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아르포르 3 >
투타타타타타타!
시끄러운 헬기 소리에 칼슨은 눈살을 찌푸렸다. 하지만 사실 그런 데에 신경을 쓸 여유 따윈 없었다.
검은 물결이 고가도로 위에서 사방을 난장판으로 만들고 있었다.
이미 렉스턴 에너지에서 다시 가져온 장비는 박살 난 지 오래였고, 이곳을 지키던 플레이어들도 다들 쓰러져 버렸다.
그리고 뒤늦게 출동한 경찰들 역시 검은 물결을 막아내지 못했다.
그들은 그렇게 렉스턴 에너지에 그야말로 막대한 손해를 안겨주고는 바람처럼 사라져 버렸다.
“쫓아가! 저놈들 당장 쫓아가라고!”
칼슨의 외침에 헬기가 검은 물결을 쫓아가기 시작했다.
“카메라 돌려. 저놈들 일단 다 찍어. 나중에 분석이라도 해야 할 거 아냐!”
“이미 찍고 있습니다.”
래리는 그렇게 대답하며 어두운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쫓아가고 있긴 하지만 저들을 잡을 수는 없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저들은 상당히 빨랐다. 단순히 빠르기만 하면 헬기로 얼마든지 쫓아갈 수 있었다.
하지만 저들은 분명히 다른 걸 이용할 것이다.
“경찰들은 뭐 하고 있어!”
“새로 병력 투입했다고 방금 연락 왔습니다.”
확실히 그동안 꾸준히 여기저기 로비를 한 보람이 있었다. 칼슨이 원하기만 하면 경찰이고 뭐고 빠릿빠릿하게 움직이니 말이다.
“저놈들 뭐 하는 거야!”
칼슨이 경악해 외쳤다. 갑자기 골목으로 들어가더니 맨홀 뚜껑을 열고 다들 하수구로 쏙쏙 들어가고 있었다.
이런 식이면 절대 저들을 잡을 수 없다. 저들은 고레벨 플레이어도 한 방에 골로 보내버린 강자들이니까.
“하수구에 병력 투입하라고 연락보내.”
“예.”
하지만 래리는 그렇게 대답하면서도 오늘 상황은 이제 끝났다고 판단했다.
저들을 다시 볼 일이 있을지는 모르지만, 일단 오늘 저들의 뒤를 잡아내는 건 불가능했다.
‘대체 어디서 나타난 놈들이지? 설마 정말로 거기에 던전이라도 있었던 걸까?’
래리의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만일 정말로 거기에 던전이 있다면, 눈에 보이지 않는 투명한 던전의 출현이었다.
그동안은 블랙홀과 화이트홀밖에 없다고 알려진 던전이 사실은 한 가지가 더 있었던 것이다.
‘투명 던전이라니…….’
래리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어쩌면 플레이어 세상이 격변하게 될 시작을 자신이 지금 보고 있는 건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쨌든 래리의 예측대로 그날의 소동은 그렇게 끝났다.
그리고 칼슨은 더더욱 많은 장비와 인력을 동원해 고가도로의 그 의심스러운 부분에 집착했다.
이번에는 래리도 딱히 말리지 않았다. 만일 거기에 투명한 던전이 있고, 그 던전에 들어갈 수 있게 된다면 렉스턴 에너지는 새로운 발견을 하게 될지도 모른다.
투명 던전을 찾아내는 기술 같은 것 말이다.
* * *
케틀러는 어둡고 눅눅한 하수도를 빠르게 이동했다. 길은 모르지만 목적지를 찾지 못할 염려는 없었다.
케틀러를 비롯한 모든 아르포르 기사단은 검은 로브를 입고 있었다. 그리고 로브에 달린 후드를 깊숙하게 뒤집어 쓰고 있었다.
로브 아래로 드러난 다리도 검은 옷과 검은 부츠 때문에 그저 검게만 보였다.
그러니 이들이 일제히 움직이면 검은 물결이 흘러가는 것처럼 보이는 게 당연했다.
게다가 칼슨은 위에서 봤으니 더더욱 검은 물결 같았으리라.
어쨌든 케틀러는 아르포르 기사단을 이끌고 목적지를 향해 빠르게 이동했다.
하수도로 들어온 것도 그저 도망치기 위해서만은 아니었다. 애초에 이곳에 들어와 목적지를 찾아가기로 되어 있었다.
케틀러는 미리 던전 출구로 나온 뒤에 뭘 어떻게 해야 할지에 대한 교육을 받았다.
근처의 지형과, 환경, 그리고 어떤 적들이 기다리고 있을 것이며, 또 어떤 놈들이 추가로 오게 될지에 대해서도 아주 자세히 교육 받았다.
처음에 뭘 하고, 어느 방향으로 도망가며, 어디에 있는 맨홀 뚜껑을 열고 하수구에 들어갈지 까지 모두 사전에 계획되어 있었다.
당연히 그 계획은 세운 사람은 양동욱이었다.
현석은 양동욱과 함께 계획을 세운 다음 직접 케틀러와 에르포르 기사단을 교육시켰다.
