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두눈 뜨고 레벨업-219화 (219/326)

< 레인보우 엘릭서 1 >

쥬크는 이를 부득 갈았다.

“드디어 다시 왔구나. 이 자식. 감히 날 그따위로 취급해 놓고 겁도 없이 돌아와?”

쥬크의 입매가 비틀렸다. 그의 마음도 입매와 마찬가지도 한없이 뒤틀렸다.

현석이 크락실리아에서 떠난 이후, 고작 며칠의 시간에 불과했지만 쥬크에게는 정말 악몽 같은 시간이 이어졌다.

특히 쥬크는 야심이 큰 사내였다.

지금 당장은 힘들어도 언젠가는 크란시스 가문의 주인이 될 거라고 굳게 믿고 있었다. 그리고 그걸 위해 좌우따위 살피지 않고 무작정 달리기만 했다.

한데 가문의 비고가 열리는 바람에 상황이 너무 위태로워졌다.

마력을 다루지 못하는 사람은 가문의 비고를 열 수 없다. 비고의 주인이 될 수 없다.

비고의 주인이 되지 못하는 사람이 가문의 주인이 될 수 있을까?

“당연히 가능하지.”

당연히 가능하다. 지금의 비고를 없애고, 보통 사람도 열쇠만 있으면 얼마든지 열 수 있는 비고로 다시 만들면 된다.

비고는 반드시 필요하다. 가문의 비밀무기인 인페르노를 항상 착용하고 다니는 건, 손목이 잘릴 수도 있는 위험을 감수한다는 뜻이었다.

굳이 그런 위험을 항상 안고 살 필요는 없지 않은가. 안 그래도 위협이 많고 머리도 복잡하고 긴장을 풀 수 없는 것이 귀족의 정치 생활인데 말이다.

어쨌든 쥬크는 그렇게 만들 생각이었다. 그러려면 일단 지금 가장 유력한 가주 후보로 떠오르고 있는 제논 백작부터 어떻게 해야 한다.

제논 백작은 쥬크의 형이긴 했지만, 어머니가 달랐다. 배다른 형제인 것이다.

그래서 어릴 때부터 제논 백작에 대한 경쟁심과 증오를 달고 살았다.

쥬크의 어머니가 꾸준히 시도한 정신교육 때문이었다.

그녀는 쥬크가 모든 면에서 제논 백작에게 뒤진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반드시 뛰어난 사람이 가주가 되는 건 아니다. 가주가 되려면 그보다 더 중요한 게 있었다.

그게 바로 독심이었다.

적어도 쥬크의 어머니는 그렇게 생각했다. 그래서 쥬크에게 그 독심을 심어주기 위해 애썼다.

다른 건 몰라도 제논 백작을 죽이기 위해서라면 수단과 방법을 가릴 필요가 없다는 사실 하나만큼은 다신 잊을 수 없을 정도로 뇌리에 단단히 새겨 주었다.

그 성과가 지금 나타나고 있었다.

“모두 싹 엮어서 다 죽여주마.”

쥬크가 이를 갈았다. 그의 눈빛이 음험하게 빛나고 있었다.

* * *

“굳이 여관에서 잘 필요 있어요? 그 귀족 저택에 가면 또 재워주지 않을까요?”

사실 현석을 제외한 모두는 크락실리아에서 지내는 것이 상당한 부담이었다.

일단 말이 통하지 않으니 뭘 하든 답답했다.

그리고 아직 이곳에 있는 사람들이 평균적으로 얼마나 강한지 알 수가 없었다.

그래서 함부로 움직일 수도 없었다.

하지만 크란시스 가문에 신세를 지면 그런 건 모두 사소한 일이 되어 버린다.

옆에서 시녀들이 시중을 들면서 필요한 모든 걸 해결해주니 편하기 그지없었다.

그래서 다들 여관방에 있는 각자의 침대에 걸터앉아 있으면서 불편한 표정을 감추지 못하고 있었다.

상당히 좋은 여관에 들어왔음에도 시설은 그다지 좋지 않았다.

던전 밖의 세상과 비교하면 그야말로 하늘과 땅 차이였다. 그 차이를 없애려면 크란시스 가문의 저택으로 가는 수밖에 없었다.

