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뒷정리 >
호텔에서 나온 현석은 자신을 미행하는 자들이 셋이나 있다는 걸 알아차리고는 최대한 평범한 관광객처럼 행동했다.
사실 어려울 건 없었다.
일단 근처 커피숍에서 커피 한 잔과 베이글로 아침을 대충 때우며 시간을 보냈다.
정말 할 일이 없었기 때문에 진짜로 느긋한 시간을 보냈다. 이렇게 여유를 가지고 쉬어본 건 제법 오랜만이었다.
‘아니, 회귀 후에 한 번도 없었던가?’
그동안도 쉬긴 쉬었지만 휴식 자체가 다음 정진을 위한 준비 같은 느낌이었다.
그렇기에 한 번도 여유를 가져본 적이 없었다.
항상 쫓기듯 살아왔다.
그러다가 갑자기, 물론 좀 일부러이긴 하지만, 이렇게 여유를 가지고 오전을 즐기니 뭔가 세상이 달라 보이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생각이 달라지니 세상도 달리 보였다.
‘아예 이참에 좀 푹 쉴까? 생각해보니 무엇을 위해 이렇게 달려온 건지도 모르겠군.’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대체 나는 왜 이렇게 열심히 달리고 있는 걸까? 복수는 이미 한 거나 다름없었다.
직접적인 복수는 했고, 이제 배후에 있음이 분명한 렉스턴 에너지와 싸우는 것만 남았는데, 과연 자신이 이렇게 열심히 달리는 게 그것 때문일까?
별 생각이 다 들었다. 하지만 그 모든 생각의 근원에는 레벨업에 대한 욕망과, 플레이어 세상에서 벌어지는 일을 파헤쳐 보고 싶은 호기심이 있었다.
또한 던전의 비밀도 엿보고 싶었다. 대체 자신에게 언제 이런 많은 호기심이 생긴 건지 궁금할 지경이었다.
‘원래…… 원래 그런 놈이었겠지. 눈을 잃으면서 같이 잃어버렸을 테고.’
어쩌면 원래의 진짜 현석을 찾아가는 과정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정리하고 나니, 왠지 마음이 좀 더 편해졌다. 그리고 갑자기 심장이 두근두근 뛰었다.
몸에 깃든 마력이 살짝 요동쳤다가 가라앉았다.
현석은 자신의 몸에서 뭔가가 변했다는 걸 알아차렸다.
레벨업은 아니었다. 레벨은 그대로였으니까. 이것저것 상태창을 불러 확인하던 현석은 달라진 부분을 발견했다.
[심안-마음의 눈을 뜬, 과거로 되돌아온, 마력의 주인 타이틀이 있어야 획득 가능한 스킬. 능력을 수치로 확인할 수 있다. 마력이 담긴 모든 것의 성향을 파악할 수 있다. 3단계 성장 완료(100/100)]
심안의 3단계 성장이 끝났다.
하지만 딱히 변한 건 없었다. 사방에서 보이는 마력이 깃든 것들, 플레이어나 아티팩트의 정보도 그대로였고, 증표에서 물음표로 표기되던 것도 여전히 풀리지 않았다.
‘그냥…… 기분만 좀 좋아진 걸로 끝인가?’
그럴 리 없다.
저렇게 정보가 갱신되었다는 건, 분명히 어떤 의미가 있다는 뜻이었다.
그 의미가 무엇인지 찾는 것이 먼저였다.
왠지 심안에 관계된 퀘스트를 받은 기분이었다.
퀘스트에 대한 생각을 하니, 문득 아직도 퀸급 던전 생성지역에서 개고생을 하고 있을 팀 메인퀘스트가 떠올랐다.
‘이제 슬슬 레벨이 정체기에 들어섰으려나?’
아무래도 퀸급이니 제대로 구르기만 하면 상당한 성장이 가능할 것이다.
그만큼 위험하긴 하지만 거기에는 버퍼와 힐러가 있다. 어떤 상황이든 살아남을 수 있을 것이다.
‘슬슬…… 탐험의 시간이 다가오는군.’
팀 메인퀘스트라는 이름에 걸맞은 모험이 기다리고 있었다. 정말 위험하지만 성장 가능성이 높고, 그리고 새로운 모험이었다.
‘아마 다들 좋아할 거야.’
현석은 진심으로 그렇게 믿었다. 자신도 그때가 정말 기다려졌으니까.
그렇게 몇 시간을 여유롭게 보낸 현석은 커피전문점을 나와 느긋하게 거리를 거닐었다.
맨하탄에도 볼거리가 제법 있었다. 현석은 스마트폰을 통해 그런 것들을 하나하나 검색하며 차근차근 급하지 않게 구경하며 돌아다녔다.
그렇게 하루가 지나갔다. 그때까지도 감시자들이 붙어 있었다. 하지만 하나가 줄어들었다.
현석에 대한 의심이 줄어들었다는 뜻이다.
사실 저들을 따돌리고 투명던전으로 들어가 버릴 수도 있었다. 그러면서 절대 들키지 않을 자신도 있었다.
