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황궁에서 2 >
콰우우우!
거대한 압력이 해일처럼 밀려왔다. 하지만 현석은 물러서지 않고 버텼다.
할 수 있는 모든 힘을 다 이용해 압력에 저항했다. 현석의 몸 주변으로 무수한 마력패턴이 떠올랐다.
이대로는 죽을지도 모른다는 위기감이 현석의 잠재력을 일깨웠다.
가만히 앉아 있던 황제가 그걸 보고는 몸을 서서히 일으켰다.
그리고 손을 슥 뻗었다.
그러자 그때까지 현석에게 몰려들던 그 미친 듯한 압력이 순식간에 사라져 버렸다.
-이리 다가오라.
현석은 이제 어찌된 영문인지 몰라 잠시 분위기를 살폈다. 하지만 이내 여기서 더 잘못되어 봐야 어디까지 가겠느냐는 심정으로 걸음을 옮겼다.
더 이상의 압력은 없었다. 현석은 가벼운 걸음으로 황제 앞에 섰다.
-내 앞에 설 자격이 있노라.
황제의 말에 현석은 머리를 팽팽 굴렸다. 대체 저게 무슨 뜻일까?
‘타이틀? 나한테 그런 자격에 관한 타이틀이 있나?’
현석이 가진 것 중, 자격을 나타내는 타이틀은 마력의 주인과 용을 부리는 자뿐이다.
만일 타이틀에 관계된 거라면 둘 중에서 마력의 주인 쪽에 무게가 실린다.
용을 부리는 자라는 건 용기사의 자격이다. 고작 용기사가 황제 앞에 당당히 설 수 있을까? 그건 말도 안 된다.
남은 건 마력의 주인인데, 현석은 왠지 그건 아닐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럼 대체 뭘까?
현석은 그런 궁금증과 호기심을 뒤로하고 황제에게 한 발 더 다가갔다.
그러자 황제가 손을 슥 들었다. 더 이상 다가오지 말라는 뜻이었다.
위협이 아니라 너무나 자연스러운 위엄에 의해 현석은 걸음을 멈췄다.
현석은 새삼스러운 눈으로 황제를 쳐다봤다. 역시 황제는 황제라는 생각이 들었다.
저런 자연스러운 위엄이 몸에 깃들려면 대체 어떤 삶을 얼마나 살아야 하는 걸까?
-금화를 가지고 있구나.
황제의 말에 현석의 뇌리에 칸두스 금화가 떠올랐다. 황제 칸두스의 대관식을 기념해 만든 금화 말이다.
현석은 얼른 그것을 꺼냈다.
총 23개의 금화 중 17번째 금화가 바로 현석이 가진 금화였다. 별다른 능력은 없고, 그저 안에 복잡한 마력패턴만 새겨져 있는 금화였다.
그 마력패턴은 이미 현석이 한 차례 분석해 봤다. 하지만 별 쓸모 없다는 결론을 내렸다.
솔직히 말하면 의미를 알 수 없었다.
현석이 그때 내린 결론은 어떤 거대한 마력패턴의 중간을 따로 떼어낸 것 같다는 정도였다.
황제가 손을 내밀었다. 현석은 그의 손바닥 위에 금화를 내려 놓았다.
황제의 손은 얼굴만큼이나 새까맸다.
현석은 손을 보고서 확신했다. 이건 그림자였다. 그림자가 실체화하면 이렇게 될 것이 분명했다.
황제가 금화를 받는 순간 천장에서 뭔가가 스윽 내려왔다.
소리도 기척도 없이 내려와 현석이 깜짝 놀랐을 정도로 그 움직임이 은밀하고 조용했다.
그것은 넓적한 판이었다. 군데군데 구멍이 뚫려 있었는데, 그 구멍의 크기를 보니 딱 칸두스 금화만 했다.
황제는 현석의 금화를 그 중 한군데에 끼워 넣었다.
