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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눈 뜨고 레벨업-191화 (191/326)
  • < 근원의 나무 3 >

    “저겁니다.”

    족장이 경건한 표정으로 석상들을 바라보며 말했다.

    “솔직히 말하면…… 나도 저게 무엇을 의미하는 건지 모르오. 그리고 저 석상들이 대체 무엇을 지키고 있는 건지도 모르오. 어쩌면…… 그 무언가는 이미 이곳에 없을 수도 있겠지.”

    당연히 모르겠지. 저기엔 투명 던전이 있으니까.

    현석은 새삼스러운 눈으로 투명 던전을 쳐다봤다.

    솔직히 족장은 투명 던전의 존재를 알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보아하니 모르는 모양이다.

    ‘아까 나무 다루는 거 보니까 웬만한 수준으로는 어림도 없을 거 같던데.’

    물론 마력 컨트롤에 대한 타이틀은 없었다. 하지만 꼭 타이틀이 있어야 하는 건 아니지 않은가.

    ‘하긴. 마력 컨트롤 능력이랑 마력 감지능력이랑은 좀 다르니까.’

    류혜연도 투명던전으로 이루어진 집의 문을 여닫게 만드는 데 제법 시간이 걸렸다.

    그녀는 감각이 뛰어난데도 사실 투명 던전을 썩 잘 감지하지 못했다.

    다만 특유의 컨트롤 능력 덕분에 문을 열고 닫을 수 있게 되었을 뿐이다.

    그러니 족장이 이곳에 투명 던전이 있다는 사실을 모르는 것도 크게 이상할 건 없다.

    ‘그래도 이상하긴 해. 마치…… 날 위해 준비해둔 것 같은 느낌이 계속 드니…….’

    투명 던전을 볼 때마다 그런 생각이 어렴풋이 들었다. 저건 자신을 위해 누군가 준비해둔 선물이 아닐까?

    사실 따지고 보면 시력을 잃은 플레이어가 현석 말고도 또 있을 수도 있지 않은가.

    한데 그런 플레이어들은 과연 투명 던전을 못 찾아낼까? 그럴 리 없다.

    ‘뭐…… 나 같은 경우가 흔치는 않겠지만.’

    현석은 정말로 특이한 케이스이긴 했다. 회귀 전에 스승으로 임형석을 만났으니까.

    임형석이 아니었다면 아마 살아가는 것 자체가 쉽지 않았을 것이다.

    시력도 없이 플레이어 생활을 한다? 어림도 없는 일이다.

    그런 생각을 하면 현석이 시력 없이 활발한 활동을 하고 고레벨에 도달한 유일한 플레이어일 것 같기도 했다.

    어쨌든 어느 하나 확실한 건 없다.

    하지만 현석은 왠지 투명 던전을 이용할 때마다 그런 생각이 들었다.

    ‘뭔가…… 마치 날 기다리고 있는 느낌?’

    그러니 이렇게 많은 투명 던전을 발견하는 것 아니겠는가. 마치 그 자리에서 현석을 애타게 부르고 있는 것처럼 말이다.

    어쨌든 현석은 투명 던전이 있는 쪽으로 걸어갔다.

    투명 던전을 지키듯 서 있는 석상에도 묘한 마력이 흘렀다. 보아하니 정말로 투명 던전을 지키고 있는 듯했다.

    현석이 투명 던전에 손을 갖다 대자 파직 거리며 스파크가 튀었다.

    빠지지직!

    현석의 전격 속성이 워낙 높았는지라 그 정도 스파크로는 아무 영향을 줄 수 없었다.

    아니, 오히려 그 스파크들을 몸으로 흡수해 버렸다.

    그 광경을 지켜보던 족장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 그게 뭐요?”

    지금까지 이곳을 지켜오면서 정말 별의 별 일을 다 시도해봤다.

    한데 그 누구도 저런 현상을 일으키지 못했다.

