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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눈 뜨고 레벨업-208화 (208/326)
  • < 어둠의 숲으로 1 >

    현석 일행은 정말로 바쁜 하루를 보냈다. 일단 크란시스 가문의 주요 인사들이 끊임없이 찾아와 인사를 했다.

    그들은 대부분 왜 인사를 해야 하는지도 모르고 찾아왔다. 그저 가주가 중요한 손님이라고 강조하고 또 강조하니 가서 인사를 할 뿐이었다.

    물론 그 때마다 적당한 선물을 건네는 것도 절대 잊지 않았다.

    별의 별 선물이 다 있었다. 각종 보석과 장신구부터 시작해 아티팩트까지 있었다.

    물론 선물로 받은 아티팩트는 그다지 수준이 높지 않은 것이었지만 말이다.

    생각보다 이 던전 세상의 아티팩트 수준이 그리 높지 않아 보였다.

    마수왕의 증표가 나온 던전이 이곳이니 그 정도는 아니더라도 근접할 만한 좋은 아티팩트가 많을 줄 알았는데, 마수왕의 증표가 특별한 것이었다.

    대부분 수준 이하의 아티팩트들만 있었다.

    어제 본 인페르노를 제외하면 말이다.

    ‘그러니까…… 이들이 제작할 수 있는 한계가 낮은 모양이야. 인페르노 같은 건 고대에 제작된 유물 같은 거고 말이야.’

    현석은 일단 잠정적으로 그렇게 결론을 내렸다.

    어쨌든 그렇게 인사를 받으면서 동시에 파티 준비도 진행했다.

    현석 일행이 해야 할 것은 치장이었다.

    한 명당 대여섯 명의 수행원들이 따라붙어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치장을 해주었다.

    마치 이번 파티의 주인공은 너희들이라고 대놓고 말하는 듯했다.

    다만, 그렇게 달라붙는 사람들도 현석에게는 선뜻 다가가지 못했다.

    현석이 풍기는 특유의 분위기 때문에 근처에만 다가가도 온몸이 덜덜 떨려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다.

    당연히 일부러 그렇게 한 것이다.

    현석은 주변에 섬뜩한 느낌을 주는 마력을 짙게 깔아뒀다. 자신에게만 다가오지 않으면 된다는 생각으로 했기에 다른 일행들에게 더 많은 사람들이 붙었다.

    어쨌든 그렇게 해 놓고 현석은 자유롭게 크락실리아 곳곳을 돌아다니며 이 도시의 상황에 대해 이것저것 알아봤다.

    크락실리아는 상당히 큰 도시였다. 그리고 근처에 경쟁할 만한 다른 도시도 없었다.

    제법 큰 규모의 마을들은 많이 있었는데, 그 마을들이 크락실리아에 속해 있었다.

    즉, 크락실리아라는 도시를 중심으로 수십 개의 마을이 하나로 모여 나라와 비슷한 형태를 이루고 있는 것이다.

    물론 그렇다고 이것이 진짜 국가를 이룬 것은 아니었다. 그렇게 하기엔 서로 간에 얽힌 이해관계나 귀족의 수가 너무 많았다.

    어쨌든 현석이 알아본 바에 따르면 이 던전에는 국가 자체가 존재하지 않고 대부분 도시의 형태로 각자의 살길을 모색하고 있었다.

    던전에 잔뜩 퍼져 있는 마수들 때문이었다.

    또한 곳곳에 웅크린 채 힘을 키우고 있는 마족의 존재도 문제였다.

    어쨌든 그런 상황이기 때문에 크란시스 가문의 비밀병기인 인페르노는 그야말로 절대적인 권력을 쥐어줄 수 있는 무기이기도 했다.

    아마 크란시스 후작이 제대로 마음만 먹으면 이 도시를 국가로 만들어 왕의 자리에 오를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현석이 보기에 크란시스 후작은 그럴 계획이 전혀 없었다.

    그는 그저 이 자리와 상황을 이대로 유지하는 것이 최선이라고 여기는 듯했다.

    그렇게 도시 곳곳을 돌아다니며 이 도시의 음지에 스며들어 있는 정보조직 몇 군데를 발견했다.

    지금 당장은 그들 역시 쓸 일이 없지만, 혹시 나중에는 모를 일이니 그들의 본거지를 정확히 기억해두었다.

    현석은 너무나 은밀하게 기척과 모습을 숨기고 다녔기에 현석이 어디에서 어떻게 돌아다니는지 아무도 알아차리지 못했다.

