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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눈 뜨고 레벨업-206화 (206/326)
  • < 제논 백작 2 >

    제논 백작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장내에는 한바탕 폭풍이 몰아쳤다.

    “형님! 지금 무슨 말씀을 하시는 겁니까!”

    쥬크가 가장 먼저 나서서 소리쳤다. 그는 이것이 제논을 깎아내릴 기회라고 여긴 것이다.

    “그것은 우리 가문의 비밀스러운 일입니다! 그걸 외부인에게 공개하다니요!”

    제논 백작은 제논 백작대로 한 치도 물러서지 않았다.

    “공개할 만하니까 공개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동안 이 비밀을 외인에게 한 번도 공개 하지 않은 건 아니지 않느냐!”

    “그때는 충분히 부탁할 만하니까 그런 거 아닙니까!”

    그 말에 제논 백작이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내 말이 그 말이다. 여기 이분은 충분히 부탁할 만한 분이시다.”

    물론 아직 이름은 물론이고 그저 자신을 구해주고 인장을 찾아준 은인이라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이지만 말이다.

    “그동안은 충분이 알려도 될 만한 분들께 알린 거 아닙니까! 그동안 단 한 번이라도 우리 가문의 비밀이 새 나간 적 있습니까?”

    쥬크는 드디어 제대로 꼬투리를 잡았다는 듯 제논 백작을 잡아 먹을 것처럼 노려봤다.

    “반면, 오늘 형님의 손님은 어떻습니까? 형님, 정말로 확신하실 수 있습니까? 우리 가문의 비밀이 지켜질 거라고요?”

    제논 백작은 쥬크의 공격에 잠시 그를 쳐다봤다.

    쥬크는 제논 백작의 표정이 너무나 담담해서 흠칫 놀랐다. 아니, 그냥 담담한 게 아니라 미소까지 짓고 있는 듯했다.

    제논 백작은 쥬크를 한동안 응시하다가 고개를 돌려 가주인 크란시스 후작을 바라봤다.

    “우리 가문의 비밀을 더 이상 지킬 필요가 없습니다.”

    그 말에 좌중이 술렁였다. 각을 세우고 말다툼을 하던 쥬크와 지켜보던 크란시스 후작 말고 나머지 사람들도 놀란 눈으로 제논 백작을 바라보며 서로 수군거렸다.

    제논 백작은 크란시스 후작이 막 뭐라고 말하려는 순간, 호흡을 치고 나가 말을 꺼냈다.

    “이분이 도와주시기만 한다면 말입니다.”

    장내의 모든 시선이 현석에게로 향했다.

    현석은 제논 백작의 말과 행동을 가만히 지켜보고 있다가 피식 웃었다.

    “장담은 못하겠지만 봐줄 수는 있소.”

    현석의 말에 제논 백작이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나머지 사람들은 못미더운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호언장담을 해도 믿어줄까 말까인데 저렇게 한 발을 빼는 사람을 어떻게 믿고 일을 맡긴단 말인가.

    현석은 크란시스 후작을 슬쩍 쳐다봤다. 그의 표정은 시종일관 조금도 움직이지 않았다. 하지만 눈빛이 변하는 건 아무리 그가 노회한 정치인이라 해도 숨길 수 없었다.

    더구나 현석은 그런 미세한 차이를 알아차리는 데에 아주 특별한 능력을 갖고 있었다.

    크란시스 후작의 눈빛이 끊임없이 변하고 있었다. 현석은 그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대충 알아차렸다.

    “해보고 안 되면 다 죽여 버리겠다거나 그런 생각으로 맡길 생각이라면 안 하는 게 좋을 겁니다.”

    “뭣이! 지금 그걸 말이라고 하는 것이냐!”

    쥬크가 크란시스 후작 대신 호통을 치며 현석을 노려봤다. 그의 눈빛이 이글이글 타올랐다. 당장에라도 목을 쳐 버릴 듯한 기세였다.

    현석은 아주 간단한 방법으로 자신의 말을 증명했다.

    화아악!

    막대한 마력이 왈칵 쏟아져 나왔다. 현석이 내뿜은 마력은 엄청나게 무거웠다.

    식당이 현석의 마력으로 꽉 채워지는 데에는 숨 한 번 쉴 정도의 시간도 필요치 않았다.

    “헉!”

    쥬크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그는 이를 악물고 현석의 마력에 대항하려 했다. 하지만 그러면 그럴수록 마력이 주는 압력이 점점 더 커져갔다.

