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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눈 뜨고 레벨업-193화 (193/326)
  • < 세 번째 증표 1 >

    족장은 무릎을 꿇은 채 지그시 눈을 감고 기다리다가 문득 기이한 느낌이 들어 번쩍 눈을 떴다.

    묘한 느낌이 온몸을 휘감고 있었다.

    그 느낌이 오는 곳은 석상들이 지키고 있는 무언가로부터였다.

    거긴 아무것도 없었지만, 분명히 뭔가가 있었다.

    그곳에서 쏟아진 기운이 사방 벽으로 스며들었다. 그리고 그때부터 넝쿨들이 꿈틀꿈틀 움직이기 시작했다.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는 몰랐다. 하지만 뭔가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건 분명했다.

    갑자기 근원의 나무가 걱정되기 시작했다.

    “가봐야 하나?”

    자신의 방으로 돌아가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확인해야 하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저기 석상들 사이에서 나올 현석을 맞이하고 싶기도 했다.

    둘 중 어느 것이 더 중요하냐고 다른 사람들에게 묻는다면 백이면 백 전자라고 할 것이다.

    현석은 그저 어딘가에 갔다가 돌아오는 것일 뿐이다. 그걸 맞이하느냐 마느냐가 뭐 중요하겠는가.

    하지만 자신의 방으로 돌아가 상황을 확인하는 건 일족의 안위가 달린 일이다.

    어떤 일이 벌어졌는지 알아야 숲의 종족들을 하나로 묶어 대처해 나갈 것 아닌가.

    족장의 마음에 갈등이 일어났다. 한참을 망설였다.

    그리고 놀랍게도 족장이 선택한 건 현석을 기다리는 것이었다.

    밖에서 뭔가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게 분명했다. 묘한 느낌이 온몸을 휘감았고, 끊임없이 덩굴이 움직였으니까.

    게다가 몸에 조금씩 힘이 들어차고 있었다.

    이 느낌이 정말 신기했는데, 마치 잃어버렸던 것을 되찾는 기분이었다.

    몸에 빈자리가 있고, 그 빈자리가 무언가로 차곡차곡 채워지고 있었다.

    그렇게 잃어버렸던 무언가를 완벽하게 되찾았을 때, 석상들 사이에서 현석이 훅 튀어나왔다.

    족장은 현석을 보자마자 자신이 올바른 선택을 했다는 걸 깨달았다.

    그 순간 몸에 걸려 있던 사슬이 뚝 끊어진 것이다.

    족장은 숲의 종족에게 걸린 그 지독한 사슬이 드디어 끊어졌다는 걸 깨달았다.

    현석은 투명던전에서 나오자마자 눈앞에서 자신을 향해 정중히 엎드려 절을 하는 숲의 종족, 족장을 보고는 움직임을 멈췄다.

    ‘뭐지?’

    처음에는 이게 대체 무슨 일인가 했다. 하지만 가만히 보고 있으니 왜 저러는지 알 수 있었다.

    숲의 종족을 얽고 있던 묘한 마력의 흐름이 사라졌다.

    그 마력의 끈은 근원의 나무와 연결되어 있었는데, 그래서 처음에는 근원의 나무가 전해주는 힘을 받는 통로라고 여겼다.

    한데 보면 볼수록 힘을 주는 것과는 상관이 없는 것 같아 이상하게 여겼다.

    ‘그게 이곳에 숲의 종족을 잡아둔 족쇄 같은 거였나 보네.’

    현석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좀 이해가 간다.

    “올라가죠. 아마…… 깜짝 놀랄 겁니다.”

    “예. 제가 안내하겠습니다.”

    족장의 말투가 달라졌다. 게다가 자세도 훨씬 공손해졌다. 마치 윗사람을 모시는 듯한 태도였다.

    족장과 현석의 발밑으로 덩굴들이 모여들었다. 그리고 그 덩굴이 두 사람을 위로 쭉 올려주었다.

    아까 내려올 때보다 훨씬 빠른 속도로 올라갔다.

    족장의 힘이 늘어났다는 걸 확실히 보여주고 있었다.

    두 사람은 순식간에 근원의 나무 꼭대기, 족장의 방에 도착했다.