케틀러도 그렇고 아르포르 기사단도 그렇고, 애초에 이런 일에 아주 능숙한 자들이었다.
물론 오랜 세월을 갇혀 있느라 감이 많이 떨어지긴 했지만, 기본이 있기에 그 감을 끌어올리는 것도 그리 어렵거나 시간이 오래 필요치 않았다.
“이쪽이군.”
케틀러는 손에서 붉게 점멸하는 구슬을 보며 방향을 바꿨다.
지하 하수도는 거미줄 같았다. 아마 이 구슬 없이 들어왔다면 정말 난감했을 것이다.
안 그래도 잘 모르는 생소한 세상인데, 그곳 지하에서 길을 잃으면 얼마나 당황스럽겠는가.
하지만 지금의 케틀러는 당황할 필요가 전혀 없었다.
목적지까지 길을 안내해주는 아티팩트를 들고 있었으니까.
일명 마력탐색기였다.
특별한 파장의 마력의 위치를 찾을 수 있는 아티팩트인데, 그 중에서도 성능이 아주 뛰어난 것이었다.
케틀러는 구슬을 든 손을 앞으로 내민 채 천천히 회전시켰다.
구슬이 붉게 깜빡였는데, 그 속도가 위치에 따라 다 달랐다. 가장 빠르게 깜빡이는 쪽이 바로 목적지가 위치한 방향이었다.
그쪽으로만 계속 가면 된다.
케틀러는 중간중간 계속 그렇게 방향을 확인하며 이동했다.
하수도의 구조가 워낙 복잡했기 때문에 직선으로만 이동할 수 없기에 계속 방향을 확인해주지 않으면 자칫 엉뚱한 곳으로 갈 수도 있었다.
그렇게 얼마나 이동했을까. 구슬이 더 이상 점멸하지 않고 그저 붉게 빛나기만 했다.
“드디어 도착했다.”
케틀러의 말에 그 뒤를 따르던 아르포르 기사단이 일제히 그를 바라봤다.
케틀러는 정확히 위를 올려다봤다.
맨홀 뚜껑이 있었다.
저걸 열고 나가면 바로 그곳이 목적지였다.
케틀러는 위로 올라가 뚜껑을 열였다. 그리고 고개를 위로 내밀었다.
깜깜한 밤이었다. 그리고 그곳은 어느 골목의 중간쯤이었다.
아까 뚜껑을 열고 들어간 곳과 상당히 비슷했는데, 그렇다고 아까 거기는 아니었다.
케틀러는 일단 위로 올라갔다. 그러자 나머지 아르포르 기사단도 하나씩 따라 올라왔다.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케틀러는 갑자기 들려온 목소리에도 놀라지 않았다. 그곳에 누군가가 있다는 사실은 맨홀 뚜껑을 열기 전부터 알고 있었으니까.
그 누군가가 지금까지 찾은 마력반응의 주인공이었기에 신경 쓰지 않고 올라온 것이다.
“모두 올라오기엔 좀 좁으니 빨리 갑시다.”
“이쪽으로 따라오시지요.”
기다리고 있던 사내가 그렇게 말하고는 다급히 걸음을 옮겼다.
일단 골목을 빠져나가 근처에 있는 허름한 건물로 들어갔다. 어찌나 허름한지 손으로 밀면 툭 쓰러질 것처럼 생겼다.
그 건물 안으로 케틀러를 비롯한 아르포르 기사단 전원이 들어갔다.
“이곳에서 며칠만 지내십시오. 곧 암시장이 완공되니 그때 이동하시면 됩니다.”
케틀러는 그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거기에 대한 얘기는 현석에게 미리 들었다. 아르포르 기사단은 암시장을 보호하는 임무를 받은 것이다.
처음 현석은 케틀러에게 암시장 보호라는 얘기를 꺼내며 이들이 거부감을 가질 거라 여겼다.
한데 의외로 아르포르 기사단은 누구도 그런 명령에 거부감을 보이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더 좋아하는 것처럼 보였다. 현석이 보기에 아르포르 기사단은 그 임무에 설레고 있었다.
처음에는 그저 오랜만에 임무라는 걸 받아서 그런 거라 생각했다. 한데 알고보니 그게 아니었다.
아르포르 기사단은 애초에 그냥 보통 기사단이 아니었다. 황제가 내리는 어둠 속의 명령을 수행해 오던 기사단이었다.
그러니 이들에게 암시장 보호 같은 임무는 아주 익숙한 종류였다. 대놓고 하기 어려운 것들을 은밀히 처리하는 임무였으니까.
“그리고 그분께서 옷을 갈아입으라 하셨습니다.”
“옷을?”
케틀러의 어조에 강한 거부감이 섞여 있었다. 말하는 사내가 그걸 못 알아차릴 리 없다. 그는 눈치로 먹고 사는 사람이었으니까.
“아무 옷이나 입지 않으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잘 알고 있군.”
현재 아르포르 기사단에게 있어서 옷은 정말 중요했다. 그건 그들의 존재를 세상에 잡아주는 역할을 하고 있었으니까.
