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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눈 뜨고 레벨업-228화 (228/326)
  • < 마탑주의 등장 1 >

    현석은 자신 앞에 납작 엎드린 노인을 보며 이게 대체 무슨 일인가 하는 생각을 했다.

    그저 마탑에서 나가려 했을 뿐이었다. 그래서 마탑 1층에 도착할 줄 알았는데, 이리로 온 것이다.

    “미천한 종 베르딘이 마탑의 진정한 주인을 뵙습니다.”

    현석은 엎드린 베르딘을 물끄러미 내려다보다가 말했다.

    “일단…… 설명이 좀 필요할 거 같은데?”

    현석의 말에 노인이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공손한 자세로 서서 한 쪽으로 양 손을 내밀며 현석을 안내했다.

    “이쪽으로 앉으시지요.”

    현석은 베르딘의 손이 가리키는 곳에는 푹신한 소파와 테이블이 놓여 있었다.

    베르딘이 손님을 맞을 때 쓰는 소파와 테이블인 모양이었다. 관리가 제법 잘 되어 있었다.

    현석이 소파에 편안히 앉자, 베르딘이 그 옆에 조심스럽게 앉았다.

    지나칠 정도로 조심하고 공경을 표하니 오히려 더 불편해질 지경이었다.

    어쩌면 일부러 저러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 그냥 편하게 마음먹기로 했다.

    현석은 어서 설명해 보라는 듯 베르딘을 쳐다봤다. 더없이 담담한 눈빛이었다.

    베르딘은 속으로 감탄하며 현석의 손목을 유심히 살폈다. 그리고 바벨의 증표를 보고는 눈을 질끈 감았다.

    “드디어……!”

    베르딘이 격동하는 표정으로 몸을 부르르 떨었다. 진심으로 감격하고 있는 듯했다.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긴 세월을 기다렸습니다.”

    물론 베르딘이 기다린 시간은 수십 년에 불과하다. 나머지 기다림은 그의 선조들의 몫이었다.

    실로 오랜 세대에 걸쳐 마탑을 지키며 예언의 그날이 오기만을 기다렸다.

    그들은 마탑을 지키며 그 영향력을 베를루니의 위상을 확고히 다졌다.

    언제든 마탑의 진짜 주인이 나타나면 모든 것을 무리없이 자연스럽게 순차적으로 넘기기 위한 준비를 항상 염두에 두고 움직였다.

    현재 베르딘은 마탑주의 수석 제자 신분이며, 그 지위는 베를루니에서 열 손가락 안에 들 정도로 대단했다.

    베를루니에는 각자 자신이 성주의 후예라고 주장하는 세 개의 가문이 있었는데, 그 가문들이 서로 힘의 균형을 유지하며 베를루니를 다스리고 지켜왔다.

    베르딘은 그들의 중심에서 균형을 맞추는 역할을 해왔다.

    그의 가문이 그 오랜 세월 원한 건 딱 하나였다. 예언이 이루어지는 것 말이다.

    그리고 드디어 예언이 이루어졌다.

    설명을 가만히 듣고 있던 현석은 문득 의아한 생각이 들었다. 대체 이렇게 대를 이어가면서까지 예언을 기다린 이유가 뭐란 말인가.

    한두 세대도 아니고 수십 세대에 걸쳐 지켜왔다. 그 중 중간에 몇 번은 변절할 만한 일이 벌어졌을 것이다.

    한데 왜 그걸 놓지 못하고 있었을까?

    현석은 그 점이 궁금했지만 묻지는 않았다. 아마 뭔가 그럴 수밖에 없는 이유가 있었을 것이다.

    ‘왠지…… 좋은 이유는 아닐 것 같은데…….’

    어쩌면 그들의 영혼이나 혈통에 바벨이 뭔가 수작을 부렸을 수도 있다.

    어쨌든 단순히 그것만으로 유지할 수 있었던 건 아닐 것이다.

    마탑의 힘을 등에 업고 있으면 얼마나 큰 힘과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었겠는가.

