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천하제일인 1 >
던전 생성지역에서의 일은 현석이 들었던 대로, 또 예상했던 대로 흘러갔다.
대련방과 흑시 측에서 나머지 던전을 먼저 클리어 하고 것의 메뉴얼을 만들겠다고 나선 것이다.
양동욱과 피라밋 암시장의 웨인이 동시에 나서니 그들로서도 이대로는 얻는 건 별로 없이 힘만 들겠다는 생각이 든 모양이었다.
현석에게 미리 들은 말이 있기에 양동욱도 웨인도 아주 흔쾌히 그들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사실 현석이 원하는 건, 이 던전 생성지역이 렉스턴 에너지로 넘어가지 않게 하는 것이었다.
첫 번째 던전의 메뉴얼을 만들어준 것도 그래서였다.
그렇게 던전 하나라도 제대로 돌며 뭔가 이익이 될 만한 걸 뽑아내야 던전 생성지역을 유지할 가치가 형성될 테니까.
어쨌든 던전 생성지역의 퀸급 던전을 클리어하고 사냥 매뉴얼을 만들기 위해 무수한 고레벨 플레이어가 동원되었다.
그들에게 주어진 지상명제는 첫 째도 안전, 둘 째도 안전이었다.
안전에 관한 부분 자체를 아예 양동욱과 웨인이 나서서 못 박아 뒀기에 그들로서도 평소보다 안전에 훨씬 신경 쓸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안전에 신경 쓰도록 만든 건, 그들의 힘이 줄어들지 않게 하기 위함이었다.
그래야 렉스턴 에너지의 파상공세를 막아낼 힘을 비축할 수 있을 테니까.
던전 생성지역 쪽의 일은 비교적 원활하게 진행되었다. 양동욱과 웨인은 상당히 유능했다. 이런 상황이 될 것을 미리 예견하고 그에 따른 대비를 충분히 해뒀다.
하지만 서두를 필요는 있었다. 조만간 렉스턴 에너지가 본격적으로 움직이기 시작할 테니까.
그리고 그들의 예상대로 렉스턴 에너지의 움직임이 서서히 시작되려 하고 있었다.
* * *
꽈앙!
칼슨은 분노에 가득 찬 표정으로 테이블을 내리쳤다. 꽉 쥔 그의 주먹이 부들부들 떨렸다.
“뭐가 어떻게 돼? 다시 한 번 보고해 봐.”
칼슨에게 보고한 비서는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아무래도 오늘 일진이 사나운 모양이었다. 어쩌면 이대로 죽을 수도 있다는 위기감이 그의 심장을 쿡쿡 찔렀다.
“사, 삼합회가 중국 쪽 퀸급 던전 생성지역을 발견했습니다.”
칼슨의 눈에서 불똥이 튀었다.
“대체 그놈들이 어떻게 그걸 찾아!”
“그냥 우연히…… 찾은 것 같습니다.”
“우연히? 퀸급 던전 생성지역이 우연이 찾을 수 있을 정도로 허술한 곳에 있는 건줄 알아?”
그랬다면 지금쯤 벌써 모든 퀸급 던전 생성지역을 렉스턴 에너지가 차지했을 것이다.
거기에 대한 정보를 가장 많이 보유한 조직이 바로 렉스턴 에너지였으니까.
“후욱. 후욱.”
칼슨은 숨을 몰아쉬었다. 그러면서 마음을 좀 가라앉혔다.
“그나마 흑시 쪽에 스파이라도 넣어둬서 다행이야. 하마터면 아무것도 모른 채 당하고만 있을 뻔했잖아.”
비서가 얼른 동조했다. 그에게는 생존이 걸린 문제였다.
“그, 그렇습니다. 마음 같아서는 피라밋 쪽에도 스파이를 심고 싶은데, 그게 잘 안돼서 안타깝습니다.”
칼슨이 고개를 저었다.
“피라밋 쪽은 아예 포기해. 거긴 스파이 못 심으니까.”
“예?”
칼슨은 거기에 대해 더 얘기하지 않고 손을 내저었다.
“류크는?”
“아직 연락이 안 닿고 있습니다.”
“뭐? 아직도 연락이 안 됐다고?
칼슨의 얼굴이 사정없이 구겨졌다. 그의 눈빛이 칼날처럼 날카롭게 비서에게 꽂혔다.
“그런데도 보고를 안 했다고? 너…… 죽고 싶구나?”
“아, 아닙니다! 여러 가지 방법으로 연락을 시도 중입니다! 아직 해보지 않은 방법들이 있어서…….”
“중국 쪽 던전을 머저리 같은 흑시 놈들에게 코앞에서 빼앗긴 걸 보고도 그딴 소리가 나와?”
비서는 입을 다물었다. 숨까지 멈춘 채 두려운 눈으로 칼슨을 바라봤다.
“당장 새 팀 파견해. 그리고 인도 쪽에 추가 인력 투입해서 어떻게 된 일인지 정확히 파악해서 보고해!”
“예! 알겠습니다!”
