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레인보우 엘릭서 5 >
현석은 망설임 없이 상점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딸랑! 딸랑!
문에 설치된 방울이 은은하게 울렸다. 그러자 안쪽에서 한 번 보면 좀처럼 눈을 떼기 어려울 정도로 잘 생긴 미남자 한 명이 스윽 나타났다.
“오랜만에 오는 손님이군요. 어서 오십시오. 일단 쭉 둘러보시고 필요한 게 있으시면 언제든 말씀해 주시면 됩니다.”
현석은 그 남자가 켄드릭이라는 걸 바로 알 수 있었다. 머리 위에 이름이 떴으니까. 켄드릭 역시 플레이어였다.
그가 켄드릭이란 걸 알았으니 머뭇거릴 필요 없었다. 현석은 바로 크랑이 준 소개장을 내밀었다.
“이게 뭡니까?”
켄드릭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면서도 소개장을 선뜻 받지 않았다.
현석은 켄드릭의 표정에 살짝 위화감이 맴도는 걸 알아차렸다. 자신이 언제부터 이렇게 사람 표정과 눈빛을 잘 읽게 되었는지 몰라도 그냥 보니까 알 수 있었다.
‘이게 뭔지 아는 모양이네. 둘이 서로 약속된 표식 같은 게 있나?’
현석은 소개장을 담은 봉투를 슬쩍 내려다봤다. 봉투에는 아무 표식도 없었다. 그저 밋밋한 봉투였다.
그 얘기는 봉투 자체에 뭔가가 있다는 뜻이다.
‘내가 그게 뭔지 알아야 할 이유는 없으니까.’
둘 사이에 그런 표식이 있다면 알아서 하라고 하면 될 일이다. 현석은 자신이 원하는 것만 여기서 얻어가면 된다.
“일단 받는 게 어때?”
현석의 말에 켄드릭은 자신도 모르게 소개장을 덥석 잡았다. 그리고 깜짝 놀란 표정으로 현석과 소개장을 번갈아 바라봤다.
방금 이 행동은 자신의 의지가 거의 반영되지 않은 것이었다.
궁금한 마음은 있었다. 저 소개장 내용이나 눈앞에 있는 사람들에 대해서 말이다.
하지만 맹세코 저 소개장을 받아 확인할 생각은 요만큼도 없었다.
한데 현석의 말 한 마디에 이걸 받은 것이다.
켄드릭은 떨떠름한 표정으로 봉투에서 소개장을 꺼냈다. 이왕 이렇게 되었으니 궁금증을 해결하는 쪽으로 가닥을 잡은 것이다.
소개장을 펼쳐 그것을 찬찬히 읽은 켄드릭은 최대한 담담한 표정을 지키려 애썼다.
앞에 선 현석 일행을 하나하나 유심히 살폈다.
본래라면 이런 식으로 사람은 한 명씩 빤히 뜯어보는 건 예의에 어긋나는 일이지만, 지금은 그런 평범한 상황이 아니었다.
켄드릭은 한숨을 푹 내쉬었다.
“에휴. 내가 크랑 이놈이 사고 한 번 제대로 칠 줄 알았다니까.”
결국 포기한 표정을 지은 켄드릭이 현석을 바라보며 물었다.
“정확히 뭐가 필요하신 겁니까?”
현석은 주위를 둘러봤다. 이 자리에서 그냥 말하기엔 뭔가 꺼침칙한 느낌이 들었다.
심안에 더욱 마력을 집중하며 사방을 둘러보던 현석의 눈이 한순간 번득였다.
[소리 저장기]
[소리 전송기]
[대지의 기억]
방안 곳곳에서 감지된 이름들이었다. 어찌나 은밀한 방식으로 감춰뒀는지 현석도 심안에 집중하기 전에는 이름조차 보지 못했다.
그 이유도 금방 드러났다.
[깃털처럼 가벼운 존재감]
벽과 천장에 얇게 펴 바른 도료에 붙은 이름이었다. 그 뒤에 있는 모든 것의 존재감을 줄여주는 아티팩트였다.
