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인도에서 2 >
“정말 다행이야.”
임형석은 그렇게 중얼거리며 류크 일당을 향해 한 발 다가갔다.
강렬한 투기가 훅 하고 쏟아져 나갔다.
류크 일당은 그 투기에 흠칫 놀라며 뒤로 주춤 물러났다. 자신도 모르게 일어난 본능적인 행동이었다.
“너희들이 쓰레기라서 진짜 마음껏 힘을 쓸 수 있을 테니까 말이야.”
임형석이 그렇게 말하며 씨익 웃었다.
류크는 임형석을 보며 이건 뭔가 잘못된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그 순간 그의 눈앞에 임형석이 나타났다.
마치 순간이동이라도 한 듯한 착각이 들었다. 그냥 눈 한 번 깜빡 했는데 앞에 임형석이 서 있는 것이다.
그것도 주먹을 한껏 뒤로 젖힌 채로 말이다.
빠악!
류크는 도저히 임형석의 주먹을 피할 수 없었다. 순간적으로 정신이 훅 나가버렸다.
뻐버버버벅!
류크 주변에 있던 플레이어들이 사방으로 나가 떨어졌다. 임형석의 타격은 빠르고 강했다. 그리고 치명적이었다.
일단 한 방 맞은 사람은 다시 일어나지 못했다.
류크만 예외였다. 비명을 지르고 싶을 정도로 아프긴 했지만 그래도 정신을 차렸고, 충분히 움직일 수 있었다.
류크는 서둘러 뒤로 물러났다. 일단 임형석과 거리를 벌려야 했다.
“다들 물러나!”
제대로 진형을 갖추고 거대 마수를 사냥하듯 싸우지 않으면 안 된다는 걸 깨달았다.
상대는 그냥 평범한 사람이 아니었다. 모두 협심해서 레이드 해야 할 괴물이었다.
류크 일당이 뒤로 후다닥 물러났다. 그 와중에도 두 명이 더 쓰러졌다.
뻐벅!
임형석의 주먹은 빠르고 정확하게 두 플레이어의 급소를 때렸다.
임형석은 씨익 웃으며 주위를 슥 둘러봤다.
류크는 그런 임형석을 보며 이를 갈았다. 그야말로 순식간이었다.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 건지도 모르는 사이 아홉이나 쓰러졌다. 실로 가공할 실력이었다.
‘하지만 이제부터는 쉽지 않을 거다.’
류크는 이를 갈며 손을 휙 털었다. 그건 진형을 갖추라는 신호였다.
남은 41명의 플레이어들이 임형석을 중심에 두고 빠르게 움직여 포위망을 구축했다.
이 포위망은 그저 상대를 잡아놓겠다는 의도로 만든 게 아니었다. 사이사이에 절묘하게 포진해 최대한의 공격력을 집중할 수 있도록 고안한 진형이었다.
아무리 임형석이 강해도 이런 진형에 갇히면 피해 없이 싸우는 건 불가능하다.
게다가 류크 일당의 레벨이나 전투경험도 상당했다. 처음이야 기습에 가까우니까 한꺼번에 많이 당했지 이제부터는 그럴 일이 없었다.
류크는 그렇게 확신했다.
일단 이곳에 있는 그의 부하들은 모두 레벨 110을 훌쩍 넘은 고레벨 플레이어였다.
그리고 류크 자신은 120레벨을 넘었다.
그러니 누굴 만나 싸우든, 또 어떤 상황이 오든 전혀 두렵지 않았다. 무조건 이길 테니까.
류크는 웃음기를 머금고 서 있는 임형석을 보며 새삼스러운 생각이 들었다.
‘그러고 보니 그런 대단한 놈들을 순식간에 아홉이나 보내 버린 거잖아.’
역시 자만할 때가 아니다. 세상은 넓고 미친 놈은 모래알처럼 많았다.
그리고 강자도 많았다.
류크는 천천히 팔을 옆으로 들었다. 이제 곧 공격 신호를 보낼 것이다.
공격 방식이 몇 가지 있는데 그 중에서 어떤 것이 가장 효과적일지 머릿속으로 잠시 생각해봤다.
그러는 와중에도 가운데 갇히듯 서 있는 임형석의 얼굴에는 미소가 어려 있었다.
그의 표정은 지나칠 정도로 담담했다.
하지만 류크는 신경 쓰지 않았다. 이제 이 손을 확 내리면 가운에 있는 저놈은 끝장난다.
막 손을 내리려는 찰나, 임형석이 류크를 보며 입을 열었다.
“너 뭔가 착각을 하고 있는 것 같은데 말이야…… 아니면 너무 대가리가 나빠서 잊었거나.”
류크는 그 말을 듣는 순간 찬물을 뒤집어 쓴 것처럼 온몸에 소름이 쫙 돋았다.
