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두눈 뜨고 레벨업-205화 (205/326)
  • < 제논 백작 1 >

    “그런데 그 지도가 꼭 필요해? 그냥 대충 알아보고 날아서 위치 파악하면 안 되나?”

    라이언이 투덜거렸다. 하지만 그도 그게 불가능에 가깝다는 건 알고 있었다.

    하늘에서 위치를 파악하기엔 이곳 던전의 규모가 너무 컸다.

    전체적인 모양을 확인할 수는 있겠지만, 그 순간 이미 어디에 무엇이 있는지는 확인이 불가능하다.

    아무리 시력이 좋은 현석이라 하더라도 말이다.

    높은 항공에서 우리나라 사진을 찍었다고 어디에 뭐가 있는지 알아내는 게 쉽지 않은 것처럼 말이다.

    이곳 호리병 아랫부분 던전은 한국 보다 훨씬 넓었다. 그러니 제대로 된 지도를 구하지 않으면 원하는 걸 얻는 데 시간이 얼마나 걸릴지 알 수 없다.

    “지도는 그렇다치고…… 저 제논 백작 과연 믿을 수 있을까?”

    라이언은 의심스러운 표정으로 고개를 갸웃거렸다.

    제논 백작을 현석이 구해준 건 맞다. 또한 현석은 그림자 인간의 금고를 열어 그의 장비와 인장까지 찾아주었다.

    당시 대부분의 인간들이 찾아간 장비는 제법 쓸 만한 아티팩트였다.

    그러니 이 정도 도움은 사실 당연했다. 그런데도 왠지 제논 백작을 선뜻 믿기가 어려웠다.

    이건 그저 감이었다. 라이언의 감 말이다.

    “제가 보기엔…… 좋은 사람 같아 보이는데, 아닌가요?”

    류지혜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사실 류지혜나 라이언이나 이곳의 말을 모르기 때문에 그저 분위기가 표정으로 파악하는 수밖에 없었다.

    진실 된 대화를 해봐야 더 정확히 알 수 있을 텐데, 그게 안 되니 좀 답답하긴 했다.

    “그런데 대체 여기 말은 언제 익히신 거예요?”

    류지혜가 신기한 눈으로 현석을 보며 물었다. 그러자 현석 옆에 있던 라이언도 의미심장한 표정으로 질문을 덧붙였다.

    “너…… 처음부터 여기 사람들이 살고 있는 거 알았지?”

    현석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

    말이야 원래 그냥 할 수 있게 되었다. 그걸 논리적으로 설명하는 건 불가능했다. 아니, 한 가지 방법이 있긴 했다.

    “스킬이다.”

    “스킬? 말을 알아듣게 해주는 스킬인가? 그거 참 편리하군.”

    현석이 고개를 저었다.

    “그냥 말을 알아듣게 해주는 게 아니라 모든 언어에 제약이 사라지는 스킬이다.”

    그 말에 라이언이 경악했다.

    “그게 뭐야! 무슨 그런 사기 같은 스킬이 있어!”

    현석은 그런 라이언을 빤히 쳐다보며 말했다.

    “난 플레이어라는 존재 자체가 사기인 거 같은데. 아닌가?”

    그렇게 말하면 또 할 말이 없지 않은가.

    라이언은 입맛을 쩝 다시고는 다시 초롱초롱한 눈으로 현석을 바라보며 물었다.

    “그럼 그 다음 질문에 대한 답은? 너 여기에 사람이 살고 있다는 거, 원래부터 알고 있었지? 이 화이트홀에는 와본 적도 없으면서 말이야.”

    숲의 종족과의 관계도 그렇고, 라이언이 보기에 현석은 정말 신비하고 비밀이 많은 사람이었다.

    “솔직히 말해. 그래서 뭔가 따로 준비한 거 있지? 예를 들면…….”

    라이언은 갑자기 뭔가가 떠올랐다는 듯 눈을 크게 뜨며 손가락을 딱 튀겼다.

    “금!”

    라이언이 환한 표정으로 현석을 바라보며 외쳤다.

    “금이야! 금! 너 미리 금 좀 준비했지?”

    이 던전세상 안에서 통용되는 화폐는 금과 은이었다. 그러니 금을 충분히 준비해 왔다면 정말 유용할 것이다.

    처음에는 미리 얘기 안 해줬다고 투덜거렸지만 생각해보니 미리 얘기해줄 필요가 없으니 안 해준 것이 분명했다.