    아마 그 권력의 달콤함도 어느 정도 역할을 했을 것이다.

    “그래서 이제 내가 뭘 해야 하지?”

    베르딘이 눈을 빛내며 말했다.

    “베를루니의 주인 자리에 오르셔야지요.”

    * * *

    “이거 일이 잘못된 거 아닐까요?”

    켄드릭은 불안한 표정을 감추지 못하고 말했다. 하지만 그의 말을 알아듣고 대화를 주고받을 수 있는 사람이 없다는 걸 깨닫고는 자신도 모르게 한숨을 내쉬었다.

    “후우. 내가 대체 무슨 짓을 하고 있는 건지…….”

    그래도 믿는 구석은 하나 있었다. 그건 현재 함께 있는 일행들이었다.

    현석의 말에 의하면 이들은 모두 다른 세상에서 왔다. 그러니 그 다른 세상으로 돌아갈 길도 알고 있을 것이다.

    만에 하나 현석이 잘못된다 하더라도 이들을 따라 다른 세상으로 건너가면 된다.

    최악의 경우 빈털터리가 되긴 하겠지만 그래도 목숨은 부지할 수 있었다.

    고작 그거 하나 믿고 기다리고 있는 자신의 신세가 왠지 처량했다.

    켄드릭은 일행을 힐끗 쳐다봤다.

    다들 각자 할 일을 하고 있었는데, 대부분 제국어를 익히기 위해 골머리를 싸매고 있었다.

    켄드릭은 속으로 그들을 응원했다. 저들이 제국어를 잘 해야 그나마 자신과 의사소통이 좀 될 거 아닌가.

    ‘좀이 쑤시는데?’

    켄드릭은 이렇게 호텔에만 있으려니 답답했다. 슬슬 돌아다니면서 정보도 좀 캐고 그래야 할 듯했다.

    현석은 따로 움직이겠다고 했다. 그리고 자신과 일행 사이의 연관점이 아예 없게 조치할 거라고 했다.

    그 말을 믿는다면 슬슬 나가서 뭐라도 알아보고 준비도 좀 하고 그래야 하지 않을까?

    고민은 길지 않았다. 오랫동안 고민하기에는 켄드릭의 답답함이 너무 깊었다.

    “저 잠시 나갔다 오겠습니다.”

    켄드릭의 말에 다들 멀뚱멀뚱 그를 바라봤다. 켄드릭이 아차하며 돌아서려는 순간, 류혜연이 말했다.

    “어디?”

    “어라? 지금 제 말 알아들으신 겁니까?”

    류혜연이 손가락 두 개를 붙이며 생긋 웃었다.

    “조금.”

    순간 켄드릭은 멍하니 그녀의 미소를 바라봤다. 감히 눈을 뗄 수 없을 정도로 아름다웠다.

    하지만 이내 정신을 차리고 고개를 휘휘 저은 다음, 초롱초롱 빛나는 눈으로 류혜연을 바라봤다.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좀 알아보고 오겠습니다.”

    류혜연이 고개를 끄덕였다.

    “조심.”

    그녀의 마음이 와 닿았는지 켄드릭이 빙긋 웃었다.

    “염려 마십시오. 이쪽 바닥에서 절 능가할 사람은 아무도 없으니까요.”

    켄드릭은 일행에게 가볍게 목례를 하고는 밖으로 나갔다.

    호텔에서 나간 켄드릭은 도시 곳곳을 돌아다녔다. 굳이 사방을 쏘다닐 필요는 없었다.

    딱 필요한 포인트만 확인하면 된다.

    몇 군데를 돌며 돌아가는 정황을 파악하던 켄드릭의 표정이 점점 굳어갔다.

    그가 마지막으로 향한 곳은 정보꾼들이 모이는 술집이었다.

    들어가자마자 켄드릭을 발견한 자들이 큰 소리로 인사를 했다.

    “켄드릭! 이거 너무 오랜만인 거 같은데? 요즘 장사에서 손 뗀 거야?”

