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황궁에서 4 >
현석은 대마법사의 방에서 나와 복도를 따라 걸어갔다. 머릿속이 참으로 복잡했다.
아니, 그동안 연구하고 경험을 통해 얻은 지식들이 제대로 된 기초 위에 다시 세워지고 있었다.
역시 감에 따라 보상을 선택하길 잘했다. 설마 이런 지식과 힘을 얻게 될 줄이야.
그동안 현석이 거의 본능적으로 쓰던 마력패턴은 사실 마법의 일종이었다.
진짜 마법이 아니라, 진짜 마법을 포장하는 방식의 하나였다.
진짜 마법을 속에 감추거나, 마법을 이중으로 걸거나 할 때 쓰는 기법 중 하나를 마력의 주인이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자연스럽게 쓰고 있었다.
물론 현석이 쓰는 마력패턴도 엄연한 마법이다. 하지만 좀 더 위력적이고 규모가 큰 마법을 쓰려면 이 기초 위에 훨씬 제대로 된 체계적인 지식이 필요했다.
물론 그것 역시 마력패턴의 발전형이었다. 그렇기에 지금 현석이 쓰는 마력패턴이 기초가 되는 것이다.
그것을 계속 갈고 닦으며 연구하고 또 연구하면 진짜 제대로 된 마법을 쓸 수도 있다.
어쨌든 현석은 이번 기회에 확인했다. 예전 언데드들을 상대로 쓴 그 대규모 마법은 정말로 무모한 짓이었다는 사실을 말이다.
애초에 방식부터 잘못되었다. 대규모 마법은 그냥 그렇게 무식하게 쓰는 게 아니라, 증폭을 이용해야만 한다.
증폭을 통해 보다 적은 마력과 노력만으로도 큰 범위의 마력을 통제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문제는 증폭 자체가 그리 쉽지 않은 마법이라는 점이었다. 하지만 힌트는 충분히 얻었다.
‘조금만 더 연구하면 쓸 수 있어.’
그걸 쓸 일이 있을지 없을지는 모르지만 말이다.
어쨌든 현석은 기분 좋게 황궁에서 나갈 수 있었다.
문제는 아직 나가는 길을 찾지 못했다는 점이었다. 현석은 대마법사의 방에서 나온 이후 복도를 빙글빙글 돌다가 서재에 들어갔다가는 반복하고 있었다.
대마법사의 방은 놀랍게도 사라져 버렸다. 아니, 방이 사라진 게 아니라 문이 사라졌다.
즉, 현석은 원형 복도에 갇힌 셈이었다.
“난감하군.”
나갈 길이 없었다. 그렇다고 창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아니, 혹시 창이 있다 하더라도 여기가 황궁 안에 있는 장소인지도 알 수 없었다.
아까 홀에서 나올 때, 원래대로라면 궁에서 나갈 수 있는 복도가 나와야 하는데, 이곳이 나왔다. 즉, 공간을 뛰어 넘어 이곳으로 왔다는 뜻이다.
그러니 여기가 어딘지 알 게 뭔가.
현석은 주위를 둘러봤다. 여기는 보상으로 온 곳이다. 그러니 이렇게 무작정 사람을 가뒀을 리 없다. 이렇게 된 데에는 다 그럴 만한 이유가 있을 것이다.
그리고 흥분하지만 않으면 그 이유를 추측하는 건 어렵지 않았다.
현석은 차분히 주변 마력의 흐름을 파악해봤다.
“이런 거였구나.”
역시 추측이 맞았다. 그냥 지식만 전수해준 게 아니라, 그걸 제대로 경험할 수 있는 장치까지 만들어준 것이다.
벽을 따라 마력패턴이 새겨져 있었다. 따로 어떤 물질이나 조각을 통해 새긴 것이 아니라 마력 자체가 패턴이 되어 안착되어 있었다.
현석은 그저 자신의 마력을 움직여 그 패턴과 똑같이 만들어 겹쳤다.
그러자 패턴대로 빛이 들어왔다.