    특별한 스킬이나 아티팩트를 이용하는 게 아니라 주변에 마력을 짙게 깔아 그것을 비트는 방식으로 기척을 숨겼다.

    하지만 그 자체로 어떤 스킬이나 아티팩트보다 효과적인 은신을 이뤄낼 수 있었다.

    현석은 슬슬 자신의 마력 컨트롤 능력이 어떤 선을 넘은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그저 단순히 마력의 주인이 되어 마력을 지배하는 것이 아니라, 그 자체를 넘어서는 무언가가 된 느낌이었다.

    물론 그 느낌이 강하진 않았다. 하지만 머지않았다는 건 알 수 있었다.

    이 느낌이 더없이 강해지고 그 앞에 있는 어떤 벽을 박살 내는 순간, 그 순간이 바로 새 타이틀을 얻게 되는 때가 되리라.

    그렇게 도시 곳곳을 돌아다니며 나름의 정보를 확인한 현석은 다시 크란시스 가문의 저택으로 돌아왔다.

    이 도시에는 무수한 가문과 저택이 있었지만 현석이 보기에 크란시스 가문이 그 중 제일이었다.

    아마 던전 세상의 지도도 크란시스 가문이 보유한 것이 가장 뛰어날 것이다.

    그렇기에 현석은 다른 가문에서 지도를 슬쩍할 수 있었음에도 굳이 그렇게 하지 않았다.

    보아하니 이곳에서는 지도를 굉장히 중요하게 여기는 듯했다. 그런 것을 도난당하면 한바탕 난리가 날 것이다.

    괜히 그런 분란을 일으킬 필요가 없었다. 어차피 오늘 중으로 원하는 것을 받게 될 텐데 말이다.

    저택으로 돌아온 현석은 잠깐 자신의 눈을 의심했다.

    모든 일행이 대 변신을 이뤄냈기 때문이다.

    “제발 그런 눈으로 보지 말아요. 저도 부끄러워 미칠 것 같으니까.”

    가장 먼저 입을 연 것은 양세희였다.

    그녀는 화려하면서도 가슴이 엄청나게 강조된 드레스를 입고 있었는데, 평소에 이런 옷을 한 번도 안 입어봤는지 어색함과 부끄러움이 적절히 뒤섞인 표정을 짓고 있었다.

    하지만 옷차림과 화장과 머리가 너무나 잘 어우러져서 굉장히 아름다웠다.

    사실 양세희가 별로 꾸미고 다니지 않고, 외모에 관심이 없어서 그렇지 어디 가서 꿀릴 만한 사람은 아니었다.

    그런 그녀의 매력을 제대로 살려놓으니 다들 눈이 휘둥그레질 정도로 달라져 버렸다.

    사실 일행 중 누구도 양세희가 이렇게 아름다웠는지 아무도 몰랐으니까.

    그동안 양세희의 진짜 매력을 알고 있는 사람은 애석하게도 그녀를 항상 감싸고돌던 그녀의 친오빠인 양동욱뿐이었다.

    박승희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녀는 애초에 노리는 사람들이 많을 정도로 아름다웠다.

    그런 그녀가 작정하고 꾸미니 깜짝 놀랄 정도의 아름다움을 과시했다.

    류지혜나 류혜연 역시 말할 것도 없었다.

    특히 류혜연의 모습은 한 번 보면 결코 눈을 뗄 수 없을 정도로 대단했다.

    그녀를 치장해 주던 시녀들은 치장을 하는 내내 꺅꺅거리며 놀람을 감추지 못했다.

    여자들뿐 아니라 남자들도 마찬가지였다.

    예전 중세시대처럼 민망한 옷이 아니라 상당히 세련된 복장이었다. 또한 남자들 역시 엷게 화장을 했는지 얼굴이 훨씬 매끈하고 색이 좋아 보였다.

    일행 중에서 치장이 전혀 안 된 사람은 현석뿐이었다.

    현석은 일행의 모습을 보고도 여전히 치장할 생각이 전혀 들지 않았다. 파티 같은 것에는 전혀 관심이 없었다.

    다들 살짝 상기되어 있었다. 귀족가에서의 파티가 주는 기대감이 상당했기 때문이다.

    물론 재미있을 수도 있다. 아마 모든 관심이 이들에게 모일 것이다.

    하지만 그럼 뭐 하겠는가. 어차피 대화가 통하지 않는데.