    왜? 현석이 알아서 필요한 만큼 준비했을 테니까.

    “아무튼 그것도 그래. 금과 은만 통용된다는 건 또 어떻게 안 거야? 이거…… 비밀이 너무 많은 거 아냐? 같은 동료끼리 말이야.”

    라이언이 당당하게 정보를 요구했다.

    하지만 현석은 딱히 그에게 말해줄 정보가 없었다. 지금 그가 아는 정도가 전부였다.

    이곳의 화폐는 금과 은이라는 것 말이다.

    현석은 라이언을 보며 진지하게 말해주었다.

    “일단 말부터 익혀.”

    라이언이 입을 꾹 다물었다. 그냥 듣기만 해도 머리가 어지러워질 정도로 복잡한 언어였다.

    한데 저걸 배우라고? 때려 죽여도 못 할 것 같았다.

    현석이 일행을 슥 둘러봤다. 한 명의 예외도 없이 고개를 돌렸다.

    심지어 류혜연마저 그랬다. 아니, 류혜연은 오히려 더했다.

    그녀는 일행 중에서 현석을 제외하면 가장 머리가 뛰어났다. 그렇기에 누구보다 먼저 파악했다.

    이곳의 인간들이 쓰는 언어는 정말로 어렵다는 것을 말이다.

    “언어를 머리에 새겨주는 스킬 같은 건 없나?”

    라이언이 투덜거렸다. 그런 게 있으면 얼마를 주고서라도 구입할 것이다.

    어쨌든 얘기는 다시 원점으로 돌아왔다.

    “그래서 제논 백작인지 뭔지를 끝까지 믿고 기다리겠다는 거야?”

    라이언의 물음에 다들 눈을 빛내며 현석을 바라봤다.

    어쨌든 이 일행의 리더이자 결정권자는 현석이었다.

    현석이 하겠다고 하면 아무리 위험한 일이라도 할 것이고, 안 하겠다고 하면 아무리 큰 이득이 걸린 일이라도 안 할 것이다.

    그것이 이곳에 있는 모든 사람의 뜻이었다.

    “일단 기다려. 어떤 의도가 있는 건 분명한데, 악의를 가지진 않은 것 같으니까.”

    현석이 내린 결론에 다들 고개를 끄덕이고 수긍했다. 하지만 의도라는 단어가 마음에 걸렸다.

    “그나저나…… 이 시녀들 좀 어떻게 하면 안 되나? 시중은 무슨 시중이야.”

    라이언이 투덜거렸다. 이 정도면 사실 시중이라기보다는 감시를 위한 거 아니겠는가.

    “어차피 우리가 하는 말도 못 알아들을 텐데 무슨 상관이야.”

    “하긴.”

    다들 고개를 끄덕였다. 언어가 다른 것이 이럴 때는 또 도움이 된다.

    물론 이쪽의 대화가 저쪽에 흘러들어가지 않는 게 지금 이 상황에서 어떤 도움이 될지는 알 수 없지만 말이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갔다.

    * * *

    “난 이게 제일 신기해. 밤낮이 있는 거. 이거 던전이면 그냥 갇힌 세상 아냐? 대체 어떻게 밤낮이 있을 수 있지?”

    “다른 화이트홀은 안 그런가요?”

    류지혜가 눈을 빛내며 묻자, 라이언이 고개를 저었다.

    “내가 아는 화이트홀 중에는 그런 거 없어. 그냥 블랙홀이랑 똑같아. 마수가 다시 생겨나지 않는 거 빼고는.”

    라이언은 그렇게 설명하며 별채를 나섰다.

    그들은 이 가문의 만찬에 초대되어 가는 중이었다.

    “여기 사람들은 뭘 먹고 사는지 궁금하긴 하네요. 배도 좀 고프고.”

    아닌 게 아니라, 현석 일행은 던전에 들어온 이후 먹은 게 거의 없었다.

    군것질 거리를 잔뜩 싸오긴 했지만 선뜻 손이 가지 않아 꺼내지도 않았다.

    그러니 이제 곧 먹게 될 저녁 식사가 던전에 들어와서 먹는 거의 첫 음식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사실 좀 궁금하긴 했다. 과연 던전에서도 제대로 된 곡물을 생산할 수 있을까? 가축을 키워 잡아먹을 수 있을까?

    여긴 밤낮이 존재하긴 해도 진짜 태양이 뜨는 건 아니었다. 그 비슷한 역할을 하는 다른 무언가가 있을 뿐이었다.

