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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눈 뜨고 레벨업-218화 (218/326)
  • < 다시 크락실리아로 >

    화이트홀에서 만신창이가 된 사람 하나가 툭 튀어나왔다.

    근처를 지키고 있던 플레이어들이 그 사람을 향해 일제히 무기를 겨눴다.

    “크으으윽.”

    나타난 사람은 흑시 측 플레이어들을 이끌던 자였다. 그나마 그가 가장 뛰어났기에 다른 사람들의 희생을 이용해 간신히 살아 돌아온 것이다.

    저 안의 상황을 알려야 한다는 일념도 있었다.

    그대로 자신까지 죽어 버리면 조직에서 또 시도를 할 테니까 말이다.

    그는 나오자마자 그대로 정신을 잃어 버렸다.

    “일단 치료부터!”

    레드드래곤 길드원의 외침에 사람들이 다급히 움직였다.

    잠시 후, 화이트홀에서 나온 흑시의 플레이어가 병원에서 눈을 떴다.

    응급조치를 제법 잘 했기에 목숨에는 지장이 없었다. 하지만 다시 플레이어 생활을 하는 건 불가능했다.

    마력을 모두 잃은 것이다.

    눈을 뜬 그의 시야에 중년의 사내가 보였다. 그는 운남 대련방의 방주였다.

    그리고 현재 흑시의 장로 중 하나이기도 했다.

    원래는 아니었으나, 이번 퀸급 던전 생성지역의 일로 흑시와 손을 잡으면서 장로 자리를 얻은 것이다.

    “장로님…….”

    눈을 뜬 사내는 대련방의 플레이어였다. 흑시와 손을 잡으면서 요직에 앉게 된 사람이기도 했다.

    퀸급 생성지역에 있는 화이트홀에 가장 큰 관심을 가진 사람이 바로 대련방주였다.

    그는 흑시의 명령에 따라 움직이긴 했지만, 거기에 가장 큰 입김을 불어 넣은 사람이 바로 대련방주였다.

    “괜찮으냐?”

    “예. 방주님, 그보다 화이트홀…… 거긴 들어가면 안 됩니다.”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게냐?”

    “거긴…… 거긴 지옥입니다.”

    “지옥이라고?”

    “예. 그곳은 죽음의 땅입니다. 저도 상대하기 어려운 언데드들이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이 있었습니다. 대원들은…… 다 죽었습니다.”

    사내의 눈에서 피눈물이 흘렀다. 당시의 광경이 떠오른 것이다.

    그들은 사내의 눈앞에서 언데드들에게 온몸이 찢기고 먹혀서 죽었다.

    “너도 상대할 수 없었다고?”

    “예. 일대일이면…… 호각으로 싸울 수 있을 것 같았습니다. 하지만 그곳 분위기가 제정신 가진 사람이 싸울 수 있는 곳이 아니었습니다.”

    대련방주가 고개를 끄덕였다. 이 정도면 충분히 알았다. 그곳이 어떤 곳인지 말이다.

    “퀸급이라 그런지 화이트홀도 보통이 아니구나.”

    “예. 거길 제대로 공략하려면…… 최소 150레벨 이상의 실력자 수백 명은 족히 필요할 것 같았습니다.”

    “허어. 150레벨이 넘는 실력자! 그렇게나 위험하더냐?”

    “예. 말로 설명하는 데에는 한계가 있습니다. 거긴…… 당분간 포기하는 게 옳을 것 같습니다.”

    “알았다. 그럼 푹 쉬면서 몸이나 제대로 추슬러라.”

    대련방주가 고개를 끄덕이고는 밖으로 나갔다.

    사내는 침대에 누워 멍하니 천장을 바라봤다. 그리고 눈을 질끈 감았다.

    ‘포기하지 않으실 생각이시구나.’

    대련방주를 어릴 때부터 모셔왔다. 그가 어떤 생각을 하는지는 눈빛과 표정만 봐도 알 수 있었다.

