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천하제일인 3 >
임형석과 장춘의 싸움은 입이 떡 벌어질 정도로 대단했다.
두 사람의 스타일은 전혀 달랐다.
임형석은 저돌적으로 모든 걸 파괴하는 타입이고, 장춘은 회피와 흘리기에 중점을 둔 타입이었다.
그래서 대결의 양상은 임형석이 정신없을 정도로 공격을 몰아치고, 장춘이 그 공격을 교묘하게 흘리고 꼬아서 해소하는 방식으로 이어졌다.
말로 하면 이렇게 단순하지만 그 사이에 들어간 무수한 기법들이 구경꾼의 입을 다물지 못하게 했다.
진영관은 정말 큰 충격을 받았다. 그리고 자신과의 대결에서 임형석이 정말로 많이 봐줬다는 걸 다시 한 번 깨달을 수 있었다.
과연 자신이 저 장춘을 상대로 싸우면 얼마나 버틸 수 있을까?
진영관은 고개를 저었다. 열 수도 못 버틸 것이다.
장춘은 상대의 공격을 막고 흘리는 것만 잘하는 것이 아니었다. 공격을 흘릴 때 필연적으로 따라오는 미세한 빈틈을 날카롭게 찌르는 카운터 공격이 정말 무서웠다.
아마 진영관이었다면 단 한 수에 끝났을 수도 있었다.
하지만 임형석에게는 그런 방식이 별로 통하지 않았다. 임형석은 그런 빈틈을 강제로 메울 수 있을 정도의 파괴력이 있었다.
어설프게 빈틈을 찌르다간 역으로 당할 수도 있었다. 그래서 장춘은 처음 한 번 카운터를 시도하다가 크게 혼쭐이 날 뻔한 이후로 그것을 극도로 자제하는 중이었다.
완벽한 빈틈이 드러나기 전에는 계속 체력과 내력을 비축해 둘 생각이었다.
임형석의 공격이 워낙 강력해서 그저 흘리기만 하는 데에도 상당한 체력과 내력이 필요했다.
하지만 그걸 역으로 생각하면 흘리기에만 집중하면 상대의 힘을 쭉 빼놓을 수도 있다는 뜻이기도 했다.
그렇게 수십 차례의 공방이 오갔다. 아니, 일방적인 공격과 방어가 이어졌다.
임형석도 바보가 아닌 이상 이쯤 되면 상대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를 수 없었다.
하지만 그래도 힘을 빼고 공격을 하거나 하지 않았다. 전진을 위한 후퇴 따위는 임형석의 스타일이 아니었다.
임형석은 더욱 저돌적으로 공격을 이어갔다.
그리고 마침내 지금까지보다 좀 더 큰 빈틈이 나타났다. 임형석은 씨익 웃으며 주먹을 내질렀다.
이건 회심의 한 수였다.
콰우우!
그의 주먹이 주변 공기를 찢어발기며 장춘의 오른쪽 가슴을 파고들었다.
장춘이 그걸 보며 눈을 빛냈다. 노림수에 상대가 걸려든 것이다.
그는 몸을 비스듬하게 돌리며 팔뚝을 들어 임형석의 주먹을 밖으로 밀어냈다.
일부러 만든 빈틈이었다. 이걸 성공하면 임형석의 옆구리 쪽에 분명히 손바닥 한 방 정도는 먹여줄 수 있을 것이다.
그렇게 장춘의 팔뚝과 임형석의 팔뚝이 딱 닿는 순간, 임형석이 팔에 힘을 꽉 주었다.
파앙!
강력한 충격파가 임형석과 장춘 사이에서 터졌다.
장춘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자신의 노림수를 임형석도 함께 노리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더 중요한 사실을 깨달았다.
지금까지의 공방은 진짜 어린애 장난 같은 거였다. 아니, 탐색전에 불과했다.
진짜 싸움은 지금부터였다.
파파파파파파팡!
매 격돌마다 충격파가 터졌다.
