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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눈 뜨고 레벨업-198화 (198/326)
  • < 일단 복귀 1 >

    “이제 어쩔 생각이지?”

    추광열의 물음에 라이언은 귀를 쫑긋 세우고 현석의 대답을 기다렸다.

    솔직히 말하면 반반이었다.

    여기서 겪은 일이 너무 지독해서 이제 모험이고 레벨업이고 다 때려치우고 싶었다.

    그냥 돌아가서 지금까지 벌어놓은 돈이나 펑펑 쓰면서 유유자적 살고 싶었다.

    하지만 또 한편으로는 이 호수 너머의 세상에는 과연 무엇이 기다리고 있을지 가보고 싶었다.

    여기서 함께 갇혀 있던 자들을 본 다음부터 거기에 대한 열망이 더욱 깊어졌다.

    설마 저런 인간과 비슷하면서도 인간이 아닌 종족들이 있을 줄이야.

    그리고 그들과는 다른 인간들도 있었고 말이다.

    “그나저나 아까 그자들…… 과연 다들 약속을 지킬까?”

    라이언이 문득 그 일이 떠올라 고개를 갸웃거렸다. 말 그대로 약속을 지킬거라는 믿음만으로 다들 보내준 거 아닌가.

    실질적으로 물건을 현석에게 준 사람은 추광열과 라이언뿐이었다. 그들은 현석과의 내기에 걸려고 준비한 팔찌를 넘겼으니까.

    “아마 인간이 아닌 녀석들은 약속을 반드시 지킬 거다.”

    “그럼 인간들은?”

    “그래서 문서를 준비했지. 그들의 인장도 찍었고.”

    라이언은 여전히 회의적이었다.

    “과연 그걸로 될까?”

    “아니면 말고. 인간들 역시 반반일 거야. 지킬 사람도 있을 거고 아닌 사람도 있을 거고.”

    현석은 사실 그 정도면 충분했다.

    솔직히 금고 안에 있던 물건들 중 욕심나는 건 하나도 없었다.

    말 그대로 그들의 장비와 그들 일족의 보물, 혹은 가문의 인장 같은 것들이었으니까.

    실직적인 쓸모가 있는 물건은 하나도 없었다.

    금고에 있던 물건 중 가장 탐나는 건 딱 하나, 세 번째 인장뿐이었다.

    그리고 그 세 번째 인장은 이제 현석의 손에 들어왔고 말이다.

    “어쨌든 어쩔 거지?”

    이번엔 라이언이 물었다. 그의 눈빛에 떠오른 기대감을 보며 현석은 피식 웃었다.

    “그걸 왜 묻는 거지?”

    “널 좀 따라가려고.”

    라이언이 뻔뻔한 얼굴로 말했다. 솔직히 그림자 인간에게 잡히기 전까지는 자신만만했다.

    이 던전 안에서 자신들에게 위해를 가할 수 있는 존재가 그리 많지 않을 거라 믿었다.

    하지만 그림자 인간이 그들의 자신감을 산산조각 냈다.

    그들끼리 호수 너머를 탐험하기에는 너무 불안했다. 그래서 현석이라는 조력자와 함께 하고 싶었다.

    “관심 없다. 너희 일은 너희가 알아서 해라.”

    현석이 매몰차다 싶을 정도로 단호히 거절했다. 하지만 라이언과 추광열은 낯빛 하나 변하지 않았다.

    “우리가 그 철창에 갇혀 갖은 수모와 고통을 다 당하고 있을 때, 결심한 게 하나 있지.”

    현석은 관심 없다는 듯 고개를 돌려버렸다.

    하지만 라이언은 그런 현석의 태도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말을 이었다.

    “우리를 이 지옥에서 구해준 사람을 따르기로 했어.”

    현석은 성큼성큼 걸어갔다.

    라이언과 추광열이 황급히 그 뒤를 따라갔다.

    두 사람은 현석이 걸어가는 방향을 확인하고는 상당히 복잡한 표정을 지었다.

