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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눈 뜨고 레벨업-155화 (155/326)
  • < 천하제일인 2 >

    칼슨은 심각한 표정으로 앞에 선 사내들에게 몇 가지 지시를 내렸다.

    지시를 받은 사내들이 긴장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고는 사무실에서 나갔다.

    “후우. 이거…… 너무 서두르는 게 아닌가 모르겠군.”

    칼슨은 자리에 앉아 넥타이를 느슨하게 풀었다. 인도에 간 류크는 포기했다. 아마 죽었을 것이다.

    생각할수록 피라밋 놈들에게 이가 갈렸다. 그놈들이 끼어들면서 일이 다 꼬여 버렸다.

    “대체…… 그놈들은 그 정보를 어떻게 알아낸 거지?”

    정말 철저한 보안 속에서 진행한 일이었다. 한데 그 정보가 새 나간 것이다.

    그것밖에 생각할 수 있는 답이 없었다. 원래부터 그곳에 대해 알고서 찾았을 리는 없지 않은가.

    중국이야 그래도 좀 낫다. 하지만 인도는 밀림 한가운데 있는 곳인데 거길 플레이어들이 왜 간단 말인가.

    그래서 예전에 세웠던 계획을 좀 앞당겨서 시행하기로 했다. 어차피 진행할 계획이니 좀 서두른다고 해서 나쁠 건 없었다.

    다만 그것 때문에 다른 일에 약간씩 차질이 생기는 게 문제였다.

    하지만 칼슨이 판단하기에 그걸 제일 먼저 해결하지 않으면 나중에 일이 어떤 식으로 꼬일지 상상이 가지 않았다.

    “피라밋 놈들을 정리하려면 이러는 수밖에 없지.”

    지금 칼슨이 하려는 건, 미국에 거대 암시장을 만드는 것과, 피라밋 암시장을 견제하는 것이었다.

    그 두 가지 일을 동시에 진행하기로 했다.

    미국에 세우려는 암시장, 엠페러 타워는 암시장의 판도를 바꿔놓을 작품이었다.

    엠페러 타워를 통해 미국의 모든 암시장을 싹 흡수하고 그 세력을 세계 전체로 퍼트릴 계획이었다.

    자연스럽게 다른 암시장들이 힘을 잃을 것이고, 그렇게 잃은 힘을 엠페러 타워가 다시 차지하면서 점점 덩치를 불려나가는 것이 주목적이었다.

    엠페러 타워는 지하든 지상이든 모든 것을 렉스턴 에너지가 장악해서 다스리겠다는 목적을 이루기 위한 발판이었다.

    엠페러 타워를 만들면 피라밋 암시장 쪽에 아무래도 타격이 갈 수밖에 없었다. 아니, 반드시 타격이 가게 만들 것이다. 그걸 위해 손해도 감수할 생각이니까.

    랙스턴 에너지는 전 세계의 모든 조직 중에서 가장 돈과 아티팩트가 많은 곳이었다.

    그러니 얼마든지 출혈 경쟁을 할 수 있었다.

    그러면서 다른 한편으로 피라밋 암시장 쪽에 별도의 공작을 준비 중이었다.

    칼슨은 복잡해진 머리를 식히려 창문을 살짝 열었다.

    차가운 바람이 사무실을 가득 채웠다.

    “일이 잘 안 풀리나보지? 바람도 찬데 창문까지 열어서 열을 식히려는 걸 보니.”

    칼슨은 문 쪽에서 들려온 소리에 깜짝 놀라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봤다.

    “미카엘!”

    미카엘은 씨익 웃으며 칼슨에게 손을 흔들어주었다.

    “일이 잘 안 풀리긴 안 풀리는 모양이군. 날 그렇게 반갑게 부르는 걸 보니까. 왜? 무슨 일인데?”

    칼슨은 자리에 털썩 앉아 긴 숨을 내쉬었다.

    “후우우. 정말 다행이야. 자네가 이렇게 딱 적절한 순간에 나타나 줘서 말이야.”

    미카엘은 대단한 미남자였다. 화려한 금발에 조각 같은 얼굴을 갖고 있어 한 번 보면 쉽게 눈을 떼기 어려울 정도였다.