‘대체 내가 무슨 미친 짓을 하고 있는 거지?’
어떻게 적의 존재를 잊을 수 있단 말인가. 지금 이곳에 있는 적은 임형석 하나가 아니었다.
아니, 류크를 긴장하게 하고 소심하게 움직일 수밖에 없도록 만든 존재가 버젓이 남아 있는데, 어떻게 그를 잊고 저 멍청한 남자에게 집중할 수 있단 말인가.
류크가 막 뭐라고 소리치며 팔을 움직이려는 찰나, 섬뜩한 절단음이 연이어 들려왔다.
서걱! 서걱! 서걱!
그리고 찌르는 소리.
푹!
류크는 목 아래에서 느껴지는 섬뜩한 통증에 비명을 질렀다. 하지만 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팔을 내려 공격 신호를 보낼 수도 없었다. 이미 팔이 사라지고 없었으니까.
류크의 눈에는 세상이 느리게 움직이는 것처럼 보였다.
사방에서 피가 분수처럼 솟아올랐다. 마치 피의 꽃이 피는 것 같았다.
류크가 있던 곳에서 시작해, 그 근처에 있던 플레이어들이 속절없이 당했다.
그들은 전혀 예상치 못한 뒤에서의 기습적인 공격에 전혀 대비하지 못했다.
그리고 그렇게 한 축이 무너진 포위 진형은 더 이상 임형석에게 아무런 위협이 되지 못했다.
현석과 거의 동시에 움직이기 시작한 임형석은 현석과 정 반대 쪽 플레이어들을 향해 달려들었다.
뻐버버버버벅!
임형석의 주먹을 제대로 막아내는 사람이 없었다. 미리 준비까지 하고 있었지만 임형석은 그들보다 한 차원 위에 있는 사람이었다.
아니, 괴물이었다.
류크는 그 모든 비현실적인 광경을 지켜보며 털썩 무릎을 꿇었다.
다리에 힘이 풀려 더 이상 서 있을 수가 없었다.
그의 고개가 천천히 옆으로 돌아갔다. 간결하면서도 빠른 동작으로 검을 휘두르고 있는 현석의 모습이 보였다.
류크는 문득 자신이 되고 싶던 모습이 저런 게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세상이 온통 새까맣게 변했다.
* * *
“이제 이놈들 어쩔 거냐?”
임형석은 사방을 둘러보며 눈살을 찌푸렸다. 혈향이 진동했다.
아마 밀림에 사는 맹수들이 이 냄새 때문에 이쪽으로 달려올지도 모른다.
아니, 분명히 올 것이다.
물론 임형석이나 현석이 그런 맹수를 두려워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굳이 귀찮은 일을 할 필요는 없었다.
“마력 빠지기 전에 던전에 넣죠.”
현석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임형석이 움직였다. 그는 바닥에 널브러진 플레이어들의 목덜미를 잡고 던전 쪽으로 휙휙 던졌다.
순식간에 그곳에 있던 모든 플레이어들이 던전 속으로 사라졌다.
하지만 여기 남은 피냄새는 사라지지 않았다. 어차피 바닥에 스며들어서 그걸 제거하는 건 결코 쉽지 않았다.
“피냄새는 어쩔 거냐?”
임형석이 현석을 보며 물었다.
현석은 대답 대신 폭포 쪽으로 걸어갔다. 그러면서 마력을 움직였다.
“대충 물로 한 번 씻어내죠.”
순간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떨어지던 폭포가 방향을 바꾼 것이다.
직선으로 떨어지지 않고 마치 뭔가에 걸리기라도 한 것처럼 물이 튀어 폭포가 떨어지는 연못을 넘어서 쏟아졌다.
콰콰콰콰콰!
효과는 당연히 놀라웠다. 주변이 물바다로 변한 것이다. 당연히 바닥에 남은 핏자국들도 싹 쓸려 내려갔다.
물론 그렇게 한다고 해서 모든 피냄새나 흔적이 사라진 건 아니었다.
하지만 상당히 희석되었다.
딱 거기까지였다. 현석은 더 이상 이곳을 청소하는데 신경이나 힘을 쓸 생각이 없었다.
“이제 어쩔 거냐?”
이곳에 온 목적은 이제 모두 이뤘다. 목표로 했던 던전 생성지역도 찾았고, 또 이걸 찾기 위해 움직인 렉스턴 에너지의 플레이어들도 처리했다.
아마 당분간 렉스턴 에너지는 이쪽에 신경을 못 쓸 것이다. 류크 일행이 이렇게 사라진 줄 모를 테니까.
시간이 좀 지나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 때쯤이면 모든 상황이 종료된 뒤다.
현석은 이곳으 피라밋 암시장과 함께 관리할 생각이었다.
애초에 외국에 있는 던전 생성지역을, 그것도 인도의 밀림 한가운데 있는 던전 생성지역을 현석 혼자의 힘으로 지키고 유지할 수 있을 리 없었다.
