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엠페러 타워 3 >
벽면 거의 전체가 아티팩트에 포함되어 있었다. 그 정도로 거대한 아티팩트였다.
현석은 그걸 유심히 살피면서 재미난 사실 한 가지를 찾아냈다.
이 아티팩트는 원래 다른 아티팩트와 연결될 수 있도록 만든 게 분명했다.
아티팩트의 경계를 보면 무언가와 연결할 수 있는 마력패턴이 존재했다.
그것도 그냥 연결이 아니라 아주 강력한 연결이었다. 그걸 강제로 분리해 여기에 갖다 끼워놓은 것이다.
현석은 대충 어떻게 된 건지 유추할 수 있었다.
아마 이 아티팩트는 애초에 금고나 창고로 쓰였을 것이다. 그러니 도난에 대비해야 하고, 그것이 바로 다른 아티팩트와의 연결이었다.
이 금고만 떼어내서 가져가지 못하도록 다른 거대한 방어 아티팩트와 연결시켠 놓은 것이다.
그 연결 고리를 부수려면 막대한 힘이 필요할 것이고, 그렇게 하려면 몰래 금고만 떼 가는 건 불가능할 테니까.
현석의 입가가 슬쩍 올라갔다.
만일 그 모든 걸 다 갖춰서 여기에 갖다놨다면 아무리 현석이라도 몰래 이걸 가져가는 건 불가능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 이대로라면 어려울 게 없다.
현석은 검을 뽑았다. 그리고 벽에 파묻힌 아티팩트의 경계에 검을 푹 찔렀다.
두부에 칼을 꽂듯 가볍게 푹 들어갔다.
현석은 검을 휘리릭 돌려 아티팩트만 싹 도려냈다.
소리도 나지 않았고, 아주 깔끔하게 떨어져 나왔다. 애초에 분리되어 있던 걸 강제로 끼워 놓았으니 간단히 떨어지는 게 당연했다.
현석은 그렇게 떨어져 나온 아티팩트를 자신의 아공간에 넣었다.
혹시 아공간끼리 충돌하는 건 아닐까 걱정했는데, 그러지는 않았다.
어쩌면 좀 특이한 방식의 아공간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니면…… 내 아공간이 특별해졌거나.’
최근 현석의 마력 컨트롤 능력이 올라가면서 현석의 아공간도 점점 특별하게 변해갔다.
이유는 아직 현석도 모른다. 하지만 왠지 아공간이 다른 아공간과는 전혀 다른 성질로 변해가는 것 같았다.
아공간에 다른 아공간을 보관하는 건 상당히 위험성이 높았다.
그래서 지금까지는 아공간 아티팩트를 따로 보관해 왔다.
시도해보지 않은 건 아니었다. 하지만 넣을 때마다 공간의 충돌이 일어나 이젠 포기한 상태였다.
한데 이 아공간은 충돌하지 않고 현석의 아공간에 쏙 들어갔다.
어쨌든 잘 되면 된 것 아닌가.
엠페러타워의 창고를 빼돌렸으면 이제 이곳에서의 할일은 끝난 셈이었다.
현석은 조용히 그곳을 빠져나왔다.
건물 곳곳에 아티팩트들이 있었지만 굳이 그것까지 건드리지는 않았다.
어차피 대단한 것도 없었을뿐더러 괜한 경각심을 미리 심어줄 필요는 없었으니까.
저들에게 비상이 걸리는 건 금고가 사라졌다는 걸 알아낸 순간부터였다.
물론 그것도 쉽지는 않겠지만 말이다.
건물에서 빠져나온 현석은 첫 번째 동굴로 들어갔다.
동굴은 상당히 컸기에 혹시 앞에서 누군가 다가온다 하더라도 충분히 눈을 피할 수 있었다.
물론 그냥은 안 되고, 암흑석을 비롯해 마력까지 잘 써서 최대한 잘 숨어야겠지만 말이다.
동굴은 당연히 길었다. 하지만 직선으로 뻗어 있어서 현석 정도 되는 플레이어라면 빠르게 이동이 가능했다.
현석은 최대한 빠르게 달리면서도 기척이 흘러나가지 않게 조심해서 움직였다.
그렇게 얼마나 달렸을까. 이내 환한 공터가 나타났다. 생각해보니 여기도 지하 깊은 곳인데 이렇게 환하다니 좀 놀라웠다.
천장을 보니 역시나 LED등이 촘촘하게 박혀 빛을 내고 있었다.
아마 이 밝기를 유지하는 데만 해도 엄청난 전력이 들어갈 것이다.
그런 것이 하나도 아니고 15개나 있으니.
공터의 구조는 중앙의 그것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다만 이곳은 공터가 더 좁았다. 다른 곳으로 이동할 통로가 많지 않으니 당연했다.
‘세 개.’
여긴 동굴이 세 개 있었다.
방금 현석이 지나온 동굴, 그리고 양 옆으로 각각 하나씩 더 뚫려 있었다.
그거 하나만으로도 엠페러타워의 구조를 알 수 있다.