하지만 현석은 굳이 그렇게 하지 않았다.
회귀 후 처음 갖는 여유다. 이 시간이 왠지 정말 소중했다.
해가 저물 무렵 다시 호텔로 돌아갔다. 대담하게도 J호텔로 돌아갔는데, 그곳에 예약이 되어있으니 당연했다.
그렇게 이틀이 지나자, 결국 모든 감시의 눈이 사라져 버렸다.
현석을 그저 단순한 관광객으로 판단한 것이다.
그 뒤로도 무려 이틀을 더 머물렀다. 그동안 현석이 하는 일이라고는 그저 걸으며 구경하고 먹고 쉬고 다시 호텔로 돌아와 자는 것이 전부였다.
겉으로 보기에는 한량이나 다름없었는데, 사실 현석은 그러면서 놀라운 경험을 하는 중이었다.
사냥을 한 것도 아니고 수련을 한 것도 아닌데, 레벨이 오르고 있었다.
게다가 마력 컨트롤 능력이 체감으로 느껴질 정도로 급격히 향상됐다.
그래서 하루하루 머무는 시간이 늘어난 것이다. 대체 언제까지 이게 될지 보려고 말이다.
그리고 어제를 끝으로 더 이상 레벨이 오르지도, 마력 컨트롤 능력이 늘어나지도 않았다.
사실 대표적인 것이 그 두 가지라서 그것만 언급한 것이지, 실제로는 변한 것이 훨씬 많았다.
예를 들면 스탯이 있다. 레벨이 오르지 않았는데도 스탯이 올라갔다. 그저 충분히 쉰 것만으로 말이다.
체력과 정신력이 중점적으로 올랐고, 힘이나 민첩도 상당히 많이 올랐다. 지력이 가장 더디게 오르긴 했지만 그것도 제법 오르긴 했다.
그런 식으로 고작 일주일 동안 얻은 거라고는 믿기 어려울 정도로 급격한 성장을 했다.
어쨌든 그 성장도 이제 끝났으니 다시 원래대로 돌아갈 시간이 되었다.
현석은 체크아웃을 하고 호텔을 나섰다.
이제 투명 던전을 통해 다시 한국으로 돌아갈 시간이 되었다.
투명던전이 있는 고가도로를 향해 걸어가던 현석은 문득 지금이 렉스턴 에너지가 가장 방심하고 있을 때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남은 다섯 개의 아공간 금고도 가져와야 하는 게 아닐까 하는 마음이 슬그머니 생겨났다.
어느새 현석은 고가도로가 아닌 다른 곳으로 향하고 있었다.
거기에는 현석이 아는 엠페러타워의 입구 중 하나가 있었다. 물론 그곳은 아직 현석이 채 건드리기 전의 입구였다.
이번에는 굳이 조심스럽게 일을 진행할 생각이 없었다. 제대로 분탕질을 한 번 칠 생각이었다.
물론 처음부터 그렇게 하지는 않을 것이다. 최대한 조심해서 하다가 분위기가 이상하다 싶으면 제대로 뒤집어줄 생각이었다.
걸음을 옮기는 현석의 입가에 어느새 미소가 떠올랐다.
* * *
칼슨은 이젠 분노하다 못해 허탈한 표정으로 비서를 노려봤다.
“보안…… 강화하라고 했지?”
“강화했습니다! 훨씬 더 강화했는데…… 그런데 어쩔 수가 없었습니다.”
“그놈 신상 털어. 얼굴 확보했지?”
“예. 일단 확보는 했습니다만…… 아무래도 변장한 얼굴 같습니다.”
“당연히 그렇겠지. 그럼 그냥 맨얼굴을 드러내놓고 다닐 거 같아?”
비서는 마른침을 꿀꺽 삼키고는 칼슨을 바라봤다.
“아무리 변장을 했어도 원래 얼굴을 알아낼 방법이 분명히 있을 거야. 그 정도는 알아서 좀 해!”
“예! 즈, 즉시 알아보겠습니다.”
“그놈…… 아직 빠져나가지 못한 거 확실한가?”
“일단 모든 입구를 완벽하게 틀어막았습니다. 한창 날뛰고 있을 때 진행한 일이기 때문에 아마 절대 빠져나가지 못했을 것입니다.”
단단한 철벽으로 엘리베이터로 올라오는 길 자체를 막았다. 엠페러타워를 빠져나오려면 그것을 부수는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아직 그 어느 곳도 부서지지 않았다. 그리고 엄청난 병력이 입구를 지키는 중이었다.
만일 밖으로 나온다면 이번에는 절대 도망칠 수 없었다.
“잘 지켜. 그놈…… 무조건 잡아.”
“예. 알겠습니다.”
비서는 시원하게 대답을 했지만 사실 속은 타들어가는 중이었다.
피라밋 쪽을 컨트롤하기 위한 인력까지 모조리 동원해 그놈을 잡기 위한 병력에 쏟아 넣었다.
