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레인보우 엘릭서 3 >
방안의 분위기가 차갑게 내려앉았다. 기사들이 뿜어내는 살기가 크랑과 그의 조직원인 두 여인의 피부를 따끔따끔하게 찔렀다.
하지만 정작 그 모든 살기를 뒤집어쓰고 있는 현석은 태연하기 그지없었다.
현석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여길 정리하고 크랑을 잡아 원하는 걸 알아내면 된다. 별로 복잡할 것도 없었다.
아마 오늘 이 기사들을 움직인 쥬크는 큰 타격을 받을 것이다.
이들은 모두 쥬크의 기사들일 테니까.
“자, 그럼 일단 청소부터 끝내 볼까?”
현석의 중얼거림에 크랑이 슬금슬금 뒤로 물러났다. 그가 물러나는 쪽 벽에 비밀통로가 있음이 분명했다.
현석은 크랑을 보며 빙긋 웃었다.
슈슈슉!
현석의 손에서 뭔가가 쏘아져 나갔다. 바늘호랑이의 털이었다.
크랑과 두 여인이 그대로 기절해 쓰러졌다.
셋 모두 플레이어였기에 바늘호랑이의 털이 제대로 효과를 발휘했다.
현석은 손목에 채워진 신검 켈루안을 검으로 바꿨다.
그걸 본 기사들의 눈이 화등잔만 해졌다. 그들 역시 신검 켈루안에 대한 전설은 들어봤기 때문이다.
“설마 그거 신검 켈…….”
그 기사는 말을 잇지 못했다. 목이 잘렸으니까.
현석은 어느새 기사들 틈에 서 있었다.
폭풍 같은 검격이 쏟아져 나와 주변을 휩쓸었다.
열 구의 시체를 차가운 눈으로 내려다본 현석은 크랑만 달랑 들고 밖으로 나갔다.
복잡한 복도가 나왔지만, 현석에게는 전혀 문제가 되지 않았다. 어차피 이 방으로 오는 동안 길을 다 외워뒀으니까.
나가는 도중에 몇몇 사람을 마주쳤지만 전혀 문제없었다.
크랑을 손에 들고 걸어가는 현석을 보고서는 다들 말없이 길을 비켜주거나 후다닥 도망쳤다.
이내 현석은 가게에서 나왔다. 그리고 번화가를 가로질러 숙소로 돌아갔다.
번화가에서 나오고 나니 인적이 거의 없어서 길을 가기에는 편했다.
여관에 도착하니 막 일행도 돌아오고 있었다.
“그놈은 뭐야?”
라이언이 호기심에 찬 눈으로 현석과 그의 손에 들린 크랑을 번갈아 바라보며 물었다.
“정보 상인.”
현석은 그렇게 말하고 여관 안으로 들어갔다.
여관은 텅텅 비어 있었다. 기사들이 몰려 들어갈 때부터 큰 싸움이 일어날 거라 생각한 손님과 종업원들이 모두 도망쳤기 때문이다.
덕분에 현석은 별다른 귀찮은 일 없이 방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털썩!
현석은 크랑을 침대에 던졌다. 그러면서 동시에 바늘호랑이의 털을 뽑았다.
아마 바늘호랑이의 털은 크랑도 처음 겪어봤을 것이다. 어쩌면 이곳 던전 세상에는 없을 가능성이 높았다.
그건 마계의 마수로부터 얻은 물건이었으니까.
어쨌든 크랑은 정신을 차렸다. 그리고 주변을 둘러보고는 소스라치게 놀랐다.
“뭐, 뭐야!”
“놀라는 척할 필요 없다. 다 드러나니까.”
크랑은 현석을 두려운 눈으로 바라봤다. 뭘 해도 이렇게 통하지 않는 사람은 정말 처음이었다.
“자, 이제 시간이 많아졌다.”
크랑은 두려움과 긴장감이 뒤섞인 표정으로 침을 꿀꺽 삼켰다.
