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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눈 뜨고 레벨업-229화 (229/326)
  • < 마탑주의 등장 2 >

    베를루니를 지배하는 건 세 개의 가문이었다.

    이곳의 도시 대부분이 그렇다. 실질적으로 도시를 지배하는 몇 개의 가문이 있고, 그들이 힘겨루기를 하며 도시를 운영해 나간다.

    성주가 따로 있는 도시도 있지만, 그 역시 성주 혼자서 모든 걸 다 할 수 없기에 몇몇 가문의 도움을 받거나 견제를 해가면서 도시를 운영한다.

    베를루니는 좀 특별했다. 마탑 때문이었다.

    마탑주가 베를루니의 주인이라는 인식이 아주 자연스럽게 파고들어 있었다.

    심지어 베를루니를 지배하는 세 가문조차 그렇게 여겼다.

    그래서 그 가문들의 최종 목표는 마탑을 차지하는 것이었다. 마탑의 주인을 가문 휘하로 들이거나, 아니면 가문의 주인이 마탑의 주인이 되는 길을 모색했다.

    그들이 그런 마음을 먹을 수 있었던 것은 사실 마탑주가 그동안 한 번도 등장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마탑주라는 것이 사실은 상징적인 자리가 아닐까 추측한 것이다.

    그동안은 그 추측이 맞아 떨어지는 것처럼 보였다.

    그 오랜 세월이 흐르는 동안 단 한 번도 마탑주가 등장하지 않았으니 다들 그렇게 여기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한데 이번에 그 모든 추측과 통념을 박살 낼만한 사건이 터졌다.

    진짜 마탑주가 등장한 것이다.

    말 그대로 한바탕 난리가 났다. 세 가문은 가진 모든 정보력과 인맥을 총동원해서 마탑주에 대한 정보를 모았다.

    언제 어떻게 등장했느냐부터, 갑자기 전면에 등장한 이유, 그리고 마탑의 진의가 무엇이냐까지 촉각을 곤두세우고 정보 수집에 열을 올렸다.

    하지만 결국 그들이 밝혀낸 건 거의 없다시피 했다.

    마탑주는 여전히 마탑에서 나오지 않았으며 마탑과 관계된 대부분의 일은 베르딘이 처리했다.

    그리고 대체 무슨 수를 쓴 건지 마탑이나 마탑주와 관계된 정보 자체가 원천 차단된 느낌이었다.

    누군가가 나서서 강제로 정보를 소거해 나가고 있는 듯했다.

    그 불안감이 세 가문을 한 자리에 모았다. 그것도 그냥 가문의 실무자가 모인 게 아니라 가문의 주인들이 모였다.

    각 가문이 모은 정보를 서로 공유하고 함께 대처할 필요성을 느낀 것이다.

    “일단 각자 돌린 서류부터 읽고 얘기를 나눕시다.”

    안톤 후작의 말에 파비안 후작과 사무엘 후작이 동시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럽시다.”

    각자의 가문에서 수집한 모든 정보를 정리해서 공유하자고 미리 약속하고 모인 자리였다.

    세 사람이 읽는 서류가 바로 그 결과물이었다.

    내용이 그리 많지 않았기에 다 읽는 것도 금방이었다.

    그래서 다들 눈살을 찌푸렸다.

    “내용이…… 대동소이하군요.”

    안톤 후작의 말에 나머지 두 사람도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실제로 그랬으니까.

    세 가문의 정보력 자체는 비슷했지만 정보의 유입 경로가 조금씩 달랐기에 서로 다른 정보를 얻을 가능성이 있어서 모인 자리였다.

    하지만 마탑주에 대한 정보 자체가 워낙 적었기에 그들이 모은 정보의 차별점 또한 거의 없었다.

    아주 소소한 부분 몇 가지가 다르긴 했지만 말 그대로 소소한 정보일 뿐이었다. 더구나 진위 여부조차 확실치 않은 소문에 기반한 정보였다.

    “이제 어쩌면 좋겠소?”

    “마탑주가 어떻게 나올지 파악하는 것이 먼저 아니겠소?”

    “그야…… 뻔한 거 아니오?”