    현석은 호수를 넘어갈 생각이 없다는 듯, 왔던 길로 되돌아 가고 있었다.

    “돌아가는 건가?”

    라이언이 시원섭섭한 표정으로 물었다.

    현석은 대답 대신 계속 걷기만 했다.

    이내 그들은 섬의 끄트머리에 도착했다. 그곳에는 배가 한 척 있었다.

    현석은 배에 훌쩍 올라탔다. 그러자 라이언과 추광열도 따라 탔다.

    배에는 노가 두 개 있었다.

    현석은 노와 두 사람을 번갈아 쳐다봤다.

    잠시 멍하니 그 모습을 바라보던 라이언과 추광열이 씨익 웃으며 노를 하나씩 잡았다.

    세 사람을 태운 배가 빠르게 호숫가로 이동해갔다.

    * * *

    “허어! 이게 대체 뭐지?”

    “대체 여기서 무슨 일이 벌어진 거야?”

    “그 허허벌판이 이런 숲으로 변하다니!”

    “우리가 그렇게 오랫동안 잡혀 있었나?”

    라이언과 추광열은 감탄하며 서로 말을 주고받았다.

    놀랄 만도 했다. 원래는 허허벌판이었던 곳이 울창한 숲으로 변했으니까.

    게다가 숲에서 아주 멀리 떨어진 곳에서부터 보이는 거대한 나무의 위용은 정말 엄청났다.

    근원의 나무는 처음 봤을 때보다 몇 배나 더 커진 듯했다.

    사실 근원의 나무가 저렇게 크게 자라난 것에 대해서는 현석도 좀 놀랐다.

    ‘확실히…… 신의 파편이 대단하긴 대단한가보네.’

    신의 파편에서 흘러나오는 힘의 여파가 근원의 나무를 저렇게 키웠을 것이다.

    그리고 이 숲도 마찬가지고 말이다.

    숲 자체가 처음 현석이 떠나올 때보다 더 커졌다. 숲의 나무들도 더 크게 자라났고, 숲의 규모도 몇 배나 더 커졌다.

    그리고 어쩌면 지금 이 순간에도 숲이 점점 더 커지고 있는지도 몰랐다.

    아니, 분명히 그럴 것이다.

    세 사람은 숲을 빠르게 가로질러갔다.

    그렇게 잠시 걷고 있으니 숲의 종족들이 나타났다.

    그들은 현석을 보자마자 정중히 허리 숙여 예를 표했다. 허리를 숙이는 건 숲의 종족이 보일 수 있는 가장 높은 공경의 표시였다.

    그 광경에 라이언과 추광열이 잠시 얼빠진 표정을 지었다.

    숲의 종족은 그들이 숲을 편하고 빠르게 지나갈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

    숲에는 그들만 이용할 수 있는 길이 있었다. 그 길은 숲의 지름길이었다.

    숲의 지름길을 이용하면 그냥 숲을 관통하는 것보다 몇 배나 더 빨리 지나갈 수 있었다.

    그곳은 숲의 마력이 작용하는 공간이었다.

    그렇게 얼마나 걸었을까. 그들은 숲 안에 있는 산에 도착했다.

    산 역시 울창한 나무로 가득 뒤덮여 있었다.

    라이언과 추광열은 멍하니 그 산을 올려다보며 중얼거렸다.

    “설마…… 이 산이 그 산은 아니겠지?”

    “그 산 맞다.”

    두 사람의 시선이 느릿하게 움직여 현석을 바라봤다. 이젠 더 놀랄 기운도 없었다.

    대체 여기 들어온 그 짧은 시간 동안 무슨 일을 얼마나 한 것인가.

    세 사람은 그렇게 산을 타고 올라갔다.

    산 중턱에 화이트홀이 있었는데, 그들은 그곳에 도착하자마자 망설임 없이 거기에 뛰어들었다.