모든 동공은 중앙으로 연결되어 있고, 또 양옆으로 인접한 두 개의 동공에 연결되어 있는 것이다.
그리고 지상으로 갈 수 있는 엘리베이터도 있을 것이다. 물론 없는 곳도 있고 말이다.
지금 현석이 들어온 곳은 엘리베이터가 없는 동공이었다.
인부의 수는 중앙과 비교해도 크게 떨어지지 않았다. 역시나 여기서 일하는 자들도 다들 불법체류자 같았다.
현석은 더 이상 그들에게 신경 쓰지 않았다. 나중에 기회가 되면 구해줄 수도 있겠지만 지금 당장은 시간 낭비일 뿐이니까.
빠르고 은밀하게 공터를 가로지른 현석은 건물로 숨어들었다.
이곳 역시 아까와 마찬가지로 방비가 크게 심하지 않았다. 아니, 여기는 아까보다 더 허술했다.
‘대체 왜 이렇게 방비가 허술한 거지?’
현석은 그 점을 이해할 수 없었다. 하지만 그러면 자신에겐 좋은 일 아니겠는가.
건물 안쪽 깊은 곳으로 들어간 현석은 또 하나의 아공간 금고를 발견했다.
아까와 정확히 모양과 방식이 일치하는 아공간 아티팩트였다. 다만 크기와 용량이 좀 작았다.
현석은 이 금고도 서걱서걱 썰어서 자신의 아공간에 보관했다.
이것 역시 별다른 충돌 없이 얌전하게 현석의 아공간으로 들어갔다.
그렇게 건물을 빠져나온 현석은 옆으로 뚫린 동굴로 들어갔다. 그러면서 시간을 확인했다.
‘아무래도…… 15개 전부를 돌지는 못하겠는데?’
이동에 시간이 너무 오래 걸렸다. 남은 시간이 별로 없었다. 그리고 시간을 모두 채우기 전에 이 안에 침입자가 들어왔다는 사실이 알려질 가능성도 있었다.
현석은 냉정함을 유지하며 철저히 만일의 사태에 대비한 동선을 짰다.
그리고 상황을 빠르게 파악할 방법을 마련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현석이 선택한 것은 도청이었다.
마력을 이용해 작동하는 작은 도청기와 위치추적기를 건물 입구에 묻어두었다.
혹시라도 무슨 일이 생기면 즉시 상황을 파악하고, 가장 감시가 허술하면서 안전하게 빠져나갈 수 있는 곳이 어디인지 알아낼 수 있도록 말이다.
그렇게 조치를 취한 현석은 더욱 서둘러 빠르게 움직였다.
최대한 많은 금고를 취해야 한다. 엠페러타워를 제대로 흔들려면 말이다.
* * *
콰당탕탕!
“크, 큰일났습니다!”
칼슨은 새하얗게 질린 얼굴로 문을 거의 부술 듯 힘껏 열고 달려들어온 비서를 보며 눈살을 찌푸렸다.
엠페러타워에 대한 세부계획을 점검하고 있었는데, 저렇게 소란을 피우는 바람에 집중이 깨져 버렸다.
“무슨 일이지?”
칼슨은 최대한 평정심을 유지하려 애쓰며 물었다. 하지만 이어지는 보고에 평정심이 산산조각 났다.
“엠페러타워의 금고가 털렸습니다!”
“뭐라고!”
쾅!
칼슨이 책상을 내리치며 벌떡 일어났다. 그의 눈은 금방이라도 불길을 쏟아낼 것처럼 이글이글 타올랐다.
“무슨 일인지 자세히 보고해!”
“방금 J호텔 지하에 있는 중앙 엠페러타워의 금고가 사라졌다는 보고를 받았습니다.”
“다른 곳은!”
“조사해서 바로 보고하라고 알렸습니다.”
마침 그 순간 전화벨이 울렸고, 비서가 얼른 전화를 받았다. 비서의 얼굴이 점점 창백해졌다.
“벌써 열 군데가 당했답니다!”
그 보고를 듣는 와중에도 칼슨의 머리가 팽팽 돌아갔다.
“어떤 놈인지 모르지만 아직 진행 중이야. 당장 비상 때리고 병력 투입해서 그놈 잡아!”
“예!”
“반드시 산 채로 잡아! 배후를 캐야 하니까!”
칼슨은 배후가 있을 거라고 판단했다. 그게 아니라면 이런 엄청난 스케일의 작전을 펼칠 수 있을 리 없으니까.
엠페러타워의 금고인 아공간 아티팩트는 크기가 상당하다. 그러니 그냥 가지고 나갈 수는 없었다.
아주 특별한 루트를 이용해야만 한다. 엘리베이터에도 들어가지 않으니 말이다.
그렇다는 얘기는 그 루트만 단단히 틀어막고 있으면 그놈은 절대 금고를 빼돌리지 못한다는 뜻이었다.
“그나마 아직 진행 중이라서 다행이야.”