    파비안 후작의 말에 나머지 두 사람이 눈을 빛내며 그를 바라봤다. 사실 그 두 사람도 아마 같은 생각을 하고 있을 것이다.

    “병력부터 장악하려 할 거요. 우리 도시의 병력은 제법 우수하니까.”

    제법 우수하다는 말로는 모자란다. 베를루니의 군사력은 모든 도시를 통틀어 세 손가락 안에 들 정도로 대단했다.

    아니, 말이 세 손가락이지 실질적으로 전투에 돌입하면 아마 가장 강할 것이다.

    베를루니라는 도시 자체의 병력만으로도 그랬다. 거기에 도시를 이끄는 세 가문의 병력까지 더해지면 그야말로 적수가 없을 정도로 대단할 것이다.

    “고작 마탑주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이 모든 것을 순순히 넘겨줄 수는 없지 않겠소?”

    “그야 당연하지요.”

    “그럼 일단…… 마탑주가 도시의 병력을 장악하지 못하게 방해하는 것이 먼저겠군요.”

    다들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눈을 빛내며 서로를 바라봤다.

    세 사람 사이에 공감대가 형성되었다. 굳이 말을 꺼낼 필요도, 또 서류를 작성할 필요도 없었다.

    잠정적 동맹이 성립되었다.

    * * *

    켄드릭은 마탑 입구를 서성였다.

    “후우. 대체 내가 어쩌자고 여기까지 와서는…….”

    막상 와서 생각하니 여기서 자신이 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 이 근처를 돌아다니며 정보를 수집하다가는 마탑의 눈에 띄어 쥐도 새도 모르게 사라질 수도 있었다.

    자신의 가게에 감시 아티팩트로 도배를 해 놓은 놈들이다. 그런 놈들이 무슨 짓을 못하겠는가.

    그리고 그런 대단한 놈들이 마탑 주변을 감시 청정지역으로 놔둘 이유도 없었다.

    아마 이 근처는 켄드릭의 가게보다 훨씬 더 대단한 감시망이 형성되어 있을 것이다.

    ‘내가 이러고 있는 것도 벌써 분석에 들어갔을지도 모르지.’

    켄드릭이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서성일 때, 마탑의 문이 활짝 열렸다.

    “헉!”

    마탑의 그 거대한 문이 벌컥 열리는 바람에 켄드릭은 화들짝 놀랐다.

    열린 문에서 노인 하나가 나왔다. 켄드릭은 그 노인을 보자마자 얼굴이 창백해졌다.

    정보로 먹고 사는 켄드릭이 그 노인의 얼굴을 모를 리 없었다. 그는 마탑의 실질적인 운영자인 베르딘이었다.

    베르딘은 노인이라고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시원시원한 걸음을 보여주었다.

    그는 성큼성큼 걸어 켄드릭 앞에 섰다.

    켄드릭은 마른침을 꿀꺽 삼키고는 떨리는 눈으로 베르딘을 바라봤다.

    “제, 제게 무슨 볼일이라도…….”

    “탑주께서 찾으시네.”

    “예? 저, 저를요?”

    “그렇다네. 왜? 무슨 문제라도 있나? 혹시 우리 마탑에 죄라도 지었나?”

    “그, 그럴 리가요. 아하하하.”

    켄드릭은 억지로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하지만 눈동자가 사정없이 굴러다니는 모습을 보면 누가 봐도 켕기는 점이 있다는 걸 쉽게 알 수 있었다.

    베르딘이 그런 켄드릭의 어깨를 툭툭 두드려 주었다.

    “자네는 어디 가서 거짓 연기 같은 건 절대 하지 말게.”

    “예?”

    “너무 티가 많이 나지 않나. 자네 가게에서 검술 수련하는 척하다가 벽 부순 거, 그거 일부러 그런 거지?”

    “예, 예에? 그, 그, 그럴 리가요. 그, 그때는 정말 순수하게…….”

    베르딘이 빙긋 웃었다.

    “변명하지 말게. 더 추해지니까. 그저 인정하는 게 발전에는 훨씬 도움이 된다네.”

    “아, 예…….”

    켄드릭은 자신이 무슨 말을 하든 이제 소용이 없다는 걸 절실히 깨달았다.

