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황궁으로 가는 길 3 >
슈각! 꽈득! 파삭!
현석이 용기사의 창을 아슬아슬하게 피하며 검을 휘둘러 용기사의 핵을 정확히 파괴함과 동시에 용기사의 몸체가 가루로 변해 흩어지는 소리가 연이어 울렸다.
털썩.
현석은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그리고 숨을 몰아쉬었다.
“허억! 허억! 허억!”
이번 싸움은 정말 힘들었다.
사실 싸움 자체는 길지도 않았고, 공방이 많이 오가지도 않았다.
하지만 지금까지 했던 그 어떤 싸움보다도 힘들었다.
‘벌써 이 지경인데…… 아직도 관문이 더 남았으니…….’
어쨌든 어찌어찌 이번 싸움은 이겼다. 그동안 여기까지 오면서 마력패턴에 대한 연구와 수련을 병행한 것이 정말 큰 역할을 했다.
현석은 문득 이 투명던전을 여럿이서 함께 오면 어떨까 하는 생각을 했다.
하지만 이내 고개를 저었다.
어설픈 실력을 가진 플레이어라면 아무리 많아봐야 방해만 될 뿐이었다.
현석에 근접한 사람, 즉, 임형석이나 장춘쯤 되는 실력자가 여러 명 온다면 좀 도움이 될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랬다면 지금처럼 마력패턴의 수련과 연구는 병행하지 못했겠지.’
방금 성공시킨 마력패턴을 다시 하라고 하면 과연 할 수 있을까?
자신 있게 할 수 있다고 말하기 어려웠다. 하지만 만일 또 써야 할 일이 있다면 망설임 없이 쓸 것이다.
그리고 어떻게든 해낼 것이다.
안 그러면 죽을 테니까.
현석은 자리에서 일어나 방금 전 용기사가 가루가 되어 흩어진 곳으로 걸어갔다.
커다란 마정석 하나가 바닥을 뒹굴고 있었다.
그리고 뼈로 이루어진 검 하나가 꽂혀 있었다. 손잡이만 남기고 땅에 푹 들어가 있었는데, 풍기는 분위기가 정말 예사롭지 않았다.
현석의 심안은 자동으로 검의 이름과 정보를 읽어냈다.
[메겔루의 검]
[용기사 메겔루가 쓰던 검. 그가 부리던 드래곤의 심장 일부를 가공해 만들었다. 제국 최고의 명장 켈루안이 3년에 걸쳐 만든 검. 힘+30, 민첩+30, 체력+50. 검의 인정을 받으면 새 타이틀을 얻을 수 있다.]
‘검의 인정? 그런 것도 있었나?’
현석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검을 쥐고 그대로 잡아 뽑았다.
화아아악!
강렬한 빛이 사방을 뒤덮었다.
빛이 사라지자, 세상이 바뀌었다. 현석은 직감적으로 이것이 바로 그 시험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현석이 서 있는 곳은 사막 한가운데였다. 사방을 둘러봐도 오로지 모래뿐이었다.
그렇게 잠시 서서 상황을 파악하고 있을 때, 저 멀리서 아른거리는 형체 하나가 나타나 서서히 이쪽으로 다가오기 시작했다.
사막의 열기는 엄청났다. 뜨거운 열기가 시야를 왜곡해 멀리 보이는 것들이 아지랑이처럼 흔들리게 만들었다.
그 무언가가 점점 다가올수록 형체가 또렷해져갔다.
그것은 거대한 용이었다.
더 가까이 다가오니 용 위에 누군가가 타고 있다는 것도 알 수 있었다.
‘설마…… 저놈이랑 싸우는 게 시험인가?’
현석은 일단 전력분석부터 했다. 현석이 가진 심안이라는 능력은 이럴 때는 거의 사기나 다름없는 위력을 발휘한다.
하지만 심안을 써먹으려던 현석은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심안이 먹히지 않아?’
현석은 급히 자신의 상태창을 불러봤다. 하지만 그것조차 떠오르지 않았다.
심안이 완벽하게 봉인된 것이다.
심지어 마력의 흐름도 느껴지지 않았다. 마치 맨몸으로 사막 한가운데 던져진 기분이 들었다.
처음엔 당황했지만 이내 상황을 파악했다.
‘환상이로군. 여기서 뭔가를 보여주는 게 시험인가?’
다가오고 있는 놈은 용기사가 분명했다. 아마 이 검의 주인, 메겔루인 듯했다.
현석은 가만히 서서 다가오는 용기사를 쳐다봤다. 이내 코앞에 용기사가 도착했다.
거대한 용을 타고 있었는데, 용의 코에서 연신 화염이 뿜어져 나왔다.
호흡 자체가 불로 이뤄진 듯했다. 아마 제대로 브레스를 쏘면 주변을 화염으로 초토화시킬 수 있을 것이다.
그저 근처에 다가온 것뿐인데도 뜨거운 열기가 느껴졌다. 어쩌면 사막이라 더 뜨겁게 느껴지는 것인지도 모르지만.
