 않으면 된다.

    설사 마탑주라고 해도 이걸 빼앗을 수는 없을 것이다.

    쿠르트와는 그렇게 믿었다.

    반지와의 계약 조건은 세 가지였다. 첫 번째와 두 번째는 방금 현석이 말한 그것이고, 세 번째는 계약자마다 달랐다.

    각자 가장 소중한 것을 걸게 되어 있으니까.

    계약을 어기는 즉시 그 소중한 것을 잃게 된다.

    쿠르트와의 가장 소중한 것은 그의 목숨이었다. 그러니 절대 계약을 어길 수 없었다.

    그걸 어기는 건 곧 죽음을 말하니까.

    쿠르트와의 표정과 태도를 보던 현석이 피식 웃었다.

    저래봐야 아무 소용없다. 마탑의 시험을 통과한 사람에게 자신의 아티팩트를 원거리에서 조종하는 것 정도는 정말 아무것도 아닌 일이니까.

    “슬슬 거취를 정하시죠. 원래 하던 사람이 잘 할 테니 굳이 내칠 필요는 없을 것 같고…… 내 밑으로 오겠습니까?”

    현석의 노골적인 물음에 벤테케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내가 왜 그래야 하지?”

    쿠르트와가 적의를 드러내며 그렇게 물었다. 그제야 굳어있던 벤테케의 표정이 살짝 풀렸다.

    현석은 두 사람의 반응을 확인하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니까 친하긴 한데, 아직 완벽하게 같은 편이 된 건 아닌 모양이네.”

    그렇게 말한 현석이 옆에 있는 켄드릭을 보며 확인했다.

    “그렇지?”

    “예. 맞습니다.”

    켄드릭은 갑자기 마음이 편해져서 여유를 되찾았다. 그러자 상황이 좀 더 넓게 보였다.

    지금 이 방에서 여유를 갖고 있는 사람은 오직 현석뿐이었다.

    ‘그러니까 나도 떨 이유 없는 거지.’

    현석이 여유를 갖는 데는 다 이유가 있을 거라 생각하니 켄드릭도 조금씩 여유를 되찾을 수 있었다.

    “우리 도시의 사령관님들은 마법병단 빼고는 다들 몇몇 가문과 친하게 지내고 있습니다. 받는 건 많고 주는 건 없지만 다들 그 정도는 충분히 감당할 만한 가문들이니까요.”

    켄드릭의 설명이 이어지자 현석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다시 쿠르트와를 쳐다봤다.

    “그게 뭐? 난 내 의무를 다할 뿐이다. 파비안 가문과 친하게 지내지 말라는 법은 없으니까.”

    현석이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그건 그렇지. 계약 내용에 그런 게 있을 리 없으니까. 그래서 마음을 확실히 정한 건가? 내 밑으로는 올 생각 없는 거 맞지? 나중에 딴 소리해봐야 소용없으니까 기회 있을 때 확실히 말해.”

    현석의 말은 어딘가 꺼림칙하게 만드는 구석이 있었다. 쿠르트와의 표정이 심각해졌다.

    사실 자신이 얻은 이 반지는 그냥 생겼다. 그와 동시에 계약이 진행되었고, 그 결과 보병부대의 사령관이 되었다.

    쿠르트와가 아는 건 그가 부릴 수 있는 보병부대를 만든 존재가 바벨이라는 것밖에 없었다.

    당시 은밀히 바벨에 대해 알아봤는데,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까마득하게 오래전 제국의 황제였다는 것밖에 알아낼 수 없었다.

    쿠르트와가 아는 건 계약 내용과 바벨의 보병부대를 부리는 방법, 그리고 그들의 위력뿐이었다.

    계약만 어기지 않으면 된다고 생각하고 살아왔는데 눈앞에서 이렇게 자신을 흔드는 사람이 나타나니 고민도 되면서 짜증도 났다.

    ‘마탑의 주인이 도시의 주인이고 모든 병력의 주인이라고? 그건 그저 전설일 뿐이야. 마탑에서 만들어 퍼트린 헛소문에 불과해.’

    쿠르트와를 불안하게 만든 건 바로 그 전설이었다. 하지만 그런 전설이야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만들어낼 수 있었다.

    고민의 시간이 제법 길어졌지만 그래도 결정을 내릴 수는 있었다.

    쿠르트와는 지금 현재의 지위를 잃고 싶은 생각이 추호도 없었다.

