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일단 복귀 2 >
“이쪽입니다.”
콜은 기세등등하게 걸어가며 말했다. 그의 뒤로 차가운 인상의 사내 열 명이 질서정연하게 따라가고 있었다.
그들은 렉스턴 에너지에서 지원해준 플레이어들이었다.
렉스턴 에너지 소속 플레이어들은 최근 특별한 연구에 자주 동원되었는데, 그 중 운이 좋으면 갑자기 급성장해서 돌아오곤 했다.
물론 부작용도 좀 있었는데, 지금 따라오는 자들처럼 감정이 조금씩 마모된다는 점이었다.
콜은 가끔 자신의 뒤에 아무도 없는 것 같은 느낌에 섬뜩섬뜩했다. 하지만 열 명의 플레이어는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일정한 거리를 두고 콜을 따라가고 있었다.
그리고 그들의 뒤로 처음 콜이 이곳에 올 때 함께 했던 그의 동료이자 부하들이 살짝 주눅이 들어 주춤주춤 쫓아오고 있었다.
그때 라이언에게 당한 뒤로 제대로 기를 펴지 못했다.
콜은 그걸 보고는 이를 갈았다. 오늘 저들을 데려온 것은 기를 다시 살려주기 위함이었다.
라이언이 형편없이 당하는 모습을 보고 나면 좀 나아지지 않겠는가.
저들은 콜이 앞으로 위를 향해 올라가는 데 반드시 필요했다. 끝까지 자신의 발판이 되어주어야 할 힘이었다.
그러니 여기서 무너져선 안 된다.
콜은 서둘러 걸음을 옮겼다. 이 짜증나는 시간을 빨리 끝내고 싶었다.
“저 건물입니다. 저 안에 화이트홀이 있습니다.”
콜의 말에 렉스턴의 플레이어 하나가 무표정하게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봤다.
“확실한가?”
“네. 확실합니다. 이 정보를 얻으려고 엄청 고생했습니다. 돈도 많이 깨졌고요.”
콜은 이 근처를 배회하는 덩치들 몇 명을 포섭해서 일을 진행했다.
그 덩치들은 당연히 라이언에게 고용된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절대 건물 안에 들어가지 못하도록 계약이 되어 있었지만, 콜이 제시한 막대한 돈에 흔들리고 말았다.
라이언과의 약속을 어기는 건 정말 위험한 일이었지만 그 위험을 감수할 정도로 콜이 제시한 돈의 액수가 컸다.
어쨌든 그걸 이용해 콜은 건물 내부의 정보를 조금씩 얻을 수 있었고, 결국 저 안에 화이트홀이 존재한다는 사실까지 알아냈다.
애초에 그걸 자신이 혼자 독식하겠다는 생각은 없었다. 자신이 아무리 최근 급성장 했다고는 하지만 라이언과 비교할 정도는 아니었다.
라이언은 공식적으로 세계 제일의 플레이어였으니까.
게다가 정보에 따르면 라이언과 추광열이 함께 있다고 했다. 추광열은 공식적인 세계에서 두 번째 플레이어였다.
세계 1위와 2위가 함께 있는데, 감히 자신이 그걸 차지할 수 있을까? 어림도 없었다.
그래서 어제 왔을 때는 그저 염탐이었다.
그런데 일이 꼬인 것이다. 라이언과 추광열이 없다고 생각해 우격다짐으로 밀고 들어가 화이트홀 내부를 한 번 탐색하려고 했을 뿐이었다.
‘젠장. 이래서야 꼴이 말이 아닌데.’
렉스턴 에너지에 손을 벌리는 건, 좀 나중의 일이었어야 한다 이래서야 힘이 모자라 실패했으니 도와달라는 꼴밖에 안 되지 않은가.
새로운 화이트홀을 발견해서 갖다 바치는 모양새가 되었어야 했다.
그 점이 못내 아쉬웠다.
하지만 어쨌든 이번에 제대로 화이트홀을 차지하게 되면 그 공이 어디 가는 건 아니었다.
처음 계획보다는 좀 떨어지겠지만, 어쨌든 위로 올라갈 발판 하나는 마련한 셈이었다.
콜과 플레이어들이 가가가자, 건물 주변을 배회하고 있던 덩치들이 인상을 쓰며 슬금슬금 길을 막았다.