    저긴 그냥 빈 공간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현석은 고개를 돌려 족장을 보며 물었다.

    “여기서 뭔가의 존재감을 느낀 적이 없습니까?”

    족장은 고개를 저었다.

    “거기 뭔가가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은 해 봤소. 하지만…… 아무도 그걸 증명해내지 못했소.”

    그랬다면 이곳에 있는 무언가가 원래 있다가 사라졌을 거라고 여기는 것이 당연한 수순이었다.

    사실 숲의 종족들도 그런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래서 최근 회의론이 크게 올라오는 중이었다. 우리가 이렇게 여기서 전설의 존재를 기다리는 게 과연 의미가 있는 일이냐고 말이다.

    있지도 않은 걸 지키며 기다리다가 막상 그런 존재가 왔을 때, 오히려 제대로 지키지 못했다고 책망이나 들으면 어쩌냐고 말이다.

    그래서 족장은 간절한 눈으로 현석을 바라봤다.

    이제 숲의 부족을 유지하는 것도 슬슬 한계에 도달했다.

    튀어나가려는 자들만 있는 건 아니었다. 하지만 그렇지 않은 자들은 이제 슬슬 도태의 길을 걷고 있었다.

    숲의 종족은 너무 오랫동안 제자리에 머물러 있었다.

    사실 그건 퇴보와 같은 의미였다.

    이대로 더 시간이 지나면 숲의 종족은 근원의 나무와 하나가 되어버릴 것이다.

    그건 멸족이다.

    그 모든 생각이 족장의 눈과 표정에 담겨 있었다.

    현석은 족장의 간절함이 마음에 닿는 것 같아 고개를 돌렸다.

    왠지 계속 보고 있으면 불편했다.

    ‘뭐…… 전설의 사람이 나인지는 모르지만, 이걸 해결할 수 있는 사람은 나밖에 없을지도 모르겠네.’

    물론 이곳에 들어가 신의 파편을 활성화 시키면 여기가 어떻게 변할지는 전혀 예상치 못하겠지만 말이다.

    어쨌든 현석은 족장에게 여기 있는 것의 의미를 얘기해줄 필요가 있다고 여겼다.

    “여기에 신의 흔적이 있습니다.”

    현석의 말에 족장의 눈이 화등잔만 해졌다. 그리고 이내 그의 눈에 희열이 맺혔다.

    거대한 감정의 폭풍이 족장의 온몸을 후려쳤다.

    현석은 격동하는 족장을 힐끗 쳐다보고는 투명 던전 안으로 스윽 들어갔다.

    빠지지직!

    석상에서 일어난 전류가 주변에 한 차례 몰아쳤다.

    전류가 사라진 자리에는 아무도 없었다.

    족장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전설이…… 실현되었어!”

    수천 년을 기다려온 전설의 존재가 드디어 나타난 것이다.

    족장은 그 자리에 무릎을 꿇고 앉아 조용히 눈을 감았다.

    현석이 다시 나타날 때까지 이곳에서 기다리겠다고 결심했다.

    전설의 존재가 수천 년간 이어온 사슬을 끊는 순간을 자신의 두 눈으로 똑똑히 지켜보고 싶었다.

    ‘내가 맞이하리라.’

    눈을 감고 꿇어앉은 족장의 몸이 격동으로 부르르 떨렸다.

    * * *

    현석은 긴장감을 유지한 채 주위를 둘러봤다.

    이곳은 밀림이었다. 사방이 울창한 나무였고, 날씨는 무더웠다.

    나무마다 덩굴들이 축축 늘어져 있었는데, 묘하게 어딘가에서 본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아, 나무 지하로 내려갈 때…….’

    그때 현석을 단단히 받쳐주던 덩굴과 상당히 닮아 있었다. 벽을 쫙 바르고 있던 그 덩굴들 말이다.

    ‘뭐…… 이게 그건 아니겠지.’

