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인도와 중국 >
허공에서 사람 한 명이 뚝 떨어졌다. 그 사람은 상당히 높은 곳에서 갑자기 떨어졌는데도 아주 가볍게 바닥에 착지했다.
그리고 바로 이어서 또 한 사람이 같은 자리에 나타나 뚝 떨어졌다.
그 사람은 더 가볍고 날렵한 몸놀림으로 바닥에 내려섰다.
임형석과 현석이었다.
두 사람의 모습은 아주 말끔했다. 마계를 토벌한 다음 깨끗이 씻고 옷까지 갈아입었기에 전혀 이상해 보이지 않았다.
“머리는 어떻게 좀 해야겠군.”
임형석이 자신의 머리를 긁적이며 중얼거렸다. 현석도 머리가 많이 길었기에 일단 머리부터 정리하러 가기로 했다.
골목에서 나온 두 사람은 미용실부터 찾았다.
번화가였기에 얼마 돌아다니지 않고서도 금방 찾을 수 있었다.
그렇게 머리까지 정리하고 나니 아주 말끔해졌다.
두 사람은 머리를 정리한 다음 밖으로 나와 거리를 천천히 걸었다.
제법 오랫동안 삭막한 풍경만 보고 또 이가 갈릴 정도로 치열하게 싸우기만 해서 그런지 이런 평화로운 광경이 참으로 마음에 깊이 와 닿았다.
“이런 기분은 정말 오랜만인데?”
임형석은 그렇게 중얼거리며 기분 좋게 미소 지었다.
현석도 보기 드물게 기분 좋은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만큼 마계에서의 싸움이 힘들었다는 뜻이기도 했다.
“젠장. 한 달이 넘게 걸릴 줄은 몰랐는데.”
임형석의 투덜거림에 현석은 고개를 끄덕였다.
두 사람이 마계에서 보낸 시간은 한 달 하고도 열흘이었다.
무려 40일 동안이나 마계에서 지낸 것이다.
물론 그렇게 해서 마계를 완벽하게 토벌했다. 이제 저곳 투명 던전 안의 마계에는 아무것도 남아있지 않았다.
그리고 그 40일의 전투를 겪으며 두 사람은 크게 성장했다.
현석이야 당연히 잦은 레벨업을 통해 강해졌고, 임형석은 전투를 통해 엄청나게 강해졌다.
임형석은 강해 보이는 마족이 있으면 앞뒤 재지 않고 달려들었다.
그렇게 강한 적과 실전 경험을 계속 겪는데 강해지지 않으면 그게 더 이상한 일이었다.
잠시 걷던 임형석은 갑자기 멈춰 서서 뒤를 돌아봤다. 그리고는 엄청나게 아쉬운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돌아갔으려나?”
주어가 없었지만 현석은 임형석이 누굴 생각하며 저 말을 하는지 왠지 알 것 같았다.
하지만 기다리고 있을 리가 없었다. 상대는 엄청나게 바쁜 사람이다. 개인 시간을 빼기 정말 어려운 사람이었다.
아마 한국에 왔던 것도 한국 지부를 만드는 일 때문에 겸사겸사 온 것이지 개인적인 볼일을 보기 위해 온 것은 아닐 것이다.
“일단 집으로 가죠.”
현석은 그렇게 말하고 다시 걸음을 옮겼다.
임형석은 현석의 말에도 한동안 뒤를 돌아보고 있다가 이내 몸을 돌려 따라갔다.
* * *
양동욱은 자신의 사무실 문을 열고 들어오는 두 사람을 보고는 멍한 표정을 지었다.
잠시 그렇게 멍하니 있다가 퍼뜩 정신을 차린 양동욱은 벌떡 일어나 버럭 소리를 질었다.
“아니, 대체…… 대체 어디 갔다 이제 오시는 겁니까!”
“사냥.”
현석의 어이없을 정도로 간단한 대답에 양동욱은 오히려 말문이 막혀 버렸다.