콜이 그들을 보며 차갑게 웃었다.
“오늘은 어제와는 상황이 많이 달라. 시간도 별로 없고. 그러니 죽기 싫으면 비키는 게 좋을 거야.”
콜의 표정과 기세에서 물씬 풍기는 지독한 살기에 덩치들이 긴장해 침을 꿀꺽 삼켰다.
그들은 서로의 눈치를 좀 살피다가 천천히 자리를 벗어났다.
이내 건물 주변에는 아무도 남지 않았다. 건물만 달랑 서 있었다.
건물앞 공터에 서서 그 광경을 가만히 지켜보던 콜은 만족스럽게 웃으며 건물로 걸음을 옮겼다.
이 허름한 건물 안에 화이트홀이 있다니. 다시 생각해 봐도 정말 신기한 일이었다.
콜의 뒤를 따라 나머지 플레이어들이 우르르 들어갔다.
그들은 건물을 샅샅이 뒤졌다. 심지어 옥상과 지하실까지 뒤지고 털어냈다.
하지만 아무리 뒤져도 화이트홀 비슷한 것조차 발견할 수 없었다.
건물은 최근까지 이용한 흔적이 곳곳에 남아 있었다.
쓰던 물건도 고스란히 있었다. 이사를 가거나 치우거나 하지도 않았다.
라이언이나 추광열의 것으로 짐작되는 물건도 몇 개 발견할 수 있었다.
이 건물에 불과 얼마 전까지 추광열과 라이언이 있었던 건 확실했다.
하지만 그 어디에도 화이트홀은 없었다.
“확실하다고 들은 것 같은데?”
렉스턴의 플레이어가 콜에게 다가와 차갑게 말했다. 그의 말투와 표정에서 냉기가 뚝뚝 묻어났다. 그리고 가벼운 살기가 흘러나왔다.
콜은 마른침을 꿀꺽 삼킨 다음 다급히 입을 열었다.
“확실합니다! 여기 분명히 화이트홀이 있다고 했습니다!”
“있다고 했습니다? 직접 확인한 것도 아니면서 확신을 해? 원래 일하는 스타일이 그런가?”
콜의 얼굴에 두려움과 절망감이 뒤섞여 떠올랐다.
“라, 라이언을 잡으면, 그놈을 잡으면 알 수 있을 겁니다! 분명히 그놈이 무슨 짓을 했습니다!”
콜의 말에 사내가 더욱 차가워진 눈으로 물었다.
“무슨 짓? 설마 여기 있던 화이트홀을 그놈이 가지고 도망쳤다는 말을 하고 싶은 건 아니겠지?”
콜은 바로 그거라고 소리치고 싶었다. 하지만 그럴 수가 없었다. 그게 말이 안 된다는 건 플레이어인 자신이 가장 잘 알고 있으니까.
던전은 이동이 불가능하다. 그 자리에서 계속 존재할 뿐이다.
스릉.
사내가 검을 뽑았다. 콜은 그걸 보며 덜덜 떨었다.
저 사내가 얼마나 강한지는 이미 겪어봐서 안다. 자신과 동료들이 모두 힘을 모아 덤벼도 저 사내 한 명을 이길 수 없다.
그 정도로 강한 자였다. 게다가 저 사내와 똑같이 강한 자들이 아홉 명이나 더 있다.
저들이 자신을 죽이겠다고 마음먹으면 자신은 죽어야 한다. 그러니 떨지 않을 수가 없었다.
“라이언을 찾아내는 건 네 일이다. 알겠나?”
“예! 아, 알겠습니다! 반드시 찾아내겠습니다!”
콜은 죽을 위기에 내려온 한 줄 지푸라기를 꽉 움켜쥐었다. 무슨 수를 써서든 라이언을 찾아내야만 했다.
사내는 다시 검을 집어넣었다. 그리고 렉스턴 에너지 본사에 연락을 했다.
확실히 뭔가 좀 이상하긴 했다.
라이언에게 밝혀내야할 것들이 좀 있는 게 분명했다. 보아하니 저 콜이란 놈은 발바닥에 땀이 날 정도로 열심히 뛸 테니까 회사에서 조금만 보조해줘도 금방 찾아낼 수 있을 것이다.