    그 누구보다 미카엘을 많이 봐 온 칼슨조차도 그랬으니 다른 사람은 오죽하겠는가. 아마 어디서 뭘 하는지는 몰라도 여자깨나 울리고 다닐 것이다.

    어쨌든 칼슨은 미카엘이 너무나 반가웠다.

    “일단 좀 앉게. 할 얘기가 너무 많아. 대체 자넨 뭐가 그리 바빠서 이렇게 보기가 힘든가?”

    “찾을 사람이 있어서 돌아다니는 건데, 단서가 너무 적어서 쉽지가 않군.”

    “찾을 사람이 있다고? 그런 얘기는 진작 해줘야지. 우리 정보력을 무시하는 건가? 게다가 마음만 먹으면 전 세계 각국의 정보기관을 이용할 수도 있어.”

    칼슨은 어이없으면서도 서운한 표정으로 그렇게 말하고는 눈을 빛내며 물었다.

    “그래서 누군가? 자네가 찾는 사람이.”

    미카엘은 고개를 저었다.

    “자네가 도울 수 없는 부분이네. 사실 나도 그저…… 기억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라는 것밖에 모르거든.”

    미카엘의 말에 칼슨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기억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라니. 대체 그게 무슨 소리란 말인가.

    “이제 자네 문제나 말해보게. 그게 결국 우리 회사 문제일 거 아닌가.”

    칼슨은 무거운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피라밋 암시장이 계속 우리 일을 방해하고 있네.”

    “우리 일을 방해한다고? 그놈들은 우리 일이 뭔지도 모르고 있을 텐데?”

    칼슨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지. 모르고 있지. 한데 모르면서도 묘하게 우리와 얽히고 있네. 이번에 자네가 말했던 퀸급 던전 생성지역들…….”

    “그래. 그거 정말 중요한 건데, 어떻게 됐나?”

    “다 털렸네.”

    “뭐? 털리다니. 그게 무슨 말인가?”

    칼슨은 미카엘이 오면 보여주려고 미리 준비해둔 서류를 찾아 건넸다. 그러면서 피라밋 암시장과 있었던 일들을 차근차근 설명해 주었다.

    보고서를 모두 읽고, 설명까지 들은 미카엘의 표정이 심각해졌다.

    “그런 식이라면…… 피라밋 암시장을 우리가 흡수해 버리는 수밖에 없겠군.”

    “맞네. 그래야 하네. 던전에 대한 피라밋 놈들의 지분을 확보해야 하니까.”

    “어쩌면…… 그 던전의 가치를 제대로 모를 수 있으니 구매하는 방안도 생각해 봐야겠군.”

    “그놈들도 돈이라면 넘칠 정도로 있으니 아마 쉽지는 않을 걸세. 그래도…… 시도해볼 가치는 있겠지.”

    “피라밋이라, 피라밋…….”

    잠시 그렇게 중얼거리던 미카엘의 눈이 반짝 빛났다.

    “거기를 흔들 수 있는 좋은 방법 하나가 떠올랐네.”

    “좋은 방법? 그게 뭔가?”

    “지금 피라밋 암시장의 주인이 누군지 아나?”

    “그거야 너무나 유명하지 않나. 블러디퀸이지.”

    “그래. 한데 원래는 그렇지 않았다는 거 알고 있나?”

    “뭐? 그게 정말인가?”

    미카엘이 매력적인 미소를 지으며 손가락 하나를 들었다.

    “블러디퀸의 영원한 숙적, 머미킹.”

    “머미킹…… 왠지 그쪽 이름이 피라밋 암시장인 이유를 알 것 같군.”

    칼슨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래도 권력 다툼이 있었다면 패배한 쪽은 죽었을 거 아닌가. 암시장 놈들이 적의 보스를 살려줄 정도로 자비로울 것 같진 않은데?”

    “살아있네. 아니, 살릴 수 있네.”

    미카엘의 말을 들은 칼슨은 묘한 표정을 지었다. 왠지 정말 특이한 일을 겪게 될 것 같아서였다.