감지되기 전이라면 모를까, 일단 그 존재가 감지된 이상, 그것의 정보는 이미 현석의 것이나 다름없었다.
현석은 심안에 마력패턴까지 분석해 그것들을 철저히 파악했다.
소리를 저장하는 아티팩트부터 시작해 이곳에서 난 소리를 고스란히 다른 곳으로 보내는 아티팩트도 있었다.
대지의 기억이라는 놈은 이곳에서 벌어지는 일을 입체 영상으로 저장해 언제든 꺼내볼 수 있도록 해주는 아티팩트였다.
즉, 이곳은 자의든 타의든 완벽하게 감시 받는 공간이라는 뜻이었다.
현석은 켄드릭을 가만히 쳐다봤다. 과연 저자가 어떤 의도를 가지고 있는지 확인하고자 함이었다.
켄드릭의 눈빛은 조금도 흔들리지 않았다. 다만 귀찮은 일을 겪게 되어 약간의 짜증이 담겨 있을 뿐이었다.
‘그러니까…… 모른다는 뜻이지?’
현석은 슬슬 이 아티팩트들을 누가 설치한 건지 알 수 있을 듯했다.
‘마탑 놈들, 생각보다 대단한데?’
현석은 눈을 빛내며 돌아섰다.
“여기서 할 얘기는 아닌 것 같으니 자리를 좀 옮길까?”
켄드릭이 황당한 표정을 지었다.
“아니, 그렇게 말하면 여기가 무슨 이상한 장소 같잖습니까. 여기 정보상입니다. 정보상. 그런 얘기 하는 곳이란 말입니다.”
현석은 피식 웃고는 밖으로 나갔다.
그러자 나머지 일행도 함께 밖으로 나갔다. 말을 다 알아들을 수 없어서 답답하긴 했지만 돌아가는 분위기만 봐도 대충 눈치로 때려 맞출 수 있었다.
“이러다가 독심술 익히겠네.”
라이언이 투덜거렸다. 틈나는 대로 제국어를 열심히 공부하고 있지만 정말 어려워도 너무 어려웠다. 좀처럼 실력이 늘지 않았다.
그나마 가장 진도가 빠른 사람이 류혜연이었는데, 그녀도 썩 신통치 못했다. 아마 제대로 대화를 주고받으려면 몇 달 정도 고생을 해야 할 듯했다.
아무튼 그렇게 일행들이 우르르 나가 버리자, 홀로 남게 된 켄드릭은 너무 어이가 없어서 멍하니 그들의 뒷모습만 바라봤다.
그리고 뒷머리를 긁적이며 중얼거렸다.
“이걸…… 대체 뭘 어째야 하는 거야? 이러다가 납치당하는 건 아니겠지? 몸조심 해야 하는데…….”
중얼거리던 켄드릭의 뇌리에 방금 안에 함께 들어왔던 여자들의 모습이 떠올랐다.
“뭐…… 그 정도면 당해줘도…….”
고개를 크게 끄덕이던 켄드릭은 어느새 상점 밖으로 나온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고는 흠칫 놀랐다.
잠시 쓴웃음을 짓던 켄드릭은 저 멀리 골목 앞에서 기다리는 현석을 발견하고는 그쪽으로 천천히 걸어갔다.
“이것도 병이야, 병.”
호기심을 이기지 못하는 병, 그리고 예쁜 여자만 보면 정신을 못 차리는 병이었다.
* * *
“진짜…… 어이가 없군요.”
켄드릭은 정말 황당한 눈으로 현석을 바라봤다. 그리고 고개를 휙 돌려 저 멀리 보이는 베를루니를 바라봤다.
현석은 얘기 좀 하자고 켄드릭을 여기까지 데리고 온 것이다.
사실 중간에 몇 번이나 그냥 돌아가려고 했는지 모른다. 하지만 그때마다 근처에 흩어져서 걸어가는 네 여자가 눈에 들어왔다.
그렇게 한 번 헬렐레 하다가 정신을 차리면, 어느새 호기심이 마음 가득 들어찬 뒤였다.