    족장은 눈앞에 펼쳐진 광경을 보고는 깜짝 놀라 자신도 모르게 입을 떡 벌렸다.

    “이, 이게…… 이게 대체……!”

    잠깐 아래에 내려갔다 온 것뿐인데 세상이 바뀌어 있었다. 근원의 나무 주변의 그 허허벌판이 설마 이렇게 변할 줄이야.

    세상이 울창한 숲으로 뒤덮였다.

    그리고 그 숲으로부터 아주 익숙한 향기가 느껴졌다. 저 숲의 주인은 근원의 나무였다.

    아니, 저 숲 자체가 바로 근원의 나무였다.

    아마 속박의 사슬이 끊어지지 않았어도 숲의 종족은 훨씬 더 넓은 세상에서 살아갈 수 있었을 것이다.

    저기 펼쳐진 숲이 모두 그들의 공간이 될 테니까.

    족장은 창밖으로 펼쳐진 거대한 숲을 바라보며 격동에 몸을 부르르 떨었다.

    그리고 몸을 돌려 현석을 바라보고는 정중히 허리를 숙였다.

    “당신은 우리 일족의 은인입니다.”

    현석은 족장의 인사를 받은 순간 자신의 몸에 뭔가 미약한 변화가 찾아왔다는 걸 깨달았다.

    그게 무엇인지는 굳이 확인하지 않아도 짐작이 가능했다.

    현석은 상태창을 열었다. 역시 변화가 있었다.

    새 타이틀을 획득한 것이다.

    [숲의 은인-숲의 종족을 속박에서 구해준 자에게 주어지는 칭호. 숲에서의 회복력이 두 배로 늘어난다. 숲에 있을 때 모든 스탯이 10 증가한다. 스킬 숲의 주인을 쓸 수 있다.]

    타이틀을 확인한 현석의 눈이 번득였다. 이건 정말 유용한 타이틀이었다.

    특히 타이틀에 포함된 스킬, 숲의 주인은 이 스킬의 효용을 더욱 올려주는 사기 스킬이었다.

    [숲의 주인-반경100미터의 공간에 1시간 동안 가상의 숲을 소환한다. 진짜 숲이 아니기에 움직임의 제한은 없지만 숲에 들어간 것과 똑같은 효과를 준다. 하루에 두 번 사용 가능.]

    현석은 이 스킬을 한 번 써보고 싶었지만, 일단 뒤로 미뤘다.

    숲에서 또 숲을 소환해 봐야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하지만 꼭 확인하고 싶긴 했다. 가상의 숲을 소환한다는 게 어떤 의미인지, 또 그것이 전투에서 어떤 효과를 줄지 반드시 확인해 둬야했다.

    그래야 나중에 진짜 급할 때 이걸 써먹을 거 아닌가.

    이제 현석은 하루에 두 번 모든 스탯을 10 올리고, 두 배의 회복력을 가질 수 있게 되었다.

    안 그래도 자연회복이라는 스킬이 점점 발전해서 뛰어난 회복력을 갖고 있는데, 그게 두 배로 늘어난다면 대체 얼마나 대단해 지겠는가.

    웬만한 상처는 거의 즉시 치료가 될 것이다. 팔다리가 절단될 정도로 큰 상처만 아니라면 말이다.

    그런 현석을 상대할 적은 또 얼마나 당황하겠는가.

    현석의 입가에 슬며시 미소가 맴돌았다. 이번 신의 파편도 정말 현석에게 꿀 같은 선물을 주었다.

    문득 퀘스트 성공 보상으로 받은 마두스의 영혼이 떠올랐다. 그건 과연 어디에 써먹을 수 있을까?

    어쨌든 그 모든 것이 참으로 즐거운 상상이었다.

    현석이 그렇게 즐거움에 잠깐 빠져 있을 때, 족장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혹시 필요하신 게 있으십니까? 무엇이든 말씀하시면 힘닿는 데까지 해드리겠습니다.”

    그제야 현석은 자신이 신의 파편을 깨우느라 생명수를 모두 써버렸다는 사실이 떠올랐다.

    “이번 일에 생명수를 모두 써서 그런데 조금 더 주실 수 있습니까?”

    족장이 환하게 웃었다.