    ‘뭐…… 던전이 열리고 플레이어와 마력이 등장한 것 자체가 원래 보통 일은 아니긴 하지.’

    그보다 더 특이한 일이 어디 있겠는가.

    칼슨은 고개를 흔들어 상념을 털어냈다. 그리고 미카엘을 보며 환하게 웃었다.

    “역시 자네가 와야 일이 풀린다니까. 나도 뭔가를 해주고 싶군. 그러니 말해보게. 대체 누굴 찾고 있는지.”

    미카엘은 잠시 칼슨을 바라보다가 피식 웃었다. 그리고 차분히 입을 열었다.

    “선택받은 자. 모든 기억을 받은 자. 조각난 세상의 열쇠가 될 자.”

    칼슨의 표정이 묘해졌다. 뭘 말하는지 알 수가 없었다. 하지만 정말 중요한 사람을 찾고 있다는 건 알 수 있었다.

    미카엘은 그런 칼슨의 표정을 보고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 빙긋 웃고는 말을 이었다.

    “플레이어와 던전에 대해서 내가 예측하던 거, 기억나나?”

    “물론이지. 너무 정확해서 소름이 끼칠 정도였지.”

    “한데 이제 내 예측 범위를 벗어나 버렸네.”

    “그게…… 무슨 소리인가?”

    “변화가 너무 빨라졌어. 그래서 시기를 예측할 수가 없네.”

    칼슨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지금까지 미카엘이 갖다주던 그 막대한 정보들은 렉스턴 에너지의 큰 힘이 되어왔다.

    한데 그걸 쓸 수 없게 된다니.

    “아, 오해하지 말게. 정보야 계속 얻어올 테니까. 그저…… 던전의 흐름을 예측할 수 없다는 뜻일세. 뭐…… 어찌보면 별 거 아니지.”

    칼슨은 억지로 고개를 끄덕였다.

    미카엘은 그런 칼슨을 보며 손뼉을 짝짝 쳤다.

    “자, 그럼 이제 난 또 그 열쇠를 찾으러 가봐야겠네. 나만의 특별한 방법을 동원하고 있으니까 아마 오래 걸리진 않을 거야.”

    “그래. 잘 찾길 바라네. 난…… 그 머미킹을 이용해 피라밋 암시장을 꿀꺽 삼켜보지.”

    미카엘은 빙긋 웃으며 돌아섰다. 그리고 손을 흔들어주고는 밖으로 나갔다.

    칼슨은 그런 미카엘을 가만히 쳐다보기만 했다. 밖으로 따라서 나가봐야 의미가 없었다. 아마 문을 나가자마자 사라졌을 테니까.

    “선택받은 자라…… 뭐, 내가 알 바 아니지. 미카엘이 알아서 할 테니까.”

    미카엘이 그를 찾아 뭘 하려는지는 모른다. 하지만 한 가지 확실한 건 그를 위로 올리진 않을 거라는 사실이다. 아마 그 선택받은 열쇠는 철저히 이용당하다가 버려질 것이다.

    칼슨의 입꼬리가 슬쩍 올라갔다.

    “자, 그럼…… 난 머미킹을 찾아볼까?”

    * * *

    임형석은 느릿하게 앞으로 두 걸음 다가갔다.

    그러자 앞에 마주보고 선 노인, 장춘은 눈살을 찌푸렸다.

    “대체 이게 뭐 하는 짓인가! 다짜고짜 남의 도장에 들어와 행패라니!”

    그러자 임형석이 씨익 웃었다.

    “에이, 노인장, 왜 이러십니까. 절 딱 보고 드는 생각 없습니까? 정말 안 싸우고 싶어요?”

    임형석은 그렇게 말하고는 자신의 가슴에 손을 착 올렸다.

    “난 이렇게 심장이 두근두근 뛰는데. 노인장은 안 그런단 말입니까?”

    장춘이 단호하게 말했다.

    “싸우기 싫네. 난 원래부터 싸우는 걸 좋아하지 않는 사람이야.”

    “에이, 앞뒤 안 맞는 말씀을 하시네. 싸우는 걸 싫어하시면서 왜 무술을 익혀 고수가 됐습니까?”