대체 어떤 던전에 가서 무슨 사냥을 했기에 한 달이 넘게, 아니 40일 동안이나 사라질 수 있단 말인가.
“후우. 아무튼…… 오랜만입니다.”
양동욱은 다시 자리에 털썩 주저앉으며 힘없이 말했다. 그리고는 현석과 임형석을 물끄러미 쳐다봤다.
오랜만에 봐서 그런지, 아니면 꽤 지독한 사냥을 통해 레벨업을 해서 그런지는 몰라도 어딘가 분위기가 달라 보였다.
“못 보던 사이에 왜 이리 까칠해졌어? 무슨 일 있었어?”
임형석이 양동욱에게 다가가며 물었다.
그저 양동욱의 책상 앞쪽에 마련된 소파에 앉으려고 다다간 것뿐이었다.
한데 양동욱은 순간 포식자가 자신을 덮치는 듯한 착각에 빠졌다.
그의 몸에서 갑자기 식은땀이 줄줄 흐르고 얼굴이 창백해졌다.
“뭐야? 보약이라도 먹어야 하는 거 아냐? 왜 식은땀을 흘리고 그래? 평소에 몸 관리 잘 해놓지 않으면 결정적일 때 후회한다.”
임형석은 그렇게 말하며 씨익 웃었다. 마치 자세히 말은 못해주지만 뭔가가 있는 것 같은 표정이었다.
누가 봐도 한눈에 알 수 있는 표정과 미소였지만 양동욱은 그런 것조차 파악하지 못할 정도로 긴장한 상태였다.
양동욱은 심호흡을 통해 마음을 다스리려 애쓰며 임형석을 바라봤다. 하지만 여전히 마음이 진정되지 않았다.
그때 현석이 나섰다. 별 거 없었다. 그저 임형석 옆으로 다가갔을 뿐이었다.
한데 그것만으로도 양동욱은 순식간에 포식자에게 노려진다는 생각이 말끔히 사라져 버렸다.
현석은 임형석 옆에 앉으며 말했다.
“조심 좀 하시죠. 함부로 기세 풀풀 날리고 다니면 사람들 다 도망갑니다. 맹수가 덤벼드는 것 같을 걸요?”
“잉? 그건 또 무슨 헛소리야?”
현석은 아무것도 모르겠다는 듯한 임형석의 표정에 고개를 저었다.
아무래도 너무 급성장을 하는 바람에 저렇게 된 모양이었다. 하긴, 이번 마계원정은 정말 여러모로 성과가 대단하긴 했다.
“아마 나중에 연애도 못할 겁니다.”
“뭐? 이놈이 왜 악담을 하고 그래?”
현석은 더 이상 말하지 않고 양동욱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이미 충분했다.
임형석은 자신에게 과연 무슨 문제가 있는지 고민했다. 정말 오랜만에 찾은 즐거움 중 하나를 이렇게 허무하게 잃어버리긴 싫었으니까.
양동욱의 반응을 보면 자신에게 문제가 있는 건 확실했다. 그리고 그게 무슨 문제인지 현석에게 들었으니 그걸 고치는 것도 가능할 것이다.
임형석이 그렇게 고민에 빠져들었다.
그 사이, 현석과 양동욱은 그동안 못 만났기 때문에 밀린 일처리를 좀 해야만 했다.
“특별한 일은 없었나?”
“이걸 특별하다고 해야 할지…… 우리 회사의 매출이 늘었습니다.”
“매출? 그런 것도 있었어?”
“에이, 절 너무 무시하시는 거 아닙니까? 나름 매출이 나오는 건실한 회삽니다. 요즘 얼마나 떠오르고 있는데요. 우리 회사랑 계약하고 싶어 안달 난 플레이어들이 지금 줄을 서 있습니다.”
“플레이어랑 계약을 해?”
양동욱이 씨익 웃었다.
“암시장에서 뒤통수 맞으며 거래하기 싫다는 거죠. 그리고 관리센터에 넘기기엔 너무 아까운 물건들도 많고 말이죠.”