    * * *

    라이언과 추광열은 화이트홀에서 나오자마자 날카롭게 눈을 번득였다.

    “침입자들이 있는 것 같은데?”

    두 사람은 황급히 달려가 창밖을 내다봤다.

    “타이밍 한 번 죽이는군.”

    플레이어들이 위협적으로 이 건물을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 그리고 이 근처를 배회하던 덩치들이 그런 플레이어들과 대치하며 사납게 으르렁거리고 있었다.

    “저것들 어디서 온 거지? 렉스턴인가?”

    “아닌 거 같은데?”

    “그래?”

    라이언은 건물로 천천히 다가오는 플레이어들을 보며 우드득 주먹을 쥐었다.

    “그동안 쌓였던 스트레스를 한 방에 풀 좋은 기회로군.”

    그렇게 중얼거린 라이언이 창문에서 훌쩍 뛰어내렸다.

    갑자기 등장한 라이언의 모습에 다가오던 플레이어들이 한껏 굳은 표정으로 움직임을 멈췄다.

    “내 집에는 무슨 볼일들이신가?”

    라이언은 그렇게 말하며 마력을 촤르르 풀었다.

    이렇게 자유자재로 마력을 풀었다 거둬들였다 하는 기술은 아무나 할 수 있는 게 아니었다.

    당연히 라이언과 대치한 플레이어들은 엄두도 못 낼 기술이었다.

    모두 30명이나 되는 플레이어가 몰려왔지만 그들은 라이언의 마력에 눌려 순식간에 기가 죽어 버렸다.

    하지만 모든 플레이어가 그런 건 아니었다. 가장 뒤에서 상황을 지켜보던 플레이어 한 명이 동료들을 헤치고 앞으로 나섰다.

    “라이언, 오랜만이야.”

    “콜?”

    “그래. 한…… 2년 만인가?”

    라이언이 굳은 표정으로 콜을 노려봤다. 콜은 라이언과 동료이자 라이벌 같은 관계였다.

    그러다가 2년 전 큰 다툼 이후 떠나가 버렸다.

    “네가 집에 좋은 걸 두고 혼자만 차지하고 있다는 얘기가 들려서 말이야.”

    “그래서?”

    “확인 차 왔지. 그게 혼자 쓰면 안 될 물건이라는 얘기가 있어서.”

    라이언의 표정이 굳었다.

    “그래서 내 집에 강제로 들어가겠다는 건가?”

    콜이 씨익 웃었다.

    “왜? 경찰이라도 부르게?”

    “그럴 리가. 네가 뭔가 착각을 하고 있는 것 같아서 말이야.”

    “착각? 착각은 내가 아니라 네가 하고 있는 것 같은데? 안 그런가?”

    콜의 몸에서도 마력이 차르르 흘러나왔다. 라이언과 마찬가지로 마력을 통해 주변을 장악하기 시작한 것이다.

    두 사람의 마력이 서로 부딪혔다. 스파크가 마구 튀었다.

    파바바바바박!

    박빙이었다. 콜이 풀어낸 마력의 힘이 생각보다 대단했다. 라이언과 비슷한 수준이라니 말이다.

    “어때? 이제 좀 느낌이 오는 것 같아?”

    라이언이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느낌 왔어.”

    그 순간 라이언의 몸에서 폭발적으로 마력이 뿜어져 나갔다. 그 마력은 콜을 비롯한 플레이어들을 모조리 휩쓸어 버렸다.

    “우와아악!”

    “쿠웨엑!”

    쿠당탕탕!

    라이언은 사방으로 나가떨어진 플레이어들과 콜을 무심하게 내려다봤다.

    “난 아직 끝이 아닌데. 넌 그게 끝인가 보군.”

    라이언의 무심한 말에 콜이 이를 악물고 몸을 일으켰다. 마력이 충돌하면서 속이 크게 상하는 바람에 여기서 더 버틸 상태가 아니었다.