현석은 그런 일행을 보며 씨익 웃었다.

다들 그 미소를 보고는 불길함에 몸을 부르르 떨었다.

아니나 다를까, 현석이 모두에게 책을 한 권씩 건넸다.

받고 보니 책이라기보다는 두꺼운 노트였다. 그 안에 뭔가가 가득 적혀 있었다.

그게 뭔지 알아내는 데에는 그리 오랜 시간이 필요치 않았다.

“이거…… 여기 말인가요?”

류혜연이 놀란 눈으로 현석을 바라보며 물었다.

그 노트에는 각각 한글로 발음이 쓰여 있고, 그 뜻이 함께 적혀 있었다. 옆에는 제국어도 있어서 이것만 달달 외우면 그럭저럭 제국어를 할 수 있게 될 듯했다.

“이걸…… 직접 다 적으신 건가요?”

류혜연은 감동에 젖은 눈으로 현석을 바라봤다.

“정말 열심히 익힐 게요.”

그녀는 결연한 표정으로 노트를 꽉 쥐며 그렇게 말했다. 그녀의 눈빛에 어린 결심은 대단했다.

그렇게 류혜연이 가장 먼저 제국어 공부를 시작했다.

그녀가 그렇게 나오니 나머지도 이걸 거부할 수가 없었다. 그리고 잠시 후, 다들 머리를 쥐어 뜯었다.

“뭐 이렇게 어려워!”

라이언의 절규가 방안을 가득 메웠다.

제국어는 정말로 어렵고 까다롭고 복잡했다.

* * *

일행에게 제국어 교본을 던져준 현석은 따로 나와서 예전에 왔을 때 파악해 뒀던 정보 조직들을 둘러봤다.

일단 이쪽 세상에서 레인보우 엘릭서를 뭐라고 부르는지부터 알아내야 했다.

그래야 그에 대한 자세한 정보를 얻을 수 있을 테니까 말이다.

일단 최대한 정보를 모아보고, 정 안 되면 제논 백작을 만날 생각이었다.

아무래도 그가 현석보다는 이쪽 세상의 정보에 대해서는 더 밝고, 또 정보를 얻을 방법도 많을 테니까 말이다.

현석은 예전에 살펴봤던 정보조직들을 떠올리며 그 중 하나를 골랐다.

그때 현석의 감을 가장 많이 자극하던 놈들이었다. 아마 그들이 가장 실력이 뛰어날 것이다.

물론 정보를 모으고 그걸 가공하는 건 전투와는 좀 다르지만 말이다.

구석진 골목 중간에 있는 허름한 술집이었다.

현석은 망설임 없이 그 안에 들어갔다. 어떤 식으로 여길 이용하는지는 이미 파악해 두었다.

멀리서 지켜보며 여길 이용하는 자들의 말과 행동을 유심히 관찰했으니 말이다.

사람마다 이용법이 다를 수도 있기에 여러 번 확인했다.

정말 별 거 없었다. 그냥 카운터에 가서 정보를 사러 왔다고 말하면 된다.

카운터가 따로 있는 술집이 아니었다. 길쭉한 바가 있고, 그 안쪽에 우락부락한 사내 하나가 소소한 안주를 만드는 중이었다.

술집 안에는 일곱 개의 테이블이 있었는데, 그 중 두 개에 자리가 차 있었다.

테이블에 자리한 자들 역시 이곳 정보 조직의 관계자들 같았다.

현석은 바에 적당히 자리를 잡고 앉았다.

“뭘로 드릴까?”

우락부락한 사내가 히죽 웃으며 물었다. 현석은 그동안 지켜본 대로 얘기했다.

“정보를 사러 왔다.”

“오오. 정보 쪽 손님이셨군. 그래, 어떤 정보를 원하지?”

“무지개풀에 대한 모든 정보를 원한다.”

“무지개풀이라…….”

사내는 잠시 뜸을 들였다. 그러더니 눈을 빛내고 말했다.

“어느 정도 가격을 제시하느냐에 따라 정보의 양과 질이 달라질 것 같은데? 얼마나 갖고 오셨나?”

현석은 망설임없이 품에서 금괴를 꺼냈다.

투두둑!