장춘이고 임형석이고 이래서는 버틸 수가 없었다.
이대로 충격이 계속되면 상대적으로 체력이나 근력이 약한 장춘이 더 손해일 것이다.
하지만 장춘은 그 와중에도 내력을 이용해 충격파를 흘려내고 있었다.
그러니 결과를 예측할 수 없었다.
한 가지 확실한 건 이제 끝이 머지않았다는 점이었다.
꽈앙!
거대한 폭발음이 울렸다. 그리고 장내가 자욱한 먼지로 뒤덮였다.
그것이 마지막 격돌이었다. 드디어 싸움이 끝났다.
* * *
커다란 불판에 고기가 지글지글 익어가고 있었다.
그 불판 주위로 다섯 남자가 둘러 앉아 술잔까지 기울이며 열심히 먹고 마셨다.
“크아. 한바탕 움직였더니 아주 그냥 고기가 꿀맛이네.”
가장 많은 고기와 술을 흡입하고 있는 사람은 단연 임형석이었다.
덩치도 가장 컸고, 싸울 때의 에너지 소모도 그가 가장 컸을 테니,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그리고 그 많은 고기를 굽는 사람은 가이드였다.
사실 그는 이런 일을 하려고 온 사람은 아니었지만 찍소리도 못하고 일꾼을 자처하고 있었다.
함께 있는 사람들이 하나하나 보통 사람이 아니니, 아차 하는 순간 이 세상과 작별인사를 하고 떠날 수도 있겠다는 위기감이 항상 따라다녔다.
어쨌든 불판이 워낙 컸고, 고기도 워낙 많았기에 나름 열심히 구우면서도 충분히 먹을 수는 있었다.
다만 술을 마시기가 좀 어려웠는데, 그건 일부러라도 안 마시는 게 나았다.
취기 좀 올라왔다고 헛소리 하다가 죽으면 자신만 손해였으니까.
진영관과 장춘은 가이드와는 달리 편안하게 먹고 마셨다. 고작 이런 걸로 벌벌 떨기엔 그들이 그동안 살아온 삶이 평탄지 않았다.
또한 가진 힘도 만만치 않았다.
어쨌든 그렇게 분위기가 조금씩 무르익어갔다.
그 자리에서 가장 조용한 사람은 현석이었다. 현석은 어딘가에서 고기를 잔뜩 가져와 턱 내려놓은 다음, 자리에 앉아 누군가 고기를 굽기만 기다렸다.
그게 현석이 한 전부였다.
“그나저나 이 고기 대체 무슨 고기야? 이렇게 맛있는 고기는 처음인데?”
임형석이 고기를 와구와구 씹으며 현석에게 물었다. 그 질문에 다들 같은 표정으로 현석을 바라봤다.
고기는 정말 끝내줬다.
쫀득쫀득한 식감도 그렇고, 씹을 때마다 입 안 가득 퍼지는 맛과 향이 기가 막혔다.
게다가 씹으면 씹을수록 맛있어서 고기는 그저 몇 번 씹고 삼키는 게 당연하다고 여기는 임형석조차 최대한 여러 번 고기를 씹는 중이었다.
“이런 고기라면 평생 이것만 먹고 살아도 될 것 같은데?”
임형석이 만족스런 표정으로 고기 세 점을 한꺼번에 입에 털어 넣으며 말했다.
다들 고개를 끄덕이며 그 말에 동의했다. 그 정도로 맛있었다.
게다가 술은 또 어떠한가.
술 역시 현석이 가져온 것인데 30리터짜리 하얀 물통에 들어 있는 술이었다. 그러니 직접 담갔다는 뜻인데, 대체 어디서 이런 걸 구해왔는지 알 수 없었다.
어쨌든 술맛도 기가 막혔다. 마시면 목구멍이 화끈해지는 걸 봐선 상당히 센 술인 게 분명한데, 입에서는 전혀 그런 느낌이 들지 않았다.
술맛이 고기맛과 어찌나 절묘하게 어우러지는지 벌써 세 통의 술을 비웠다.
