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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눈 뜨고 레벨업-145화 (145/326)
  • < 젤리웜 4 >

    “후욱. 후욱. 더럽게 넓네. 여기 끝이 있긴 한 거냐?”

    임형석이 숨을 헐떡이며 물었다. 현석이 보기에 지금 임형석은 한계를 넘어섰다. 더 이상의 사냥은 무리였다.

    현석은 바닥에 주저앉은 채 주위를 둘러봤다.

    무수한 젤리웜의 사체가 사방에 널려 있었다. 그리고 마족의 시체도 널려 있었다.

    이번 전투는 정말 힘들고 위험했다.

    지금까지는 마족 한 마리에 젤리웜이 스무 마리 정도 있었다.

    한데 이번에는 100마리가 넘는 젤리웜에 열이나 되는 마족이 나타났다.

    마치 함정을 파고 기다리고 있었던 것처럼 한꺼번에 바닥을 뚫고 튀어나왔다.

    그들은 현석의 마력 감지 능력으로도 기척과 마력을 잡아내지 못할 정도로 은밀하게 숨어 있었다.

    기척이 사라지게 만든 건 그중 가장 강하고 까다로운 마족이 가진 능력이었다.

    그들이 일제히 나타났을 때 얼마나 놀랐는지 모른다. 모든 마족과 마수의 중심에 현석과 임형석이 있었다.

    그리고 그 모두의 공격을 한꺼번에 받아내야만 했다.

    몇 번이나 죽을 고비를 넘겼고, 또 몇 번이나 큰 상처를 입었다.

    임형석은 싸우면서 상처 치료 아이템을 먹어야 했다. 온몸을 잠식하는 고통까지 참아내며 싸웠다.

    현석에게 자연치유 스킬과 간이 힐링포션이 없었다면 아마 벌써 죽었을 것이다.

    하지만 두 사람은 결국 살아남았다.

    그 처절한 싸움의 승자가 된 것이다.

    그리고 싸움에 승리한 쪽에는 전리품을 획득할 자격이 주어진다.

    현석은 무릎을 짚으며 힘겹게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주위를 다시 한 번 둘러봤다.

    치열한 전투의 흔적이 곳곳에 남아 있었다. 그걸 보는 것만으로 저때가 어떤 상황이었고, 어떻게 적과 싸웠는지 떠올랐다.

    그곳에는 전투의 흔적만 있는 게 아니었다. 무수한 전리품들이 흩어져 있었다.

    모든 전리품에는 이름이 붙어 있었다. 물론 심안을 가진 현석만이 확인할 수 있는 이름이었다.

    현석은 일단 젤리웜의 체액부터 챙겼다.

    사실 그것이 가장 중요했다.

    그동안 현석이 모은 마력의 정수는 정말 어마어마하게 많았다.

    그 많은 마력의 정수를 보관하려면 웬만한 양으로는 어림도 없었다.

    하지만 이제 여기 있는 100마리의 체액을 모두 모은다면 앞으로 얻게 될 마력의 정수까지도 충분히 보관할 수 있으리라.

    어쨌든 그것만으로도 이번 마계 원정의 목표는 충분히 달성한 거나 다름없었다.

    하지만 현석은 여기서 원정을 끝낼 생각은 없었다.

    이곳을 완벽하게 토벌할 때까지 싸울 계획이었다.

    젤리웜의 체액을 모두 챙긴 현석은 이제 나머지 마족의 시체를 확인했다.

    마족들은 가끔 굉장한 아티팩트를 갖고 다닐 때가 있었다. 이번이 바로 그런 경우였다.

    현석은 이 많은 마수와 마족이 어떻게 그렇게 은밀하게 숨어 있었을까에 대한 의문을 풀 수 있었다.

    [마왕의 그림자]

    [지정한 아군의 존재감을 지운다. 레벨과 마력 컨트롤 능력에 따라 지정할 수 있는 아군의 수와 은신 수준이 달라진다.]

    그것은 진짜 그림자였다.

    특정한 물건으로 이루어진 아티팩트가 아니라 진짜 그림자가 바닥에 드리워져 있었다.

    그림자의 모양은 머리에 두 개의 뿔이 달린 남자처럼 보였다. 그것을 통해 마왕의 모습을 대강 유추할 수 있었다.

    물론 이렇게 그림자조차 떨어져 나온 걸로 봐선 멀쩡히 살아 있을지 알 수 없지만 말이다.

    현석은 바닥에 드리워진 그림자에 손을 갖다 대고 마력을 일으켰다.

    예상했던 대로 그림자가 손으로 쑥 빨려 들어왔다.

    그림자를 흡수하자마자 자신이 어떤 능력을 쓸 수 있는지 저절로 알 수 있었다.

    이런 식으로 겉으로 드러나지 않고 몸으로 흡수하는 종류의 아티팩트는 마치 도구의 능력을 흡수해 자신의 능력으로 만드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왠지 더 강해진 느낌이었다.

    어쨌든 이제 현석은 은신에 관한 한, 마왕의 능력을 가졌다고 보면 된다. 물론 레벨을 더 올려야 진짜 제대로 된 위력을 발휘하겠지만 말이다.