    “그럴 리가. 좀 쉬고 있었을 뿐이야. 그나저나 요즘 재미난 일 좀 없나?”

    다들 의아한 눈으로 켄드릭을 바라봤다.

    “정말 아예 손 떼고 있었던 모양인데? 요즘 얼마나 시끌시끌한데 재미있는 일을 찾아?”

    켄드릭은 속으로 철렁 했지만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으로 물었다.

    “시끌시끌하다고? 무슨 일인데?”

    그러자 켄드릭을 보고 있던 자들이 씨익 웃었다.

    “하여간 저 되도 않는 연기 또 하네. 표정 보니까 너도 대충 알고 있는 모양인데 뭘 또 떠보고 그래?”

    “어디 이런 적이 한두 번이야? 그냥 모르는 척 얘기나 해줘. 우리도 뭐 들을 거 있으면 듣고 움직여야지.”

    켄드릭의 능력이야 다들 인정하는 바였고, 또 하나 받으면 반드시 하나 이상으로 돌려주는 사람이었기에 다들 켄드릭에 대해서는 호의적이고 적극적인 태도를 보였다.

    “마탑의 주인이 드디어 등장했어.”

    “마탑의 주인? 베르딘?”

    켄드릭이 그게 무슨 시끄러운 일이냐는 듯 심드렁하게 묻자, 다들 고개를 휘휘 저었다.

    “그랬으면 재미난 일이라고 하겠어? 베르딘이 모시는 진짜 주인이 나타났다고!”

    켄드릭은 정신이 번쩍 들었다.

    “그럼…….”

    “이제부터 진짜 재미있어지는 거지. 베를루니를 지배하는 세 가문이 과연 어떻게 나올까?”

    역시 다들 들뜬 이유가 있었다.

    저렇게 권력 다툼이 시작되면 정보꾼들의 세상이 온다. 물론 다들 목숨을 걸어야 할 것이다.

    하지만 그만큼 대가도 크고 달콤할 것이다. 어디에 줄을 대느냐도 이제부턴 아주 중요해진다.

    그래서 다들 눈을 빛내며 켄드릭을 바라봤다.

    이럴 때일수록 뛰어난 자의 의견이 중요하다. 물론 무조건 켄드릭만 믿고 움직일 생각은 없지만, 그래도 충분히 도움이 될 것이다.

    켄드릭은 불안해졌다.

    ‘그 사람은 어떻게 된 거지? 설마 일이 실패해서 마탑주를 자극시킨 건가?’

    하지만 고작 자극 한 번 받았다고 그렇게 오랫동안 전면에 한 번도 나선 적 없던 마탑주가 나서는 건 좀 이상하지 않은가.

    “켄드릭. 넌 어쩔 거야? 아니, 어떻게 될 거 같아?”

    “뭐가?”

    “예전부터 우리 베를루니에 내려오는 전설 말이야.”

    “마탑주가 베를루니의 진정한 주인이라는 그 허무맹랑한 전설?”

    “역시 너도 그건 아니라고 보는 모양이지?”

    “넌 아니야? 믿기엔 너무 오래된 전설 아닌가?”

    다들 비슷한 생각이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무시할 수는 없었다.

    “아마…… 세 가문은 절대 그렇게 생각하지 않을 거야.”

    “당연하지. 싹을 밟지 않으면 자기들이 밟히게 생겼는데.”

    “그런데 마탑주가 정말로 세 가문을 누르려고 할까?”

    “그거야 모르지. 그리고 그게 뭐가 중요해?”

    “하긴.”

    다들 고개를 끄덕여 수긍했다.

    마탑주의 의지가 어디에 닿아 있는지는 아무 상관없다. 세 가문이 그걸 믿지 않을 테니까.

    일말의 불안함이라도 가질 생각 자체가 아예 없을 테니까.

    그동안 참아온 건 마탑이 오랫동안 침묵을 유지했기 때문이다. 굳이 그 강력한 조직을 건드릴 필요가 없었던 것이다.