    아니, 어쩌면 그저 주변을 환하게 비추는 밝은 빛만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게다가 지하로 얼마나 존재하는지도 모른다. 어쩌면 땅을 조금만 파내려가도 금방 끝이 나타날지도 모른다.

    ‘뭐…… 하늘이 높은 걸 보니 땅도 깊긴 하겠지만.’

    어쨌든 이 화이트홀은 하나하나 겪고 생각할 때마다 궁금한 것투성이였다.

    뭐든 궁금하고 뭐든 알고 싶었다.

    일행의 시선이 현석에게로 향했다. 왠지 현석은 그 모든 것에 대한 답을 알고 있을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이런 저런 생각을 하며 걷는 사이 어느새 저택 본관에 도착했다.

    그들을 안내한 시녀들이 정중히 인사를 했다. 아마 그들은 본관에는 들어갈 수 없게 되어 있는 모양이었다.

    현석 일행은 본관에서 나와 맞이하는 집사의 안내로 들어가 식당을 찾아갔다.

    본관 안쪽으로 쭉 들어가니 넓은 식당이 나타났다. 제논 백작과 그의 가족들이 먼저 식탁에 자리를 잡고 앉아 있었다.

    제논 백작이 자리에서 일어나 일행을 맞이해 주었다.

    몇 마디 인사가 오가고 시녀들이 다가와 일행을 각자의 자리에 안내해 주었다.

    시녀들이 하나부터 열까지 다 시중을 들어주니 먹기에는 편했지만, 마음은 불편한 식사가 계속 이어졌다.

    음식은 상당히 훌륭했다. 과연 크락실리아에서 힘깨나 쓰는 가문의 만찬다웠다.

    다만, 만찬이 끝나도록 대화는 거의 없었다.

    이런 분위기면 보통은 주눅이 들거나 불안하거나 해야 하는데, 현석 일행에게는 그런 게 전혀 없었다.

    사실 그들에게 이곳은 그저 던전의 일부일 뿐이었다.

    받아들이는 방식 자체가 이곳에서 사는 주민들과는 다를 수밖에 없었다.

    만일 이런 일이 던전 밖에서 벌어졌다면 얘기가 좀 달라졌을지도 모른다.

    어쨌든 그런 현석 일행의 모습을 제논 백작을 비롯해 그의 가족들로 보이는 사람들이 관심 없는 척하면서도 눈을 빛내며 지켜보고 있었다.

    이내 만찬이 끝나가고 있었다.

    현석 일행은 배부르게 음식을 먹어치웠다. 예의 같은 건 전혀 신경도 쓰지 않았다.

    그저 시중을 받으며 자유롭게 식사를 즐겼다.

    사실 먹으면서 몇 마디 대화도 나누고 싶었지만 왠지 분위기가 엄숙해서 그러지는 못했다.

    그래서 더 먹는 데 열중했다. 덕분에 식탁은 빈접시가 가득했다.

    “놀라운 식성이군.”

    가장 먼저 입을 연 것은 제논 백작의 아버지이자 이곳 크란시스 가문의 주인인 크란시스 후작이었다.

    나머지 사람들은 그가 입을 열기만을 기다렸다는 듯 한 마디씩 꺼냈다.

    다 같은 얘기였다. 현석 일행의 식성이 대단하다는 것과 예의가 없다는 걸 비꼬는 얘기였다.

    물론 그 말을 알아들은 건 현석뿐이기에 다들 그저 눈만 멀뚱멀뚱 뜨고 있었다.

    “제국어를 못 한다는 게 사실이었군요.”

    제논 백작의 동생인 쥬크가 슬쩍 웃으며 말했다. 다른 사람은 그냥 그런가보다 하고 넘어가는데 유독 그가 하는 말에 가시가 많았다.

    “말을 가려 해라. 내 은인이시다.”

    “아, 그랬지요. 제가 깜빡 했습니다. 워낙 어울리지 않는 분들이셔서 미처 생각이 거기까지 닿지 않았습니다.”

    제논 백작은 그런 쥬크의 모습을 보며 묘한 미소를 지었다.

    그 미소를 본 쥬크가 발끈했다. 마치 자신을 아래로 깔아보는 듯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그것 때문에 더 나서지는 않았다.

    그저 속으로만 이를 갈았을 뿐이었다.

    “이제 식사 대접도 했으니 할 만큼 하신 것 같은데…… 아닙니까?”