    아까 이 마왕의 그림자를 쓰던 마족의 레벨이 무려 194였다. 그러니 그렇게 상대하기 어려웠던 것이다.

    그러니 그놈만큼 이 능력을 쓰려면 최소 그 정도 레벨은 되어야 한다는 뜻이다.

    물론 현석의 마력 컨트롤 능력이 훨씬 뛰어나니 정확한 비교는 어렵지만 말이다.

    이곳에서 얻을 수 있는 전리품 중에 방금 얻은 마왕의 그림자가 가장 뛰어난 아티팩트였다.

    물론 나머지 아티팩트들 중에서도 훌륭한 것들이 많았지만 그래도 마왕의 그림자에 비할 바는 아니었다.

    그리고 다른 아티팩트들은 현석이 쓰기에 썩 괜찮은 것이 없었다. 플레이어가 아닌 임형석이 쓸 수 있는 것도 없었고 말이다.

    “다 끝났냐?”

    임형석이 바닥에 누운 채 물었다. 왠지 저러다가 잠들 것처럼 보였다.

    “찬데서 자면 입 돌아갑니다. 쉴 만한 장소를 찾아보죠.”

    아무리 그래도 여기서 먹고 자고 하기에는 좀 그랬다. 이곳에 남은 전투의 흔적이 너무 치열하고 지독해서 분위기 자체가 휴식을 방해했다.

    임형석도 그 부분을 충분히 느끼고 있었기에 억지로 몸을 일으켰다.

    “끄응. 온몸이 쑤시는구나. 나이도 별로 안 먹었는데 벌써 이러면 어쩌나.”

    현석은 나이를 별로 안 먹었다는 말에서 잠깐 피식 웃었지만 굳이 언급하지는 않았다.

    솔직히 임형석을 보고 있으면 실제 나이야 어떻든 겉보기에는 마흔이라고 해도 믿을 수 있을 정도였으니까.

    사람은 마음가짐에 따라서 늙는 정도도 달라지는 법이다. 차라리 계속 저렇게 생각하며 사는 것이 훨씬 젊고 건강하게 사는 방법이다.

    “아까 오면서 저쪽에 봐둔 장소가 있으니까 5분만 힘내시죠.”

    “5분? 그러지 뭐.”

    임형석은 언제 힘들다고 투덜거렸냐는 듯 쌩쌩해진 얼굴로 얼른 현석에게 붙었다.

    “뭐하냐? 안 가고. 너 그 요상한 기술로 좋은 거 잔뜩 가져왔지?”

    현석은 잠시 임형석을 가만히 쳐다봤다. 그러더니 고개를 휘휘 젓고는 걸음을 옮겼다.

    “어라? 너 그 불순하고 경박한 고개놀림은 뭐냐? 왠지 표정도 마음에 안 드는데? 너 무슨 생각했어? 응?”

    현석은 대답하지 않고 걸음을 빨리했다.

    “어라? 이거 더 수상한데? 왜 빨리 가는 거야? 응? 너 속으로 나 욕했지. 응?”

    현석의 걸음이 점점 빨라졌다. 임형석은 어디서 그런 힘이 나는지 빠르게 현석을 쫓아갔다.

    현석이 달리기 시작했다. 엄청난 속도였다.

    임형석은 놀랍게도 그런 현석을 따라잡아 나란히 달렸다.

    “이거 봐라, 이거 봐. 켕기는 게 있으니까 이렇게 빨리 달리는 거 아냐. 안 그래?”

    임형석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현석이 딱 멈췄다.

    “어라라라? 으라차차!”

    임형석은 현석처럼 갑자기 멈출 능력은 없었다. 현석을 지나쳐 달려가다가 힘으로 발을 땅에 박아 속도를 줄였다.

    “야! 그렇게 갑자기 멈추면 어떡해!”

    현석은 그런 임형석을 보며 손가락 하나를 들어 입술에 갖다 댔다. 조용히 하라는 뜻이었다.

    임형석은 아뜨거 하는 표정으로 입을 텁 다물었다.

    방금 그런 지독한 싸움을 하고 한계를 넘나들었는데, 이렇게 소란을 피우다가 또 그런 놈들이 몰려들기라도 하면 큰일이었다.

    슬슬 힘과 체력이 돌아오고 있긴 하지만 아직 제대로 힘주고 싸울 정도는 아니었다.

    “끄응. 치사한 놈 같으니.”

    “그래도 덕분에 이렇게 빨리 오지 않았습니까.”

    현석의 말에 임형석이 주위를 둘러봤다. 그리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거대한 바위가 잔뜩 놓인 곳이었다. 바위와 바위 사이에 자리를 잡으면 웬만해선 들키지 않을 것 같았다.

    “그런데 그 더럽게 예민한 놈들이 우리 냄새라도 맡으면 곤란하지 않을까? 여긴 숨기도 좋지만 나중에 도망치기가 나쁠 거 같은데?”

    “도망을 왜 칩니까.”

    현석의 말에 임형석이 씨익 웃었다.

    “그거 마음에 드는 말이로구나. 그래. 내가 왜 도망을 가. 이상한 놈들이 몰려올 때쯤이면 충분히 싸울 수 있을 텐데.”