    이내 쥬크가 한 쪽 무릎을 꿇었다. 도저히 마력이 주는 압력을 이겨낼 수가 없었다.

    특별히 물리적인 힘을 가하는 게 아닌데도 그랬다.

    크란시스 후작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그의 몸에도 무지막지한 압력이 가해지고 있었다. 하지만 견딜 만했다.

    그가 견딜 만한 것이 현석의 힘이 모자라서가 아님을 잘 알고 있었다.

    지금 식당을 장악한 마력은 현석에게 반감을 가지고 대항하려는 사람에게 더 큰 힘을 집중하고 있었다.

    이렇게 마력의 형질을 자기 마음대로 조절할 수 있다는 것 자체가 대단한 일이었다.

    제논은 놀란 눈으로 현석을 바라봤다.

    사실 그림자 인간들을 혼자 모두 잡았다는 말을 들었을 때는 그냥 대수롭지 않게 넘어갔다.

    그때는 거기에 대한 의미를 생각할 정신적 여유가 없었다. 인장을 되찾는 일도 중요했고 말이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그게 얼마나 대단한 일인지 뼈저리게 마음에 와 닿았다.

    그리고 그 힘의 일부를 이렇게 확인했다.

    제논이 크란시스 후작을 바라보며 말했다.

    “이건 이분이 가진 진짜 힘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닙니다. 그러니…… 현명한 판단 부탁드립니다.”

    제논의 말에 크란시스 후작은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으니 그만 하게. 내 애초에 그런 생각을 하지 않았네. 그러니 이제 그 정도면 충분하네.”

    그 말이 끝남과 동시에 식당을 메웠던 마력이 거짓말처럼 사라져 버렸다.

    쥬크는 피나 날 정도로 이를 악물고는 무시무시한 눈으로 현석을 노려봤다.

    여전히 한 쪽 무릎을 꿇은 채로 다시 일어날 생각도 하지 못했다.

    자신만 꼴사나운 모습을 보이고 말았다. 제논 백작도 아무렇지도 않게 서 있고, 크란시스 후작도 별다른 충격을 받지 않은 것 같은데, 오직 자신만 무릎을 꿇었으니 말이다.

    더 짜증나는 것은 나머지 가족들, 여동생이나 어머니도 아무렇지 않게 그 마력을 견뎌냈다는 점이었다.

    ‘왜 나만!’

    쥬크가 현석을 무시무시한 눈으로 노려보는 데에는 그 부분에 대한 원망 때문이었다.

    현석이 애초에 의도적으로 자신만 노렸다고 생각한 것이다.

    하지만 현석은 쥬크에게 눈길 한 번 주지 않았다. 솔직히 관심이 아예 없었다.

    현석은 제논 백작을 보며 말했다.

    “일단 확인부터.”

    제논 백작이 크란시스 후작을 바라봤다. 그러자 크란시스 후작이 고개를 끄덕였다.

    “안내해 드려라.”

    “안 됩니다, 아버님!”

    쥬크가 외쳤지만 식당에 있는 누구도 그의 말을 귀담아 듣지 않았다.

    제논 백작이 앞장서서 밖으로 나가자, 현석이 그 뒤를 따랐다.

    그리고 그때까지 지금 무슨 일이 벌어지는 건지 몰라 이리저리 눈치만 살피던 현석의 일행이 황급히 그 뒤를 따라갔다.

    크란시스 후작은 아직도 일어나지 못하고 있는 쥬크를 못마땅하게 한 번 쳐다본 후 식당에서 나가 버렸다.

    쥬크는 그 모습에 또 한 번 이를 갈았다.

    * * *

    “이곳이네.”

    제논 백작이 안내한 곳은 저택 깊숙한 곳에 있는 지하실의 끝이었다.

    저택에는 지하실이 몇 군데 존재했는데, 그 중 가장 큰 지하실이자, 지하 감옥으로 쓰는 곳의 끝부분에 커다란 강철문이 있었다.

    제논 백작이 안내한 장소는 바로 그 강철문 앞이었다.

    지하감옥의 끝에 있기에 곳곳에 간수 역할을 하는 병사와 기사들이 눈을 번득이며 지키고 있었다.

    애초에 지하실로 들어가는 입구의 경계도 삼엄하기 그지없었다.

    하지만 그런 모든 병력과 경계보다 이 강철문 하나가 더 뚫기 어려운 관문이었다.