    근원의 나무에서 투명 던전 안까지 덩굴이 이어졌을 리는 없으니 아마 서로 다른 덩굴일 것이다.

    하지만 묘한 느낌을 지울 수는 없었다. 왠지 계속 신경이 쓰였다.

    지난번 신의 파편 때는 까마득한 절벽 위에 있었고, 어마어마한 수의 마수들이 쫙 깔려 있었다.

    한데 이번엔 밀림이니 과연 어떤 던전일지, 또 신의 파편은 어디에 있을지 궁금했다.

    “일단…… 위치부터 파악해야겠는데?”

    현석은 일단 나무 위로 올라갔다. 그리고 주위를 둘러봤다.

    저 멀리 높은 절벽이 보였다. 폭포가 쏟아지고 있었다.

    일단 저 위에 올라가면 시야 확보가 가능할 것 같았다. 현석은 빠르게 절벽을 향해 달려갔다.

    폭포를 거슬러 위로 쭉쭉 올라간 현석은 절벽 꼭대기에 도착해 주변을 둘러봤다.

    끝없는 나무의 바다가 펼쳐져 있었다. 그리고 절벽 뒤쪽도 또 울창한 밀림이었다.

    현석은 갑자기 이상한 기분이 들어서 절벽 위에 있는 나무 꼭대기에 올라갔다.

    그러자 저 멀리 또 절벽이 보였다. 거기서도 폭포가 쏟아지고 있었다.

    “이건 뭐지?”

    마치 계단 형으로 폭포와 밀림이 이어져 있는 것 같지 않은가.

    그런 생각이 든 현석은 폭포를 향해 빠르게 달려갔다. 나무 위를 껑충껑충 뛰어서 이동했기 때문에 순식간에 폭포에 도착할 수 있었다.

    그 폭포에 올라가니 또 나무들이 보였고, 그 나무 위에 올라가니 저 뒤쪽에 폭포가 있었다.

    그렇게 몇 번을 반복한 끝에 현석은 가장 끝에 있는 폭포 꼭대기에 도착할 수 있었다.

    “이번 건 더 넓은 거 같은데?”

    결정적으로 지난번과 달리 신의 파편이 있을 만한 곳이 보이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마수도 없었다.

    아마 이 던전 안에는 마수가 없는 게 분명했다.

    “그러니 이렇게 마력이 깨끗하지.”

    만일 던전에 마수가 많았다면 분명히 어딘가에서 난폭한 마력의 흐름이 느껴졌을 것이다.

    물론 아주 먼 곳에 마수가 있다면 얘기가 좀 달라지겠지만, 현석이 보기에는 그런 것 같지도 않았다.

    이곳 절벽 꼭대기에서 보니, 사방으로 폭포가 쏟아지고 있었다.

    마치 밀림과 폭포로 10단 케이크를 만들어 놓은 것 같았다.

    사방으로 거대한 폭포가 쏟아지고 있었고, 그 아래에 사각 밀림이 펼쳐져 있다. 그리고 각각의 끝에 또 폭포가 쏟아지고 있었고, 절벽 아래에는 사각 밀림이 있었다.

    그런 식으로 거대한 밀림의 케이크가 만들어져 있었다. 제일 아랫부분의 넓이는 어찌나 어마어마한지 돌아다닐 엄두도 안 날 정도였다.

    현석은 문득 자신이 서 있는 곳이 이 던전의 중심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어쩌면 이 밀림 케이크는 10단이 끝이 아닐 수도 있었다. 저 끝이 보이지 않는 부분 어딘가에 폭포가 있고, 그 뒤로 또 밀림이 펼쳐져 있을지도 모른다.

    아니, 분명히 그럴 것이다.

    “진짜…… 어마어마하네.”

    이번 던전의 규모는 지금까지 중 최고였다.

    현석은 고개를 숙여 발아래를 내려다봤다. 평평한 돌바닥이었다.

    문득 아까 숲의 종족, 족장이 하던 행동들이 떠올랐다.