칼슨이 이글이글 타오르는 눈으로 비서를 노려보며 한 자 한 자 씹어 뱉듯 말했다.
“이제 네 마지막 기회라는 걸 명심하는 게 좋을 거야.”
비서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다. 그는 고개를 꾸벅 숙이고 후다닥 밖으로 나갔다.
칼슨은 비서가 나갈 때까지 무서운 눈으로 노려보다가 이내 한숨을 내쉬며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이럴 때…… 미카엘이 있으면 정말 큰 힘이 되어줄 텐데…….”
칼슨은 그렇게 중얼거렸다. 하지만 말을 꺼내자마자 고개를 저었다.
불과 얼마 전에 나타나 인도와 중국, 한국에 있는 퀸급 던전이 왜 중요한지와 그것들의 대략적인 위치를 알려준 다음 다시 사라졌다.
대체 뭘 하느라 그리 바쁜지 알 수가 없었다.
분명한 것은 그가 뭘 꾸미고 무슨 일을 진행하든, 그건 모두 렉스턴 에너지를 위한 것이라는 사실이다.
미카엘은 렉스턴 에너지의 대표이사다. 그렇다는 건, 나중에 렉스턴 에너지가 세울 거대한 제국의 왕이 될 사람이라는 뜻이기도 했다.
칼슨이 원하는 건 딱 미카엘 바로 아래의 직위였다.
미카엘의 성향 상, 정치나 군림에는 관심이 없을 테니, 그건 온전히 칼슨의 몫이 될 테니까.
겉보기에는 2인자이지만, 실질적으로 세상을 통치하는 왕이 되는 것이다.
그런 생각을 하다 보니 어느새 마음이 차분히 가라앉았다. 그리고 흥분하느라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것들이 눈에 보이기 시작했다.
칼슨은 다시 한 번 보고서를 찬찬히 살폈다. 던전이 있는 곳의 지형이 세밀히 그려진 지도도 있었다.
칼슨이 주목하는 건 바로 그 지도였다.
“여길 우연히 발견했다고?”
아무리 봐도 믿기지가 않았다. 어쩌면 누군가 여길 찾기 위해 나서서 주변을 샅샅이 수색했을지도 모른다.
만일 그렇다면 그게 무엇을 의미하는 걸까?
“뻔하지. 미카엘 같은 놈이 또 있는 거야.”
흑시 아니면 피라밋에 있을 것이다. 칼슨은 피라밋 쪽에 더 신경이 쓰였다.
그가 유일하게 들여다보지 못하는 곳이니 더 신경 쓰이는 게 당연했다.
그들에 대해 파악하려면 외부로 미치는 영향력을 통하는 수밖에 없다.
아니면 가끔 거래를 위해 그곳으로 플레이어들을 들여보내서 단순히 보이는 것만으로 파악하거나.
‘인도와 중국 쪽으로 피라밋 애들이 움직였다는 보고가 있었지?’
칼슨은 예전에 비서가 했던 보고가 갑자기 떠올랐다. 그때는 피라밋이 한국, 중국, 인도를 제외하고도 아시아권에 있는 수많은 나라들에 인력을 파견했기에 대충 넘겼다.
지부를 세우는 작업에 들어가는 걸 확인하고는 더 신경을 끊었다. 그저 의례적인 감시만 했을 뿐이었다.
한데 이제 와서 일이 틀어진 다음 생각하니 정말 의심스러웠다.
아시아권의 다른 나라들에 지부를 세운 것 역시 기만책 중 하나가 아니었을까?
“어쩌면…….”
어쩌면 인도도 피라밋 쪽으로 넘어갔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칼슨의 눈이 섬뜩한 빛을 뿜어냈다.
“아무래도…… 지나칠 정도로 거슬려.”
* * *
중국의 던전 생성지역을 둘러싸고 무수한 일이 벌어지거나 준비되고 있을 때, 현석 일행은 사천으로 향하고 있었다.
자타가 공인하는 천하제일인, 장춘을 만나기 위해서 말이다.
“기대되는군.”
가는 도중 가이드가 장춘에 대한 소문 몇 가지를 얘기해 주었다.
그걸 들은 임형석의 기대감은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았다.
소문 속의 장춘은 말 그대로 임형석 같았다.
홀로 수십의 고레벨 플레이어를 박살 냈다거나 맨몸으로 건물을 부순다고 하니, 얼마나 대단한가.
그 정도면 예전의 임형석에게 따라다니던 소문보다 오히려 훨씬 대단했다.
물론 그때 돌던 임형석에 대한 소문은 실제보다 축소된 것이긴 하지만 그걸 감안해도 마찬가지였다.
임형석은 그 이후 현석을 만나 급격히 강해졌다. 아마 장춘이 소문대로라면 정말 굉장한 싸움이 될 것이다.
이들과 함께 움직이고 있는 진영관도 기대감이 물씬 드는 모양이었다.
하긴 이런 고수들의 대결을 언제 또 볼 수 있겠는가.
그는 속으로 부디 장춘이 소문보다 더 대단한 고수이기를 빌고 또 빌었다.