    크란시스 가문의 피가 섞이지 않은 사람에게는 말이다.

    하지만 크란시스 가문의 피가 섞인 사람이라면 아주 손쉽게 문을 열 수 있었다.

    제논 백작은 잠시 기다렸다. 혼자서 이 문을 열고 들어가선 안 된다. 크란시스 후작이 보는 앞에서 문을 열고 함께 들어가야 한다.

    어차피 가주인 크란시스 후작이 없다면 안에 들어가 봐야 소용이 없었다.

    가주의 인장이 이 다음 관문의 열쇠였으니까.

    현석은 그 앞에 서서 마력을 투사해 강철문의 구조와 그 뒤에 있는 관문의 구조, 그리고 그 다음에 무엇이 있는지를 천천히 파악했다.

    스멀스멀 흘러나오는 현석의 마력이 강철문을 촘촘히 뒤덮었다.

    현석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 강철문의 원리를 대번에 파악한 것이다.

    크란시스 가문의 피에 새겨진 특별한 마력패턴이 이 강철문에 새겨진 마력패턴과 맞아 떨어질 경우 문이 열리게 설계되어 있었다.

    사실 그건 현석 정도 되는 사람에게는 별 의미 없는 관문이었다.

    현석은 그 정도 마력 패턴은 눈 깜짝할 새에 만들어 낼 수 있었다.

    더구나 이런 식으로 마력패턴을 짜맞춰 여는 거라면 더 간단했다. 굳이 마력패턴을 새로 만들어내지 않고 맞물리는 부분만 채워넣으면 그만이니까.

    지금 당장에라도 마력패턴을 짜맞춰 문을 열 수 있었지만 그렇게 하지 않았다. 그래 봐야 일이 복잡해지기만 할 뿐이니까.

    두 번째 관문 역시 비슷한 방식으로 이루어진 문이었다. 다만 맞춰야 하는 마력패턴이 크란시스 가문의 인장이라는 것이 다를 뿐이었다.

    다만, 방어력이 훨씬 뛰어난 문이었다. 상당히 복잡하고 강력한 마법진이 문에 깃들어 있었다.

    어설픈 힘으로 문을 열려고 하다가는 그대로 통구이가 되어 버릴 수 있는 위험한 마법진이었다.

    물론 현석에게는 별 거 아니었다. 이 자리에 서서 두 번째 관문을 해체하고 마법진을 없애 버리라고 한다면 고개 한 번 끄덕일 시간에 그렇게 할 수 있을 것이다.

    현석은 새삼 자신의 마력 컨트롤 능력이 엄청나게 발전했다는 걸 깨달았다.

    마력의 주인 타이틀을 처음 얻었을 때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성장했다.

    이대로 조금만 더 성장하면 새 타이틀을 얻을 수도 있을 것 같았다.

    ‘과연 어떤 타이틀이 나올까?’

    그리고 그 타이틀의 효능은 어떤 걸까? 어쩌면 상상을 초월하는 힘을 얻게 될지도 모른다.

    지금 당장 마력의 주인이 가지는 진짜 힘을 찾아가는 도중인데도 이렇게 강력한데, 상위의 타이틀에는 대체 어떤 힘이 깃들어 있을지 상상만으로도 소름이 돋았다.

    어쨌든 현석은 두 번째 관문 뒤에 무엇이 있는지 파악해봤다. 그곳은 이곳 크란시스 가문의 보물창고 같았다.

    각종 아티팩트들이 진열되어 있었다. 그리고 그 중앙 끝부분 벽에 새겨진 아공간이 느껴졌다.

    ‘저게 아까 말한 그 가문의 비고인 모양이군.’

    제논 백작이 원한 건, 바로 그 가문의 비고를 열어 달라는 것이었다.

    크란시스 가문의 비고는 사실 이곳 크락실리아에서 제법 유명했다.

    그 비고 안에는 엄청난 재화가 넘쳐나고, 이 도시에 위기가 닥쳤을 때, 그걸 막아낼 수 있는 어마어마한 아티팩트가 보관되어 있다고 한다.

    하지만 지금까지 그걸 확인한 사람은 이곳 크락실리아가 처음 생겨났을 때 함께 있던 자들뿐이었다.

    도시가 처음 세워졌을 때, 이곳의 모든 인간을 말살하겠다고 달려든 대마족 아크둠을 크란시스 가문의 초대 가주가 그 특별한 아티팩트를 이용해 단숨에 날려 버렸다고 한다.