    임형석의 회복력은 불가사의할 정도로 뛰어났다.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이번엔 좀 시간이 필요했다.

    적어도 잠을 좀 자야했다.

    현석은 컨테이터 박스 하나를 꺼냈다. 그리고 그 안에서 1인용 텐트 두 개와 각종 보존식들을 꺼냈다.

    그걸 본 임형석의 입에서 군침이 줄줄 흘렀다.

    아공간에 보관해서 그런지 음식 상태도 아주 끝내줬다.

    “불을 못 피우는 게 아쉽군.”

    “왜 못 피웁니까?”

    현석은 그렇게 말하고는 엄청나게 거대한 불판 하나를 꺼냈다. 그 위에 고기를 올려 구우면 다섯 근은 한꺼번에 구울 수 있을 것 같을 정도로 큰 불판이었다.

    현석은 그 불판에 손가락을 갖다 댔다. 그러자 불판이 순식간에 달아올랐다.

    마력의 불을 응용한 방법이었다.

    현석은 미리 꺼내 놓은 삼겹살을 그 위에 하나씩 올렸다. 비록 숯불에 구운 건 아니지만 삼겹살 자체가 워낙 맛있는 음식이니 이 정도로도 충분했다.

    치이이익!

    삼겹살 익는 소리와 냄새가 주변을 자욱하게 감쌌다.

    임형석은 그걸 보며 침을 줄줄 흘리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이 냄새와 소리 때문에 마수들이 몰려오지 않을까 걱정이 이만저만 아니었다.

    저걸 눈앞에 두고 먹지도 못한 채 싸우게 된다면 정말 미쳐버릴 것만 같았다.

    “야, 그냥 먹자. 굳이 잘 익힐 필요 없잖아.”

    “그래도 삼겹살은 잘 익혀먹어야죠.”

    현석은 그렇게 말하며 고기를 휙휙 뒤집었다. 이내 앞뒤로 삼겹살이 노릇하게 익었다.

    임형석은 그걸 정신없이 입에 집어 넣었다. 그리고 볼이 터질 지경이 되어서야 씹기 시작했다.

    언제 이 맛을 다시 볼 수 있을지 모르니 열심히 먹어 둬야 했다.

    반면 현석은 한 점 한 점 음미하듯 천천히 고기를 먹었다.

    그리고 쌈 채소까지 준비했다. 거기에 즉석밥까지 꺼내 뎁힌 다음 정말 즐기듯 그것을 천천히 먹었다.

    임형석은 입이 터질 지경으로 고기를 넣어 씹으며 그런 현석의 모습을 바라봤다.

    언제 무슨 일이 터질지 모르는데 저 말도 안 되는 여유는 대체 뭐란 말인가.

    임형석은 우걱우걱 씹어 억지로 고기를 삼킨 다음, 현석을 뚱하게 보며 물었다.

    “너, 뭐하냐?”

    현석은 대답하지 않았다. 누가 봐도 밥과 고기를 먹고 있다는 걸 알 수 있으니 굳이 대답할 이유가 없었다.

    임형석도 굳이 밥 먹는다는 대답을 바라고 한 질문이 아니었다.

    “그러다가 미친 괴물들이 달려들면 어쩌려고 그렇게 여유를 부려?”

    현석은 그런 임형석을 보며 빙긋 웃었다.

    지금 굳이 그렇게 서두를 필요 없다고, 마수가 여기 몰려올 일은 없다고 말해줄 생각은 없었다.

    약간의 긴장감은 우리의 안전을 지켜줄 테니까.

    지금 현석은 오늘 얻은 마왕의 그림자를 제대로 써먹고 있었다.

    현재 동료로 인식된 임형석을 비롯해서 각종 물품과 고기까지 모두 존재감이 사라진 상태였다.

    냄새가 가장 문제인데, 그건 마력을 이용해 주변으로 흘러나가지 않게 차단했기에 상관없었다.

    현재 냄새는 끝없이 위로만 올라가고 있었다. 물론 그렇게 위로 올라간 다음 아까 있었던 치열한 전장 쪽으로 빠르게 날려 보내고 있었다.

    아마 냄새의 시작이 여기라고는 그 어떤 마수나 마족도 알아차리지 못할 것이다.

    그렇게 식사를 끝낸 두 사람은 텐트로 들어가 잠을 청했다.

    현석은 이 마계를 토벌하는데 얼마나 시간이 필요할지 생각해봤다.

    ‘1주일은 너무 짧으려나?’

    이곳이 아무리 넓고 위험하다 해도 그래봐야 조각난 마계의 한 지역에 불과했다.

    오늘처럼만 싸우면 아마 길어야 열흘일 것이다.

    물론 이 마계를 끝까지 겪어보지 못해서 확신할 수는 없지만 말이다.

    어쨌든 그렇게 마계에서의 첫 날이 지나가고 있었다.

    아마 이 마계를 토벌하고 나갈 때쯤이면 회귀 전의 레벨을 넘어설 수 있을 것 같았다.

    < 젤리웜 4 > 끝

    ⓒ 김강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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