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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눈 뜨고 레벨업-207화 (207/326)
  • < 제논 백작 3 >

    “열 수 있겠나?”

    현석은 크란시스 후작의 물음에 대답하지 않고 다시 아공간을 쳐다봤다.

    아공간을 여는 거야 이제 제법 익숙해졌다.

    그동안 열었던 아공간 중 가장 어려웠던 것이 바로 그림자 인간들의 호수에 있던 그 아공간이었다.

    그림자에 겹쳐져 있어서 마력 패턴을 분석하는 것 자체가 어려웠고, 그동안 봤던 아공간 중 가장 복잡한 술식과 보안체계를 가진 아공간이었다.

    하지만 결국 그것도 열어냈다.

    한데 고작 이 정도 아공간을 못 열 리 있겠는가.

    더구나 그림자 인간의 아공간을 열면서 현석의 마력 컨트롤 능력이 더 성장했다. 또한 아공간에 대한 이해도가 높아졌다.

    이젠 더 어려운 아공간이 나오더라도 얼마든지 해체할 자신이 있었다.

    현석은 벽면 전체에 깔린 아공간을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초창기 방식이군.’

    현석은 나름대로 아공간을 분류했다. 가장 기초적인 수준의 아공간부터 복잡한 아공간까지 시대별로 분류했다.

    진짜 오래 된 아공간이라는 뜻이 아니라 그냥 처음 나온 게 더 간단하고 쉽지 않을까 해서 나름대로 붙인 분류방식일 뿐이었다.

    그런 현석이 보기에 이곳에 있는 아공간은 초기모델이었다.

    ‘다만 보안방식이 좀 괜찮은 편이네.’

    아공간은 초기방식인데 보안은 뛰어났다.

    그 말은, 이 아공간을 열기가 어렵다는 뜻이다.

    그리고 일단 연 아공간에 어떤 물건이 있는지 확인하려면 안에 있는 물건을 계속 끄집어내는 수밖에 없다는 뜻이기도 했다.

    초기모델의 가장 큰 단점이었다.

    보통 이런 아공간에는 안에 많은 물건을 보관하지 않는다. 어쩔 수 없는 경우를 제외하면 말이다.

    현석은 분석을 끝내고 한 발 물러났다. 그러자 크란시스 후작이 기대감 어린 눈으로 물었다.

    “어떤가? 열 수 있겠는가?”

    현석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 반향은 어마어마했다. 크란시스 후작의 눈이 찢어질 듯 커졌다.

    “그게 정말인가? 정말로 저걸 열 수 있다고?”

    현석은 재차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면서 살짝 눈살을 찌푸렸다.

    “아, 미안하네. 내 너무 믿기 어려워서 실례를 했군.”

    크란시스 후작은 금세 저자세로 나왔다. 이 가문의 비고를 열 수만 있다면 무슨 수모든 다 견딜 수 있었다.

    하물며 지금은 수모랄 것도 없지 않은가. 명백히 자신이 실수한 것이니 말이다.

    사실 그동안 크란시스 후작이라고 놀고만 있었던 건 아니었다. 아니, 그만이 아니었다. 그의 아버지, 또 할아버지, 또 그 선조까지 모두가 애썼다.

    그리고 결국 이 아공간이 왜 안 열리는지 그 이유를 알아냈다.

    아주 간단했다. 아공간의 주인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 아공간의 주인은 초대 크란시스 가문의 가주였다. 그가 죽으면서 주인이 사라져 버린 것이다.

    아공간의 주인이 아공간을 타인에게 인계하지 않고 죽으면 입구가 꼬이면서 열기가 더 어려워진다.

    그래서 아공간에 대한 조예가 아무리 깊은 사람을 데려와도 다들 고개만 저을 뿐이었다.

    그걸 알고 있으니 현석의 저 말을 더 믿기가 어려웠다.

    크란시스 후작은 제논을 바라봤다. 제논은 후작과 눈이 마주치자 고개를 한 번 끄덕였다. 그 눈빛이 어찌나 의미심장한지 후작은 다시 현석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부탁하네.”

    후작이 진심을 담아 부탁했다. 만일 저 아공간을 정말로 열 수 있다면 어떤 대가라도 치를 수 있었다.

    가문의 비고는 크란시스 가문을 지탱하는 주춧돌이나 다름없었다.

    지금까지는 허상이었지만 만일 저 아공간을 열어 그것을 꺼낼 수 있다면 진실로 만들 수 있을 것이다.