    대련방주는 아직도 포기하지 않았다.

    사내는 왠지 대련방의 미래가 어두워지는 듯한 예감이 들었다.

    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눈을 감은 사내는 억지로 잠을 청했다.

    다 잊고 싶었다.

    * * *

    “그래서 이젠 어쩌실 건가요? 공허의 산맥을 넘어가나요?”

    “크락실리아로 돌아간다.”

    “레인보우 엘릭서 때문에요?”

    현석이 고개를 끄덕였다. 현 상황에서는 그게 제일 중요하다.

    신의 파편은 이제 4개 남았다. 그걸 모두 완료하면 어떤 보상을 받을지 모르지만 아마 상당한 레벨업을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신의 파편을 하나씩 깨울 때마다 비슷한 방식으로 레벨업 보상을 받게 될 것이다.

    그런 식이면 300레벨을 넘어 400레벨 가까이 가는 것도 아예 불가능한 일은 아니다.

    다만 그렇게 레벨업을 하고 나면 그 뒤는 레벨업을 거의 포기하다시피 해야 할 것이다.

    그때 레인보우 엘릭서를 쓰면 된다.

    현석의 계획은 그랬다.

    하지만 그러려면 미리 레인보우 엘릭서의 제조법을 얻어내야만 한다.

    ‘어쩌면…….’

    현석은 문득 레인보우 엘릭서를 개발한 렉스턴 에너지가 떠올랐다.

    그들도 어쩌면 제조법을 화이트홀에서 얻은 건 아닐까?

    충분히 가능성 있었다.

    크락실리아가 가까운 건 아니지만 현재 그들의 상태라면 비교적 빨리 갈 수 있었다.

    “그 호수, 또 건너실 건가요?”

    현석은 고개를 끄덕였다. 다들 표정이 어두워졌다.

    “이번엔 잡아야지.”

    “예? 그걸 잡는다고요?”

    다들 놀란 눈으로 현석을 바라봤다.

    호수의 그 거대 문어는 본체도 확인하지 못했다. 호수를 건너올 때 고생했던 기억이 떠올랐다.

    하지만 현석은 그들과 생각이 좀 달랐다.

    “올 때도 제법 잘 싸우지 않았나? 시간을 좀 더 끌었으면 분명히 잡았을 것 같은데?”

    현석은 눈을 빛내며 말을 이었다.

    “그리고 거대문어는 제법 맛있는 편이지.”

    다들 멍하니 현석을 바라봤다. 그들의 뇌리에 얼마 전에 아주 맛있게 먹었던 고기가 떠올랐다.

    “설마…….”

    설마 그 고기가 마수의 고기는 아니겠지? 모두의 뇌리에 강한 의심이 들었다.

    특히 경험이 있는 양세희의 얼굴은 벌써 창백해졌다.

    그때도 그 지렁이 고기를 얼마나 맛있게 먹었던가. 물론 전에 먹은 고기는 지렁이 고기와는 전혀 달랐다.

    훨씬 부드럽고 육즙도 철철 넘쳤다. 그리고 맛 자체가 확연히 달랐다.

    “아무튼 슬슬 출발하지. 더 늦기 전에.”

    현석의 말에 일행은 서둘러 출발했다. 아마 조만간 밤이 될 것이다.

    “목표는 오늘 중으로 크락실리아에 도착하는 거다.”

    “예?”

    “그게 가능해요?”

    “굳이 그렇게 무리할 필요가 있나?”

    현석은 일행의 말에 일일이 대꾸하지 않고 걸음을 옮겼다.

    오늘 중으로 문어도 잡고 크락실리아에도 도착할 것이다. 충분히 그렇게 할 수 있었다.

    용을 타고 이동할 테니까.

    그 사실을 까맣게 모르는 일행은 긴가민가하는 표정으로 현석을 따라 열심히 달리기 시작했다.

    * * *

    “헉헉헉.”