화아아악!
강렬한 빛이 판에서 뿜어져 나왔다. 그러더니 현석의 금화가 판에 녹아들듯 자리를 잡았다.
마치 원래부터 그곳에는 구멍 따위 없고, 그냥 그렇게 만들어진 판처럼 변해버렸다.
-이제 세 개 남았군.
황제의 말에 현석이 다시 판을 확인하니, 구멍이 세 개 남아 있었다.
-네가 가져온 금화는 내 17세를 의미하느니라.
현석은 그제야 왜 칸두스 금화를 23개 만들었는지 알 수 있었다. 대관식을 할 때, 황제의 나이가 23세였던 것이다.
각각의 금화에 의미를 담아 만든 것이 분명했다.
그리고 각각의 나이에 걸맞은 포상이 숨겨져 있을 것이다.
현석은 그런 기대감을 안고 황제를 쳐다봤다.
-눈치가 빠르구나. 내가 17세 되던 해에 기사단을 선물로 받았지.
“설마 아르포르 기사단?”
현석은 왠지 저 새까만 황제의 얼굴이 웃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동안 황제가 말을 하지 않았다. 마치 회한에라도 잠긴 것처럼 말이다.
-잘 아는구나. 누구보다 충성심이 강한 나의 기사들.
그 말을 들으니 현석의 입매가 저절로 비틀렸다. 그런데 왜 지하 감옥에 가뒀단 말인가. 그런 충성스러운 기사들을.
-정치적 희생양이지.
황제는 거기까지만 말하고 더 이상 말하지 않았다.
현석은 가만히 서서 황제를 쳐다봤다. 그러자 바닥에서 뭔가가 훅 튀어 올랐다.
위협적이지는 않았지만 아까 위에서 내려온 판과 마찬가지로 기척도 소리도 없었는지라 깜짝 놀라게는 할 만했다.
하지만 그래도 한 번 당했던 것인지라 그 정도로 놀라진 않았다.
현석은 코앞까지 튀어 오른 그것을 확인하고는 손으로 잡아챘다.
그것은 직사각형의 금패였다. 특별한 마력패턴이 새겨져 있었다.
현석이 그것을 잡아챈 것은 심안을 통해 이름을 확인했기 때문이다.
[황제의 사면령]
드디어 사면령을 구했다.
* * *
“오셨습니까.”
“어디야?”
“이쪽입니다.”
칼슨은 인사도 제대로 안 받고 걸음을 빨리했다. 그곳을 책임지는 사람이 허둥지둥 앞장서서 칼슨을 안내했다.
“여긴가?”
“예. 맞습니다. 화면을 통해 추정한 위치는 바로 저곳입니다.”
“흐음.”
칼슨은 책임자가 손가락으로 가리킨 허공을 유심히 확인했다. 하지만 그가 알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거긴 그저 허공일 뿐이었다.
“플레이어들은?”
“일단 저쪽에서 대기 중입니다.”
“아무것도 안 걸려?”
“플레이어는 물론이고 마력감지기까지 동원했습니다만…… 별다른 걸 발견하지 못했습니다.”
칼슨은 그 말에 심각한 표정을 지었다.
“시간이 너무 오래됐나? 공간이동을 했으면 그 흔적이 분명히 남을 텐데…….”
칼슨의 말을 들은 책임자는 놀란 심정을 억지로 감추며 침을 꿀꺽 삼켰다.
그렇다는 얘기는 공간이동이 가능한 사람이 존재한다는 뜻 아닌가.
아니면 그런 기술이 있거나.
그게 플레이어든, 아니면 아티팩트든 굉장한 일이었다.
‘공간이동이라니…….’
책임자가 다시 한 번 누군가가 나타났던 허공을 바라보는 사이, 칼슨은 플레이어들이 모여 있다는 곳으로 걸어갔다.
플레이어들의 시선이 일제히 칼슨에게 꽂혔다.