열 개의 금괴가 쏟아져 쌓였다. 그걸 본 사내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이거…… 너무 과한데?”

사내는 그 중 금괴 하나를 집더니 품에서 단검을 꺼내 그것을 반으로 싹둑 잘랐다.

아무리 칼을 썼다지만 금괴를 단숨에 반으로 쪼개는 걸 보면 사내의 실력도 보통은 아니었다.

“딱 이 정도면 될 것 같은데?”

사내는 나머지 금괴를 현석 앞으로 다시 슥 밀었다.

그리고 아래에 쪼그려 앉아 뭔가를 뒤적거리더니 얇은 책자 하나를 꺼냈다.

입으로 바람을 후후 불어 책자에 쌓인 먼지를 털어낸 사내가 그것을 현석 앞에 가만히 내려놓았다.

“사실 돈을 좀 과하게 받은 감이 있으니 충고 하나 해주지.”

현석은 말해보라는 듯 사내를 쳐다봤다.

“이 근처에 아무리 돌아다녀봐야 내가 준 정보 이상을 얻을 수는 없을 거야.”

현석이 가만히 듣고 있자, 사내가 바에 놓인 금괴들을 힐끗 쳐다봤다.

“저 정도 가격을 지불할 만한 정보는 이 근처 어디에도 없어. 그게 어떤 종류의 정보든 말이지.”

사내는 양 팔을 벌리며 주위를 휘휘 둘러봤다.

“우리가 뭔가 감추면서 장사를 하던가? 어때? 몇 번 지켜봤으니 알잖아? 우린 대놓고 정보를 사고팔거든.”

현석이 눈을 빛냈다. 이들은 자신이 돌아다니며 정보 조직을 살피고 다녔다는 사실을 이미 알고 있었다.

사실 몇 번 하지도 않았는데 벌써 파악했다는 건 이들의 실력이 생각보다 대단하다는 뜻이기도 했다.

“그러니까 뒤가 구린 정보나, 혹은 우리의 목숨을 위태롭게 할 만한 정보는 취급 안 한다 이거지.”

현석은 고개를 끄덕이며 금괴들을 품으로 쓸어 담았다. 그저 손으로 당겨 품에 휙 던지듯 넣었는데, 하나도 떨어지지 않았다.

품에 아공간 아티팩트가 있다는 뜻이었다.

그걸 본 사내의 눈이 또 한 번 반짝였다.

“호의 고맙군.”

현석은 그렇게 말하고는 사내를 똑바로 쳐다봤다. 사내와 현석의 눈빛이 거의 동시에 번득였다.

“그런 의미에서 보답으로 술 한 잔 사고 싶은데, 어때? 생각 있나?”

현석의 말에 사내가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좋은 곳을 알고 있는데, 술값이 좀 되지. 괜찮나?”

“가지.”

현석이 고개를 끄덕이자 사내가 반색하며 바에서 나왔다. 그리고 안쪽을 향해 소리쳤다.

“누가 가게 좀 봐줘!”

그러자 안쪽에서 호리호리한 사내 한 명이 느릿느릿 나오더니 바에 자리를 잡고 섰다. 그리고 손을 휘휘 내저었다.

“자자, 어차피 장사도 잘 안 되는 가게는 저놈한테 맡기고 우린 술이나 한 잔 하러 가지. 이런 호탕한 손님은 정말 오랜만인데?”

우락부락한 사내가 앞장서서 가게에서 나갔다.

현석은 천천히 사내의 뒤를 따라갔다.

사내는 도시에서 가장 번화한 곳으로 향했다. 밤인데도 휘황찬란한 빛이 가득 채워진 거리였다.

그곳은 크락실이아의 밤을 지배하는 거리였다.

사내는 거침없이 거리를 따라 걸어갔다. 미리 정해둔 가게가 있는 모양이었다.

“이쪽이야.”

사내는 거리에서 가장 화려한 술집으로 현석을 안내했다. 안으로 들어가니 아름답고 헐벗은 여자들이 곳곳에 돌아다니고 있었다.

아주 비밀스럽게 운영되는 곳이 분명했다. 손님들이 서로 마주치지 않게 배려가 되어 있었다.

들어가자마자 곧장 대기실로 안내 되었는데, 대기실 자체가 함께 쓰지 않도록 여러 개 마련되어 있었다.

