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두눈 뜨고 레벨업-179화 (179/326)

< 아르포르 1 >

케틀러는 온몸을 옭아매던 질긴 사슬이 툭툭 끊어져 나가는 걸 느꼈다.

황제의 사면령은 그와 그의 동료들에게 걸린 모든 속박을 풀어주었다.

그 질긴 저주와 속박을 단숨에 끊어내는 걸 보면 황제의 사면령이 대단하긴 대단하다 싶었다.

케틀러의 몸에 칭칭 감긴 검은 붕대가 흐물흐물해지기 시작했다.

그걸 본 현석이 얼른 컨테이너 박스 하나를 꺼냈다.

그 안에는 가죽갑옷 형태의 아티팩트들이 잔뜩 들어 있었다. 현석은 정확히 101개의 가죽갑옷 세트를 꺼냈다.

산처럼 쌓인 가죽갑옷을 보는 케틀러의 눈빛이 살짝 흔들렸다.

이대로 검은 붕대가 풀어지면 그는 더 이상 이 세상에 남아 있을 수 없다. 모든 힘이 흩어진 채 영혼은 제 갈 길을 가게 된다.

이 세상에서 사라지게 되는 것이다.

잠시 망설이던 케틀러는 결국 가죽갑옷을 입었다.

그가 갑옷을 입자, 나머지 아르포르 기사단도 모두 갑옷을 입었다.

“내가 설마 소멸을 아쉬워하게 될 줄은 몰랐군.”

케틀러는 지나칠 정도로 오랫동안 어둠 속에서 고독과 싸워왔다. 그래서 소멸을 간절히 바랄 정도가 되었다. 그 정도로 어둠과 고독이 싫었다.

한데 막상 모든 속박과 저주가 끊어져 이 세상을 떠날 수 있게 되고 나니, 미련이 생겼다.

진짜 세상을 보고 싶었다. 그리고 진짜 육체를 갖고 싶었다. 정말 미치도록 말이다.

케틀러는 현석을 보며 말했다.

“이 가죽갑옷…… 그저 임시방편이라는 거 알고 있나? 아마…… 몇 시간 버티지 못할 거야.”

아르포르 기사단의 영혼이 저 세상으로 가지 않고 현세에 남을 수 있도록 붙잡아둔 것은 아이러니하게도 저주, 그러니까 봉인의 천이었다.

그리고 그 저주가 풀리면서 봉인의 천도 풀려 나가고 있었다.

갑옷은 그저 봉인의 천이 풀리는 걸 잠시 막아주는 역할을 할 뿐이었다.

뭔가 좀 더 근본적인 대처가 필요했다.

현석은 케틀러와 아르포르 기사단을 슥 둘러봤다. 다들 비슷한 눈빛을 하고 있었다.

그들의 눈빛에 담긴 짙은 미련을 보며 현석은 천천히 말을 꺼냈다.

“다들 세상에 남고 싶나?”

현석의 물음에 아르포르 기사단은 일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가장 앞에 선 케틀러가 물었다.

“가능한가? 내 생각엔…… 그리 쉽지 않아 보이는데.”

현석은 일단 대답하지 않았다.

가능하긴 하다. 하지만 확신할 수 없었다. 어쩌면 확인하는 데 시간이 좀 걸릴지도 모른다.

운이 좋으면 지금 당장 될지도 모르고 말이다.

이들을 세상에 남길 가능성을 확인한 건, 사실 신과의 소통 덕분이었다.

그때 뇌리를 자극했던 그 넓은 시야가 현석의 마법 응용력을 한 단계 상승시켰다.

여러모로 이번 퀘스트는 정말로 유용했다.

현석은 생각을 좀 정리한 다음 케틀러를 보며 물었다.

“세상에 남으면 어디서 뭘 할 생각이지? 그냥 여기서 지낼 건 아니지?”

“당연히 아니지! 여기서 나가야지. 나가서 더 넓은 세상을 봐야지.”