    다들 지쳐 널브러졌다. 설마 문어를 잡기 위해 물속에 걸어 들어가 싸울 줄은 몰랐다.

    얼마나 오랫동안 숨을 멈추고 문어와 사투를 벌였는지 다들 물 먹은 솜처럼 축 늘어졌다.

    “악마. 악당.”

    양세희가 멍하니 하늘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예전 지렁이랑 싸우게 할 때부터 알아봤다. 저 사람은 자신이 고난에 빠져 허우적거리는 걸 보며 즐기는 악당이 분명했다.

    그들의 옆에는 거대한 문어가 널브러져 있었다. 그 문어는 이내 현석의 아공간으로 사라져 버렸다.

    “다들 이거 하나씩 먹도록.”

    현석의 말에 전부 어그적거리며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현석이 있는 쪽을 바라봤다.

    현석 앞에 간이 테이블 하나가 놓여 있었다. 아공간에서 꺼낸 모양이었다.

    ‘하여간…… 별 걸 다 갖고 다닌다니까.’

    마수왕의 탑에 들어가기 전에 주고 간 컨테이너 박스를 보고 얼마나 놀랍고 황당했는지 모른다.

    설마 그런 걸 갖고 다닐 줄이야, 게다가 그렇게 큰 컨테이너 박스가 들어가는 아공간이라니. 대체 아공간이 얼마나 크단 말인가.

    보면 볼수록 신기했다.

    다들 억지로 몸을 일으켜 현석에게 다가갔다. 테이블 위에는 새까만 구슬들이 놓여 있었다.

    “이게 뭔가요?”

    류혜연이 신기한 눈으로 구슬을 들고 이리저리 살피며 물었다.

    그녀는 정말 힘들긴 했지만 다른 사람들처럼 현석을 질린 눈으로 보지 않았다.

    꼭 필요한 일이니 시켰을 거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먹으면 힘이 솟는 약.”

    “힘이 솟는다고요? 그럼 안 힘들게 되는 건가요?”

    현석이 고개를 끄덕이자, 류혜연은 1초도 망설이지 않고 그것을 입에 넣었다.

    “우와!”

    반응은 즉각적이었다. 류혜연의 입에서 감탄이 터져 나왔다.

    “정말 맛있어요!”

    다들 흠칫 놀라 류혜연과 테이블을 번갈아 바라봤다.

    “우와! 진짜 힘이 솟아요!”

    류혜연은 정말로 깜짝 놀랐다. 온몸에 쌓였던 피로가 말끔히 사라져 버렸다.

    힘이 펄펄 넘쳤다. 당장 또 문어랑 싸우라고 해도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물론 또 싸우긴 싫었지만.

    다들 슬금슬금 다가왔다. 그리고 테이블 위에 놓인 검은 구슬을 유심히 살폈다.

    “이거…… 정확히 정체가 뭐예요?”

    류지혜가 은근한 목소리로 물었다. 하지만 현석은 대답해주지 않았다.

    이게 거대문어의 먹물주머니에 담겨 있던 구슬이라는 얘기를 굳이 해줄 필요는 없지 않은가.

    다들 미심쩍은 표정으로 그것을 집어 이리저리 살피다가 입에 넣었다.

    그리고 류혜연과 아주 똑같은 반응을 보였다.

    “다 먹었으면 슬슬 출발하지. 이제 아무리 달려도 지치지 않을 것 같지 않나?”

    현석의 말에 다들 표정이 굳었다.

    방금 그렇게 힘들게 싸웠는데 바로 또 달린다고? 어떻게 그럴 수 있단 말인가.

    모두 말은 안 했지만 현석을 보는 시선이 악마를 보는 듯했다.

    현석은 빙긋 웃더니 용을 소환했다.

    다들 멍하니 용과 현석을 번갈아 바라봤다.

    “설마…… 혼자 저거 타고 날아가고 우린 달려서 따라와라…… 이런 건 아니죠?”