    그저 분위기만 즐기다가 와야 할 것이다. 반쪽짜리 밋밋한 파티가 될 확률이 높았다.

    그렇기에 현석은 더더욱 그런 파티에 관심이 없었다.

    그래도 참석은 해두는 게 나았다. 어쨌든 나중에 뭐가 어떻게 될지는 누구도 알 수 없으니까.

    일행의 준비가 끝나자 집사가 직접 모시러 찾아왔다.

    사실 처음 현석 일행이 손님으로 왔을 때와 지금의 위상은 하늘과 땅차이였다.

    그때는 제논 백작이 자신의 은인으로 가볍게 초대했을 뿐이었다.

    더구나 제논 백작은 가문의 주요 인사들로부터 상당한 견제를 당하는 중이었다.

    그러니 대접이 제대로 이뤄질 수 있을 리 없었다. 그나마 제논 백작이 직접 나서서 열심히 챙겼기에 그 정도나마 가능했던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다르다.

    지금은 크란시스 가문 자체의 은인이 되었다.

    이유는 알려지지 않았지만 가주인 크란시스 후작이 직접 모두에게 그렇게 공표했다.

    이제 현석 일행에게 함부로 하는 사람은 가문의 은인에게 무례를 범하는 나쁜 놈이 되는 것이다.

    그러니 대접이 달라지는 건 너무나 당연했다.

    어쨌든 그렇게 파티가 시작되었다.

    현석의 예상대로 일행은 파티에 제대로 녹아들지 못하고 겉돌았다.

    하지만 그럼에도 그들의 위상이 달라졌기에 접근하는 사람들도 많았고, 적극적으로 손짓 발짓을 통해 대화를 시도하려는 사람들도 많았다.

    덕분에 그들은 그나마 파티를 즐길 수 있었다.

    현석은 일부러 일행들과 떨어져 있었다. 자신이 있으면 오히려 일행들이 파티를 즐기지 못한다는 걸 알기 때문이었다.

    일행 중 유일하게 말이 통하는 사람이 현석이니 다들 현석과만 말을 섞으려 할 게 뻔하지 않은가.

    그래서 현석은 적극적으로 사람들을 피해 다녔다. 일행들을 위한 나름의 배려였다.

    물론 일행들이 그걸 배려로 받아들일지는 알 수 없지만 말이다.

    그런 현석에게 누군가가 접근했다.

    현석은 굳이 보지 않고도 그가 제논 백작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사과하러 왔소.”

    현석은 그 말에 대답하지 않고 그를 물끄러미 쳐다봤다. 그러자 제논 백작이 오히려 더 머쓱해져서 뒷머리를 긁적였다.

    “당신의 능력을 이용한 거 말이오. 사실 그날 당신이 내 인장을 찾아주었을 때부터 이 날을 기다렸소.”

    그때부터 계획을 세웠다는 뜻이다. 그러니 이렇게 물 흐르듯 자연스럽게 일이 진행되었을 것이다.

    “그놈들에게 마력을 갈취 당하면서 오히려 실력이 늘었소. 이걸 좋아해야 할지 말아야 할지 한동안 갈피를 잡을 수 없었지.”

    제논 백작은 그렇게 말하고 잠시 뜸을 들이다가 현석을 바라보며 힘있게 말했다.

    “나, 생각보다 신의 없는 놈 아니오. 지킬 건 지키는 사람이오. 또 은혜를 저버리는 파렴치한도 아니고. 우리 가문과 당신이 약속한 것과는 별개로, 향후 당신이 필요할 때 언제든 날 부르시오.”

    현석이 그 말에 눈을 빛냈다. 그러자 제논 백작이 결연한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내 목숨이 필요한 일이라도 흔쾌히 웃으면서 들어주겠소.”

    현석은 그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새겨두지.”

    그제야 제논 백작이 환하게 웃었다. 마치 십 년 묵은 체증이 내려간 듯한 표정이었다.

    “하하하. 그럼 그때가 오기만을 기다리겠소. 더 열심히 날 키우면서 말이오.”

    제논 백작은 그렇게 말하고 정중히 인사를 한 다음 현석에게서 멀어져갔다.

    현석은 그런 제논 백작의 뒷모습을 보며 다시 한 번 고개를 끄덕였다.

    썩 괜찮은 기분이었다. 현석의 입가가 슬며시 올라갔다.

    두 번째로 현석을 찾아온 것은 크란시스 후작이었다. 그 역시 현석에게 약속을 꼭 지키겠다는 말을 하고 돌아갔다.