“가자.”
렉스턴에서 온 플레이어들이 썰물 빠지듯 물러갔다.
콜은 그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죽다 살아난 표정으로 멍하니 천장을 바라보던 콜은 퍼뜩 정신을 차리고 벌떡 일어났다.
“이럴 때가 아니지. 어서 찾아야 돼.”
조금이라도 빨리 찾아야 한다. 살려면.
콜과 그의 일당이 건물을 빠져나가 어딘가로 우루루 몰려갔다.
모두가 사라지자, 낡은 건물에 적막이 내려앉았다.
이제 아무도 다시 찾지 않을 것이다.
* * *
라이언과 추광열은 어이없는, 아니 경악한 눈으로 현석을 바라봤다.
그들의 시선은 한참 동안이나 현석에게 머물다가 이내 조금씩 옆으로 돌아갔다.
그들의 시선이 멈춘 곳에 새하얀 소용돌이 하나가 있었다.
“이게…… 이게 대체 어떻게 된 거지?”
“이 화이트홀이 왜 여기 있는 거야?”
두 사람은 얼빠진 표정으로 현석과 화이트홀을 번갈아 바라봤다.
이 화이트홀이 자신들이 이용하던 그 화이트홀이라는 건 이미 확인한 뒤였다.
안에 들어갔다가 나왔으니까.
울창한 숲에 둘러싸여 있어서 처음엔 좀 당황했지만, 이내 그곳이 그렇게 변했다는 걸 떠올리고는 경악해야만 했다.
그들의 상식 안에서 던전은 절대 움직이지 않는 존재였다. 이동이 불가능하다. 한데 왜 던전이 여기 있단 말인가.
“설마…… 그때 애기했던…… 그 던전 입구가 하나 더 있다는 게 이거였어?”
현석은 그 질문에 대답해주지 않았다.
거기 있던 던전을 이리로 옮겨왔다는 얘기를 굳이 이들에게 해줄 필요는 없지 않은가.
지금 현석 일행이 있는 장소는 라이언의 건물이 있던 곳에서 두 블럭 정도 떨어진 곳에 있는 최신식 빌딩의 꼭대기 층이었다.
이 빌딩은 현석이 미리 구입해 둔 건물이었다.
애초에 이렇게 될 걸 예상하고 준비했기에 최상층에는 여러 명이 지낼 수 있는 시설부터 해서 던전이 놓일 장소까지 마련되어 있었다.
어쨌든 보안이 아주 철저한 빌딩이었고, 플레이어들의 잠입에 대한 대비도 어느 정도 된 곳이었기에 앞으로는 들킬 염려가 별로 없었다.
“만일 나중에 여길 들키게 된다면 이유는 아마 너 때문일 거야.”
현석이 라이언을 보며 말했다.
라이언은 황당한 표정을 지었다. 이 무슨 말도 안 되는 단정화법이란 말인가.
“내가 뭘? 날 너무 헐렁헐렁하게 보는 거 아냐? 나도 보통은 넘어. 세계 제일의 플레이어라는 자리가 지키기 쉬운 줄 알아?”
라이언은 처음에는 발끈했지만 이내 현석이 괜한 얘기를 하는 사람이 아니라는 걸 알기에 점점 목소리가 줄어들었다.
“그때 찾아왔던 놈들, 과연 누굴 찾을까?”
라이언이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그놈들이 찾긴 누굴 찾는단 말인가.
“왜? 그쪽 던전에 무슨 짓이라도 하고 왔어?”
“거긴 더 이상 던전이 없다.”
“뭐? 그게 무슨 말이야? 던전을 없앨 수도 있다고?”
라이언과 추광열이 경악해 현석을 바라봤다. 하지만 현석은 거기에 대해서도 전혀 말해주지 않았다.
알아서 상상하고 알아서 결론을 내리게 둘 생각이었다.
두 사람은 현석이 그런 걸 하나도 알려주지 않자 답답하기 짝이 없었다.
“그래서, 거기 던전이 없어서 날 찾을 거란 말인가?”
“그 건물이 네 소유니까.”
“하긴…….”
라이언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그들이 누구와 손을 잡았는지 알기에 난감했다.
렉스턴 에너지가 마음먹으면 자신 하나 찾아내는 것쯤은 일도 아니었다.