    현석이 고개를 저으며 피식 웃었다.

    대체 어떻게 하면 저런 생각을 할 수 있단 말인가. 자신이 뭐 대단히 괴롭힌 것도 아닌데 말이다.

    “다 같이 타고 갈 거다. 크락실리아까지.”

    “예? 정말요?”

    “그게 가능한가요? 보니까 번개가 번쩍번쩍 하던데.”

    “가능하게 할 테니까 염려 마라.”

    다들 반색했다. 그렇게만 할 수 있다면 더 할 나위 없었다. 달려가야 하는 줄 알았는데 날아갈 수 있으면 당연히 날아가고 싶은 게 인지상정 아니겠는가.

    일행의 눈이 기대감으로 반짝반짝 빛났다.

    잠시 후, 어처구니가 없는 표정의 라이언이 멍하니 아래를 내려다봤다.

    그는 아래를 내려다보다가 고개를 들어 일행을 둘러봤다.

    “이게 뭐야!”

    라이언이 분통을 터트리자, 류혜연이 배시시 웃으며 말했다.

    “그래도 마법의 양탄자 타는 것 같잖아요. 재미있지 않아요?”

    다들 황당한 눈으로 류혜연을 바라봤다.

    “너도 진짜 어지간하다.”

    결국 그렇게 말하고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지금 일행은 날아가는 중이었다. 용의 몸에 매단 줄에 단단히 고정시킨 넓은 금속판 위에 앉아서 말이다.

    바람이 씽씽 불었다. 조금만 방심해도 아래로 뚝 떨어질 것이다. 여긴 난간이 없었으니까.

    “난간이라도 좀 만들어주지.”

    라이언이 투덜거렸다. 하지만 이곳에 있는 사람은 모두 고레벨의 플레이어였다. 고작 이런 바람에 날려 아래로 떨어지는 일은 없을 것이다.

    그냥 용 한 번 타고 싶었는데, 이렇게 매달려 가는 게 싫어서 투덜거릴 뿐이었다.

    “이러다가 이 끈 끊어지면 큰일이잖아.”

    “공중에는 마수 없나요?”

    양세희의 지극히 현실적인 질문에 라이언이 입술이 쭉 나온 표정으로 말했다.

    “있어도 이렇게 무시무시한 용 근처로 날아오기나 하겠어?”

    “하긴…….”

    다들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생각해보니 가장 안전하면서도 빠른 방법이었다.

    그런데 왜 마수왕의 탑으로 갈 때는 이 방법을 안 썼는지 의아했다.

    “고생 한 번 시키고 싶었나?”

    “에이, 그건 아닐 거예요. 그땐 미처 생각이 안 나셨겠죠.”

    류혜연은 그렇게 말하고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우리 오라버니께서 이런 걸 생각 못하실 리 없는데? 아, 그럼 우리의 훈련과 성장을 겸해서 달렸나보네요. 그렇죠?”

    다들 멍하니 류혜연을 바라봤다.

    “중증이다. 중증.”

    * * *

    결국 현석 일행은 밤이 막 시작되었을 때, 크락실리아에 도착할 수 있었다.

    정문을 통과하는 건 어렵지 않았다. 사방 성벽을 지키는 병사가 모두 크란시스 가문 소속이었다. 그들은 당연히 현석의 얼굴을 알고 있었다.

    이미 모든 성문에 현석에 대한 정보가 하달되었다. 언제든 검문없이 성문을 통과시키라는 크란시스 후작의 명령이 내려온 상태였다.

    물론 현석이 들어가면 그 보고 역시 위로 올라가게 되어 있었고 말이다.

    현석이 성문을 통과해 크락실리아 안으로 들어갔다는 보고가 몇 단계를 거쳐 크란시스 후작에게 도착했다.

    그리고 그 몇 단계 중에는 쥬크도 포함되어 있었다.

    < 다시 크락실리아로 > 끝

    ⓒ 김강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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