“이제 하고 싶은 얘기를 마음껏 해라. 살려줄 가치가 있는 얘기를 들으면 보내줄 테니까.”
현석의 말에 크랑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크랑은 시간을 끌어선 안 된다는 걸 본능적으로 파악했다. 현석의 얼굴은 담담했지만 절대 참고 기다리지 않을 거라는 사실을 바로 알아차렸다.
일단 무슨 얘기라도 꺼내야 한다.
“이곳 크락실리아는 모든 도시 중에서 가장 강력한 곳 중 하나입니다.”
크랑이 가장 먼저 꺼낸 얘기가 바로 그것이었다. 그건 어쩌면 양날의 검이 될 수도 있었다.
자신이 이런 선택을 할 수밖에 없는 당위성에 대해 설명할 수 있었으니까.
이곳 던전 세상에는 모두 19개의 크고 작은 도시가 존재했다.
그리고 크락실리아를 가장 강력한 도시로 손꼽는 사람이 많았다.
그 이유가 바로 인페르노였다.
사람들은 인페르노의 쿨타임이 한 달이라는 걸 모른다. 그러니 그 힘을 목격한 사람은 그 무지막지한 파괴력에 두려워할 수밖에 없었다.
물론 지금은 그저 전설처럼 내려오는 이야기일 뿐이지만, 그래도 분명히 각 도시의 지배계층에는 기록으로 남겨져 내려오고 있었다.
그런 상황에서 최근 이제 도시 형태가 아닌 국가의 형태를 갖추자는 논의가 오가고 있었다.
그 뒤에 이 좁은 세상에서 벗어날 연구와 모험을 본격적으로 시작하자는 주장이 힘을 받고 있었다.
만일 그렇게 되면 누가 왕이 되겠는가.
가장 가능성 높은 가문이 바로 크란시스 후작 가문이었다.
그리고 쥬크는 크랑이 판단하기에 가장 유력한 차기 가주였다.
그러니 어떻게 크랑의 요구를 무시할 수 있겠는가. 만일 그랬다면 절대 살아남지 못했을 것이다.
물론 그건 현석이 전혀 고려할 만한 사항이 아니었다.
현석은 그 설명을 무표정하게 들었다.
“그래서?”
크랑은 그 반응을 보며 즉시 다음 정보를 풀었다.
이 변명을 하면서 열심히 머리를 굴려 기억해낸 정보였다.
“레인보우 엘릭서에 대해 제가 아는 모든 것을 말씀드리겠습니다.”
그제야 현석의 눈이 살짝 빛났다. 크랑은 그걸 보고는 속으로 안도했다.
잘하면 죽음만은 면할 수도 있을 듯했다.
물론 그 이후의 일이 정말 고달파지겠지만 그건 이런 일을 하다보면 어쩔 수 없이 겪는 감기 같은 거였다.
일단은 살아남는 게 중요했다.
“레인보우 엘릭서를 제작할 수 있는 곳은 마탑이 유일합니다.”
“마탑?”
“가장 중심지에 위치한 도시인 베를루니의 지배자입니다.”
크랑은 현석의 눈치를 살피며 말을 이었다.
“무지개풀 두 뿌리를 가져가면 레인보우 엘릭서 하나를 만들어줍니다. 아니면 무지개풀과 10만 골드를 내야합니다.”
10만 골드라는 말에 현석이 피식 웃었다.
정말 엄청난 폭리를 취하는 놈들이었다. 아까 현석이 내준 금괴 하나가 100골드쯤 하는 양이었다.
한데 10만 골드라니. 금괴 1000개에 엘릭서 하나를 준다는 것 아닌가.
게다가 재료까지 이쪽에서 제공하니 그저 제작비로만 10만 골드를 받아먹는 셈이었다.
‘뭐…… 다른 재료도 들어가긴 하겠지만.’
한데 왠지 현석은 그 다른 재료들이 별로 중요하지 않아 보였다.
“제작법을 얻을 방법은?”