    “만일 저걸 열 수만 있다면 자네가 하는 부탁 세 가지를 들어주겠네. 가문의 존폐나 우리 가족의 생사에 관계되지 않은 일이라면 그 어떤 요구라도 들어주겠네.”

    크란시스 후작의 말에 제논 백작이 깜짝 놀랐다. 아무리 가문의 비고를 여는 게 중요하다지만 설마 저런 말을 할 줄은 몰랐다.

    현석은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 당장이야 별 쓸모없지만, 저런 약속을 굳이 거절할 필요는 없었다.

    나중에 또 무슨 일이 벌어질지는 아무도 모르는 일 아닌가.

    더구나 현석은 이 하나의 세상을 이루는 던전이 가지는 의미가 절대 평범하지 않다는 느낌을 받고 있었다.

    이곳과 현석이 그동안 확보해둔 퀸급 던전생성지역의 화이트홀과는 분명히 어떤 연관이 있을 것이다.

    현석의 입가가 슬쩍 올라갔다. 생각해보면 정말 재미있고 흥미진진한 일이었다.

    각각 따로 일 것 같은 화이트홀이 사실은 모두 하나로 연결될지 모른다. 게다가 그 중심에 지금 현석이 서 있는 이 화이트홀이 있었다.

    현석의 추측대로라면 그랬다.

    ‘그리고…… 지금까지 이런 식의 추측이 틀린 적이 거의 없었지. 특히나 회귀 후에는 더더욱.’

    회귀 후에는 마치 미래를 알고 세상 모든 걸 아는 사람이 귓가에서 앞으로 벌어질 일이나 세상의 비밀을 속삭여 주는 것 같았다.

    강한 예감이 들면 그것이 틀리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그러니 이번에도 아마 맞을 것이다.

    그러니 나중을 위해서라도 이곳에 이런 우호세력을 하나쯤 만들어 두는 건 나쁘지 않은 일이었다.

    현석은 벽으로 다가갔다. 그리고 벽에 손바닥을 갖다 댔다.

    굳이 손대지 않고도 얼마든지 아공간을 해체할 수 있지만, 그래선 자신이 뭔가를 하는 게 아니라 저절로 열린 것처럼 보일 것이다.

    이왕 하는 것 보여주는 것도 중요했다.

    현석의 손에서 마력이 실처럼 뿜어져 나갔다. 수십 가닥의 마력이 아공간이 새겨진 벽으로 스며들었다.

    마력의 실 수십 가닥이 아공간에 걸린 보안을 하나하나 해체해 나갔다.

    순식간이었다. 비교적 높은 보안 수준이라고 해도 현석이 예전에 풀었던 마족의 아공간보다 훨씬 못한 수준이었다.

    보안을 풀어낸 현석은 아공간의 주인 인식 패턴을 손봤다. 그걸 그냥 없애 버릴 수도 있지만 그렇게 하지 않았다.

    다시 쓸 수 있는 걸 그렇게 해서 아예 망가뜨릴 필요는 없지 않은가.

    예전 현석이 마족의 아공간을 해체할 때도 같은 방식을 썼다. 그래서 그 아공간들은 현석의 아공간에 추가되어 새로운 방을 여러 개 추가해 주었다.

    어쨌든 현석은 그렇게 아공간을 풀어낸 다음 다시 한 걸음 물러났다. 그리고 고개를 돌려 크라시스 후작을 쳐다봤다.

    “이 아공간의 주인 인식을 다시 설정할 수 있는데, 해드릴까요?”

    그 말에 크라시스 후작의 눈이 번득였다. 만일 그렇게 된다면 가주로서 가지는 자신의 위상이 훨씬 더 높아질 것이다.

    “그게 가능한가? 가능하다면…… 날 주인으로 인식해주게.”

    현석이 씨익 웃으며 말했다.

    “복수로 설정하는 것도 가능합니다. 이런 방식의 아공간은 만에 하나를 대비하게 되어 있으니까요.”

    그래서 애초에 이 아공간에는 주인이 둘이었다. 하지만 셋으로 설정하는 것도 가능했다.

    현석은 그 모든 주인의 마력패턴을 지웠다. 이제 거기에 새로운 마력패턴을 새겨 넣으면 완료된다.

    아마 훨씬 더 보안이 튼튼해질 것이다. 현석만의 마력패턴이 가미될 테니까.