대기실로 세련된 복장을 갖춘 매끈한 사내 한 명이 들어와 정중히 인사했다.

“오랜만입니다. 크랑님.”

크랑은 씨익 웃으며 손을 흔들어 주었다.

“오랜만이야. 항상 하던 그걸로.”

“예. 바로 준비해 드리겠습니다. 이쪽으로 오시지요.”

대기실에서 나가는 문은 들어오는 쪽과 또 달랐다. 문을 나서니 복도가 있었는데, 미로처럼 이리저리 얽혀 복잡하기 그지없었다.

그렇게 안내된 방 역시 넓고 화려했다.

“자자, 이쪽으로 앉지. 주문은 내가 알아서 했는데, 괜찮지?”

현석은 고개를 끄덕인 다음 적당한 자리에 앉았다.

잠시 후, 술과 요리가 테이블에 쫙 깔렸다. 그리고 아름다운 여자 두 명이 들어왔다.

그녀들은 크랑을 잘 아는 눈치였다.

현석은 대번에 알아차렸다. 저 여자들도 크랑의 조직원이라는 사실을 말이다.

‘이 가게 자체가 크랑의 조직에 속한 것처럼 보이지는 않던데…….’

크랑은 환하게 웃으며 자신의 옆에 앉은 여자의 어깨에 자연스럽게 팔을 둘렀다.

“자자, 우리 일단 즐기자고. 이런 데 와서 목석처럼 술만 마실 생각은 꿈도 꾸지 말고. 으하하하!”

현석은 묘한 표정을 지었다. 보아하니 지금 크랑이 이러는 데에는 여러 가지 목적이 있는 듯했다.

현석의 태도를 떠보기 위함도 있고, 또 잘 엮어서 새로운 고급 정보를 얻어내려는 목적도 있었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건 자신이 가진 정보의 가치 책정이었다. 정보의 가격을 지금 이 자리에서 손님의 반응을 보고 결정하는 모양이었다.

나름 합리적이고 영리한 방법이었다. 정보의 가치란 고정된 게 아니라 때와 장소, 그리고 각자가 처한 상황에 따라 달라질 테니까 말이다.

현석은 이렇게 복잡한 단계를 거치는 걸 원치 않았다. 그저 원하는 정보가 있으면 그걸 사면 된다.

돈은 얼마든지 있었으니까. 그리고 핵폭탄 급 정보도 갖고 있으니 정보를 주고받아도 상관없었다.

솔직히 지금 어둠의 숲에서 벌어진 일만 해도 엄청난 정보가 될 것이다.

그쪽에는 지금 인적 자체가 아예 없으니 말이다.

도중에 있는 호수에 문어 마수가 사라졌다는 것도 정보가 될 수 있다.

그리고 마수왕의 탑에 대한 정보와 공허의 산맥이 뚫렸다는 것도 대단한 정보가 될 것이다.

물론 크랑이 돈을 원한다면 돈을 줄 것이다. 돈도 얼마든지 있었다.

이럴 때 쓰려고 그동안 차곡차곡 금을 모아왔던 것이니 말이다.

“시간 낭비하지 말고 본론으로 바로 들어가지.”

현석의 말에 크랑이 크게 웃었다.

“으하하하! 시간 낭비라니! 난 지금 이 순간을 위해 살고 있는데 말이야! 으하하하!”

“그럼 계속 그렇게 살아. 말리지 않을 테니. 난 질질 끄는 걸 별로 안 좋아한다는 것만 알아두고.”

“그래? 뭐, 원하신다면야. 우리야 손님의 기분을 맞춰드려야 할 의무가 있으니까.”

크랑이 빙긋 웃으며 말했다.

“자, 이제 진짜 얘기해 보자고. 정말로 원하는 정보가 뭐야? 무지개풀을 얻는 방법이나 그딴 걸 원하지는 않았을 것 같은데 말이야.”

이제야 좀 진지해진 분위기가 돌아오자, 현석이 눈을 빛내며 말했다.

“레인보우 엘릭서의 제조법.”

크랑의 눈빛이 정신없이 흔들렸다.

< 레인보우 엘릭서 1 > 끝

ⓒ 김강현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