    그 뒤로 크란시스 가문은 도시의 성벽을 책임지는 막중한 권력을 손에 넣을 수 있었다.

    도시의 성벽을 책임진다는 얘기는 군권을 갖고 있다는 뜻이기도 했다.

    즉, 이곳 크락실리아에서 가장 힘이 강한 가문이 바로 크란시스 가문이었다.

    하지만 누구도 거기에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다.

    크락시스 가문에는 도시의 위기가 닥쳤을 때, 그것을 막아낼 비밀무기가 있었으니까.

    그래서 문제가 생겼다.

    가문의 비고를 아무도 열 수 없었으니까.

    크락시스 가문의 비고를 열 수 있었던 사람은 초대 가주 단 한 명뿐이었다.

    외부 인사를 초빙해 여러 번 시도를 해봤지만 누구도 성공하지 못했다.

    그 대부분은 은밀히 죽였다. 소문이 퍼지지 않게 하려면 당연한 일이었다.

    그렇게 할 수 없을 정도의 힘을 가진 자에게는 막대한 선물과 함께 어길 수 없는 맹세를 받아냈다.

    그것이 지금까지 크란시스 가문이 비밀을 지켜낸 방식이었다.

    크란시스 후작은 지하감옥의 끝으로 걸어가며 이번엔 두 번째 방법을 쓸 수밖에 없겠다고 생각했다.

    그의 눈에 강철문 앞에 서 있는 사람들이 보였다. 그는 그걸 보곤 눈살을 찌푸렸다.

    ‘수가 너무 많군.’

    입을 막아야 하는 사람의 수가 많아지는 건 달갑지 않은 일이다. 돈을 많이 쓰든 피를 많이 보든 어쨌든 많으면 많을수록 힘드니까.

    크란시스 후작이 도착하자, 제논이 앞으로 나섰다.

    “일단 문부터 열겠습니다.”

    강철문 양쪽에 달린 손잡이를 제논이 꽉 움켜쥐었다. 손바닥이 따끔했다. 문을 여는 절차였다. 가문의 피를 확인하는 것이다.

    끼기기기기긱!

    강철문이 천천히 열리기 시작했다.

    문이 활짝 열리자 짧은 복도가 있었다. 그리고 그 복도 끝에 또 하나의 문이 있었다.

    재질을 알 수 없는 문이었다. 상당히 복잡한 마법진이 문 전체를 뒤덮고 있었다.

    이번엔 크란시스 후작 차례였다.

    크란시스 후작은 문으로 다가가 가문의 인장을 문 한가운데 난 홈에 꾹 눌러 비틀었다.

    쿠구구구구궁!

    문이 좌우로 천천히 열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내부가 공개되었다. 현석이 파악한 대로 아티팩트들이 보기 좋게 진열되어 있었다.

    그리고 금괴나 보석들도 한쪽에 잘 정리되어 있었다.

    한 마디로 크란시스 가문의 보물창고 같은 곳이었다.

    크란시스 후작은 현석 일행의 반응을 보며 눈을 빛냈다. 이건 좀 의외였다.

    현석 일행 중에서 내부의 보물을 보고 눈빛이 흔들리는 사람이 한 명도 없었다.

    금괴나 보석은 물론이고 아티팩트를 보고서도 아무도 큰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그들의 관심은 오로지 현석에게 가 있는 듯했다.

    현석은 안으로 들어가 가장 끝에 있는 벽 앞에 섰다.

    그냥 아무것도 없는 단순한 벽이었다. 하지만 그 벽 자체가 아공간 아티팩트라는 건 아는 사람만 아는 비밀이었다.

    “이걸 열면 되는 겁니까?”

    현석이 크란시스 후작을 보며 물었다.

    크란시스 후작은 속으로 혀를 내둘렀다. 말도 안 했는데 저기에 비고가 있다는 사실을 대체 어찌 알았단 말인가.

    ‘확실히…… 뭔가 있긴 있단 말이로군.’

    지금까지 저 자리에 비고가 있다는 사실을 알아낸 사람은 현석을 제외하면 딱 두 명이었다.

    하지만 그 둘조차 이렇게 단숨에 알아차리진 못했다.

    한동안 비고 안을 이리저리 살펴본 다음에야 간신히 알아차렸다.

    크란시스 후작의 마음속에 희망의 불씨 하나가 미약하게 타올랐다.

    < 제논 백작 2 > 끝

    ⓒ 김강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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