    크라시스 후작은 잠시 고민하다가 이내 결심을 굳힌 듯 말했다.

    “복수로 해주게. 나머지 하나는…… 저기 있는 제논 백작으로 하면 되겠군.”

    제논 백작의 눈이 커다래졌다. 그도 사람인지라 내심 기대는 하고 있었다. 하지만 크라시스 후작이 이렇게 선뜻 결정을 내려 버릴 줄은 몰랐다.

    “아버님…….”

    “내 너의 마음을 아주 잘 알고 있다. 네가 언제나 우리 가문을 위한 선택을 해 왔다는 건 내가 너보다 더 잘 알 것이다. 너라면 자격이 있다.”

    크라시스 후작의 말에 제논 백작은 말을 잇지 못했다.

    현석은 두 사람의 대화를 듣다가 말했다.

    “그럼 그렇게 설정하죠. 저 벽에 손바닥을 대시면 됩니다.”

    제논 백작과 크라시스 후작은 현석이 시키는 대로 벽에 다가가 손바닥을 올렸다.

    그러자 기이한 마력의 흐름이 일어나 두 사람의 손을 휘감았다. 그 마력은 팔을 타고 올라가 심장 어림에 자리를 잡았다.

    “방금 생긴 것이 아공간의 열쇠입니다. 앞으로는 두 분 외에는 누구도 저 아공간을 열 수 없을 겁니다.”

    그 말에 크라시스 후작은 묘한 눈으로 현석을 바라봤다. 마치 넌 이걸 열 수 있지 않느냐고 묻는 듯했다.

    현석은 그 시선을 무시하고 말했다.

    “아공간 안에 무엇이 있는지 확인해 보시죠. 이런 방식의 아공간은 안에서 직접 물건을 꺼내 일일이 확인하기 전에는 무엇이 들었는지 알 수 없습니다.”

    그 말에 두 사람은 퍼뜩 정신을 차리고 아공간으로 다가갔다.

    그리고 하나씩 안에서 물건을 꺼내기 시작했다.

    가장 먼저 나온 건 엄청나게 커다란 궤짝이었다. 척 보기에도 안에 보물이 가득 들어있는 듯했다.

    크라시스 후작이 꺼낸 궤짝을 제논 백작이 열어 확인했다. 아니나 다를까, 궤짝 안에는 금괴가 가득했다.

    그 정도 양이면 크라시스 가문의 3년치 예산은 될 듯했다.

    두 번째 나온 것 역시 궤짝이었다. 하지만 첫 번째 것과는 조금 모양이 달랐다.

    역시 그 안에는 보물이 아니라 다른 것이 들어 있었다. 그 안에 든 것은 책이었다.

    수십 권의 책이 차곡차곡 쌓여 있었다.

    아공간에 보관된 만큼 보관 상태도 아주 훌륭했다.

    제논 백작은 책 하나를 들어 제목을 확인하고는 헉소리를 냈다.

    그것은 검술서였다. 그것도 크란시스 가문의 잃어버린 검술서였다. 그 원본이 여기 있었다.

    아공간에서 다음 물건을 꺼내려던 크란시스 후작도 움직임을 멈추고 멍하니 제논 백작이 든 책을 바라봤다.

    두 사람은 잠시 먼저 책을 조금 살폈다.

    절반은 검술서였고, 나머지 절반은 마법서였다. 대충 앞부분만 훑어봐도 하나하나 굉장한 가치를 지닌 책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크란시스 후작은 책을 확인하다 말고 다시 일어났다. 지금은 이럴 때가 아니었다. 아직 아공간에는 꺼내지 않고 남은 물건이 있었다.

    다시 아공간으로 가서 안에 든 물건을 꺼냈다. 안에서 검과 갑옷을 비롯한 아티팩트들이 줄줄이 나왔다.

    아공간에서 꺼낸 모든 아티팩트들이 방에 보관된 그 어떤 아티팩트보다 짙은 마력을 품고 있었다.

    현석은 후작이 아티팩트를 꺼낼 때마다 심안으로 그 정보를 확인했다.

    하지만 현석이 보기에는 그 아티팩트들의 수준이 크게 별 볼일 없었다.

    물론 좋은 아티팩트인 건 맞다. 하지만 지금 일행이 갖춘 장비보다는 못했다.

    팀 메인퀘스트의 장비도 이제 보통이 아니었다. 그동안 퀸급 던전을 꾸준히 돌면서 하나하나 맞춘 장비들의 수준이 상당했다.