현석은 빠르게 모든 패턴을 자신의 마력으로 덧씌웠다. 하다 보니 기억도 더 선명해졌고, 아까 미처 깨닫지 못했던 걸 다시 확인하며 깨닫게 되기도 했다.
그리고 마력 패턴을 뭔가 새로운 관점에서 바라보는 계기가 되었다.
현석은 그렇게 복도를 따라 걸으며 벽에 붙은 마력패턴에 정신없이 자신의 마력을 덧씌워 나갔다.
그러다보니 어느새 원형 복도를 크게 한 바퀴 돌았다. 처음 그 자리가 다시 나온 것이다.
빛나는 마력패턴이 벽을 따라 쭉 이어져 결국 처음의 그곳과 만나 하나가 되었다.
그러자 복도 전체가 환하게 빛나기 시작했다.
그 자체가 또 새로운 마법이었던 것이다.
현석의 머릿속에서 방금 그 마력패턴들이 무수히 조합되기 시작했다. 마치 머릿속에서 번갯불이 번쩍번쩍 치는 것 같았다.
그리고 복도에 가득 찬 빛이 엄청나게 환해지며 모든 시야를 빼앗아 버렸다.
그렇게 시야를 빼앗은 빛은 즉시 사라져 버렸다.
너무나 강렬했던 빛이 시야를 꽉 채웠었기에 그게 사라지고 나니 잠시 눈앞이 캄캄해졌다.
물론 현석은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어차피 눈이 보이든 말든 주변을 인식하는 데에는 큰 지장이 없었으니까.
현석은 자신이 황궁 밖에 서 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이내 시야가 돌아왔다.
자신에게 신검을 보상으로 남긴 그 무지막지하게 강한 스켈레톤과 싸웠던 자리에 서 있었다.
현석은 돌아서서 황궁을 다시 한 번 눈에 담았다.
황궁으로 가는 길 중간에 숨어있던 자들이 떠올랐다. 과연 그들도 황제와 함께 남은 사람들일까?
어쩌면 대마법사처럼 만들어진 존재일지도 모른다.
‘대체 여긴 어떤 세상이었을까?’
현석은 그런 의문을 떠올리며 몸을 돌렸다.
이곳에서의 볼일은 끝났다. 이제 다시 밖으로 나갈 시간이 되었다.
‘그나저나…… 거길 어떻게 빠져나갈지도 슬슬 궁리해 봐야겠네.’
그리고 다시 들어올 수 있는 길을 열어두는 것도 생각해야 한다.
왠지 이곳 황궁에 다시 올 일이 생길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 * *
현석은 돌아가는 걸 서두르지 않았다. 시간이 더 흐를수록 렉스턴 에너지의 감시가 허술해질 것이다.
굳이 힘든 길을 갈 필요는 없지 않은가.
현석은 돌아가는 길에 아공간을 해체하는 작업을 시도했다.
그동안은 거의 주먹구구식에 가깝게 도전했지만, 이젠 그럴 필요가 없었다.
마법의 기초라는 체계가 생긴 것이다.
그걸 통해 아공간에 접근하니 풀어낼 수 있는 방법이 몇 가지 보였다. 다만 그것도 쉽지는 않았다.
애초에 아공간에는 복잡한 보안 마법이 걸려 있었다. 현석이 하려는 일이 바로 그 보안을 해제하는 것인데, 당연히 쉬울 리가 없었다.
아니, 원래는 불가능해야 한다.
현석은 아공간의 보안마법을 해제하면서 자신은 다른 마법사들과는 좀 다른 존재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리고 마력의 주인이라는 것이 얼마나 대단한 타이틀인지도 다시 한 번 깨달았다.
쩡!
“됐다!”
현석은 드디어 첫 번째 아공간을 해체했다. 예전 마계에서 얻었던 아공간 아이템 중 하나였다.
안에 뭔가가 들어 있어서 해체한 다음 자신의 아공간에 합치려고 했던 바로 그 아공간이었다.