“그게 끝인가?”

케틀러가 고개를 저었다.

“널 도울 거다.”

“날?”

케틀러는 망설임 없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말했다.

“황제폐하의 사면령이 그저 우리의 죄를 사하기만 한 건 아니더군.”

“그럼?”

“사면령을 가져온 너를 따라야 할 의무가 생겼다.”

현석은 눈을 빛내며 케틀러를 쳐다봤다. 그리고 아르포르 기사단을 둘러봤다.

저들은 아마 사면령이 발동한 순간 그것을 알아차리고 느꼈을 것이다.

“하지만 그건 강제 사항이 아니잖아. 그저 단순한 지시일 뿐 아닌가?”

현석의 말에 케틀러가 정색을 했다.

“우린 아르포르 기사단이다. 황제 페하께서 직접 휘두르실 수 있는 유일한 검이야! 그리고 페하는 그 검을 네게 건넨 것이다.”

현석은 담담한 얼굴로 케틀러를 쳐다봤다.

케틀러는 그런 현석을 똑바로 마주보며 말을 마무리했다.

“황제폐하의 마지막 지시야. 내가, 아니, 우리가 그걸 어길 것 같나?”

현석은 아르포르 기사단 전원을 둘러봤다. 그들 역시 케틀러와 같은 마음인 듯했다.

그 황제의 명령으로 지하감옥에 갇혀 억겁의 세월을 고통 받았는데, 또 그 황제의 마지막 명령을 듣겠다니.

현석은 솔직히 자신이라면 절대 그런 선택을 하지 않을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그들을 이해할 수도 있을 것 같았다.

“그나저나…… 너 원래 알고 있었군? 사면령에 다른 명령이 포함되어 있다는 걸 말이야.”

현석은 고개를 끄덕였다.

심안이 한 단계 성장하면서 사면령에 대한 자세한 설명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 설명을 통해 사면령에 함께 포함된 황제의 명령도 알 수 있었다.

하지만 굳이 그 말을 하지 않았다. 황제의 명령에는 강제성이 없다는 걸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현석은 저들이 원치 않는다면 굳이 강제로 붙잡을 생각이 없었다.

지금까지 자유가 속박된 채 어마어마하게 오랜 세월을 버텨왔으니, 이제는 좀 보상을 받을 때도 되었다고 생각했다.

물론 저들이 원한다면 말이다.

한데 아르포르 기사단에게 황제의 명령이라는 건 현석이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대단한 의미가 있는 모양이었다.

“날 따라야 한다고 해서 날 상급자로 대할 필요는 없을 것 같은데. 안 그래?”

케틀러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에게는 사실 명령을 내리고 받는 관계가 훨씬 편했다. 아니, 저런 건 아예 생각도 해본 적이 없었다.

케틀러뿐 아니라 이곳의 아르포르 기사단 전체가 마찬가지였다.

“친구처럼 대해. 어차피 나도 그러고 있으니까.”

케틀러는 그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기사단장답게 판단과 계산이 빨랐다.

“대하는 건 친구처럼 하지. 하지만 그럼에도 네가 우리의 주군이라는 건 변하지 않아. 필요한 일이 있을 때 얼마든지 명령을 내려줬으면 좋겠군.”

현석도 굳이 저 말까지 반박할 필요도 이유도 없었기에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설사 그 명령이 우리의 죽음을 담보로 하는 거라도 우리는 반드시 따른다. 그러니 너도 그런 명령에 부담을 갖지 않았으면 좋겠군.”

“그것도 좋아.”

어차피 그런 명령을 안 내리면 된다. 그리고 사람 일이라는 것이 알 수 없지 않은가. 혹시 나중에라도 그런 일이 생길지 말이다.

“명령은 단호하게. 그리고 망설임 없이. 무자비하게. 알겠나?”

현석은 고개를 끄덕였다.

“참고하지.”