소문만 과장된 자를 만나 실망하고 싶지 않았다.
“좀 멀죠? 그래도 최대한 밟고 있으니 비교적 금방 도착할 겁니다.”
가이드의 말에 임형석이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제대로 된 싸움을 하러 가는데 그 정도야 얼마든지 참고 견딜 수 있지.”
가이드는 그 말을 들으니 왠지 불안해졌다.
‘만일…… 장춘이 소문이랑은 전혀 다른 사람이면 어떻게 되는 거지?’
가이드가 갑자기 몸을 부르르 떨었다. 생각도 하기 싫었다. 만일 그렇게 되면 저 임형석의 화를 누군가 감당해야 할 것이다.
임형석이 현석에게 그런 일로 화를 내진 않을 것이다. 그리고 이제 막 생긴 동생에게 화를 내지도 않을 것이다.
‘만만한 게 나구나.’
가이드는 속으로 장춘이 제발 진짜 천하제일인이기를 빌고 또 빌었다.
그렇게 현석 일행을 태운 차가 운남을 벗어나 사천으로 들어섰다.
* * *
사천은 엄청나게 넓다. 만일 장춘이 사천에 살긴 하지만 정확히 어디인지는 모른다고 했다면 찾을 엄두도 못 냈을 것이다.
하지만 장춘은 무술가들 사이에서 워낙 유명한 사람인지라 어디에 사는지도 잘 알려져 있었다.
가이드는 그 소문을 가지고 지금 장춘을 찾고 있는 중이었다. 한데 그게 생각처럼 잘 되지 않았다.
“아직 멀었냐? 걷기 시작한 지 벌써 한 시간은 지난 거 같은데. 이럴 거면 그냥 차를 타고 오지 그랬어.”
임형석의 말에 가이드는 식은땀을 뻘뻘 흘렸다.
“부, 분명히 이 근처 어딘가일 거 같은데…… 아! 저기 있습니다!”
가이드가 손가락으로 가리킨 쪽에 다 쓰러져 가는 허름한 무술도장 하나가 있었다.
무술도장의 위치 자체가 사람들이 모여 사는 곳에서 한참이나 떨어져 있었기에 찾기가 쉽지 않았다.
“산기슭에 사는 걸 보니 딱 누군가가 떠오르는군요.”
보기 드물게 현석이 그런 말을 했다. 현석은 그렇게 말하며 임형석을 힐끗 쳐다봤다.
임형석은 참으로 묘한 표정으로 제자리에 멈춰 서서 쓰러져가는 도장을 가만히 바라봤다.
“뭔가…… 진짜 강한 사람이 살 것처럼 생긴 곳이구나.”
물론 임형석의 도장과는 모양이 많이 달랐다. 임형석의 도장은 동네 체육관이라고 하는 편이 더 어울렸다.
하지만 여긴 담장도 있고, 문에 현판도 달려 있었다. 마치 오래전 무술도장이 저렇게 생기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게 만드는 모습이었다.
임형석은 무술도장을 향해 성큼성큼 걸어갔다. 가까이 다가가면 다가갈수록 임형석의 표정이 점점 묘해졌다.
“이놈 봐라?”
임형석이 이를 드러내고 사납게 웃었다.
그리고 임형석을 따라가던 진영관은 더 이상 앞으로 가지 못하고 걸음을 멈췄다.
“정말…… 강한 사람이 있는 것 같습니다.”
진영관은 어쩌면 소문보다 더 대단한 사람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가이드는 아예 처음 그 자리에 서서 식은땀만 줄줄 흘리고 있었다. 도저히 걸음을 뗄 마음이 생기지 않았다.
그리고 그때까지 가만히 서서 무술도장을 보고 있던 현석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현석이 가이드 앞을 지나치자, 가이드는 갑자기 숨통이 확 트이는 기분이 들었다.
“후아아아!”
길게 숨을 몰아쉰 가이드는 경이로운 눈으로 현석의 뒷모습을 바라봤다.
그리고 천천히 걸음을 옮겨 현석을 따라갔다.
현석이 진영관을 지나치자, 진영관도 가이드와 마찬가지로 온몸을 옥죄던 뭔가가 사라진 느낌이 들었다.
“후우욱!”
진영관도 숨을 통해 몸의 탁기를 내뱉은 다음 현석의 뒤를 따랐다.
임형석은 벌써 무술도장 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현석은 무술도장의 문을 두 손으로 밀어 열었다. 규모가 큰 연무장이 나타났다.
바닥에 돌을 촘촘히 깔아 제법 그럴 듯했다.
그리고 그 연무장 한가운데에 임형석이 누군가와 마주보고 서 있었다.
임형석은 웃고 있었고, 마주한 상대는 인상을 찡그리고 있었다.
현석이 그 두 사람을 향해 천천히 걸어갔다. 그리고 가이드와 진영관이 그 뒤를 따랐다.
연무장에 한 차례 바람이 휭하고 불었다.
< 천하제일인 1 > 끝
ⓒ 김강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