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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눈 뜨고 레벨업-204화 (204/326)
  • < 도시 크락실리아 2 >

    도시의 이름은 크락실리아였다. 이곳은 인간뿐 아니라 이종족들도 자연스럽게 섞여 있었다.

    그리고 도시는 높고 두터운 성벽으로 둘러싸여 있었다.

    상당히 거대한 도시였다. 그 거대한 도시를 이렇게 두텁고 높은 성벽으로 감싼 걸 보니 참 대단하다 싶었다.

    그리고 그만큼 마수의 위협이 상당하다는 것도 알 수 있었다.

    현석 일행이 여기까지 달려오는 동안 만난 마수의 수는 셋 정도였다.

    하나하나가 강하긴 했지만 이렇게 멀리 왔는데 고작 세 마리밖에 안 만났기에 호리병 아래쪽 세상은 생각보다 마수가 없는 줄 알았다.

    “성벽을 보니까 우리가 운이 좋았거나…… 아니면 전쟁이 자주 일어나거나 둘 중 하나겠네요.”

    류지혜가 성벽을 보며 자신의 의견을 말했다.

    “어쨌든 일단 들어가자. 안에서 지도도 구하고 정보도 얻고 해야 하는 거 아냐? 그 어둠의 숲인가 뭔가에 가려는 거지?”

    라이언은 현석을 바라보며 말을 덧붙였다.

    “그리고 마수왕의 탑을 찾고. 맞지?”

    현석은 피식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맞다. 마수왕의 탑을 찾을 것이다.

    원래 현석의 목표는 연결고리를 찾는 거였다. 한데 마수왕의 탑이라는 이름을 들었으니 거기에 안 가볼 수가 없었다.

    현석이 거기에 가려는 이유는 증표 때문이었다.

    현석은 신과의 소통 퀘스트를 클리어하며 심안을 한 단계 성장시켰다.

    그 결과 그동안 보이지 않던 물음표들을 확인할 수 있었다.

    정확히 목표에 일치하는 결과였다.

    현석이 확인한 물음표는 네 가지 증표였다.

    사실 확인했을 때, 정말 의외였다. 솔직히 말하면 황제의 증표나 왕의 증표정도 될 줄 알았다.

    거기 나온 스킬의 종류만 봐도 그렇지 않은가. 복종, 위압, 붕괴. 그러니 그렇게 오해하는 게 당연했다.

    현석은 문득 얼마 전에 받아 손목에 찬 세 번째 증표를 내려다봤다.

    [세 번째 증표]

    [마수왕을 증명하는 네 가지 증표 중 세 번째. 마수왕의 권능 중 일부가 깃들어 있다. 100레벨 이상 사용가능. 마력을 넘어선 자만이 사용 가능. 스킬 광기가 깃들어있다.]

    [광기-복종으로 제압한 개체를 광기에 빠지게 한다. 공격력이 세 배로 늘어나고 방어력이 절반으로 줄어든다. 광기에서 빠져나오면 체력이 바닥난다.]

    ‘마수왕이라니…….’

    게다가 마수왕의 탑이라니. 우연도 이런 우연이 없었다. 마치 자신을 위해 미리 짜 맞춰 준비라도 한 것 같지 않은가.

    현석이 볼텍스 암시장에 있는 바위들쥐를 정리하지 않고 남겨둔 이유가 이것 때문이었다.

    이 복종이나 위압은 인간을 상대로 하는 스킬이 아니었다. 물론 인간에게도 쓸 수 있지만 그 효과가 그리 크지 않다.

    대신 마수에게는 정말 큰 효과를 발휘한다.

    바위들쥐는 비교적 약한 마수에 속한다. 그렇기에 위압과 복종을 통해 다루기가 아주 쉬웠다.

    볼텍스 암시장에서는 바위들쥐의 수를 적절히 유지하면서 그들을 넓은 던전 곳곳에 숨겨두었다.

    만에 하나 암시장을 공격하는 놈들이 있으면 바위들쥐를 이용해 시간을 벌 계획이었다.

    바위들쥐가 비록 강한 마수는 아니지만 다수가 모이면 제법 상대하기가 까다로웠다.

    바위들쥐는 여럿이서 전투하는 법을 본능적으로 깨우치고 있는 마수였다.

    만일 거기에 광기까지 써먹을 수 있다면 금상첨화겠지만, 현석이 암시장에 머물고 있어야 쓸 수 있는 스킬이니 당장은 쓸모가 없었다.