    물론 현석이 보기엔 아직 멀었지만 말이다.

    현석은 이번 여행이 끝나고 나면 본격적으로 팀 메인퀘스트의 장비를 맞춰줄 계획을 세워뒀다.

    아마 그 장비들을 착용하고 나면 지금보다 훨씬 강해질 것이다.

    팀 메인퀘스트는 더 강해져야 한다. 앞으로 현석과 따로 움직일 일이 많을 텐데, 그때 제대로 활동하려면 지금 정도로는 아직 많이 부족했다.

    어쨌든 그렇게 장비들 몇 가지가 나온 다음 아공간에 있던 마지막 물건이 나왔다.

    그것은 반짝이는 팔찌였다. 빙 둘러 붉은 보석이 촘촘히 박혀 있었는데, 왠지 보기만 해도 뜨거운 열기가 느껴지는 듯했다.

    현석은 눈을 빛내며 그것을 확인했다. 크란시스 가문의 보물이 바로 이것이었다.

    [인페르노]

    인페르노라니. 이름부터 무시무시했다. 현석은 흥미진진한 눈으로 심안에 집중해 정보를 확인했다.

    [지옥의 불길을 소환해 적을 말살한다. 한 달 동안 모은 지옥의 열기를 응축해 단일 개체의 적을 공격하는 스킬 인페르노 애로우와 다수의 개체를 공격하는 스킬 인페르노 스톰 두 가지를 쓸 수 있다. 각각 한 달에 한 번씩 쓸 수 있다. 현재 인페르노 애로우 사용가능. 인페르노 스톰 사용가능]

    설명을 확인한 현석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어떻게 달려든 마족을 죽일 수 있었는지도 충분히 알 수 있었다.

    인페르노라는 아티팩트에 담긴 마력의 양은 그야말로 무시무시했다.

    게다가 그 모든 마력이 불속성을 갖고 있었다. 그러니 저 정도 설명에 걸맞은 위력을 낼 수 있는 것이다.

    두 가지 종류의 스킬을 쓸 수 있으니 대규모의 적이든 단일의 적이든 둘 다 대응이 가능했다.

    정말 쓸모 있는 아티팩트였다.

    크란시스 후작과 제논 백작은 인페르노를 보며 격동에 몸을 떨었다.

    이것에 대해서는 가문 대대로 내려오는 이야기들이 있기에 사용법이야 벌써 익숙했다.

    이걸 차면 자연스럽게 힘이 생긴다. 그리고 그 힘을 자유롭게 풀어내면 되는 것이다.

    크란시스 후작은 현석을 향해 한쪽 팔을 배에 대며 정중히 허리를 숙였다.

    가문의 숙원을 해결해준 은인에게 보내는 진심어린 인사였다.

    제논 백작 역시 후작과 마찬가지로 인사했다.

    “정말 고맙소. 이 은혜는 우리 가문 대대로 결코 잊지 않을 것이오.”

    크란시스 후작이 그렇게 약속했다.

    “하루만 머물다 가시면 안 되겠소? 내 약속의 징표를 만들어주고 싶소. 지도와 정보를 원한다고 하셨는데, 그것도 하루 안에 다시 준비해 드리고 싶소.”

    현석은 고개를 끄덕였다. 하루 더 투자해서 더 좋은 지도와 정보를 얻을 수 있다면 충분한 가치가 있었다.

    현석은 자신이 구해준 모든 사람들과 이종족들을 한 번씩 만나는 것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하기 시작했다.

    어쨌든 미래를 생각하면 조력자는 많으면 많을수록 좋았다.

    “자, 이제 돌아가서 좀 쉬십시다. 내일 파티를 개최할 테니 꼭 참석해 주시면 좋겠습니다. 하하하하.”

    크란시스 후작은 평소의 그답지 않게 크게 감정을 드러내며 웃었다.

    그 정도로 오늘의 일은 일대 사건이었다.

    후작은 금괴가 든 궤짝을 다시 아공간에 넣고, 책이 든 궤짝만 제논 백작에게 들라고 지시한 다음 그곳에서 나갔다.

    현석 일행도 크라시스 후작을 따라 밖으로 나갔다.

    그리고 별채의 숙소로 돌아갔다.

    그날은 그렇게 지나가고 다음 날이 되었다.

    < 제논 백작 3 > 끝

    ⓒ 김강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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