이대로라면 당분간 피라밋 쪽은 방치할 수밖에 없었다.
만일 나중에 뭔가 잘못되기라도 하면 그 모든 책임을 자신이 뒤집어써야 하는데 마음이 편할 리 없었다.
‘차라리…… 도망을 가 버릴까?’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지만 이내 고개를 저었다.
렉스턴 에너지의 힘은 자신이 더 잘 알고 있었다. 도망가 봐야 벼룩이다. 아마 이틀도 버티지 못하고 잡혀올 것이다.
그 다음은 죽지도 살지도 못하게 된 채 평생을 고통 속에서 살아야 하고 말이다.
상상만으로도 온몸이 부르르 떨렸다.
비서는 고개를 꾸벅 숙이고는 서둘러 밖으로 나갔다. 더 이상 칼슨의 저 무시무시한 시선을 견뎌내다가는 소변이라도 지릴 것만 같았기 때문이다.
비서가 후다닥 사라지자, 칼슨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유리벽 앞을 서성였다.
이번에는 아무리 맨하탄의 전경을 내려다봐도 진정이 되지 않았다.
“왠지 불안하더라니…… 그걸 싹 털릴 줄이야.”
설마 남은 다섯 개의 아공간 금고까지 싹 가져갈 줄은 몰랐다.
물론 진짜 중요한 것은 다른 곳에 보관하고 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엠페러타워의 아공간 금고에 보관한 아이템들이 별 거 아니라는 뜻은 아니다.
최근의 플레이어 세상에서도 상당히 가치가 높은 물건들이 잔뜩 들어 있었다. 일부는 정말 구하기 어려운 것들이었다.
한데 그 모든 걸 싹 털려 버렸다.
그걸 다시 채워 넣으려면 대체 얼마나 많은 인력과 시간과 돈이 들어갈지 생각만 해도 골치가 지끈지끈 아파왔다.
하지만 안 할 수는 없었다.
그걸 해야 플레이어 세상의 지하경제를 꽉 틀어쥘 테니까.
“어떤 놈인지…… 잡히기만 해라.”
칼슨은 밖을 내다보며 으드득 이를 갈았다.
* * *
현석은 널찍한 바위에 앉아 주변을 둘러봤다.
이곳은 투명던전 안이었다. 들어올 때 확인한 이름은 [황궁으로 가는 길]이었다.
뭔가 딱딱 맞아떨어지는 이야기의 주인공이라도 된 기분이 들었다.
“이건…… 꼭 날 황궁으로 보내고 싶어서 안달이 난 사람이 있는 것 같네.”
길을 찾는 건 어렵지 않았다. 관련 아티팩트가 있었으니까.
현석은 [안내자의 증표]를 확인했다.
이것은 예전 오명국에게 선물로 받은 아티택트였다. 황궁까지 가는 지도를 볼 수 있다는 설명이 붙어 있는데, 과연 마력을 주입하니 지도가 쫙 펼쳐졌다.
상당히 먼 여정이었다. 하지만 시간은 얼마 걸리지 않을 것이다. 현석이 달리는 속도는 상상을 초월하니까.
문제는 중간에 필연적으로 만나게 될 마수들이었다. 과연 어떤 마수들이 있는지 모르지만 결코 쉽지는 않을 것이다.
“설마 황궁으로 가는 길이…… 엠페러타워에 있을 줄이야.”
생각도 못했다.
이곳을 발견한 덕분에 굳이 무리해서 밖으로 나가지 않았다. 사실 하려고 했다면 충분히 할 수 있었다.
물론 어느 정도 피해는 각오해야 하지만 어쨌든 빠져나갈 자신 있었다.
하지만 투명던전이 있다면 얘기가 전혀 달라진다.
아무 피해 없이 몸을 뺄 수 있는데 왜 굳이 위험을 감수하겠는가.
현석은 미련 없이 투명던전으로 들어갔다.
어차피 아공간 금고는 모두 수집했기에 더 이상 엠페러 타워에는 볼일이 없었다.
이번 투명 던전에서는 시간이 제법 걸릴 것이다.
그러니 나중에 빠져나갈 때쯤이면 또 경계가 허술해져 있을 것이 분명했다.
그때 선물 하나를 더 안겨주면 이번 생에서는 어쩌면 엠페러타워가 세계 3대 암시장에 이름을 못 올리는 걸 볼 수 있을지도 모른다.
현석은 그런 생각을 하며 머릿속에 떠오른 지도를 확인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가슴이 두근거렸다.
황궁이라니. 어쩌면 황궁에서 황제를 만날 수 있을지도 모른다.
물론 예상대로라면 이미 마수처럼 변해버렸을지도 모르지만.
‘어쩌면…… 그 사면령이라는 걸 얻을 수 있을지도 모르지.’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황궁에 다녀오고 나면 현석은 지금보다 훨씬 더 크게 성장할 거라는 점이었다.
현석은 힘차게 황궁으로 가는 첫 발을 내디뎠다.
< 뒷정리 > 끝
ⓒ 김강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