    베르딘이 중간에서 힘의 균형을 워낙 잘 맞추기도 했고.

    하지만 이렇게 되면 얘기가 전혀 달라진다.

    세 가문은 어떤 방식으로든 마탑과 권력다툼을 할 것이다.

    결과가 어떻게 나든 말이다.

    “그래서 켄드릭 너는 결과가 어떻게 될 거 같아? 역시 네 개로 안착하겠지?”

    “글쎄…… 그거야 아무도 모르지. 가보지 않았으니까.”

    대부분은 마탑이 독자적 세력을 이루면서 베를루니의 지배세력이 넷으로 늘어날 거라 예측했다.

    지금 돌아가는 정황이나 지금까지 베를루니가 지내온 역사를 보면 그럴 가능성이 가장 컸다.

    하지만 켄드릭은 왠지 그렇게 간단히 끝날 것 같지가 않았다.

    정말 불안했다.

    ‘아무래도…… 미리 피하는 게 나을까?’

    생각과는 달리 켄드릭은 어느새 마탑을 향해 움직이고 있었다.

    * * *

    현석과 베르딘은 마탑 1층에 마련된 화려한 응접실에 앉아 있었다.

    이곳 응접실은 지금까지 관리만 하고 있었을 뿐, 한 번도 쓰지 않은 곳이었다.

    이것은 마탑의 주인이 나타났을 때, 가장 먼저 이용할 수 있도록 준비해둔 공간이었다.

    이후는 마탑주인 현석의 선택에 의해 다른 손님을 위해 쓰거나 아니면 현석 혼자 쓰거나 둘 중 하나의 길을 택하게 될 것이다.

    그것도 아니면 아예 폐쇄해 버리거나 말이다.

    어쨌든 모든 것은 현석의 마음대로였다.

    현석이 베르딘과 만나 얘기를 나누면서 느낀 것이 바로 그것이었다.

    이 마탑은 온전히 현석의 것이고 현석이 하고 싶은 대로 할 수 있었다.

    심지어 마탑에 소속된 마법사들까지 현석의 명령이라면 당장 자결할 수도 있었다.

    그 정도로 마탑과 탑주에 대한 충성심 강한 자들만 마탑에서 살아남을 수 있었다.

    사실 이곳의 마법사들은 마탑과 베르딘의 합작품이나 다름없었다.

    고아를 모아다가 어릴 때부터 키워진 마법사들이었다.

    당연히 그 와중에 많이 떨어져 나갔고, 정예 중에서도 최상에 위치한 정예들만 남았다.

    어쨌든 그건 마탑의 일이고 이제부터는 벨를루니에 대한 일을 논의할 차례였다.

    “응접실은 마음에 드십니까?”

    현석이 고개를 끄덕이자 베르딘은 진심으로 기쁜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준비하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제 뭘 하면 되지?”

    베르딘이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다.

    “탑주께서 가장 먼저 하실 일은…….”

    잠시 뜸을 들이던 베르딘이 눈을 빛내며 말을 이었다.

    “베를루니의 모든 병력을 장악하시는 것입니다.”

    현석은 그 말에 떠오르는 것이 있었다. 이번에 새로 얻은 타이틀이었다.

    “베를루니 기사단, 보병대, 기병대, 궁병대, 마법병단이었던가?”

    베르딘이 환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예. 맞습니다. 바로 그것들을 장악하셔야 합니다.”

    순식간에 웃음기를 지운 베르딘이 나직이 말했다.

    “세 가문이 호시탐탐 기회를 노릴 것입니다. 절대 방심하셔선 안 됩니다.”

    물론 베르딘은 말은 그렇게 해도 별로 걱정하지 않았다. 진정한 바벨의 후예이자, 마탑의 주인이라면, 그 병력은 온전히 그만의 것일 테니까.

    그것이 바로 예언이었다.

    베르딘은 그것 하나만을 바라보고 살아왔기에 예언이 반드시 실현될 거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 마탑주의 등장 1 > 끝

    ⓒ 김강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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