    현석은 제논 백작과 크란시스 후작이 참으로 많이 닮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마지막으로 현석을 찾아온 것은 쥬크였다.

    쥬크는 현석을 보자마자 이를 갈았다. 그리고 매섭게 노려봤다.

    “네놈 생각대로는 안 될 것이다.”

    현석은 그 말에 피식 웃었다.

    “내 생각이 뭔데?”

    “형님을 차기 가주로 밀고 있는 것 아닌가! 내가 그리 쉽게 물러날 줄 아느냐? 절대 안 물러난다. 끝까지 버티고 버틸 것이다. 결국 가주 자리에 앉게 되는 건 내가 될 거야!”

    쥬크의 말에 현석은 그를 가만히 쳐다봤다.

    “아마 넌 안 될 거다.”

    “웃기지 마! 네가 뭘 안다고 그따위로 말하느냐!”

    현석은 고개를 돌려 제논 백작과 크란시스 후작이 있는 쪽을 쳐다봤다.

    그리고 다시 시선을 돌려 쥬크를 쳐다봤다.

    “너에게는 저 두 사람에게 있는 것이 없거든.”

    쥬크가 으드득 이를 갈았다. 그게 뭔지는 자신도 아주 잘 알고 있다. 마로 마력이었다.

    쥬크는 마력을 쓰지 못하는 몸이었다. 하지만 그게 뭐 어떤가. 마력을 못 쓰는 귀족은 널리고 널렸다.

    자신만 특이한 게 아니었다. 아니, 오히려 특이한 건 크란시스 후작과 제논 백작이었다.

    마력을 저렇게 잘 쓰는 귀족이 오히려 더 드물었다. 오히려 기사나 마법사가 더 마력을 잘 쓴다.

    “마력 따위 없어도…… 내가 이 가문의 주인이 되는 데에는 아무 문제가 없다.”

    현석이 고개를 저었다.

    “다른 가문은 몰라도 여긴 안 될 거다. 가문의 비고를 열 수 없을 테니까.”

    보통은 아티팩트를 제작할 때, 마력 사용자가 아니더라도 쓸 수 있게 만든다.

    하지만 크란시스 가문의 비고는 마력 사용자가 아니면 그것을 열 수 없도록 설계되어 있었다.

    당연했다. 아공간의 주인이 되어야 하니까.

    사용자의 마력 패턴에 맞춰 아공간의 열쇠를 각인해야 하는데, 마력 사용자가 아니면 그 과정이 불가능했다.

    하지만 쥬크는 거기에 대해서는 전혀 알 수 없었다. 그렇기에 이런 허황된 꿈을 꾸는 것이다.

    “네가 이 가문의 가주가 된다면…… 아마 가문도 끝날 거다.”

    “뭐?”

    쥬크는 눈을 부릅뜨고 현석을 노려봤다. 그의 눈에 핏발이 섰다.

    당장에라도 저놈의 목을 쳐버리고 싶었다. 하지만 그럴 수가 없었다.

    그는 현석이 무슨 일을 했는지 알고 있다. 수백 년 동안 아무도 열지 못했던 가문의 비고를 열었고, 크란시스 후작과 제논 백작에게 그 열쇠를 넘겼다.

    그런 현석을 적대했다간 오히려 상황을 더 악화시킬 수도 있었다.

    쥬크는 무시무시한 눈으로 현석을 노려보다가 휙 몸을 돌려 멀어져갔다.

    “어리군.”

    현석은 쥬크게 대한 감정을 그 한 마디로 정리해 버리고는 다시 시선을 돌렸다.

    슬슬 파티가 끝나가고 있었다.

    그리고 피곤함과 만족감이 뒤섞여 묘한 표정을 짓고 있던 현석의 일행들이 하나둘 모이기 시작했다.

    “내일 새벽에 떠난다.”

    현석의 말에 다들 뜨악한 표정을 지었다. 이렇게 피곤한 하루를 보냈는데 몇 시간이라도 쉬고 아침도 잘 먹고 가면 좋으련만.

    “하여간 우리가 쉬는 꼴을 못 본다니까.”

    라이언이 모두를 대변해 투덜거렸다. 하지만 안 하겠다는 말은 하지 않았다. 그건 모두 마찬가지였다.

    그렇게 파티가 끝났다.

    그리고 다음 날, 현석은 자신의 말을 지켰다.

    < 어둠의 숲으로 1 > 끝

    ⓒ 김강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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