“그분께서 미리 옷을 준비해 주셨습니다.”
사내는 그렇게 말하고는 황급히 달려가 옆방으로 이어진 문을 활짝 열었다.
열린 문을 통해 방의 모습이 보였다.
그 방에는 새하얀 옷이 걸린 옷걸이가 쫙 걸려 있었다. 정확히 101벌의 옷과 부츠가 마련되어 있었다.
“흰색이군.”
“예. 아주 특별히 제작한 옷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케틀러는 만족스러웠다. 케틀러뿐 아니라 아르포르 기사단 전체가 옷을 보고 만족스럽게 웃었다.
그들은 지금까지 너무 오랜 세월을 어둠 속에서 검은 붕대를 감고 살아왔다.
솔직히 이제 검은 색은 신물이 날 정도로 싫었다.
“역시 마음에 드는 주군이야.”
케틀러는 로브를 벗었다. 그러자 나머지 아르포르 기사단도 모두 로브를 벗어던졌다.
그렇게 드러난 모습을 본 사내가 자신도 모르게 헛바람을 삼켰다.
온통 새까만 옷을 입은 자들이었다. 한데 얼굴이 없었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얼굴이 검은 연기로 이루어져 있었다.
검은 연기가 둥그스름하게 뭉쳐 얼굴과 머리 역할을 하고 있었다.
신기하게도 그 안에 눈은 있었다. 물론 사람의 눈과는 많이 달랐다. 그저 반짝이는 빛이었을 뿐이니까.
검은 연기로 이루어진 얼굴에 빛나는 눈을 가진 사람 101명이 서 있었다.
그것도 검은 옷을 입고서 말이다.
사내는 자신도 모르게 덜덜 떨었다. 그리고 주춤주춤 뒤로 물러났다.
“우리 얼굴이 좀 이상하지?”
“아, 아, 아, 아닙니다! 그렇지 아, 않습니다!”
“마음에 없는 말을 하는 놈들은 주로 말을 더듬더군.”
“아, 아, 아닙니다! 아, 안 더듬겠습니다!”
케틀러는 과하게 반응하는 사내에게 다가갔다. 사내가 사시나무처럼 몸을 덜덜 떨었다.
이러다가 소변이라도 지릴 것 같아서 케틀러는 최대한 부드럽게 그의 어깨를 툭툭 두드려 주었다.
“겁먹을 거 없어. 이래봬도 아주 멀쩡한 사람이니까.”
사내는 너무나 황당했지만 그 감정을 얼굴에 드러낼 수는 없었다.
멀쩡하긴 뭐가 멀쩡하단 말인가. 얼굴이 검은 연기로 이루어진 사람이 대체 어떻게 멀쩡한 사람일 수 있단 말인가.
물론 그건 생각으로 그쳤다. 사내는 자신의 생각을 꾹 참을 줄 아는 아주 이성적인 사람이었으니까.
그러는 사이 케틀러와 아르포르 기사단은 방으로 들어가 옷을 갈아입기 시작했다.
그냥 함부로 옷부터 싹 벗고 입으면 절대 안 된다.
하나씩 해야 한다. 그래야 존재가 흩어지지 않고 유지될 테니까.
“그나저나…… 흰 옷을 입고 싸우면 피가 묻어서 별로이긴 한데…….”
케틀러가 중얼거리는 말에 사내는 또 정신이 번쩍 들었다.
새삼 이들이 절대 정상적인 보통 사람, 그러니까 멀쩡한 사람이 아닐거라는 생각에 확신이 더해졌다.
이내 아르포르 기사단이 옷을 모두 갈아입었다.
새하얀 옷으로 갈아입은 그들의 모습은 상당히 그럴듯했다. 마치 신성한 기사단 같았다.
그리고 정말 신기하게도 흰 옷으로 갈아입고 나니 얼굴을 이루는 연기도 하얘졌다.
사내는 멍하니 그렇게 변신한 아르포르 기사단을 바라봤다.
아르포르 기사단은 거기에 흰 로브까지 입고 후드를 뒤집어썼다.
아까와 똑같은 모습에 정확히 색깔만 바뀐 셈이었다.
“이거…… 정말 마음에 드는군.”
케틀러는 자신의 몸을 이리저리 살피다가 저 멀리 멍한 얼굴로 서 있는 사내를 보며 물었다.
“어때? 괜찮지 않나?”
“아! 괘, 괘, 괜찮, 아니! 머, 멋집니다! 예! 아주 멋집니다!”
사내의 말에 케틀러를 비롯한 아르포르 기사단 전원이 기분 좋게 웃었다.
케틀러는 흰 옷을 입으며 분명히 느낄 수 있었다. 이 옷은 보통 옷이 아니라는 것을 말이다.
이걸 입으니 온몸에 힘이 넘쳐흘렀다.
케틀러는 사내를 보며 나직하지만 힘 있게 말했다.
“주군께 전해드리게. 아르포르가 준비를 마쳤다고. 이제 날아오를 수 있을 거라고.”
< 아르포르 3 > 끝
ⓒ 김강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