메겔루는 용에 앉아 오만한 눈으로 현석을 내려다봤다. 현석의 손에는 메겔루의 검이 들려 있었다.
메겔루는 그 검을 보고는 손을 내밀었다.
“내 것이다.”
메겔루의 입에서 나온 말은 약간 지역 특색이 섞인 제국어였다. 현석은 그 말을 들으며 메겔루가 사막지역 출신인 모양이라고 생각했다.
자신이 거기에 대해 어떻게 아는지 신기하긴 했지만 지금은 그 신기함에 빠져 있을 때가 아니었다.
사실 제국어는 물론이고 어떤 언어든 다 알아들을 수 있는 게 더 신기한 일 아닌가.
현석이 가만히 메겔루를 쳐다봤다. 그러자 메겔루의 용이 꿈틀거렸다.
화르르륵!
메겔루의 용은 화염을 훅 내뿜으며 현석에게 입을 가까이 가져갔다.
허튼짓 하면 그대로 구워 버리겠다는 위협이었다.
현석은 그걸 보며 피식 웃었다. 그리고 검을 쥔 손에 힘을 꽉 주었다.
“이젠 내 건데?”
현석이 유창한 제국어로 말했다. 오히려 현석이 메겔루보다 더 제국인 같았다. 현석의 제국어는 수도에서 쓰는 아주 정확한 제국어였다.
메겔루의 입가에 비웃음이 걸렸다.
“수도의 샌님이셨군.”
메겔루의 말투에서 느낀 건 지독한 적대감이었다. 메겔루는 수도 쪽 사람들에게 반감을 갖고 있는 모양이었다.
현석은 가만히 메겔루를 쳐다보며 물었다.
“나한테 뭐 하고 싶은 말이라도 있나?”
메겔루가 다시 손을 내밀어 까딱였다.
“그 검을 돌려주면 목숨을 살려주지.”
“싫은데?”
메겔루의 입가에 걸린 비웃음이 더욱 짙어졌다.
“아마…… 곧 주고 싶어질 거야.”
메겔루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현석이 손에 든 검이 시뻘겋게 달아오르기 시작했다.
치이이익!
검을 쥔 손에서 불로 지지는 듯한 통증이 밀려들었다. 아니, 실제로 불로 지지고 있었다. 살이 타는 매캐한 냄새가 코로 훅 들어왔다.
하지만 현석은 표정 하나 바뀌지 않고 여전히 검을 쥔 채 메겔루를 쳐다봤다.
메겔루의 얼굴에 살짝 놀란 표정이 스쳤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이내 비웃음이 더욱 짙어졌다.
“버텨봐야 너만 손해다. 그 검은 아무나 함부로 다룰 수 있는 것이 아니야. 그러니 순순히 넘겨라. 그렇지 않으면 고통이 점점 더 심해질 테니까.”
현석은 대답도 하지 않고 담담한 표정으로 메겔루를 쳐다봤다.
방금 확신했다. 메겔루든 그가 부리는 용이든 현석을 해칠 수 없는 게 분명했다.
해치고 싶은 마음이 있는지 없는지는 모르지만, 그럴 수 없다는 건 확실했다.
현석은 검을 쥔 손에 더욱 힘을 주었다.
치이이이익! 화르륵!
급기야 손이 불타오르기 시작했다. 그 불길은 손을 넘어 팔뚝까지 타고 올라갔다. 하지만 그게 다였다. 그 이상은 올라가지 않았다.
딱 팔뚝까지만 장악하고 엄청난 고통을 선사해 주었다.
물론 현석의 표정은 여전히 담담했다. 메겔루의 말대로 점점 더 고통이 심해졌지만, 별로 상관없었다.
어차피 이렇게 뭔가를 참는 건 그 누구보다 잘할 자신이 있었다. 설사 이대로 고통이 더 심해진다고 해도 참아낼 수 있었다.
메겔루의 입가에 떠올랐던 비웃음이 사라졌다. 그 자리를 대신 차지한 건 지독한 분노였다.
“그 검을 당장 놓으라니까!”
뜨거운 열기가 온몸을 덮쳤다. 단지 호통만으로 주변 온도를 급격히 끌어올리는 힘을 가진 모양이었다.
현석은 반사적으로 메겔루의 레벨을 확인했다. 심안이 작동하지 않는다는 걸 알지만 그저 본능에 의해 심안을 발동시켰다.
한데 놀랍게도 그 순간 심안이 작동했다.
‘348!’
어마어마한 레벨이었다. 아마 지금 당장 저 메겔루와 붙으면 절대 이길 수 없을 것이다.
레벨 차이가 웬만큼 나야 스킬이나 마력 컨트롤로 비벼보기라도 하지, 저 정도로 격차가 나 버리면 정말 어떻게 할 수가 없었다.
하지만 저 레벨을 갖고 있으면 뭐 하는가. 어차피 공격하지도 못하는데.
현석은 검을 쥔 손에 더욱 힘을 주었다.
시간이 지나자 분노에 찬 메겔루의 얼굴이 점차 일그러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의 목소리도 일그러졌다.