    쥬크는 그렇게 말하며 제논 백작을 타오르는 듯한 눈으로 노려봤다.

    두 형제가 이렇게 기 싸움을 벌이는데도 그들의 아버지인 크란시스 후작은 그저 그 광경을 가만히 지켜보기만 했다.

    “쥬크, 너무 무례하구나. 그러다가 나중에 크게 후회할지도 모른다.”

    쥬크가 피식 웃었다. 후회라니. 그게 2년이나 가문에서 나가 떠돌아다니다가 이제야 돌아와서 자신의 자리를 위협하고 있는 사람이 할 말인가?

    ‘내가 그동안 이 기반을 닦으려고 얼마나 발버둥을 쳤는데!’

    그렇게 2년 동안 개처럼 노력해서 간신히 가문의 인정을 받아냈다.

    한데 제논 백작은 고작 검 몇 번 휘두른 걸로 그동안의 공백이 마치 없었던 일인 것처럼 자연스럽게 가문에 녹아들었다.

    그러니 쥬크가 제논을 곱게 볼 수 없는 게 당연했다. 더불어 그런 제논을 구해줬다는 현석 일행도 마찬가지였다.

    물론 꼭 그게 아니더라도 제논의 손님이니 고까운 건 당연했지만 말이다.

    그리고 현석은 그런 두 사람의 관계에는 아무 관심이 없는 것처럼 식사를 마무리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 행동에 다들 어이없는 표정으로 현석을 쳐다봤다.

    현석은 제논 백작을 보며 나름 정중하게 말했다.

    “저녁은 감사히 먹었소. 이제 받을 것을 받고 떠났으면 하는데. 딱히 우릴 반겨주는 것 같지도 않고.”

    현석의 말에 쥬크의 표정이 대번에 굳었다. 저건 분명히 자신보고 들으라고 한 얘기다.

    쥬크가 무시무시한 눈으로 현석을 노려봤다. 하지만 현석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아니, 그냥 그렇게 가면 내가 너무 미안하지 않소. 조금 더 머물면서 여독도 풀고…….”

    “여독 따위 없소. 그러니 약속한 것만 받으면 바로 떠나겠소.”

    쥬크가 벌떡 일어나 현석을 노려보며 소리치듯 말했다.

    “대체 약속한 게 뭔데 이리도 무례하게 구는 것이냐!”

    현석은 그런 쥬크를 보며 피식 웃었다.

    “누가 누구한테 무례를 따지는지 모르겠군. 세밀히 그려진 지도와 어둠의 숲, 마수왕의 탑에 대한 정보를 받기로 했소.”

    현석의 말에 쥬크가 움찔 했다. 그리고 묘한 표정으로 제논 백작을 바라봤다.

    “형님, 설마…… 그런 걸 약속하셨습니까? 지키지도 못할 약속을 왜 하신 건지 모르겠군요.”

    하지만 쥬크의 말에도 제논 백작은 당당하기 그지없었다.

    “지킬 수 있다.”

    쥬크의 입꼬리가 슬쩍 올라갔다. 명백한 비웃음이었다. 그는 아버지인 크란시스 후작을 바라봤다. 어서 판결을 내려달라는 뜻이었다.

    크란시스 후작의 얼굴에 떠오른 표정은 호기심과 기대감이었다.

    “네가 아무 생각 없이 그런 말을 했을 것 같진 않고…… 무슨 생각이냐?”

    제논 백작은 크란시스 후작의 말에 대답하는 대신, 현석을 보며 말했다.

    “내 부탁을 하나만 들어주겠소? 그대에겐 별로 어렵지 않은 일일 거요.”

    현석이 피식 웃었다. 감춰둔 꿍꿍이가 이거였던 모양이다.

    “애초에 조건 따위가 걸린 약속이었는지 몰랐군.”

    “그건 미안하게 되었소. 하지만 반드시 그에 대한 대가를 만족할 정도로 치르겠다고 약속하겠소.”

    현석은 대충 견적을 냈다. 제논이 뭘 부탁할지도 충분히 예상할 수 있었고 말이다.

    다들 흥미진진한 눈으로 현석과 제논을 바라보고 있었다.

    현석의 눈빛과 표정을 세심히 살피던 제논 백작이 반색하며 입을 열었다. 허락의 기미를 읽은 것이다.

    “제가 드릴 부탁은…….”

    < 제논 백작 1 > 끝

    ⓒ 김강현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