안에 들어있던 건 정말 별 거 없었다. 마정석과 자질구레한 아티팩트들이었다.
물론 다른 플레이어들에게 보여주면 눈에 불을 켜고 달려들 만한 아티팩트였지만, 현석의 눈에는 별로 차지 않았다.
현석은 그렇게 첫 번째 아공간을 자신의 아공간에 합쳤다. 그저 아공간에 넣는 것만으로 합쳐지기에 별로 신경 쓸 것도 없었다.
“음?”
현석은 아공간이 흡수되는 과정을 느끼며 묘한 표정을 지었다. 이 마력의 흐름도 왠지 기억해두면 도움이 될 것 같았다.
예전에는 전혀 알아차리지 못했던 마력의 흐름을 이젠 좀 알 것 같았다.
확실히 자신은 계속 발전하고 있다는 걸 다시 한 번 깨달았다.
현석은 내친김에 두 번째 아공간도 꺼내 해체 작업을 시작했다.
어느새 조금만 더 가면 처음 나왔던 투명 던전의 출입구였기에 일단 여기서 머물기로 했다.
그렇게 아공간 해체에 재미를 붙인 현석은 가진 모든 아공간 아이템을 하나하나 분석하고 거기에 걸린 보안을 해제하며 시간을 보냈다.
그러다 보니 열흘이 훌쩍 지나갔다.
* * *
현석은 투명 던전의 출구를 통해 휙 뛰어나갔다. 그리고 재빨리 주변 기척을 살피며 몸을 숨겼다.
그저 반사적인 행동이었다. 들켜서 좋을 게 없으니까.
현석은 나오기 전에 얼굴의 분장부터 확인했다. 분장이 좀 망가지는 바람에 분장한 티가 확 났다.
하지만 그래도 본래의 얼굴이 드러나진 않았다. 그러면 된 거 아닌가.
어쨌든 투명던전 출구에는 아무도 없었다.
이곳이 워낙 외진 곳이기도 했지만 예상했던 대로 감시가 상당히 느슨해졌다.
이 정도면 빠져나가는 데 별 문제가 없을 듯했다.
조심스럽게 움직이는 현석은 여전히 공사 중인 엠페러타워의 모습이 보였다.
이제 공사는 마무리 단계에 접어든 모양이었다.
현석이 투명 던전에서 보낸 시간이 제법 길었으니 공사도 상당히 오래 끈 셈이었다.
사실 현석이 처음 여기에 들어왔을 때, 이미 마무리 중이었다. 한데 아직도 마무리 중이라니.
‘그때 터트린 것들 때문에 그런 건가?’
폭발이 그리 약하지 않았으니 아마 건물의 축이 흔들렸을 수도 있다. 그렇다면 보강 공사를 다시 해야 한다.
이곳을 몇 년 쓰고 버릴 게 아니라면 말이다.
엠페러타워의 오픈을 더 뒤로 미룬 셈이 되었다. 물론 공사가 마무리 된다 하더라도 이곳에서 판매할 물건을 다시 구하려면 아마 보통 노력으로는 안 될 것이다.
‘이래저래 오픈이 늦어질 수밖에 없겠군.’
엠페러타워는 나중에 플레이어 세상에 절대적인 영향력을 발휘한다.
그 얘기는 렉스턴 에너지의 힘이 더더욱 강해진다는 뜻이기도 했다.
그리고 그건 현석이 바라는 바가 아니었다.
그러려면 다른 암시장의 힘을 키워야 한다. 피라밋 암시장이나 흑시 같은 것들 말이다.
‘그리고…… 종로 암시장도 키워서 어깨를 나란히 할 수 있으면 더 좋지.’
그렇게 키운 종로 암시장을 미국에 진출시키는 것도 나쁘지 않다. 아마 위험하긴 하겠지만 제대로 엠페러타워를 견제할 수 있을 테니까.
그러려면 그만한 힘이 필요하다.
정계나 재계에 미치는 영향력도 중요하지만 실질적인 무력이 훨씬 중요했다.