    마탑주 아래로 들어가면 지금의 자유는 끝이었다. 지금은 그저 파비안 가문이 지원해주는 돈으로 호의호식하다가 도시에 무슨 일이 생기면 병력을 동원해 해결하면 그만이었다.

    이런 천국같은 생활을 어떻게 버린단 말인가.

    “난 지금이 좋다. 이 생활을 버릴 생각이 절대 없으니 그만 돌아가라. 아니면 여기서 죽여줄까?”

    쿠르트와가 사납게 웃으며 허리춤의 검을 꽉 움켜쥐었다.

    그의 기세가 폭풍처럼 주위를 휘감았다. 능력이 상당한 모양이었다.

    현석은 그걸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저것 역시 바벨의 보병막사가 가지는 힘이었다. 계약을 완료한 순간 타이틀을 얻게 되는데, 그 타이틀의 힘이 상당했으니까.

    [바벨의 보병사령관-계약을 무사히 완료한 자에게 주어지는 칭호. 계약이 깨지는 순간 사라진다. 스킬 마력검, 사령관의 검술을 쓸 수 있다. 모든 능력치+50]

    [마력검-검에 마력을 담아 검술의 파괴력을 극대화하는 스킬. 자동으로 몸에 새겨지며 계약 파기 시 사라진다.]

    [사령관의 검술-바벨의 보병부대 사령관이 쓰는 검술. 속도와 파괴력에 중점을 둔 검술이다. 자동으로 몸에 새겨지며 계약 파기 시 사라진다.]

    고작 반지 하나 얻어 계약을 진행한 것치고는 보상이 너무나 엄청났다.

    저기에 2천에 달하는 보병부대까지 얻었으니 아쉽거나 두려울 일이 있을 리 없지 않은가.

    그러니 쿠르트와의 저런 반응은 어찌 보면 당연하다 할 수 있었다.

    물론 현석은 그렇다고 해서 쿠르트와를 이해해주거나 용서해줄 생각은 요만큼도 없었다.

    ‘저걸 내가 직접 쓸 수는 없는 모양이군.’

    보아하니 저건 가신에게 하사하기 위해 따로 심혈을 기울여 제작한 아티팩트인 모양이었다.

    저걸 현석이 끼운다고 해서 계약이 진행되지도 않고, 또 저 타이틀과 스킬을 얻을 수도 없을 듯했다.

    ‘뭐…… 딱히 필요하지는 않지만.’

    모든 능력치를 50이나 올려준다는 걸 제외하면 현석에게는 별로 쓸모없는 스킬들이었다.

    “그럼 지금처럼 그냥 살도록.”

    현석은 미련없이 몸을 돌렸다. 그러자 옆에 있던 켄드릭이 오히려 더 당황했다.

    “그, 그냥 가시는 겁니까?”

    “그럼? 싫다는 사람 붙들고 애원이라도 할까?”

    “아니, 그게 아니라…….”

    켄드릭이 걱정하는 건 그런 게 아니었다. 과연 여기서 무사히 돌아갈 수 있을까가 제일 걱정이었다.

    쿠르트와를 설득하는 데 실패했는데, 과연 저들이 현석을 그냥 얌전히 보내줄까? 절대 그렇지 않을 것이다.

    무려 마탑주가 직접 방문했다. 현재 세 가문을 가장 골치 아프게 만들고 있는 존재가 제 발로 여기 걸어 들어온 것이다.

    아니나 다를까, 문을 막고 있는 세 기사는 절대 비킬 생각이 없어 보였다.

    현석이 피식 웃으며 뒤에 있는 벤테케를 쳐다봤다.

    “후회할 텐데?”

    “후회할 땐 하더라도 이런 기회를 놓칠 수야 없지. 쿠르트와님이 마음을 정하기 전이라면 모를까, 지금은 오히려 우릴 도와주실 수도 있을 것 같은데?”

    현석은 벤테케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마력을 풀어 방안을 그 힘으로 짓눌렀다.

    “커억!”

    “이 무슨!”

    문을 막고 있던 세 기사는 입에서 피를 흘리며 무릎 꿇었다. 저항할 틈도 없었다. 마력의 압력에 말 그대로 짓눌린 것이다.

    어떻게든 일어나려 애써봤지만 소용없었다.