현석이 눈을 빛내며 말했다.
“네가 여기서 나가지만 않으면 들킬 일은 없어.”
라이언이 황당한 눈으로 현석을 바라봤다. 그래서 감옥에 갇힌 것처럼 여기 있으란 말인가? 절대 그럴 수는 없었다.
현석은 라이언이 어떤 표정을 짓건 신경 쓰지 않고 고개를 돌려 이번엔 추광열을 쳐다봤다.
“너도 마찬가지다.”
갑자기 화살이 자신에게 날아오자 추광열이 화들짝 놀라 물었다.
“나? 나는 왜? 그 건물은 라이언 거잖아!”
현석은 굳이 대답해주지 않고 그저 추광열을 가만히 쳐다보기만 했다.
이런 건 설명하지 않아도 다 알만한 일이었다.
결국 추광열도 힘없이 고개를 푹 숙였다. 사실 동의하지 않을 수 없었다.
“시간이 지나면 그놈들도 포기하겠지.”
현석의 말에 라이언이 발끈했다.
“시간이 지나면? 그래서 그 시간이 얼마나 되는데? 1년? 2년? 만일 그때도 그놈들이 포기하지 않으면?”
현석은 눈을 빛내며 두 사람을 번갈아 쳐다봤다.
“시간을 아주 잘 보낼 수 있는 방법이 있잖아.”
두 사람은 현석의 시선이 옆으로 이동한 걸 보고는 침음을 삼켰다.
그곳에는 화이트홀이 고고한 자태를 뽐내며 조용히 회전하고 있었다.
* * *
“갑자기 우릴 왜 불렀지?”
양세희가 두근두근한 심정으로 중얼거렸다. 그녀 주위에는 류지혜와 류혜연, 그리고 권혁찬과 박승희가 모여 앉아 있었다.
그들은 자연스럽게 류지혜를 중심으로 하고 있었는데, 그동안 얼마나 험한 사냥을 오랫동안 잘 맞춰서 해왔는지 단적으로 보여주는 모습이었다.
그들은 퀸급 던전을 그야말로 끊임없이, 쉬지 않고 돌았다.
퀸급 던전은 정말 신기한 던전이었다. 이 던전은 익숙해지지가 않았다.
어떻게 된 것이 매번 새로웠다. 또한 들어갈 때마다 던전의 마수들이 점점 강해지고 똑똑해졌다.
하지만 거기에도 분명한 한계가 있었다.
어느 순간부터 더 이상 마수들이 강해지지도 똑똑해지지도 않았다.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역시 강력한 마수들이었기에 계속 성장할 수는 있었다.
그저 성장 속도가 조금씩 더뎌지고 있을 뿐이었다.
그리고 이제 슬슬 효율이 너무 낮아지는 게 아닐까, 싶은 시점에 현석으로부터 연락이 왔다.
정말 소름끼칠 정도로 정확한 타이밍이었다.
류지혜는 지금까지 퀸급 던전에서의 사냥을 떠올려봤다.
그걸로 인해 얻은 건, 단순히 레벨만이 아니었다.
메인퀘스트라는 팀의 팀웍을 단단하게 다질 수 있었다. 이제 그들은 그들보다 월등히 강한 상대와 싸운다 하더라도 절대 물러서지 않을 것이다.
팀웍만 제대로 발휘하면 분명히 이길 수 있을 테니까.
그동안의 사냥으로 돈도 엄청나게 벌었다. 퀸급 던전에서 나오는 마정석과 아티팩트는 정말 대단했다.
그걸 꾸준히 미래산업에 공급하며 그들은 막대한 돈을 벌 수 있었다.
그래서 가슴이 뛰었다.
어쩌면 이제 퀸급 던전보다 훨씬 더 위험한 곳으로 가게 될지도 모른다.
아니, 분명히 그럴 것이다.
그게 아니라면 굳이 이들을 이렇게까지 키워줄 이유가 없으니까.
그들이 쉬고 있는 응접실에 누군가가 들어섰다.
현석이었다.
모두의 시선이 현석에게로 향했다. 다들 미친듯이 뛰는 심장을 주체할 수가 없었다.
< 일단 복귀 2 > 끝
ⓒ 김강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