“그 검을…… 어서…… 내게 넘겨라.”
현석은 왠지 메겔루의 모습이 흐려지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아니, 실제로 흐려지고 있었다.
메겔루의 모습이 흐려지면 흐려질수록 검을 쥔 손을 타고 들어오는 고통이 점점 더 심해졌다.
나중에는 현석도 이를 악물고 참아내야 할 정도였다. 여기서 조금만 고통에 밀리면 정신을 잃을 수도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현석은 결국 끝까지 참아냈다.
그렇게 메겔루가 사라졌다. 마지막 한 마디만 남기고.
“네가 이겼다. 잘 부탁한다.”
사방이 섬광으로 가득 찼다. 그리고 섬광이 사라졌을 때, 현석은 어느새 원래 그 자리에 서 있었다.
고통은 씻은 듯이 사라졌다.
현석은 홀린 듯이 자신이 손에 들고 있는 메겔루의 검을 내려다봤다.
파사삭!
검이 가루가 되어 흩어지고 있었다. 그 고통을 감내하며 시험에 통과했는데, 결국 검의 수명은 그게 다였던 모양이다.
허무하다면 허무할 수 있는 일이었다. 하지만 현석은 별 생각이 없었다.
그저 검의 시험을 자신이 이겨냈다는 점에 기분이 좋아졌다. 그리고 검이 부서졌지만, 얻은 건 있었다.
시험을 통해 정신력이 한층 강해진 것이다. 실제로 상태창의 정신력 스탯이 5나 상승했다. 이 스탯은 나중에 혹시라도 있을지 모를 비슷한 위기 상황에서 큰 도움이 될 것이다.
현석은 그렇게 가볍게 생각하고 넘어가려 했다. 하지만 그게 끝이 아니었다.
검이 부서져 나온 가루가 일제히 현석에게 달려들었다.
피하고 자시고 할 틈도 없었다. 만일 적이 이 정도 속도로 공격한다면 무조건 당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 순간 현석의 뇌리에 떠오른 생각은 시험의 환상 속에서 봤던 메겔루의 레벨이 떠올랐다.
아마 348레벨의 플레이어가 특수한 스킬로 공격하면 이 정도 속도가 나오지 않을까?
어쨌든 그렇게 쏟아진 가루가 현석의 온몸을 파고들었다. 엄청난 고통이 밀려왔다. 하지만 그건 환상 속에서 메겔루의 검이 준 고통보다 못했다.
고통은 길지 않았다. 그리고 현석에게 선물을 주었다.
검이 가진 능력치가 현석에게 흡수된 것이다. 현석은 졸지에 힘과 민첩이 각각 30씩 오르고, 체력이 50이나 올랐다.
레벨업을 몇 번이나 해야 저 정도 스탯을 얻을 수 있을까? 그야말로 레벨을 초월해 가는 중이었다.
현석은 문득 아까 메겔루의 검의 설명에 붙어 있던 내용이 떠올랐다. 검의 시험을 이기면 새 타이틀을 준다는 것 말이다.
얼른 확인했다. 그리고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새 타이틀을 추가로 얻은 것이다.
[용을 부리는 자-용과 교감해 용을 부릴 수 있는 사람에게 주어지는 타이틀.]
용기사가 되면 얻을 수 있는 타이틀이 아니었다. 이건 용기사의 극에 이르러 벽을 부수고 한 단계 넘어선 자가 얻을 수 있는 타이틀이었다.
‘그걸 내가 어떻게 아는 거지?’
너무 자연스럽게 지식이 떠올라서 사실 깜짝 놀랐다. 대체 그런 지식을 어떻게 알고 있는 것일까?
지금으로서는 그저 타이틀에 자연스럽게 따라오는 지식이 아닐까 추측만 해볼 뿐이었다.
물론 진실은 아직 모른다.
“그나저나…… 타이틀만 있으면 뭐해? 용이 있어야지.”
현석은 그렇게 중얼거리며 피식 웃었다.
이제 용만 얻으면 현석도 용기사들처럼 용에 타고 싸울 수 있게 된다.
만일 하늘을 날아다닐 수 있는 용을 얻으면 용을 탈 것으로 이용할 수도 있고 말이다.
“용을 얻을 수 있을 리가 없잖아.”
게다가 어떤 용을 얻어야 하는지도 모른다. 아니, 어떻게 용을 얻을 수 있는지도 모른다.
그냥 아무 용이나 다 길들일 수 있는 건 아닐 것이다. 그랬다면 제국은 용기사로 가득 찼을 테니까.
뭔가 특별한 방법이 있지 않겠는가. 예를 들면 용의 알을 구해 부화할 때 함께 있는다거나 하는 방법 말이다.
“아니면 소환이라도 하나? 나와라! 이렇게?”
현석은 입을 다물었다. 그리고 황당한 표정으로 앞을 바라봤다.
거대한 용 한 마리가 현석 앞에 갑자기 나타나 현석을 노려보고 있었다.
< 황궁으로 가는 길 3 > 끝
ⓒ 김강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