칼슨은 그렇게 중얼거리며 전화기를 들었다. 어떤 놈들이 들어와 저러는지는 몰라도 한두 놈이 아닐 것이다. 그리고 보통 실력이 아닐 것이다.
그놈들이 도망칠 가능성이 만에 하나라도 있어선 안 된다. 그러려면 이런 일에 특별한 힘을 발휘하는 녀석들을 보내야 한다.
전화기 속으로 신호음이 세 번 울리자 상대가 전화를 받았다.
“엠페러타워에 쥐새끼들이 숨어들었어. 싹 잡아. 죽이지는 말고.”
그렇게 명령을 내린 칼슨이 전화를 끊고 이를 갈았다.
“어떤 놈인지 몰라도…… 아주 잘 걸렸어.”
칼슨은 문득 피라밋 암시장이 떠올랐다. 시기가 참으로 공교롭지 않은가.
“설마…… 설마 피라밋에 사는 그 여왕의 졸개들은 아니겠지?”
칼슨은 고개를 저었다. 그럴 가능성은 지극히 낮다. 그들은 지금 당면한 싸움을 준비하는 것만으로도 벅찰 테니까.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머미킹을 깨운 건 신의 한 수였어.”
지금 피라밋 암시장은 정확히 두 패로 갈려 싸우고 있었다. 아직 유혈 사태가 벌어지진 않았지만 그것도 시간 문제였다.
여기서 조금만 더 흔들어주면 싸움은 걷잡을 수 없는 방향으로 치달아갈 것이다.
그리고 그 틈을 이용해 엠페러타워를 열어야 한다. 아마 단숨에 세계 제일의 암시장으로 성장할 수 있을 것이다.
피라밋의 지분을 싹 가져올 수 있을 테니까.
남은 건 중국의 흑시 정도인데, 그쪽은 천천히 요리하면 된다. 그놈들이 차지한 퀸급 던전 생성지역도 결국은 빼앗아 와야 하니까 말이다.
“한데, 그런 내 계획에 감히 초를 쳐?”
생각할수록 이가 갈렸다. 칼슨은 그놈이 누군지 모르지만 배후의 배후까지 싹 털어서 모조리 죽지도 살지도 못하게 만들어 평생 고통 속에서 살게 해주겠다고 다짐했다.
* * *
“예상이랑 비슷하긴 한데…… 좀 아쉽군.”
현석은 아쉬운 표정으로 움직임을 멈췄다.
이제 10개의 금고를 털었을 뿐이었다. 그리고 동굴의 끝이 코앞에 있었다.
조금만 무리하면 지금 나타날 곳의 금고까지 가져갈 수도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현석은 무리하지 않았다.
누가 이 일을 벌인 건지 들키지 않기 위해 곳곳에 도청 아티팩트를 뿌리고 다녔던 거 아니겠는가.
이 정도만 해도 충분했다. 아마 엠페러타워는 당장 열기 어려울 것이다.
규모만 크면 뭐 하겠는가. 팔 물건이 별로 없는데. 먹음직스러운 물건을 잔뜩 가져다 놔야, 또 물건을 팔고 싶은 사람들이 꼬이는 법이다.
현석은 그렇게 동굴에서 나갔다. 그리고 바로 몸을 숨겼다.
이곳 동굴도 플레이어들이 눈에 불을 켜고 돌아다니고 있었다.
현석이 가장 먼저 확인한 것은 엘리베이터의 유무였다.
‘있다.’
다행스럽게도 엘리베이터가 있는 곳이었다. 그렇다면 빠져나가기도 훨씬 수월할 것이다. 동굴을 이동하지 않아도 되니 말이다.
아마 지금쯤이면 모든 동굴에 병력이 투입되고 있을 것이다.
그 병력들과 마주친다고 해서 두려울 건 없지만, 그렇게 위치가 파악되면 그 뒤가 힘들어진다.
현석은 품에서 작은 펜 하나를 꺼냈다.
무지갯빛을 은은하게 품고 있는 펜이었다. 펜처럼 생겼지만 그건 펜이 아니었다.
모양도 펜과 비슷할 뿐, 자세히 보면 펜과는 좀 달랐다. 끝에 누르는 버튼이 달려 있었다. 당연히 잉크가 나오는 펜촉 부분은 없었다.
그저 뭉툭한 막대기에 가까운 물건이었다.
물론 그건 현석이 미리 준비한 아티팩트였다. 이럴 때를 대비해서 준비한 물건이었다.
그리고 그동안 현석이 열심히 뿌리고 다니던 도청장치와 마력 감지장치와 연결된 아티팩트이기도 했다.
“그럼…… 빠져나갈 준비를 해볼까?”
현석은 그렇게 중얼거리며 펜의 버튼을 힘껏 눌렀다.
펜이 부서져 가루가 되었다. 그리고 그 반동으로 강력한 마력의 파동이 사방으로 크게 퍼져 나갔다.
현석의 입가에 슬며시 미소가 떠올랐다.
< 엠페러 타워 3 > 끝
ⓒ 김강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