이럴 때는 손을 잡는 것도 필요하다.
어쨌든 그건 나중 일이고, 지금은 그런 것보다는 눈앞의 호기심을 충족하는 것이 더 중요했다.
인도의 퀸급 던전 생성지역은 말만 들었지 이렇게 와보는 건 처음이었다.
“던전 한 번 돌죠.”
현석의 말에 임형석의 입가가 찢어질 듯 늘어났다.
* * *
블러디퀸은 심각한 표정으로 턱을 괴고 앉아 생각에 잠겨 있었다.
그녀의 옆에 조용히 서 있는 웨인은 담담하려 애썼지만 왠지 계속 불안함이 심장을 옥죄는 것 같아 평정심을 유지하기가 어려웠다.
“그래서, 뭐라고 답을 했죠?”
“일단 제 선에서 승낙했습니다. 하지만 여왕께서 원치 않으신다면 언제든 번복할 수 있게 여지를 남겨뒀습니다.”
블러디퀸이 고개를 저었다.
“아뇨. 잘하셨어요. 올바른 판단이에요. 그건 절대 버리기 아까운 카드잖아요?”
웨인은 가볍게 고개를 숙였다. 그 역시 정확히 그렇게 판단했다.
그도 그럴 것이 퀸급 던전이 생성되는 지역이다. 그곳을 장악하면 얻을 수 있는 것이 얼마나 많겠는가. 당연히 차지해야 할 지역이었다.
다만 지분은 반반으로 나누면서 들이는 힘은 이쪽이 훨씬 많다는 게 문제이긴 하지만, 그걸 발견한 것 자체가 대단한 일이니 그 정도면 괜찮은 거래였다.
“전 표정이 안 좋으셔서 제가 잘못 판단한 줄 알았습니다.”
블러디퀸이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방금 전까지 그렇게 심각했었던 것이 연기였나?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환한 표정이었다.
“그렇게 보였군요. 그 일 때문이 아니에요. 그걸 발견한 사람 때문이지.”
웨인은 그제야 블러디퀸이 왜 이러는지 깨달았다.
이번에 인도의 퀸급 던전 생성지역을 발견한 사람이 바로 그 사람, 임형석이었다.
사실 처음에는 웨인도 블러디퀸이 왜 그렇게 임형석에게 신경을 쓰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하지만 이젠 좀 알 것 같았다. 임형석은 보통 사람에게는 없는 무언가가 있었다.
“나한테 연락할 시간은 없고, 그런 데 쫓아다닐 시간은 있다 이거지? 40일 만에 나타나서 말이야. 기가 막혀서 정말…….”
블러디퀸의 중얼거림을 들은 웨인은 자신의 생각을 살짝 수정할 수밖에 없었다.
물론 근본은 달라지지 않는다.
임형석은 정말로 보통 사람이 아니었다. 적어도 블러디퀸의 관심을 끌어낸 남자는 그가 처음이었으니까.
“얼마나…… 지원을 보낼까요?”
웨인의 질문에 블러디퀸의 표정이 다시 차가워졌다.
“일단 미스터 양에게 연락을 해서 절충을 해봐요. 아무래도…… 인도 하나로 끝날 것 같진 않죠?”
웨인은 크게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렉스턴 에너지에 대한 정보 중 상당 부분을 제공한 것이 바로 그들이었다.
그러니 현재 렉스턴 에너지에서 중국과 인도에 상당히 많은 인력을 파견했다는 것도, 또 그들이 무언가를 찾고 있는 중이라는 것도 알고 있었다.
그 중 인도에 있는 걸 현석과 임형석이 먼저 찾아낸 것이고 말이다.
“어차피 함께 관리를 해야 하니, 적정선을 찾아보겠습니다. 그럼 렉스턴 에너지 쪽은 어떻게 할까요?”
“어떻게 하긴요. 그냥 잘 감시하고 그때그때 상황에 맞게 대응해야지. 잘 아시겠지만…… 그들을 자극하거나 도발해서 좋을 게 하나도 없어요.”
“물론 잘 알고 있습니다.”
“그들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강하고 무서운 자들이에요. 그 점, 명심하셔야 할 거예요.”
“항상 염두에 두고 있습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얻은 보물을 포기할 생각은 전혀 없지만 말이다.
또한 위협을 받는다고 꼬리를 내릴 생각도 없고 말이다.
“어쨌든…… 우리에게도 뭔가 기회가 온 것 같은 예감이 들지 않아요?”
블러디퀸의 눈이 평소보다 훨씬 더 반짝였다.
웨인은 그걸 보며 그녀의 눈빛이 왠지 붉어 보인다는 생각이 들었다. 마치 핏빛처럼 말이다.
< 인도에서 2 > 끝
ⓒ 김강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