    “물론입니다. 얼마든지 드리겠습니다.”

    근원의 나무가 제대로 힘을 받아 세상을 뒤덮은 덕분에 나무의 수액이라 할 수 있는 생명수의 양도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많이 늘어났다.

    아무리 퍼줘도 생명수가 부족할 일은 없었다.

    근원의 나무에 힘을 끊임없이 전해주는 주체가 바로 신의 파편이었으니까.

    족장은 처음 현석에게 생명수를 전해줄 때와 같은 방식으로 나무등걸 모양의 물통을 만들어 그 안에 생명수를 가득 담아 주었다.

    크기도 어마어마했다. 처음 줬던 물통의 다섯 배는 될 법한 크기였다.

    생명수까지 챙긴 현석은 더 이상 여기 남아 있을 필요가 없어졌다.

    이제 떠날 때가 된 것이다.

    현석이 이곳 화이트홀에 들어온 건, 숲의 종족을 만나기 위함이 아니라 라이언과 추광열을 찾기 위함이었다.

    이제 진짜 목적을 위해 떠나야 할 때가 되었다.

    현석이 그 마음을 먹자마자 족장이 아쉬운 표정을 지었다.

    “표정을 보니 떠나시려는 모양이군요.”

    “할 일이 있어서요.”

    족장이 정중하게 말했다.

    “언제든 저희 일족의 힘이 필요하시면 찾아오십시오. 일족의 존망이 걸리지 않는 한, 또한 일족의 명예에 해가 되지 않는 한, 무슨 일이든 도와드리겠습니다.”

    멸족할 정도로 위험한 일이 아니라면 어떤 일이든 다 도와주겠다는 뜻이었다.

    그건 정말 대단한 호의였다.

    현석은 그 호의에 감사를 표했다. 당연히 거절하지는 않았다. 저 정도 호의를 보여주는데 거절하는 건 오히려 예의에 어긋나는 일이다.

    “호의 감사히 받겠습니다.”

    족장이 정중히 현석에게 허리를 숙였다.

    현석은 그런 족장을 향해 말했다.

    “나중에 또 볼 수 있으면 좋겠군요.”

    그 말을 끝으로 현석은 그곳에서 떠났다.

    창문을 통해 훌쩍 뛰어내렸는데, 사방에서 날아온 덩굴이 현석의 발밑을 단단히 받쳐 주었다.

    그리고 빠르게 바닥에 내려 주었다.

    ‘이건 정말 편하네.’

    어쩌면 덩굴을 타고 숲 위를 날아서 이동할 수도 있을 것 같았다.

    현석은 잠시 그런 생각을 하다가 근원의 나무를 힐끗 쳐다본 다음 돌아서서 걸음을 옮겼다.

    숲이 상당히 넓었지만, 빠져나가는 건 순식간이었다.

    마치 숲 자체가 현석이 빨리 나갈 수 있도록 도와주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물론 타이틀 덕분에 힘이 넘치는 것도 한몫 했고 말이다.

    * * *

    숲에서 나온 현석은 빠르게 이동했다. 어디로 가야 하는지는 모른다. 하지만 왠지 이쪽으로 가면 될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숲에서 나오니 한참동안 황무지가 이어졌다. 그리고 그 황무지의 끝에 거대한 호수가 있었다.

    호수 중앙에 제법 큰 섬이 하나 있었는데, 울창한 나무로 뒤덮여 있었다.

    가장자리는 제법 잘 자란 갈대가 쫙 펼쳐져 있었다.

    그냥 호수 밖에서 보기만 하는데도 위험한 느낌이 물씬 풍겼다.

    섬을 보고 있으니 왠지 저 섬에 들어가 확인해 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주위를 둘러보니 호숫가에 배들이 쫙 늘어서 있었다.

    노가 달려 있는 조각배였는데, 한두 사람이 타고 노를 저어 움직이는 배였다.

    저 배를 타고 섬으로 건너가면 될 듯했다.

    현석은 천천히 배를 향해 걸어갔다. 그리고 막 배에 올라타려는데, 뭔가 묘한 위화감이 엄습해왔다.