현석의 질문에 크랑이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그건 아무래도…… 마탑의 보안은 정말 철저합니다. 게다가 제작법을 아는 사람 자체가 많지 않습니다.”
“기록은 존재할 텐데?”
“그야 그렇습니다만…….”
현석의 눈이 서늘해졌다. 크랑은 깜짝 놀라 손사래를 쳤다.
“딴생각 하는 게 아닙니다! 거래나 이딴 걸 생각한 게 아니라고요! 정말 모릅니다. 정말로요!”
“그래도 잘 생각해봐. 진짜 아무것도 모르는지, 아니면 티끌만큼이라도 관계될만한 얘기를 알고 있는지.”
크랑은 멍하니 현석을 바라봤다.
‘이 지독한 놈!’
속으로 그렇게 욕하면서도 내심 결심했다. 다시는 이 사람과 적대 관계로 있지 않겠다고.
이 사람은 잘못 엮이면 그냥 탈탈 털리는 걸로 모자라 정말 골수까지 뽑아 먹힐 거라고 말이다.
“마탑에 대한 일은 베를루니의 켄드릭이 가장 전문가입니다.”
“켄드릭?”
“제가 소개장을 써드리겠습니다. 아마 절대 허튼짓 하지 못할 겁니다. 장담합니다!”
현석은 가만히 크랑을 쳐다봤다. 그러자 크랑이 얼른 말을 덧붙였다.
“겁이 많은 놈입니다. 제가 적당히 협박할 테니 힘만 좀 보여주시면 말을 잘 들을 겁니다.”
그제야 현석은 고개를 끄덕이고 의자에 앉았다.
크랑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는 얼른 소개장을 작성하기 시작했다.
특이하게도 언제든 이런 걸 할 수 있도록 종이와 펜, 그리고 자신을 증명할만한 수단을 함께 들고 다녔다.
“이걸 보여주시면 될 겁니다. 그리고 이게 그놈이 있는 위치입니다.”
크랑이 두 장의 서류를 내밀었다.
하나는 소개장이었고, 다른 하나는 베를루니의 지도였다. 지도에는 켄드릭의 위치가 정확히 표시되어 있었다.
그뿐 아니라 켄드릭의 평소 이동 동선까지 기록되어 있었다.
초등학생이라도 이걸 가지고 있으면 켄드릭을 찾을 수 있을 것 같았다. 물론 이 정보가 진실이라는 가정 하에 말이다.
현석은 크랑을 보며 씨익 웃었다.
“널 정확히 기억했다.”
“예?”
“네 마력 패턴을 기억했으니 얼굴을 바꾸든 살을 찌우고 빼든 상관없다. 무조건 알아볼 수 있으니까. 도망갈 수 있으면 도망쳐 봐라.”
“헤헤헤. 제가 왜 도망을 칩니까. 찔리는 게 전혀 없는데 말입니다.”
크랑의 비굴한 웃음을 본 현석은 두 장의 서류를 아공간에 넣은 다음 돌아섰다.
“찾아다니는 것도 나름 재미있긴 하겠군.”
현석은 그 말을 남기고 밖으로 나갔다.
크랑은 멍하니 현석이 나가고 다시 닫힌 문을 바라보다가 몸을 부르르 떨었다.
거짓 정보를 주지 않길 정말 잘했다. 순간의 선택이 크랑을 살린 것이다.
“아…… 뜨지도 못하겠네. 진짜 울고 싶다.”
크랑의 얼굴이 울상으로 변했다. 아무래도 자신은 이곳 크락실이아에서 뼈를 묻을 운명인가 보다.
물론 이렇게 기반을 잘 다져놨는데 다른 곳으로 갈 생각도 없었지만 말이다.
* * *
“뭐라고? 그게 무슨 소리냐! 나갔던 기사들이 돌아오지 않는다니!”
쥬크는 청천벽력 같은 보고를 듣고는 버럭 소리를 질렀다.
“그게…… 정말로 안 돌아왔습니다. 그쪽에 확인했는데, 아직 목표들이 그대로 있다고…….”