    ‘대신 다른 방식으로 쓸 수 있지.’

    다수의 마수를 상대할 때, 지금 가진 이 스킬들은 정말 대단한 힘을 발휘할 것이다.

    그래서 마수왕의 탑에 더더욱 가고 싶어졌다. 거기 가면 분명히 뭔가 탐나는 것이 있을 것이다.

    탑에 들어갈 수 있는 조건 자체가 증표라지 않는가. 그것이 마수왕의 증표를 말한다는 건 굳이 더 확인하지 않아도 너무나 뻔했다.

    가볍게 얘기를 나누며 걷다보니 어느새 성문에 도착했다.

    성문에는 제법 많은 사람들이 줄을 서서 들어가고 있었다. 그리고 성문을 지키는 병사들도 있었다.

    “그냥 막 들여보내주는 건 아닌 모양인데?”

    성문을 지키는 병사들은 나름대로 뭔가를 조사하고 알아본 다음에야 사람들을 통과시켜 주고 있었다.

    일행은 그런 광경을 바라보며 신기한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던전 속에 이런 세상이 펼쳐져 있을 줄은 몰랐어요. 그저…… 그저 마수들이 판치는 세상인 줄 알았는데.”

    사실 그동안 대부분의 플레이어들이 겪은 블랙홀은 또 하나의 세상이라기보다는 게임의 인스턴트 던전에 훨씬 가까웠다.

    던전을 클리어하지 않으면 마수들이 다시 생겨나고, 던전의 코어를 부수면 던전 자체가 사라진다. 게다가 시간이 지나면 사라졌던 던던이 다시 나타난다.

    그러니 실제 세상이라기보다는 게임에 더 가깝게 보는 게 어찌 보면 당연한 반응이고 생각이었다.

    한데 이곳은 그런 블랙홀과는 전혀 달랐다.

    “솔직히 생성지역에 있던 화이트홀들에는…… 정말 아무것도 없었는데.”

    류지혜의 중얼거림에 다들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라이언이 거기에 대해 얘기해주었다.

    “처음부터 그랬던 건 아니야. 마수도 있고 그랬어. 단지 거기는 한 번 처치한 마수가 다시 생겨나지 않을 뿐이지.”

    그 말에 다들 눈을 빛내며 성문을 지키는 병사와 성문을 지나가는 사람들을 바라봤다.

    “그러니까…… 화이트홀이랑 블랙홀이랑은 뭔가 다르긴 다르군요.”

    어렴풋이 드는 생각으로는 화이트홀은 진짜 세상이고, 블랙홀은 만들어진 세상 같았다.

    실제로 블랙홀에서는 뭔가 묘한 위화감이 있지 않았던가. 마치 진짜 세상이 아닌 것 같은 위화감 말이다.

    그렇게 각자의 생각을 얘기로 풀어나가는 사이 줄이 줄어들어 현석 일행이 들어갈 차례가 되었다.

    병사들은 현석 일행의 복장과 분위기를 보고는 다들 긴장하기 시작했다.

    “어디서 오셨습니까?”

    절도 있는 자세로 묻는 병사의 모습에 현석은 잠시 그를 쳐다보다가 대답했다.

    “북쪽 늪지대.”

    “예?”

    병사들이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서로를 바라봤다. 북쪽 늪지대라니, 대체 그게 어디란 말인가.

    “아! 북쪽! 페데로 지방을 말씀하시는 거로군요. 마수 사냥에 다녀오신 겁니까?”

    현석은 대충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페데로 지방이 그 개구리 마수가 출몰하는 늪지대를 포함한 근처 전 지역을 말하는 모양이었다.

    그때 느끼기에 늪지대뿐 아니라 근처에 상당수의 마수들이 서식하고 있다는 걸 파악했다.

    아마 그쪽으로 마수 사냥을 가는 자들이 제법 많은 모양이었다.

    병사들은 난감한 표정으로 다시 물었다.

    “사냥 지역이 아니라 출신 지역을 말씀해 주셔야 합니다. 혹시 인장이 있으시면…….”

    병사는 그렇게 말하면서 이상한 표정을 감추려 애썼다. 보통 이런 귀족들은 인장만 제시하면 그만이다.

    그럼 굳이 줄을 설 필요도 없이 들어갈 수 있다. 한데 줄을 선 것도 모자라 인장조차 제시하지 않다니.