    “크윽. 두고 보자. 우리가 이대로 물러날 거라고 생각하면 오산이야. 넌 그 보물을 무조건 내놓을 수밖에 없을 거야.”

    콜은 그 말을 남기고 나머지 플레이어들과 함께 빠르게 물러났다.

    그걸 가만히 보고 있던 라이언이 한숨을 푹 내쉬었다.

    “역시 렉스턴이겠지?”

    어느새 라이언 뒤로 다가온 추광열이 무슨 그런 당연한 얘길 하냐는 듯 바라봤다.

    “어쩔 거야?”

    라이언의 시선이 자신도 모르게 창문 쪽으로 향했다. 창가에 서서 이쪽을 내려다보고 있던 현석과 눈이 마주쳤다.

    “우리 대장님한테 해결해 달라고 해야지.”

    * * *

    현석은 더없이 담담한 얼굴로 라이언과 추광열의 시선을 받아 넘겼다.

    답을 기다리는 추광열과 라이언의 얼굴에 조급함이 어리기 시작했다.

    “왜 답이 없지? 역시 너한테도 불가능한 일인가?”

    추광열이 도발을 살짝 섞어 말했다.

    하지만 고작 그런 도발에 넘어가기엔 현석이 그동안 겪은 세월이 너무 길었다.

    “내가 왜 그래야 하지?”

    현석의 말에 추광열과 라이언이 당황했다.

    “그, 그야…….”

    잠시 고민하던 두 사람 중 라이언이 눈을 빛내며 말했다.

    “이 던전, 너한테도 필요한 거 아니었나? 저 안에는 아직 가보지 않은 미지의 지역들이 수두룩하게 남아 있어. 아까 봤지? 그 이상하게 생긴 놈들. 너, 그놈들한테 약속도 받아 놨잖아. 안 그래?”

    현석이 고개를 저었다.

    “굳이 이쪽 길을 통하지 않아도 얼마든지 갈 방법이야 있다.”

    “뭐?”

    두 사람의 눈이 화등잔만 해졌다. 이건 전혀 생각지도 못한 대답이었다.

    “그, 그게 정말이야?”

    “말도 안 돼! 던전에 입구가 또 있다고?”

    현석의 입가가 슬쩍 올라갔다.

    물론 아직 확인은 안 해봤다. 그러니 확신할 수는 없지만 굳이 그런 세세한 얘기를 해줄 필요는 없지 않은가.

    “후우우.”

    추광열이 한숨을 푹 내쉬었다. 그리고 현석을 바라봤다. 그의 눈빛에 간절함이 어렸다.

    “이 화이트홀은 우리의 모든 거나 다름없어. 그러니 좀 도와주면 안 될까? 어차피 우린 너한테 모든 걸 맡기기로 했잖아.”

    “맞아. 그러니 부하 두 명 살려주는 셈치고…….”

    현석은 두 사람을 물끄러미 쳐다보며 물었다. 물론 표정이나 말투는 더없이 담담했다. 마치 별 관심 없다는 듯이.

    “지금 한 말, 끝까지 지킬 수 있나?”

    “지켜? 뭘?”

    두 사람은 이게 무슨 뜬금없는 소리인가 어리둥절하다가 이내 무슨 뜻인지 알아차리고는 황당한 눈으로 현석을 바라봤다.

    “부하 말하는 거야? 처음부터 얘기했잖아! 대장님! 좀 도와달라고!”

    “우리처럼 배신하지 않을 사람 구하기 진짜 쉽지 않을걸?”

    현석은 두 사람의 말을 들으며 눈을 빛냈다. 이들의 말에 마력이 담겨 있었다.

    ‘마력이 담긴 방식이…… 좀 특이한데?’

    뭔지 정확히 단정할 수는 없었다. 하지만 이건 맹세 비슷한 느낌이 들었다.

    현석은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도와주지.”

    두 사람의 얼굴에 환한 미소가 어렸다.

    < 일단 복귀 1 > 끝

    ⓒ 김강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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