케틀러는 뒤로 한 걸음 물러났다. 아르포르 기사단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리고 그들은 일제히 현석을 향해 한 쪽 무릎을 꿇고 앉아 고개를 살짝 숙였다.

“아르포르 기사단, 주군께 충성을 맹세합니다.”

크지 않은 목소리였지만, 그 안에 담긴 단호함과 진중함이 현석의 가슴을 한 차례 크게 울렸다.

현석은 그 자리에 서서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움직이지도 못했다.

이내 케틀러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자 나머지 아르포르 기사단도 일어났다.

의식은 그걸로 끝이었다.

현석은 그제야 천천히 입을 열었다.

“어디…… 한 번 해보자. 시간이 얼마나 걸릴지는 모르지만.”

* * *

강원도의 어느 산, 정상에 갑자기 커다란 화이트홀이 생겨났다.

그리고 그 안에서 사람 한 명이 툭 튀어나왔다.

이내 화이트홀은 다시 점처럼 작아져 눈에 거의 보이지 않는 상태가 되었다.

“드디어 돌아왔군.”

시간이 상당히 오래 지났기 때문에 돌아가는 상황이 좀 변했을지도 모른다.

한국에 오자마자 현석이 가장 먼저 찾아야 할 사람은 뻔했다.

현석은 일단 용을 소환했다. 그리고 거기에 올라타 하늘 높이 날아올랐다.

고도가 낮아선 안 된다. 아직 밤이 채 되지 않았다. 해가 지긴 했지만 어둡지 않았다.

그러니 사람들 눈에 이상하게 보이지 않으려면 되도록 높이 올라가야 한다.

물론 조금 더 있으면 날이 어두워져서 그냥 적당한 높이로 날아간다 하더라도 아무도 발견하지 못할 것이다.

하지만 그 전까지는 높이 날아야 한다.

후우우웅!

현석을 태운 용이 빠르게 서울을 향해 날아갔다.

목적지는 양동욱이 있는 곳이었다.

* * *

양동욱은 현석을 보자마자 너무 반가워서 하마터면 달려가 꽉 끌어안을 뻔했다.

“드디어 오셨군요! 일단 이것부터 좀 봐주십시오!”

양동욱은 현석을 보자마자 미리 준비한 서류를 건넸다.

언제든 현석이 오면 바로 보여주려고 매일 정보를 갱신하며 준비한 서류였다.

현석은 살짝 떨떠름한 표정으로 서류를 받았다. 보자마자 인사도 없이 다짜고짜 서류부터 넘기다니.

하지만 양동욱은 그런 현석의 표정에는 조금도 신경 쓰지 않고 일단 설명부터 시작했다.

“이집트 쪽이 슬슬 마무리 단계에 들어갔습니다. 그쪽에 가신 두 분이…… 정말 잘해주셨습니다.”

이집트에 나타난 머미킹은 결국 임형석과 진영관의 협공에 무너졌다.

사로잡거나 없앤 건 아니지만, 상당한 타격을 입는 바람에 당분간은 모습을 드러내지 않을 듯했다.

물론 블러디퀸 쪽에서는 머미킹이 어디 있는지 알아내려 혈안이 되어 있었다.

머미킹을 잡아 다시 봉인하지 않으면 피라밋 암시장은 끝이나 다름없다고 봐도 된다.

그걸 알기에 머미킹도 그 지경이 되어서까지 포기하지 않고 버티는 것이고 말이다.

피라밋 암시장에 대한 보고를 끝낸 양동욱은 국내 상황을 쭉 읊었다.

한국의 플레이어나 길드들은 별 다른 변화가 없이 예전 그 모습 그대로 꾸준히 성장 중이었다.

렉스턴 에너지의 간섭이 사라진 순간부터 한국의 플레이어들이나 길드들이 훨씬 빠른 속도로 성장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미국의 렉스턴 에너지를 계속 주시했는데…… 이놈들 뭔가 좀 이상합니다.”

“이상하다고?”