    상대는 이미 모든 걸 다 알고 있었다. 켄드릭의 뇌리에 호텔에서 아무것도 모르고 제국어 공부를 하고 있을 일행들의 모습이 떠올랐다.

    ‘그 사람들은 이제 어쩌지…….’

    자신에 대해 이렇게 다 파악했다면 자신과 함께 있던 그 사람들에 대해서도 모두 파악했을 것이다.

    그렇다면 자신이 이러고 있는 동안 그들에게도 뭔가 일이 벌어지고 있을 확률이 높았다.

    아니, 분명히 그렇게 되었을 것이다.

    “자넨 정말 표정을 읽기가 쉽군. 그런데도 정보상으로 그 정도 능력을 발휘하는 걸 보면 참 대단하긴 해.”

    “예? 무슨 말씀이신지…….”

    켄드릭은 얼른 표정을 수습하고 베르딘을 보며 억지 웃음을 보여주었다.

    “자네와 함께 있던 사람들 걱정하고 있었던 거 아닌가?”

    켄드릭의 얼굴에 뜨끔하는 기색이 스쳐지나갔다. 그걸 본 베르딘이 빙긋 웃었다.

    “걱정하지 말게. 아무 일 없을 테니까. 아마…… 자네도 탑주님을 뵙고 나면 정말 놀랄 걸세.”

    “그야 당연히 놀라겠지요. 아니, 지금도 충분히 놀라고 있습니다.”

    절대 나타나지 않을 것 같던 마탑주가 등장한 사실 하나만으로도 평생 놀랄 모든 일을 다 놀란 것 같은 충격을 주었으니까.

    어쨌든 켄드릭은 도살장에 끌려가는 소처럼 베르딘의 뒤를 따라 터덜터덜 걸어갔다.

    그리고 그런 켄드릭의 뒤를 마치 도망치지 못하게 감시라도 하겠다는 듯 퇴로를 차단한 기사 두 명이 따라갔다.

    마탑에 들어간 베르딘은 1층의 응접실 쪽으로 켄드릭을 데려갔다.

    켄드릭은 마탑의 1층 응접실에 대해 잘 알고 있었다. 정보로 먹고 사는 사람이니 그에 대한 소문이나 정보를 당연히 알고 있었다.

    그 응접실로 가는 걸 보니 정말로 마탑주가 나타나긴 나타났나보다 싶었다.

    “자, 자네가 먼저 들어가게.”

    문을 연 베르딘이 켄드릭을 보며 말하자, 켄드릭은 또 한 번 침을 꿀꺽 삼키고는 조심스럽게 응접실 안으로 들어갔다.

    “어?”

    들어가자마자 켄드릭이 낸 소리는 그야말로 얼빠진 소리였다. 그리고 이내 켄드릭의 얼굴에 경악이 어렸다.

    마탑주가 등장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그보다 더 놀랄 일이 평생 남지 않을 거라 믿었는데, 그 믿음이 단숨에 깨졌다.

    “어어!”

    이름도 모르니 뭐라고 말을 해야 할지도 몰랐다. 그저 놀라서 어어하는 소리만 계속 낼 뿐이었다.

    “어쩌다 보니 이렇게 됐는데, 좀 놀랐지?”

    현석의 물음에 켄드릭은 고개를 끄덕이는 것조차 하지 못했다. 놀랐냐고? 아마 조금만 더 정신줄을 놨으면 기절했을 것이다.

    “대, 대, 대, 대체 뭐가 어떻게 된 겁니까!”

    그 안에 모든 궁금증에 대한 질문이 다 들어있었다. 물론 현석은 그 질문에 대답해줄 생각이 전혀 없었다.

    그런 시시콜콜한 얘기를 하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지금은 최대한 빨리 움직여야 할 때였다.

    “이제부터 베를루니의 병력을 장악하러 갈 거야.”

    “예에?”

    켄드릭은 방금 현석을 발견했을 때보다 더 놀랐다. 그리고 현석의 말에 따른 결과가 촤르륵 유추되어 머릿속에 떠올랐다.

    켄드릭의 표정과 머릿속이 차갑게 식었다.

    “전쟁을 하실 생각이십니까?”

    베를루니의 병력을 장악하려면 필연적으로 베를루니를 지배하는 안톤, 파비안, 사무엘 세 가문과 싸우게 된다.