    근원의 나무에서 손바닥 하나로 모든 것을 하던 그 행동들 말이다.

    현석은 뭔가에 홀린 듯 몸을 숙여 한쪽 무릎을 땅에 대고 앉았다.

    그리고 절벽 정상에 있는 평평한 공터의 한가운데를 찾아 정확히 그 자리에 손바닥을 갖다 댔다.

    그 다음, 지그시 눈을 감았다.

    모든 감각을 손바닥에 집중했다.

    처음에는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았다. 그저 차가운 돌바닥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자 차츰 뭔가 묘한 느낌이 손바닥을 콕콕 찌르는 듯했다.

    ‘마력!’

    이 돌바닥 아래에 마력이 흐르고 있었다. 정체를 알 수 없는 마력의 흐름을 느낀 현석은 그걸 컨트롤 해보기로 했다.

    현석의 온몸에 땀이 줄줄 흘렀다. 그 땀이 증발해 뿌연 김이 무럭무럭 솟아났다.

    현석이 마력 컨트롤에 집중하면서 어마어마한 에너지를 소모하고 있다는 뜻이었다.

    ‘잡았다!’

    한동안 헤매던 현석의 얼굴에 기쁨이 잠깐 스쳐 지나갔다. 흐르는 마력을 자신의 컨트롤 능력으로 한 가닥 잡아 챘다.

    이제부터는 진짜 시간과 노력 싸움이었다.

    현석은 한 가닥 잡은 마력의 끈을 쭉 끌어당겨 자신의 손바닥에 단단히 고정했다. 그리고 그걸 이용해 새로운 마력을 낚기 시작했다.

    한 올, 또 한 올, 그렇게 마력의 끈이 현석의 손아귀에 들어왔다.

    그리고 어느 순간 거대한 마력의 흐름이 현석의 컨트롤 아래에 들어왔다.

    현석의 얼굴에 희열이 떠올랐다. 어마어마한 성취감과 쾌감이 온몸에 들끓어 올랐다.

    이 절벽 아래에는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막대한 마력이 응축되어 있었다.

    현석이 해낸 건 그 마력의 끝단을 꽉 움켜쥔 것이다.

    모든 마력을 컨트롤할 수는 없었다. 그러기에는 마력의 양이 너무 많았고, 너무 강력하게 압축되어 있었다.

    하지만 애초에 이 마력들이 할 수 있는 일에 이용하는 건 가능했다.

    지금처럼 말이다.

    그그그그그긍!

    돌 긁히는 소리와 함께 현석의 손바닥 아래가 진동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서서히 바닥을 이루고 있던 돌이 투명해지기 시작했다.

    이내 사방 1미터 정도 되는 구멍이 생겨났다. 마치 원래부터 그 자리에 돌이 없었던 것처럼 아주 말끔하고 자연스럽게 생겨난 구멍이었다.

    현석은 구멍 안을 들여다봤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일단 들어가 봐야 뭐든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보이지도 않는 구멍에 뛰어드는 건 미련한 짓이다.

    하지만 현석은 망설이지 않고 휙 뛰어들었다.

    촤라락!

    어느새 나타난 덩굴이 현석의 발을 단단히 받쳐 주었다. 아까 근원의 나무에서 아래로 내려갈 때와 똑같은 현상이었다.

    현석은 사방을 둘러봤다. 어마어마한 양의 덩굴이 이 안을 가득 메우고 있었다.

    그리고 현석의 발을 단단히 받친 덩굴이 아래로 빠르게 내려갔다.

    아까 근원의 나무에서 내려가던 것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오랫동안 내려간 다음에야 바닥에 도착할 수 있었다.

    바닥에 도착한 현석은 경이로운 표정으로 사방을 둘러봤다.

    이제 이곳이 신의 파편이라는 확신을 가질 수 있었다.

    < 근원의 나무 3 > 끝

    ⓒ 김강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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