“일단 서류에 첨부한 사진을 봐주십시오.”

현석은 서류에 있는 사진을 봤다. 그리고 묘한 표정을 지었다.

그 사진은 지하감옥으로 가는 투명던전이 있는 고가도로였다.

렉스턴 에너지에서 파견된 플레이어들이 근처에 잔뜩 포진해 있었다.

“요즘 렉스턴 에너지가 여러 가지로 사정이 살짝 악화되었습니다. 뭐…… 그래봐야 웬만한 기업들 쌈 싸먹을 정도로 돈을 잘 벌고 있긴 하지만요.”

양동욱은 눈을 빛내며 말을 이었다.

“그런데 그놈들이 거기서 뭔가를 하고 있습니다. 그게 뭔지는 잘 모르지만, 아마 파보면…….”

“필요 없다.”

“예?”

양동욱이 멍청한 표정으로 현석을 바라봤다. 지금까지 렉스턴 에너지에 그렇게 과도한 관심을 쏟았으면서, 저런 걸 보고도 필요 없다는 말이 나온단 말인가.

“이거 렉스턴 에너지에서 뭔가 대단한 걸 발견한 게 틀림없다니까요?”

“그쪽은 신경 꺼도 된다.”

너무나도 단호한 현석의 말에 양동욱은 입을 다물었다. 하지만 이내 그게 무슨 의미인지 깨달은 그의 눈이 화등잔만 해졌다.

“설마…… 벌써 조사 끝내신 겁니까?”

현석은 대답해주지 않았다. 조사만 끝낸 게 아니라 그 안에서 얻을 수 있는 모든 걸 얻었다.

그리고 조만간 저기 모여 있는 렉스턴 에너지 놈들은 곤욕을 치를 것이다.

“저런 데 신경 끄고 미국에 암시장 하나 만들어.”

양동욱이 황당한 눈으로 현석을 바라봤다.

“예에? 뭘 만들라고요?”

“암시장.”

“난데없이 암시장을 만들라니요. 암시장이 만들어야지, 하면 바로 만들 수 있는 그런 건 줄 아십니까? 필요한 게 얼마나 많은데요.”

“종로랑 손잡아.”

양동욱은 떨떠름한 표정을 지었다. 그렇게 하면 가능하기야 하지만 그래도 쉽지는 않은 일이었다.

게다가 종로 암시장이 과연 자신과 현석의 말을 듣고 순순히 손을 잡겠는가도 자신할 수 없었다.

양동욱은 현석을 바라보며 물었다.

“대체 왜 갑자기 미국에 암시장을 만들려고 하십니까?”

“렉스턴 에너지가 암시장을 만들고 있다는 거 아나?”

“얼핏 들었습니다. 엠페러타워라고 하더군요.”

“그 지분을 싹 먹고자 한다. 그놈들이 엠페러타워를 만들어 성공하면 플레이어들의 지하경제가 무너질 수도 있어.”

“설마 그렇게까지야 하겠습니까?”

당연히 한다. 렉스턴 에너지는 엠페러타워를 통해 큰 이득을 볼 생각은 애초부터 없었다.

그들은 지하경제를 장악한 다음, 그걸 자신들의 필요에 따라 이용할 계획이었다.

“아무튼 그렇게 진행해.”

“만일 정말 그런 거라면 애로사항이 어마어마할 텐데요? 그놈들 무력도 불사하는 놈들 아닙니까? 뭐…… 눈치야 좀 보겠지만요.”

무력이 필요하다는 뜻이었다. 현석은 그 말에 씨익 웃었다.

“아주 강력한 자들을 100명 정도 붙여주지.”

“예? 제가 모르는 사이 강자를 100명이나 모았습니까? 대체 어떻게요?”

양동욱이 황당한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그 표정은 이내 경이로 바뀌었다.

정말 예측이 불가능한 사람이었다.

< 아르포르 1 > 끝

ⓒ 김강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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