    벤테케와 쿠르트와는 좀 달랐지만 어차피 덤빌 수 없는 건 마찬가지였다.

    두 사람은 온몸을 짓누르는 마력의 압력에 버티느라 어금니가 부서질 정도로 이를 악물고 현석을 노려보는 중이었다.

    켄드릭은 그 광경을 보며 하마터면 놀라 기절할 뻔했다. 자신에겐 아무 일도 벌어지지 않았다.

    ‘대체 얼마나 조절 능력이 뛰어나면 이럴 수 있는 거지? 어느 정도로 강한 거야?’

    그제야 눈앞에 선 사람이 달라 보였다. 이 사람은 그저 운이 좋아서 마탑의 주인이 된 게 아니었다. 될 만한 사람이라 된 거였다.

    “계속 그렇게 후회하고 있어라.”

    현석은 그렇게 말하고는 무릎 꿇은 세 기사를 지나쳐갔다.

    “그, 그냥 가시는 겁니까?”

    켄드릭이 당황해 물었다. 현석은 피식 웃고는 그냥 방에서 나가 버렸다.

    황급히 그 뒤를 따라 나간 켄드릭의 얼굴에 지독한 당혹감이 어렸다.

    그리고 방에 남은 사람들은 그보다 더 당황했다.

    ‘압력이…… 사라지지 않아!’

    그들을 짓누르고 있는 압력의 정체는 마력이었다. 마력이 무거운 성질로 변해 온몸을 짓누르고 있는 것이다.

    하면 그 마력을 움직이는 주체가 사라지면 당연히 마력으로 인한 모든 것도 제자리로 돌아가게 된다.

    한데 그 주체가 사라졌음에도 마력이 주는 압력이 그대로이니, 너무나 경악스러웠다.

    시간이 더 흘렀지만 압력은 줄어들기는커녕 점점 더 늘어나고 있었다.

    “커억! 다, 단장님! 도, 도와주십시오!”

    세 기사가 가장 먼저 무너졌다. 그들은 결국 바닥에 엎어져버렸다. 마력의 무게에 짓눌려 점점 몸이 찌부러지고 있었다.

    그들의 입에서 고통스러운 비명과 함께 피가 촤악 터져 나왔다.

    “끄으으으!”

    벤테케도 결국 참지 못하고 한 쪽 무릎을 꿇었다. 그의 눈에서 실핏줄이 터져 피눈물이 줄줄 흘러내렸다.

    그나마 쿠르트와가 좀 버텼다. 그는 억지로 버티고 선 채 이를 악물고 온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만 같았다. 하지만 결국 버텨내는 데 성공했다.

    후우욱!

    바람 빠지는 소리와 함께 마력의 무게가 사라져 버렸다.

    “쿠웨에엑!”

    벤테케가 피를 토했다. 창백해졌던 그의 얼굴에 비로소 혈색이 좀 돌아왔다.

    바닥에 엎어졌던 세 기사도 비척비척 몸을 일으켰다. 하지만 당분간 절대 움직일 수 없을 정도로 심각한 내상을 입었다.

    저걸 치료하려면 아주 비싼 포션이 필요할 것이다. 물론 파비안 가문에서 고작 기사를 위해 그런 비싼 포션을 지급해줄 리 없으니 그저 시간으로 때워야 할 것이다.

    “무서운 놈.”

    벤테케가 질린 눈으로 중얼거렸다. 그는 물론이고 이 방에 있던 모든 사람의 뇌리에 현석의 모습이 공포로 각인되었다.

    * * *

    밖으로 나온 켄드릭은 걱정스런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이렇게 그냥 나와도 될까요?”

    다행히 건물 밖에서 지키던 기사나 병사들은 두 사람을 막아서지 않았다.

    그래서 별다른 충돌 없이 그곳을 떠나올 수 있었다.

    다만 심상치 않은 눈초리는 받아야 했다. 그래서 더 마음에 걸렸다.

    “차라리 다 죽이고 오는 편이 낫지 않겠습니까?”

    그 질문에 대한 현석의 답은 켄드릭의 예상을 훌쩍 벗어났다.

    “어차피 다 내 아래에 들어올 사람들인데 죽일 이유가 있나?”

    “예?”

    켄드릭은 마치 망치로 머리를 한 대 얻어맞은 듯한 표정으로 현석을 멍하니 바라봤다.

    < 사령관들 2 > 끝

    ⓒ 김강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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