    그 세 가문이 마탑에서 병력을 장악하도록 내버려 두지 않을 테니까 말이다.

    “베를루니의 수많은 시민들이 피를 흘리게 될 겁니다.”

    하지만 만일 그럼에도 현석이 그렇게 하겠다고 한다면 켄드릭은 그를 도울 것이다.

    그래도 굳이 피를 흘리지 않아도 될 일을 만들지 않았으면 하는 것이 그의 바람이었다.

    “전쟁은 안 해도 될 거야. 다들 그걸 원하지 않을 테니까.”

    “그렇게 쉽게 생각하실 일이 아닙니다. 그들은 기득권을 절대 놓지 않을 겁니다.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요.”

    “그래서 괜찮다는 거다.”

    “예?”

    “나도 굳이 이렇게 되라고 한 일은 아니었는데…… 그 세 가문이 힘을 소모하기 싫은 상황이 되어 버렸어.”

    현석의 입가에 미소가 떠올랐다.

    켄드릭은 그게 무슨 뜻인지 몰라 표정이 흔들렸다. 며칠 손 놓고 있었다고 이렇게 상황파악이 안 될 줄은 몰랐다.

    아니, 그동안은 그래도 상관없었다. 지금이 딱 격변기일 뿐이었다.

    이럴 때는 하루마다, 아니, 한 시간마다 정보를 갱신해도 모자란다.

    켄드릭이 궁금증을 참지 못하는 표정으로 현석을 바라봤다.

    “슬슬 도시만 난립해 있는 상황에서 벗어나고 싶어진 거지. 필연이기도 하고.”

    켄드릭의 뇌리에 벼락이 우르르쾅쾅 떨어졌다.

    “도시들이 통합해 국가를 이룬단 말입니까?”

    지금도 충분히 다들 나름대로 잘 살고 있는데, 굳이 왜 그래야 한단 말인가.

    켄드릭은 옆에서 조용히 서류를 넘겨주는 베르딘을 멍하니 바라보다가 퍼뜩 정신을 차렸다.

    ‘뭐야? 지금까지 같이 있었어? 내가 그것도 모를 정도로 둔해졌나?’

    켄드릭은 베르딘이 내민 서류를 읽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거기에는 현재 주변 도시들이 돌아가는 상황이 일목요연하게 정리되어 있었다.

    역시 마탑다웠다. 그 촘촘한 정보망을 굳이 베를루니에만 국한시키지 않은 모양이었다.

    서류를 쭉 읽어 내려가던 켄드릭의 얼굴에 경악이 어렸다.

    “헉! 공허의 산맥이 뚫렸습니까?”

    켄드릭의 뇌리가 팽팽 돌아가기 시작했다. 베르딘이 전해준 정보가 그의 머릿속에서 휘몰아쳤다.

    그는 순식간에 큰 그림을 그려냈다.

    “생각 다 정리됐으면 슬슬 움직이자.”

    “예? 어디로 움직인단 말입니까?”

    켄드릭이 퍼뜩 정신을 차리고 현석을 바라봤다.

    현석이 씨익 웃었다.

    “병력을 장악하려면 각 병단의 사령관들을 만나봐야지.”

    그리고 그러려면 도와줄 사람이 필요하다. 안내도 하고 앞장서서 누가 왔으니 길을 열어달라고 소리칠 사람이 말이다.

    “그게 접니까.”

    켄드릭이 떨떠름한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물론 거절하지도 못했다.

    그는 돌아서서 축 처진 어깨로 걸음을 옮겼다.

    “네네, 알겠습니다. 가시죠.”

    그러자 베르딘이 그의 어깨를 툭툭 두드려 주었다.

    “이제 당신은 마탑주의 심복이 되신 겁니다. 당당히 어깨 펴십시오.”

    그 말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아차하는 순간 목이 달아날 수도 있는 위험한 자리에 자신도 모르게 앉았다는 걸 깨달은 것이다.

    물론 어깨는 활짝 펴졌다.

    “가시죠, 마탑주님.”

    켄드릭은 절로 얼굴에 피어나는 미소도 감추지 못했다.

    < 마탑주의 등장 2 > 끝

    ⓒ 김강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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