    이건 경험이 없는 애송이 귀족이거나, 아니면 인장을 제시할 수 없는 상황이거나 둘 중 하나일 수밖에 없었다.

    현석은 문득 이 크락실리아라는 도시와 얽힌 이름 하나가 떠올랐다.

    물론 그가 그렇게 얘기한 게 아니라 인장에 있는 마력패턴을 파악해 정보를 읽어낸 것이었다.

    “제논 백작을 만나러 왔다.”

    “예에? 제논 백작님을요?”

    병사들이 깜짝 놀랐다. 제논 백작의 가문은 이곳 크락실리아 성에서 성벽 전체의 병력을 관리하는 실세중의 실세였다.

    제논 백작은 한동안 실종되었다가 다시 나타났는데, 예전보다 엄청나게 강해져 위상을 단단히 세우고 있는 중이었다.

    “죄, 죄송합니다. 하지만 화, 확인이 필요합니다.”

    병사의 말에 현석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병사 몇 명이 정중히 현석 일행을 안으로 안내했다.

    잠시 멈췄던 검문이 다시 시작되었다. 성문 밖에 줄을 선 사람들이 하나둘 안으로 들어갔다.

    * * *

    현석 일행은 성문 근처에 마련된 간이 막사에 들어가서 제논 백작을 기다렸다.

    더 정확히는 제논 백작에게 현석이 왔다는 사실을 알리러 간 병사를 기다리는 중이었다.

    “대체 제논 백작이 누구야?”

    라이언이 궁금한 얼굴로 물었다. 현석은 서류 한 장을 꺼냈다.

    그걸 받아 확인한 라이언이 묘한 눈으로 현석을 바라봤다. 그건 확실히 제논이라는 사람이 쓴 문서였다. 그것도 인장까지 찍힌 문서, 계약서였다.

    라이언은 이 문서가 무엇인지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이걸 작성하는 장면을 자신도 두 눈으로 똑똑히 확인했으니까.

    “이 사람이 이 도시에 있다는 건 어떻게 안 거야? 정말 신기하네. 문서에 따로 기록한 것도 아닌데.”

    현석은 굳이 인장의 마력패턴에 기록된 거라는 얘기는 해주지 않았다.

    “어쨌든 오긴 오겠네. 아직 얼마 되지도 않은 일이니까.”

    “여기서 기다리는 사람이 나라는 걸 알면 오겠지.”

    그 말에 라이언의 표정이 살짝 굳었다.

    생각해보니 그저 제논 백작을 만나러 왔다고만 했지 누가 무슨 일 때문에 왔다는 얘기는 안 했다.

    “제논 백작이 네 이름 아나?”

    “모르지.”

    라이언이 어이없는 표정으로 현석을 바라봤다. 그런 중요한 계약을 하면서 자기 이름도 안 가르쳐 주면 어쩌잔 말인가.

    이럴 때 문제가 생기지 않느냔 말이다.

    라이언이 막 뭐라고 한 마디 하려는 순간, 막사 입구가 활짝 열리더니 누군가 안으로 불쑥 들어왔다.

    모두의 시선이 그쪽으로 향했다.

    라이언과 추광열이 살짝 눈을 빛냈다. 어딘가에서 본 적이 있는 얼굴이었다. 물론 기억이 확실하지는 않았다.

    그날 섬에서 봤던 사람들의 얼굴을 세세히 기억하고 있지는 않았으니까.

    하지만 이 정도로 익숙한 얼굴이라면 그 중 하나라고 봐도 무방할 것이다. 어차피 아는 얼굴이 그들밖에 없으니까.

    “역시 직접 찾아왔군.”

    제논 백작이 씨익 웃으며 현석에게 다가갔다.

    그는 자신을 찾아온 사람에 대한 얘기를 듣고 바로 그게 현석이라는 걸 알아차렸다.

    인장도 제시하지 않고 귀족의 분위기를 풍기며 북쪽의 늪지대, 그러니까 페데로 지방에서 온 사람이라는 얘기를 듣자마자 현석이 떠올랐다.

    “잘 찾아왔네. 자, 일단 우리 집으로 가지.”

    제논 백작은 그렇게 말하고 다시 막사에서 나갔다.

    현석 일행은 그 뒤를 우르르 따라갔다.

    지켜보던 병사들이 놀란 눈으로 제논 백작과 현석 일행을 바라봤다.

    말을 전하면서도 반신반의했다. 사실 현석이 풍기는 분위기가 워낙 대단해서 제논 백작에게 말을 전한 것이다. 원래 이런 경우가 있으면 병사들 선에서 알아서 처리하는 것이 보통이었다.