그걸 몇 번 반복하다보니 성문을 벗어났고, 또 여기까지 오게 된 것이다.
“이제 슬슬 얘기해 주시죠. 밤이 되면 다시 못 들어가는 건 알고 계실 테니 서두르셔야 하는 것도 아실 테니까요.”
켄드릭이 반쯤 자포자기한 말투로 현석을 바라보며 말했다.
“내가 왜 여기까지 왔는지 안 궁금한가?”
“궁금하죠. 하지만 예상 못할 것도 없습니다. 절 고생시키려고 그런 거 아닙니까? 일종의 길들이기 같은 거죠. 제 말이 틀렸습니까?”
“틀렸다.”
현석의 단호한 말에 켄드릭이 흠칫 놀랐다.
너무 단호히 말하니 저 거짓말이 진짜처럼 들렸다.
그런 켄드릭의 표정을 읽은 현석이 피식 웃으며 말을 이었다.
“감시당하고 있다는 거 알고 있나?”
“예?”
켄드릭이 어처구니없는 표정으로 현석을 바라봤다. 감시라니. 지금 정보의 귀재인 자신을 누군가가 감시한다고 말하는 것인가?
“지금 그게 얼마나 말이 안 되는지 알고 하시는 말씀은 아니시죠?”
“말이 왜 안 되지?”
“절 감시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사람은 저기 베를루니 안에 존재하지 않으니까요.”
켄드릭의 얼굴에 떠오른 자신감과 자부심은 아주 대단했다. 그래서 현석은 그 모습을 가만히 보다가 담담히 말을 꺼냈다.
“사실 처음에는 적당한 골목이나 잘 눈에 띄지 않고 인적이 없는 곳에서 얘기를 나눌 생각이었지.”
켄드릭이 인상을 확 썼다.
“그런데 왜 여기까지 온 겁니까!”
“안전한 장소가 없었으니까.”
“안전? 우리 베를루니는 모든 도시 중에서 안전 쪽으로는 세 손가락 안에 들어가는 곳입니다.”
베를루니에 대한 자부심이 철철 묻어나는 말에 현석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겠지. 치안도 아주 괜찮은 편이지?”
“물론입니다. 범죄율도 낮지만, 일단 범죄를 저지르고 나면 검거율도 100%에 가깝습니다. 우리 베를루니의 자랑거리 중 하나죠.”
“그게 왜 그런지는 생각해 봤어?”
“그야 당연히 베를루니를 지배하는 마탑의 힘 아니겠습니까?”
현석이 씨익 웃으며 진실을 풀어놓기 시작했다.
“일단 네 상점, 감시를 위해 장치한 아티팩트의 수가 일곱 개다. 소리를 저장하고 전송하는 것과 대지의 기억을 읽어 입체영상을 저장하는 것부터 아주 다양하더군.”
켄드릭의 눈이 화등잔만 해졌다. 믿을 수 없었다.
“절대 그럴 리 없습니다! 제가 그 부분에 대해서 얼마나 예민하고 철저한데!”
“벽을 바른 도료도 아티팩트더군. 존재감을 지워주는 아티팩트.”
켄드릭이 입을 다물었다. 사실 뭔가 찜찜한 경험이 몇 번 있어서였다. 그래서 현석의 말을 크게 부정할 수가 없었다.
“오는 내내 골목이고 공터고 집이고 모조리 감시 아티팩트 투성이더군. 베를루니는 성 자체가 거대한 아티팩트로 이루어진 곳이야.”
“그걸…… 그걸 어떻게 믿습니까? 증거라도 있습니까?”
현석이 빙긋 웃었다.
“내가 왜 그걸 증명해야 하지? 난 그저 나만 조심하면 돼. 너에게는 앞으로 거래를 해야 하니 상황을 전달해준 것뿐이고.”
켄드릭이 입을 떡 벌리고 현석을 바라봤다.
현석은 그가 그러거나 말거나 할 말을 마무리했다.
“그러니 앞으로 우리의 대화는 항상 성 밖에서 이뤄질 거야. 오늘처럼.”