한 통이 30리터짜리이니 조금만 더 마시면 넷이서 100리터를 마시는 셈이었다.
그나마 현석은 어쩌다 한 잔씩 마실 뿐이니 대부분을 셋이서 마신 셈이었다.
그런데도 아직 만취한 사람은 없었다. 정말 다들 술이 센 모양이었다.
“이 근처에서 이런 술을 파는 곳이 없는데, 대체 어디서 이런 걸 사왔나? 어딘지 좀 알고 싶은데. 고기도 그렇고.”
장춘이 은근한 목소리로 현석에게 물었다.
“그거 알려주면 한 판 더 붙어줄 겁니까?”
임형석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씨익 웃으며 끼어들었다.
그러자 장춘이 인상을 쓰며 물러났다.
“끄응. 없던 얘기로 하지.”
“허, 나 참. 자기 마음을 계속 그렇게 감추고 살면 병납니다, 병나요.”
장춘은 대답 대신 고기를 입에 넣고 술잔을 단숨에 비웠다.
“크으. 좋다.”
“이 근처에서 구한 게 아닙니다.”
현석의 말에 장춘이 눈을 빛내며 바라봤다.
“하면? 어느 지역에서 구해온 건가?”
“그냥 갖고 다니던 겁니다.”
임형석이 또 끼어들었다.
“고기랑 술을 내줄테니 한 판 붙으시렵니까?”
“끄응. 자네 고기도 아닌 거 같은데 왜 자네가 주인 행세를 하는 건가? 난 주인과 직접 얘기할 걸세.”
현석은 두 사람의 분위기를 보고는 즉시 말했다.
“말해주지 않을 겁니다. 나 말고 구할 수 있는 사람도 없습니다.”
이 고기와 술이 어디에서 왔는지 말해주면 아마 다들 기겁을 할 것이다.
솔직히 말하면 현석은 사람들이 왜 그런 반응을 보이는지 이해할 수 없었지만, 경험적으로 예측이 가능했다.
예전 지렁이 고기를 줬을 때도 그러지 않았던가. 먹을 때는 그렇게 맛있게 먹더니 그게 지렁이 고기라고 하니까 먹은 걸 싹 토해내고 말이다.
지금 먹은 고기와 술의 양을 생각할 때, 아마 이걸 다 토해내면 이 근처에서 지내는 건 절대 무리였다.
아마 지독한 냄새 때문에 당분간 이 근처를 떠나 있어야 할지도 모른다.
그나마 인가가 먼 곳이긴 하지만, 그래도 괜히 그런 추한 장면을 만들 이유는 없지 않은가.
장춘은 입맛을 다시며 아쉬운 표정을 지었다.
이런 맛있는 고기와 술을 다시 즐길 수 없다니, 이렇게 안타까운 마음이 든 건 정말 오랜만인 듯했다.
“뭐…… 그거야 그렇다 치고…….”
장춘은 아쉬움을 뒤로 하고 슬그머니 말을 돌렸다. 그는 현석을 똑바로 바라보며 물었다.
“자네 정체가 뭔가?”
현석은 그 말의 의미를 몰라 장춘을 쳐다봤다.
“자네, 그냥 단순한 플레이어가 아니지? 그렇지?”
현석은 이번에도 대체 장춘이 무슨 말을 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자신은 그저 플레이어일 뿐이었다. 심안이라는 특별한 스킬을 가진 플레이어 말이다.
“나와 저 친구의 대결을 봤으면 알겠지만…… 난 어릴 때부터 아주 체계적으로 무술을 수련해온 사람일세.”
그 말에 임형석과 진영관이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그 두 사람은 그 부분에 대해 가장 명확히 알 수 있는 자들이었다.
진영관 역시 어릴 때부터 체계적으로 무술 수련을 해왔고, 임형석은 그 반대의 정점에 서 있는 사람이었으니까.
“그리고 기를 다룰 수 있는 몇 안 되는 무술가 중 하나지.”