그들 중 칼슨이 누구인지 모르는 사람은 한 명도 없었다.
그리고 칼슨에게 잘 보이면 어떤 일이 생기고, 또 잘못 보이면 어떤 꼴이 되는지도 다들 잘 알고 있었다.
그렇기에 모두가 칼슨이 무슨 말을 할지 집중하고 또 집중해 주목했다.
“마력감지기로 살펴본 결과가 어떻지?”
칼슨의 질문에 플레이어 하나가 일어나 서류 몇 장을 건넸다.
“그 근처 마력분포를 인쇄한 겁니다.”
서류는 목표가 되는 장소를 여러 각도로 찍은 사진이었다. 거기에 펜으로 그래프 같은 걸 슥슥 그려 놓았는데, 그게 바로 마력분포도였다.
“이 말은…… 마력이 있긴 있다는 뜻이로군?”
“예. 하지만 의미있는 수치가 아닙니다. 오차범위 내이기도 하니까요.”
마력이 전혀 없는 공간을 마력감지기로 찍어도 이 정도 그래프는 나온다. 그게 바로 오차범위였다.
진짜 의미 있는 결과가 되려면 이보다 훨씬 그래프가 급격한 변화를 일으켜야 한다.
하지만 칼슨이 본 건 그런 게 아니었다.
“의미가 있고 없고는 내가 결정한다. 여긴 분명히 뭔가가 있어.”
칼슨이 그렇게 단정하는 이유는 그래프의 모양 때문이었다.
모든 사진의 그래프를 머릿속으로 다 겹쳐봤는데, 딱 저 지점에서의 마력 농도가 가장 짙었다.
물론 그 부분에 마력이 아예 없는 사진도 있었고, 또 다른 곳에 비해 적은 사진도 있었다.
하지만 모든 사진을 모아 평균을 내보면 분명히 저곳의 마력이 가장 높았다.
칼슨은 확신을 가지고 그 지점을 봤다.
‘잔여 마력분포를 보면 공간이동이 아니야.’
공간이동에 대한 연구도 약간이나마 진행 중이었다.
아직까지는 뚜렷한 성과가 없었지만, 그래도 잔여마력 분포가 어떤 식이고, 공간이동시 어떤 방식으로 마력이 움직이는지에 대한 데이터도 잔뜩 쌓아뒀다.
그걸 알기에 지금 이곳에서 벌어진 일이 공간이동과는 관계다 없다고 판단할 수 있었다.
물론 다른 방식의 공간이동일 수도 있었다.
‘예를 들면…… 게이트를 연다거나.’
게이트를 떠올린 칼슨의 머릿속이 팽팽 돌기 시작했다.
‘게이트라면…… 던전의 입구도 게이트라고 할 수 있지. 던전으로 통하는 입구이자, 새로운 공간의 문이나 다름없으니까. 그렇다는 건…….’
칼슨은 방금 그 자리를 다시 바라봤다. 그의 눈이 그 어느 때보다 날카롭게 번득이고 있었다.
* * *
황제의 사면령을 든 현석은 그것의 정보를 좀 더 자세히 확인해 보았다.
[황제의 사면령]
[칸두스 황제가 직접 내린 사면령. 아르포르 기사단을 사면할 수 있는 권리를 가진다.]
딱 아르포르 기사단 한정의 사면령이었다.
사실 칸두스 금화를 얻었을 때부터 현석은 어렴풋이 이 생각을 하고 있었다. 이걸 이용하면 황제의 사면령을 받을 수 있지 않을까 하고 말이다.
한데 마치 상황이나 이야기를 짜 맞추기라도 한 것처럼 정확히 현석이 가진 금화가 아르포르 기사단의 사면령을 얻을 수 있는 아이템이었다.
-그걸 가지고 가서 내 충성스러운 기사들을 풀어주기 바란다.