켄드릭은 발끈 하려다가 참았다. 생각해보면 이건 상대의 당연한 권리였다.
장소를 믿지 못하겠다는데 어쩌겠는가.
그리고 이 거래를 받아들일지 말지 결정하는 건 자신이었다. 문제는 여기 크랑이 엮여 있다는 점이었다.
‘아마…… 벗어나기 쉽지 않을 것 같은데…….’
켄드릭이 그렇게 복잡한 머릿속을 정리하지 못하고 갈팡질팡 하고 있을 때, 그걸 단숨에 모조리 날려 버릴 만한 얘기가 현석의 입에서 나왔다.
“레인보우 엘릭서의 제조법을 찾고 있다.”
켄드릭은 뭐라 반응도 하지 못하고 현석을 멍하니 바라봤다. 그리고 방금 한 말이 진심이라는 것도 바로 알 수 있었다.
‘이 미친놈은 진짜다! 진짜가 나타났다. 진짜 진심으로 진정으로 미친놈이야.’
살면서 절대 엮여선 안 될 미친놈에게 엮여 버렸다. 켄드릭의 얼굴에 절망감과 자괴감, 그리고 크랑에게로 향한 원망감이 동시에 떠올라 복잡하게 버무려졌다.
* * *
상점으로 돌아온 켄드릭은 일단 문부터 닫아 버렸다. 더 이상 손님을 받을 기분이 아니었다.
그리고 상점에 있는 의자에 앉아 멍하니 천장을 올려다봤다. 생각에 잠길 때 그가 항상 취하는 포즈였다. 이러고 있으면 생각이 잘 나기도 하고, 또 가끔 이대로 잠드는 걸 즐기기도 했다.
그런 켄트릭의 뇌리에 문득 아까 현석이 해준 말이 떠올랐다.
‘일곱 개나 있다고?’
말도 안 된다. 마탑이 왜 그런 짓을 한단 말인가. 그렇다면 자신이 그동안 어떤 정보를 모았는지도 다 파악하고 있을 텐데, 그런 자신을 왜 가만히 내버려둔단 말인가.
아무리 생각해도 말이 되지 않았다. 아니, 말이 되지 않기를 바라고 있었다.
켄드릭이 이렇게 고민하는 이유는 현석의 말에 나름의 설득력이 있었기 때문이다.
켄드릭은 현석이 말했던 장소를 뚫어져라 노려봤다.
‘저기 있는 것이 소리를 전송하는 아티팩트라고 했지?’
이 안에는 전송 기능이 있는 아티팩트가 하나 있고, 저장 기능을 가진 아티팩트가 여섯 개 있었다.
물론 현석의 말을 무조건 신뢰한다는 가정 하에 말이다.
“오랜만에 검이나 좀 휘둘러 볼까?”
켄드릭은 뜬금없는 말을 중얼거리고는 벽에 걸린 길쭉한 롱소드를 쥐었다.
실수를 가장해서 정확히 현석이 말한 지점을 부숴버릴 작정이었다.
후웅! 후웅! 슈슈슈슉!
켄드릭의 실력은 상당했다. 검에 마력이 살짝살짝 담기는 수준이었다.
마력을 담는 수련을 해야만 한다. 안 그러면 벽을 박살 내지 못할 테니까.
“아차!”
켄드릭은 아주 자연스러운 연기를 통해 벽을 검으로 콱 찔렀다.
꽈드득!
“으악! 이걸 어째!”
켄드릭은 얼른 검을 뽑고 부서진 벽을 살폈다. 그리고 그 안에 있는 아티팩트를 확인했다.
“내일 사람 불러야겠네. 아우, 오늘 뭐 되는 일이 하나도 없냐.”
켄드릭은 고개를 절레절레 젓고는 검을 다시 벽에 걸었다. 그리고 천천히 숙소로 걸어갔다.
고개를 살짝 숙인 채 걷는 그의 눈빛이 사정없이 흔들리고 있었다.
‘마탑, 이 개자식들!’
< 레인보우 엘릭서 5 > 끝
ⓒ 김강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