    병사들은 가슴을 쓸어내렸다. 만일 평소처럼 처리했다면 아무도 살아남지 못했을 것이다.

    그나마 제논 백작이 성벽을 관리하는 가문의 일원이라서 다행이었다.

    마침 제논 백작이 성벽 근처에 머물고 있었기에 쉽게 연락을 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런 병사들의 시선을 받으며 현석 일행은 제논 백작의 집으로 향했다.

    * * *

    “휘유. 대저택인데?”

    라이언이 저택을 바라보며 휘파람을 불었다. 다들 비슷한 생각이었다.

    “도시의 규모도 그렇고, 이 던전 속 세상이 정말…… 보통이 아닌 거 같아요.”

    마치 작은 크기의 세계가 하나 더 따로 존재하는 것 같았다. 말이 던전이지 이 정도면 다른 차원의 세상이라고 해도 믿을 수 있지 않겠는가.

    “이쪽이네. 자, 어서 가지. 내가 그래도 이 집에서 생각보다 힘 좀 쓴다네. 하하하하.”

    제논 백작은 예상했던 것보다 현석을 반겨 주었다.

    사실 인간들은 계약서를 쓰긴 했지만 반겨주기보다는 배척할 확률이 높다고 생각했다.

    제논 백작은 자신이 직접 현석 일행을 저택의 별채로 안내해 주었다. 그곳은 중요한 손님을 위해 준비해둔 장소였다.

    제논 백작은 현석 일행을 그 정도로 대접해 주고 있는 것이다.

    미리 연락도 하지 않은 갑작스러운 손님의 난입에 별채의 하인들과 시녀들, 그리고 집사는 난리가 났다.

    그들은 부산스럽게 움직여 손님 맞을 준비를 했다.

    “일단 쉬고 있게. 아무리 나라고 해도 보고는 드려야 하니까. 이따가 저녁에 따로 식사를 하면서 얘기를 나눠보지.”

    제논 백작은 기대감 어린 눈으로 현석을 바라보며 말했다.

    그런 그에게 현석은 그럴 필요 없다는 듯 말했다.

    “우린 바로 갈 생각이야.”

    “뭐? 바로 간다고? 그래도 우리 가문에 손님으로 왔는데, 가주께 인사는 드려야 하지 않겠나? 자네도 귀족이라면 말이야.”

    제논 백작은 눈을 빛내며 말했다. 하지만 현석은 그 말에도 그저 담담하기만 했다.

    “세밀히 그려진 지도가 필요해. 그리고 어둠의 숲과 마수왕의 탑에 대한 정보도.”

    제논 백작이 눈살을 찌푸렸다. 하지만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어쨌든 그게 약속이니까 준비해주지. 하지만 둘 다 쉬운 요구는 아니라는 걸 알아줬으면 좋겠군. 바로 준비할 만한 것들은 아니야.”

    현석이 가만히 쳐다보자 제논 백작이 얼른 말을 이었다.

    “나도 최대한 서둘러 보긴 하겠네. 하지만 언제까지 해주겠다고 장담할 수는 없어. 그러니 그 부분은 이해해주게.”

    이렇게까지 말하는데 웃기지 말라고 할 수는 없지 않은가. 현석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제논 백작이 환하게 웃었다.

    “고맙군. 그럼 이따 저녁 때 보세. 다른 분들도 그때 봅시다. 편히 쉬시길.”

    제논 백작은 정중히 말한 다음 집사에게 눈짓을 보냈다.

    그러자 시녀들이 우르르 몰려와 한 사람당 두 명씩 붙어서 섰다.

    “필요한 게 있으시면 언제든 말씀만 하시면 됩니다.”

    집사는 그렇게 말하고 팔을 자신의 배에 휘감으며 정중히 허리를 숙였다.

    그리고는 제논을 따라 빠른 걸음으로 응접실에서 나갔다. 아무래도 할 말이 많아 보였다.

    현석 일행은 난감함과 신기함, 그리고 호기심이 뒤섞인 표정과 눈빛으로 시녀들을 바라봤다.

    현석은 시녀들에게는 눈길도 주지 않고 멀어져가는 제논 백작의 뒷모습만 계속 쳐다봤다.

    현석의 눈이 한 차례 번득였다.

    < 도시 크락실리아 2 > 끝

    ⓒ 김강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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