장춘은 그렇게 말하며 옆에 앉은 진영관을 힐끗 쳐다봤다. 진영관 역시 그 몇 안 되는 기를 다룰 수 있는 무술가였다.
“다들 날 천하제일인이라고 추켜세우는 이유가 거기에 있네. 아마 천하를 통틀어 나보다 더 기에 대해 잘 아는 사람은 없다고 자부하네.”
장춘은 그렇게 말하고는 임형석을 바라봤다.
“저 친구는…… 좀 특이한 경우일세. 분명히 기를 다루는 것 같은데, 그게 좀 이상해. 그냥 보통 기가 아닌 것만은 확실하네.”
그 말을 들은 임형석이 인상을 썼다.
“그게 무슨 말입니까?”
“자넨 천재일세.”
그 말에 임형석의 입꼬리가 한없이 위로 올라갔다. 자신을 천재라고 추켜세워 주는데 기분이 나쁠 리 없었다.
“영감님이 뭐 좀 아시네. 으하하하!”
“본능적으로 기를 감지해 그걸 자신의 것으로 만들었으니 대체 얼마나 천재면 그게 가능할지 난 상상도 안 가네.”
“그럼 내가 좀 체계적으로 배웠으면 훨씬 대단해졌을 거라, 그겁니까? 지금이라도 좀 배워볼까요? 예?”
장춘이 고개를 저었다.
“이미 늦었네. 자네의 기는 자네의 싸움방식에 완벽하게 녹아들었어. 이제 와서 다른 걸 배워봐야 충돌할 뿐일 테지.”
임형석은 별로 아쉬워하지 않았다.
“뭐, 그럼 앞으로도 몸으로 직접 싸우면서 배우면 되겠네.”
“그리고 아마 체계적으로 배웠다면 오히려 더 성취가 더뎠을 수도 있네.”
그 말에도 임형석은 고개를 끄덕여 수긍했다.
“그럴 수도 있죠. 뭔가에 얽매이는 거 진짜 싫어하니까.”
장춘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래. 맞네. 그게 성향이라는 거고, 그 성향이 기의 성질을 결정하지. 난 말일세. 타인의 기를 읽어서 그런 성향을 유추하는 데에는 아주 일가견이 있는 사람이라네.”
거기까지 말한 장춘이 현석을 바라봤다. 그의 표정은 곤혹스럽기 짝이 없었다.
“한데 자네는…… 자네가 가진 기는 정말 이상하네.”
“마력이야 다른 플레이어들도 다 갖고 있습니다만…….”
현석의 말에 장춘이 단호히 고개를 저었다.
“마력을 말하는 게 아닐세. 자네가 마력을 많이 갖고 있는 건 사실이지만, 예전에 오히려 자네보다 마력을 훨씬 많이 갖고 있는 사람도 봤네.”
그 말에 현석이 깜짝 놀랐다.
지금의 현석은 레벨이 170을 넘어섰다. 이미 예전의 경지를 넘어선 것이다.
회귀 전에도 170대이긴 했지만 그때와 지금은 전혀 달랐다. 타이틀도 많았고, 부가적인 스탯 상승도 엄청났다.
게다가 가진 장비 자체가 달랐다.
플레이어가 가진 마력은 그 모든 것을 종합해서 결정된다.
내심 현석은 자신보다 더 레벨이 높은 사람은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 한데 더 많은 마력을 가졌다니.
타이틀 효과를 빼버린다면 레벨이 대체 얼마나 된다는 말인가.
게다가 지금 당장 본 것도 아니고 예전이란다. 그럼 지금은 대체 레벨이 몇이란 말인가.
“그 사람 마력이 얼마나 됐는지 혹시 기억하십니까?”
현석의 질문에 장춘은 자신이 하려던 말을 멈추고 잠시 기억을 더듬었다.
“그게…… 3년 전의 일이었지, 아마?”
현석의 눈빛이 거칠게 흔들렸다.
< 천하제일인 3 > 끝
ⓒ 김강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