    그제야 퍼뜩 정신을 차린 현석이 심각한 표정으로 조각배들을 둘러봤다. 그리고 고개를 들어 호수 한가운데 떠 있는 섬을 쳐다봤다.

    섬에서 기이한 마력이 계속 흘러나오고 있었다. 또한 특이한 향이 끊임없이 풍겨 나왔다.

    마력과 향이 상당히 닮아 있었다. 둘 다 사람을 끌어당기는 힘을 갖고 있었다.

    순간적으로 정신이 딴 데 갈 정도로 강력한 힘을 발휘하는 마력과 향이었다.

    저 섬에 라이언과 추광열이 있을 거라는 확신이 조금 더 깊어졌다.

    그나마 현석은 레벨이 높고 마력에 대한 감각이 예민한데다가 저항력까지 갖췄기에 유혹에 빠지지 않고 정신을 차릴 수 있었다.

    아마 라이언이나 추광열은 그러지 못했을 것이다.

    현석은 호숫가로 다가가 예민하게 갈고 닦은 마력으로 호수 안을 살펴봤다.

    섬뿐 아니라 호수도 위험하기 짝이 없는 곳이었다.

    호수 아래에 거대한 마력을 품은 마수가 살고 있었다.

    저런 크고 강력한 마수가 물속에서 공격해 온다면 그야말로 속수무책이었다.

    게다가 자신이 저 작고 약한 조각배 위에 있다고 생각하면 더더욱 섬뜩했다.

    물론 그냥 쉽게 죽지는 않을 것이다. 아니, 결국은 싸워 이길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 뒤는 어쩌겠는가.

    호수 아래에 있는 마수보다 더 무서운 느낌이 드는 무언가가 저 섬에 살고 있는데 말이다.

    ‘과연…… 그 두 사람이 아직 살아있을까?’

    그건 알 수 없다. 하지만 그러기를 바라야만 했다. 현석은 그 두 사람을 만나 반드시 받아야 할 것이 있었으니까.

    “나와라.”

    현석의 말에 용이 등장했다. 너무 조용히 아무 효과도 없이 등장하기에 부를 때마다 좀 이상한 느낌이 들었다.

    현석은 별 쓸데없는 생각을 다 한다고 중얼거리며 용에 올라탔다.

    후우웅!

    용이 허공에 붕 떠올랐다.

    이런 위험한 호수를 굳이 배로 건널 필요는 없었다. 이렇게 날아서 건너가면 되니까.

    현석을 태운 용이 높이 떠올랐다. 혹시라도 물속에 있는 마수가 뛰어올라 공격하면 곤란하지 않은가.

    굳이 쓸데없이 힘을 낭비하고 싶지 않았다.

    용을 타고 날아가니 호수를 건너서 섬에 가는 건 금방이었다.

    호숫가에 내려선 현석은 일단 용을 되돌려 보냈다.

    현석의 앞에 갈대밭이 쫙 펼쳐져 있었다. 그리고 그 갈대밭이 끝나는 부분부터 숲이 시작된다.

    숲을 본 현석의 입가가 살짝 길어졌다.

    벌써 타이틀의 효과를 볼 수 있게 되었다. 과연 두 배의 회복력이라는 것이 얼마나 대단한 힘을 발휘할지 궁금하기 그지없었다.

    “우선은…… 이 갈대부터 어떻게 해야겠네.”

    갈대 속에 만일 마수라도 숨어 있으면 곤란하지 않은가.

    물론 현석의 감각에 걸려드는 마력의 흔적은 없지만, 세상에는 별 희한한 마수나 마족이 존재하는 법이다.

    불과 얼마 전에 마력과 기척, 그리고 모습까지 완벽하게 감출 수 있는 마족을 만나지 않았던가.

    현석은 검을 꺼내 가볍게 횡으로 휘둘렀다.

    슈가가가가가가각!

    현석이 휘두른 검의 궤적을 따라 부채꼴 모양으로 갈대가 모조리 잘려 나갔다.

    역시 별다른 마수가 숨어 있거나 하지는 않았다.

    현석은 심호흡을 하고는 가볍게 몸을 풀었다. 그리고 방금 만든 길을 따라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그럼, 가볼까?”

    < 세 번째 증표 1 > 끝

    ⓒ 김강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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