“뭐? 그게 말이 된다고 생각하느냐!”
“하지만 사실입니다.”
보고를 하는 기사도 난감하기 이를 데 없었다. 사라진 기사들은 다 그의 동료들이었다.
같은 기사단 소속의 동료들이 모두 사라졌는데 그라고 기분 좋을 리 있겠는가.
총 70명으로 이루어진 기사단 중 50명이 출동했다가 모두 사라져 버렸다.
이제 20명밖에 남지 않은 것이다. 그리고 그 20명 중에는 기사단장과 부단장까지 포함되어 있었다.
그러니 사실상 기사단이 와해될 위기에 처했다고 봐도 과언이 아니었다.
임무에 파견되지 않은 기사들 중 쥬크를 진심으로 따르는 자는 그리 많지 않았으니까.
“도망쳤을 리는 없고…… 설마 당한 건가? 그게 가능할 리 없는데…… 시체는 확인했느냐?”
기사가 고개를 저었다.
“아무 흔적도 없었습니다.”
흔적이 모두 사라진 건 크랑이 과잉충성을 바친 결과였다.
크랑은 현석 일행이 남긴 모든 흔적을 지웠다. 더불어 현석이 싸운 술집에 압력과 뇌물을 적당히 행사해 목격자들의 입을 꽉꽉 틀어막았다.
그러니 크란시스 후작가가 나선 것도 아니고 고작 쥬크의 기사 몇 명이 그 흔적을 발견하거나 어젯밤 벌어진 일을 확인할 수 있을 리 없었다.
“이를 어쩐다? 이대로는 내 힘이 너무 쪼그라들어.”
안 그래도 최근 가문의 비고 때문에 쥬크의 입지가 밀리는 상황인데, 휘하 기사단이 와해되면 그 여파는 말로 설명할 수 없을 정도로 엄청날 것이다.
만일 제논 백작이 이 상황을 작정하고 이용하면 쥬크는 그야말로 나락으로 떨어질 수밖에 없었다.
그 정도로 위태로운 상황이었다.
“형님이 쉽사리 움직일 것 같진 않지만…….”
그동안 제논 백작은 가문의 주인 자리에 별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그리고 아무리 기회를 포착해도 제대로 나서서 힘을 행사한 적이 한 번도 없었다.
그래서 이번에도 그럴 거라 믿었다.
하지만 그건 쥬크의 기대심리가 반영된 안이한 판단이었다.
콰앙!
문이 부서질 듯 열렸다.
쥬크가 깜짝 놀라 문을 바라봤다. 거기에는 분노로 일그러진 얼굴의 제논 백작이 서 있었다.
“쥬크!”
“혀, 형님이 여긴 웬일이십니까?”
“네가 감히 내 은인을, 아니, 우리 가문의 은인을 기습해?”
쥬크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오, 오해십니다! 절대 그런 일 없습니다, 형님!”
쥬크는 본능적으로 일이 잘못되었다는 걸 깨닫고는 꼬리를 말았다.
하지만 고작 그 정도로는 제논 백작의 분노를 막을 수 없었다.
“네놈이 원하는 대로 해주마. 가문의 주인 자리, 절대 네게 양보하지 않겠다!”
제논 백작은 그렇게 선전포고를 던지고 그대로 돌아서서 방을 나섰다.
“혀, 형님!”
쥬크의 안색이 창백해졌다. 그는 대체 왜 일이 이렇게 되었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이것 역시 크랑의 과잉충성이었다.
그리고 새로운 줄을 잡고 자신의 과오를 정리하기 위한 몸부림이었다.
그렇게 크란시스 가문의 후계 싸움이 본격적인 국면에 접어들었다.
물론 그 싸움은 쥬크에게 한없이 불리했다.
그리고 그즈음, 현석 일행이 크락실리아를 떠나 베를루니로 출발했다.
< 레인보우 엘릭서 3 > 끝
ⓒ 김강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