    “싸우기 싫으니까.”

    임형석은 그게 무슨 말도 안 되는 대답이냐는 듯한 눈으로 장춘을 바라봤다.

    “내가 강해지면 강해질수록 함부로 덤비는 놈들이 없으니까. 이제 답이 됐나?”

    임형석이 씨익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 맘, 이해합니다. 정말 되도 않는 것들이 덤비면 짜증나죠. 다 피박살을 내 버릴 수도 없고. 앞날이 창창한 것들 팔다리를 뜯어 버릴 수도 없고.”

    장춘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임형석의 말을 들으니 포기할 생각이 없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역시나 임형석은 환하게 웃으며 말을 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런 게 아니잖아요? 솔직히 상대가 없었는데 갑자기 제가 와서 조금은 기쁘지 않습니까?”

    장춘은 한숨을 푹 내쉬었다. 이래서 고수를 만나는 게 싫다. 정말 싸우기 싫은데 이렇게 멋대로 피가 끓어올라 버리니까.

    장춘의 기세가 갑자기 물처럼 고요하게 가라앉았다. 그리고 그걸 본 임형석의 미소가 더욱 환해졌다.

    “드디어 결심하신 겁니까?”

    임형석의 기세가 산악처럼 솟아났다. 장춘의 기세와는 정반대였다.

    장춘은 그걸 보며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나 임형석은 피를 끓어오르게 하는 뭔가가 있었다.

    갑자기 임형석이 소리쳤다.

    “어라? 그러고 보니 이 영감님 우리말로 했잖아?”

    너무 딴 데 집중하고 있다 보니, 장춘이 유창하게 한국말을 했다는 것도 알아차리지 못하고 있었다.

    “내가 어떤 말을 쓰느냐가 중요한가?”

    임형석이 고개를 휘휘 저었다.

    “아뇨. 그럴 리가요. 자, 그럼…….”

    임형석이 그렇게 말하며 막 싸움을 시작하려는 찰나, 장춘이 화들짝 놀라며 뒤로 훌쩍 물러났다.

    그걸 본 임형석은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파악하고는 인상을 팍 썼다.

    “야! 나도 좀 싸우자! 왜 잘 달아오르고 있는 분위기에 찬물을 끼얹고 난리야!”

    임형석이 현석을 돌아보며 소리쳤다.

    장춘은 임형석의 외침이 아예 귀에 들어오지도 않았다. 그는 충격 받은 얼굴로 멍하니 현석을 바라보고 있었다.

    “대체…… 대체 뭔가? 자네 정체가 뭔가? 어떻게 사람이 이런 기운을 가질 수 있단 말인가.”

    장춘의 말은 뭔가 좀 묘했다.

    다들 흥미로운 눈으로 현석과 장춘을 번갈아 바라봤다.

    한 사람, 임형석만 빼고 말이다.

    “노인장! 그냥 나랑 시원하게 한 판 합시다! 저놈이랑은 그 다음에 얘기하면 되잖습니까! 예?”

    장춘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리고 임형석을 바라봤다.

    물처럼 고요히 가라앉아 있던 기세가 갑자기 창처럼 모여 집중되더니 그대로 임형석을 향해 쏘아져 나갔다.

    파앙!

    강렬한 충격파가 동심원을 그리며 연무장을 한 차례 쓸고 지나갔다.

    임형석의 얼굴이 다시 환해졌다.

    “그래. 아직 피가 식지 않았으니 한 번 어울려 보자꾸나.”

    장춘은 그렇게 말하며 임형석을 향해 냅다 달려들었다.

    그는 마치 물 위를 미끄러지듯 움직이는 것처럼 기이한 움직임으로 돌진했다.

    임형석도 마주 달려가며 주먹을 꽉 쥐고 그대로 내질렀다.

    쩌엉!

    뭔가 깨지는 소리와 함께 연무장 바닥에 금이 쩍쩍 갔다.

    임형석의 주먹과 장춘의 손바닥이 마주치며 만들어낸 현상이었다.

    두 사람의 얼굴에 동시에 비슷한 미소가 떠올랐다.

    < 천하제일인 2 > 끝

    ⓒ 김강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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