양동욱은 그 일을 대행해주며 약간의 수수료를 챙기는 식으로 회사를 운영했다.
물론 그러면서 정보도 다루고 말이다.
어디까지나 힐링포션과 파워업 키트는 따로 운영한다. 그쪽에서 나오는 수입은 아예 건드리지도 않고 차곡차곡 쌓아두고 있는 중이었다.
그러다가 현석이 지정하는 땅이 있으면 바로 매입을 진행하고 말이다.
양동욱은 굳이 그쪽의 돈을 건드리지 않고도 이 정도 회사쯤은 운영할 수 있다는 걸 보여주고 싶었다.
원래는 그래서 시작한 일이었는데, 요즘 갑자기 일이 커져 버렸다.
그래서 건물이 직원들로 바글바글했다. 처음 시작했을 때의 그 휑한 분위기는 온데간데없었다.
“팀 메인퀘스트가 요즘 아주 끝내줍니다.”
“끝내준다고?”
“어디서 어떤 사냥을 하는지 정말 엄청난 물건들을 자주 가져오고 있거든요.”
현석의 입가에 슬며시 미소가 맴돌았다.
그쪽은 일단 그런 식으로 성장하면 될 듯했다. 아마 쓸 만한 아티팩트가 나오면 따로 빼놓고 있을 것이다.
이제 슬슬 아공간 아티팩트를 하나 정도 마련해 줘야 할 때가 된 듯했다.
“제가 발품 좀 팔아서 제법 쓸 만한 아공간 아티팩트도 구해서 보냈습니다. 아마 앞으로 더 대단한 성과를 가져올 것 같습니다.”
양동욱의 눈에는 기대감이 가득했다.
현석은 양동욱의 말을 들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알아서 필요한 부분을 긁어주니 굳이 말을 더할 필요가 없어서 편해 좋았다.
“레드드래곤 쪽이랑도 제대로 연계를 했고, 이번에 사신 길드를 칠 때 정보제공에 대한 조건으로 몇몇 길드와도 계약을 했습니다.”
양동욱이 자랑스럽게 말했다. 가만히 듣고 보니 이 회사를 중심으로 길드의 판매망이 구성되고 있는 듯했다.
“다수의 중소 길드 쪽에서도 줄을 쫙 서 있습니다. 이제 곧 우리 회사를 중심으로 아티팩트 판매망을 만들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현석은 내심 고개를 끄덕였다. 만일 그게 가능해진다면 굉장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게 될 것이다.
판매망의 중심이 된다면 모여드는 정보의 양도 엄청날 것이고, 그걸 이용해 막대한 수익을 올리는 건 당연하고, 플레이어나 길드를 쥐락펴락 할 수 있게 될 것이다.
물론 당장 이뤄질 일은 아니다. 판매망의 중심에 선 다음에도 제법 오랜 시간 동안 그 자리를 유지해야 가능하게 될 일이었다.
하지만 전망은 아주 밝았다. 양동욱의 눈빛을 보고 있으니 금방이라도 그렇게 될 것 같았다.
“힐링포션과 파워업 키트가 큰 힘이 되고 있습니다. 아마 생각보다 시간이 오래 걸리지 않을 겁니다.”
양동욱은 확신에 찬 표정으로 그렇게 말했다.
현석도 그렇게 될 거라 여겼기에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고는 한 마디 해 주었다.
“기대되는군.”
양동욱이 씨익 웃었다.
“저도 기대됩니다. 무슨 그림을 그리고 계신지 모르지만, 아마 제가 아주 큰 힘이 되어드릴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현석은 살짝 놀란 눈으로 양동욱을 쳐다봤다. 오늘따라 그의 미소가 장난스럽지 않고 진지해 보였다.
설마 이런 생각을 하고 있는 줄은 몰랐다. 그리고 여기까지 들여다보고 있는 줄도 몰랐다.
현석의 표정과 눈빛은 다시 담담해졌다. 그는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것도 기대하지.”
양동욱의 입가에 더욱 진한 미소가 맴돌았다.