현석은 문득 아르포르 기사단을 풀어주는 것이 황제의 숙원 중 하나가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 생각으로 황제를 쳐다보자, 황제가 마치 현석의 생각을 읽기라도 한 것처럼 말했다.
-내 숙원을 풀 열쇠를 가지고 왔으니, 상을 주고 싶구나.
상이라는 말에 현석이 눈을 빛냈다. 명색이 황제인데, 어설픈 걸 상이랍시고 주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니 충분히 기대할 만하지 않겠는가.
-선택하라.
황제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현석의 앞에서 커다란 판 하나가 불쑥 솟아났다.
투명한 유리로 만들어진 판이었는데, 거기에 세 개의 단어가 쓰여 있었다.
[황제의 검]
[근위기사의 검술]
[대마법사와의 만남]
당연히 글은 제국어였지만 현석은 아주 자연스럽게 그것을 읽을 수 있었다.
현석은 세 가지 보상을 보며 잠시 생각에 잠겼다. 생각할 시간이 길지는 않았다. 시간제한이 있다는 게 눈에 확 보였다.
유리판이 서서히 밑으로 내려가고 있었으니까.
아마 저 글자가 사라지기 전에 눌러야 할 것이다.
일단 황제의 검은 제외시켰다. 그렇지 않아도 좋은 검을, 그것도 신검을 얻었는데, 굳이 또 검을 얻을 필요는 없었으니까.
나머지는 근위기사의 검술과 대마법사와의 만남인데, 얼핏 생각하기엔 당연히 검술을 택해야 할 듯했다.
‘세 가지 보상의 가치가 과연 제각각일까?’
세 가지 중 하나를 선택하는 보상이라면, 그것도 황제가 내리는 보상이라면 세 개의 가치는 동등하지 않을까?
거기까지 생각한 현석은 대마법사와의 만남에 손바닥을 갖다 댔다.
즉시 유리판이 아래로 쭉 내려가 바닥으로 스며들어 사라졌다.
가만 보니 그것도 신기하기 짝이 없었다.
붉은 주단이 쫙 깔린 바닥이었는데, 거기서 유리판이 튀어나온 것이다. 아까 사면령도 그렇고 말이다.
조금도 틈이 없는데 대체 어디서 그런 것들이 튀어나왔는지 알 수 없었다.
‘좀 답답하긴 하네.’
그런 것들은 분명 마력과 관계있을 것이다. 그러니 마력의 흐름이나 패턴을 분석하면 비슷하게나마 따라하거나 연구할 거리가 생길 텐데, 그게 불가능했다.
황궁 안으로 들어온 후, 현석의 마력 감지 능력이 현저히 낮아졌다. 아니, 그게 아니다. 마력에 대한 황궁의 보안 능력이 어마어마하다는 게 더 맞으리라.
그야말로 철저히 감춰져 있었다.
아예 못 알아보는 건 아니지만, 분석은 불가능했다.
그나마도 마력에 대한 현석의 능력이나 감각이 뛰어나니 이 정도라도 알아보는 것이지, 그게 아니었다면 아예 이곳에 마력이 없다고 착각했을 수도 있었다.
-적절한 보상을 택했군. 나와의 대화가 끝난 후, 밖으로 나가면 될 거다.
현석은 그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아마 홀에서 나가는 문이 대마법사의 거처로 연결되었을 것이다. 물론 마력을 이용해서 말이다.
-궁금한 게 있으면 물어보라.
드디어 기다리던 말이 떨어졌다. 현석은 직감적으로 많은 말을 물어볼 수 없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그래서 좀 포괄적인 질문을 던졌다. 답을 듣는다면 전체적인 그림을 조망할 가능성이 있는 질문이었다.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진 겁니까?”
현석은 두근두근한 심정으로 황제를 쳐다봤다. 황제의 얼굴은 여전히 무심해 보였다.
물론 그저 새까맸지만.
< 황궁에서 2 > 끝
ⓒ 김강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