그것이 플레이어들이 살아가는 방식이었다.
그리고 또한 정치권이나 기업들이 플레이어들을 이용하려 하면서도 꺼리는 이유이기도 했다.
‘물건은 있으니…… 무력만 해결되면 어떻게든 해볼 수 있을 것 같은데…….’
레드드래곤 길드를 이용하는 건 안 된다. 그들은 한국에서 제대로 뿌리를 내리고 영향력을 확대해 나가야 한다.
이곳은 종로 암시장이 딱이다.
물건이야 여기서 빼돌린 것이 있으니, 피라밋과 흑시와 손을 잡고 물건을 세탁해서 내놓으면 된다.
이제 남는 건 힘인데, 그건 좀 더 고민해 보기로 했다. 뜻이 있는 곳에 길이 있고, 그 길을 걷다보면 답이 나오는 법이니까.
현석은 은밀하고 빠르게 움직였다. 감시가 허술해지긴 했지만 예전처럼 아예 없다시피 하지는 않았다.
그리고 왠지 지상으로 통하는 엘리베이터 쪽에 감시가 집중되어 있을 것 같았다.
굳이 내부에서 수색을 강화하는 것보다는 길목을 틀어막고 있는 편이 훨씬 효율적일 테니까.
어쨌든 현석은 마지막으로 선물을 하나 주고 싶었다.
엠페러타워의 오픈은 늦어지면 늦어질수록 유리하다. 현석은 빠르게 이동해 엠페러타워의 메인, 그러니까 J호텔 지하에 있는 동공에 도착했다.
‘여긴 다 지었네.’
이곳은 진짜 정리까지 끝났다. 다른 곳은 좀 늦어지더라도 상관없었다. 여길 먼저 오픈하고 순차적으로 하나씩 공개해 나가면 되니까.
당연히 현석은 그걸 두고 볼 생각이 없었다.
현석의 입가가 슬쩍 움직였다. 좋은 생각이 하나 났다. 위험성은 낮으면서 정말 효과적인 방법이 떠오른 것이다.
* * *
엠페러타워의 경비 및 감시를 총괄하는 사람은 로간이었다. 114레벨이나 되는 플레이어로, 칼슨의 눈에 들어 승승장구하는 인물이기도 했다.
그는 10명의 부하를 대동하고 엠페러타워 곳곳을 매일 순찰했다.
엠페러타워 내부에 상주하는 플레이어의 수는 로간까지 해서 20명이 전부였다.
그 정도만 해도 충분했다. 어차피 이 안에서 상대할 사람은 인부뿐이었으니까.
그리고 예전에 침입했던 놈이 혹시 나타나면 즉시 연락을 하고, 상황에 따라 대응하면 된다.
강한 놈이면 위치 확인 후, 피하면 되고, 적당한 놈이면 싸워 시간을 끌고, 약한 놈이면 제압하면 된다.
정작 엠페러타워에 있는 강한 자들은 모두 지상에서 대기 중이었다.
출구만 꽉꽉 틀어막으면 아무도 빠져나가지 못하는 곳이 바로 이곳, 엠페러타워니까 말이다.
로간은 느긋하게 주위를 둘러보며 메인 홀을 거닐고 있었다. 한데 건물 쪽에서 소란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뭐지? 가서 알아봐.”
로간의 명령에 수하 하나가 후다닥 달려갔다. 하지만 그는 달려간 속도 그대로 즉시 도망쳐왔다.
“마수가 나타났습니다!”
“마수?”
로간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일단 특이사항이 생겼으니 상부에 보고부터 해야 한다.
막 보고를 하려고 무전기를 꺼낸 로간의 눈에 나타났다던 마수의 모습이 보였다.
“저, 저게 뭐야!”
로간의 눈이 찢어질 듯 커졌다.
꽈르르릉!
마수, 시퍼런 용의 입에서 거대한 벼락이 쏟아져나갔다.
< 황궁에서 4 > 끝
ⓒ 김강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