그는 마지막으로 준비한 서류 몇 장을 꺼내 현석에게 내밀었다.
“예전에 말씀하셨던 겁니다.”
현석은 그것을 받아 확인했다. 그리고 눈을 번득였다.
“인도와 중국에 뭔가 있긴 있는 모양이더군요. 하지만 그게 뭔지 정확히 알아낼 수는 없었습니다. 그쪽도 나름 보안이 굉장하더라고요.”
양동욱은 그렇게 말하며 현석이 서류를 모두 읽을 때까지 잠시 기다려 주었다.
내용이 많지는 않기에 읽는 데 걸린 시간은 짧았다.
“보안이 너무 철저해서 상대적으로 보안이 약한 쪽을 뚫는 수밖에 없었습니다. 당연히 거기에는 별로 얻을 것도 없었죠. 한데…….”
양동욱은 잠시 말을 끌며 현석을 바라봤다. 그의 눈이 반짝반짝 빛나고 있었다.
“제법 재미난 사실 하나를 알아냈습니다.”
“재미난 사실?”
중요한 사실이 아니라 재미난 사실이라고 했다. 아마 그렇기에 보안이 상대적으로 약했을 것이라는 짐작이 가능했다.
“그놈들이 인도와 중국에서 찾는 것이…… 우리나라에도 있는 모양입니다.”
현석의 눈이 살짝 커졌다. 이 정도로 표정이 변했다는 건 정말 크게 놀랐다는 뜻이었다.
“우리나라에…… 있는 거라고?”
현석의 머릿속이 복잡하게 꼬이기 시작했다. 우리나라에 있으면서도 인도와 중국에도 있는 것이 무엇일까?
다른 사람은 아무것도 짐작하지 못하겠지만 현석은 달랐다. 현석에게는 미래에 대한 지식이 있었다.
“원래는 우리나라에 있는 걸 먼저 찾으려고 했는데, 우리가 K나이츠 길드와 사신 길드를 너무 철저하게 박살 내는 바람에 포기한 모양입니다.”
현석은 양동욱의 설명을 건성으로 들으며 복잡하게 꼬인 머릿속을 하나하나 정리해 나갔다.
일단 키워드는 한국, 중국, 인도다. 그리고 플레이어에 관계된 것. 사실 이쯤 되면 답은 하나밖에 없다. 던전이다.
‘던전? 중국, 인도, 한국의 던전?’
현석의 머릿속에 불이 번쩍 들어왔다. 그놈들이 찾는 게 뭔지 알 것 같았다.
“어느 쪽이 더 일이 많이 진행되었는지 알 수 있나?”
“물론입니다. 일단 얼마 전까지만 해도 둘 다 비슷했습니다. 한데 일주일쯤 전에 인도 쪽에서 아주 큰 단서를 발견한 모양입니다. 그쪽이 아주 급격히 진행되고 있습니다.”
현석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인도에 가게 준비 좀 해줘.”
양동욱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씨익 웃었다. 그리고는 임형석을 바라봤다.
임형석이 뭘 그런 눈으로 보냐는 듯 눈을 부라리며 말했다.
“당연히 나도 가야지! 저놈 옆에 있으면 위험한 것들이 자동으로 꼬이거든.”
양동욱이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예. 그럼 두 분의 인도 여행 준비를 바로 진행하겠습니다.”
현석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사무실에서 나갔다.
인도와 중국에 있으면서 한국에도 있는 것, 그 중에서 한국에 있는 건 이미 현석이 찾았다.
이제 인도의 것도 먹어치워야 한다.
사무실에서 나가기 전에 현석이 돌아서서 양동욱을 쳐다봤다.
양동욱은 현석이 무슨 말을 하려는지 다 안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뒤처리는 제가 다 알아서 하겠습니다. 마음껏 휘젓고 오십시오.”
현석의 입가에 씨익 미소가 떠올랐다.
양동욱은 왠지 그 미소가 섬뜩하면서도 기분이 좋아 보였다.
< 인도와 중국 > 끝
ⓒ 김강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