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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눈 뜨고 레벨업-143화 (143/326)
  • < 젤리웜 2 >

    퍼버버벙!

    연달아 뭔가가 터지는 소리가 울렸다. 임형석의 주먹질이 만들어낸 소리였다.

    임형석은 마계에 들어오자마자 주먹질을 시작해서 아직까지 한 번도 쉬지 못하고 싸우는 중이었다.

    아무리 싸움을 밥 먹는 것보다 더 좋아하는 임형석이라도 이쯤 되니 슬슬 질리기 시작했다.

    사방으로 나가 떨어졌던 흑기사들이 다시 달려들었다. 어찌나 내구력이 좋은지 한 방에 죽일 수가 없었다.

    또 어찌나 빠르고 칼질이 교묘한지 방심할 수도 없었다.

    임형석은 몸을 슬쩍 비틀어 다섯 흑기사가 내지르는 검을 한꺼번에 피해 버렸다.

    싸움에 대한 감각이 최고조로 올라와 있기에 할 수 있는 간결한 회피동작이었다.

    공격을 이렇게 제자리에서 피하고 나면 반드시 상대에게 빈틈이 생긴다. 그리고 임형석은 그런 빈틈을 아주 정확하고 강력하게 노릴 수 있는 실력이 있었다.

    꽈과과과광!

    흑기사들이 다시 나가 떨어졌다. 이번에는 가슴이 움푹 함몰되었기에 아마 쉽게 일어나지 못할 것이다.

    흑기사들이 비틀거리며 몸을 일으켰다. 아마 다시 일어나더라도 아까처럼 강력한 모습을 보여주긴 어려울 것이다.

    그래도 방심해선 안 된다.

    임형석은 그대로 몸을 날려 가장 가까이 있는 놈의 머리를 발로 콱 찍었다.

    꽈득!

    머리가 납작하게 찌그러지며 땅에 처박혔다. 그러자 흑기사가 그대로 축 늘어졌다.

    철컹.

    흑기사는 마치 속 빈 갑옷처럼 변해버렸다. 그게 흑기사의 최후였다.

    임형석은 바쁘게 움직이며 나머지 흑기사의 머리를 박살 내거나 우그러뜨렸다.

    “후욱! 후욱! 아오 이 징그러운 것들.”

    다섯 흑기사를 처리하기 무섭게 저 멀리서 열 놈이 또 달려들었다.

    임형석은 흑기사들이 달려오는 동안 최대한 숨을 크게 쉬어 체력과 힘을 보충했다.

    몇 번 호흡을 하지도 않았는데 온몸에 힘이 꽉 차올랐다.

    빠르게 힘을 보충한 임형석은 시선을 힐끗 돌려 현석을 바라봤다.

    현석 주변에도 쓰러진 흑기사의 잔해가 무수하게 쌓여 있었다.

    심지어 임형석보다 더 많은 흑기사를 해치웠다.

    “지독한 놈.”

    임형석은 그렇게 중얼거리며 주먹을 꽉 쥐었다. 그리고 달려드는 흑기사를 향해 그대로 일격을 날렸다.

    꽈득!

    흑기사의 머리가 뭉개지며 단번에 힘을 잃고 쓰러졌다.

    그 다음부터는 아까와 비슷한 전개가 이어졌다. 임형석은 절대 무리하지 않았다.

    싸움이 좀 길어지더라도 무리하게 힘을 써서 남은 싸움을 포기할 생각은 없었다.

    힘과 체력의 배분 역시 싸움에서 중요한 요소 중 하나였다.

    그렇게 흑기사와 계속 싸우다보니 어느새 더 이상 달려드는 흑기사가 없었다.

    “이제 끝난 거냐?”

    임형석이 현석을 바라보며 물었다. 마계에 대해서 임형석이 아는 게 하나도 없으니 이렇게 수시로 물어보고 확인해야만 한다.

    이런 길고 큰 싸움에서 상대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느냐는 싸움의 승패를 가를 정도로 중요했다.

    “끝났습니다.”

    물론 다 끝난 게 아니라 흑기사가 더 이상 달려들지 않을 거라는 뜻이었다.

    아마 여기서 더 이동하면 또 마수가 달려들 것이다.

    “제법 싸우는 놈들이라 패는 맛이 있었는데 끝났다니 좀 아쉽군.”

    임형석이 씨익 웃으며 중얼거리자 현석이 바로 대꾸해주었다.

    “걱정 안 해도 됩니다. 조만간 또 올 테니까. 이번엔 이놈들보다 더 강력할 테니까 훨씬 재미있을 겁니다.”

    임형석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이놈들이랑 싸울 때도 체력이 간당간당 했는데, 더 강한 놈들이 오면 얼마나 힘들겠는가.

    물론 그렇다고 해도 질 거라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무조건 이길 수 있다. 다만 얼마나 적은 피해로 적을 물리치느냐가 문제였다.

    “쯧. 쉬면서 상처나 좀 치료하자.”

    임형석은 당당하게 손을 내밀었다. 현석은 그의 손바닥 위에 새까만 구슬 하나를 내려놓았다.

    플레이어가 아닌 임형석을 위해 준비한 치료용 아이템이었다.

    임형석은 망설임없이 그걸 입에 넣고 꿀꺽 삼켰다.

    잠시 후, 그의 얼굴이 사정없이 일그러졌다. 하지만 임형석은 어금니를 꽉 물고 신음 한 번 흘리지 않았다.

    이내 그의 표정이 다시 원래대로 돌아왔다.

    “푸하! 진짜…… 먹을 때마다 느끼는 건데, 거지같지만 훌륭한 약이야.”

    현석은 그런 임형석을 보며 내심 고개를 끄덕였다. 정말 대단한 사람이었다.

    방금 먹은 약이 얼마나 큰 고통을 주는지 알기에 더 감탄스러웠다.

    그 모진 고통을 신음 한 번 안 흘리고 참아낼 수 있다니 말이다.

    그래도 고통이 큰 만큼 효과도 정말 좋은 아이템이었다.

    몸에 났던 자잘한 상처들이 말끔히 사라진데다가 활력과 체력까지 되돌아왔다.

    임형석은 주먹을 이리저리 휘두르며 씨익 웃었다.

    “아주 좋은데?”

    지금까지 상대한 놈들의 두 배가 몰려와도 끄떡없을 것 같았다. 온몸에서 힘이 넘쳐 흘렀다.

    현석은 그런 임형석을 한 번 힐끗 본 다음 주변에 널린 흑기사의 잔해를 둘러봤다.

    사실 흑기사의 몸은 굉장히 질 좋은 철로 이루어져 있었다. 저걸 다 모아서 가져가면 제법 많은 돈을 받을 수 있다.

    하지만 지금의 현석에게 그런 건 아무 의미가 없었다.

    흑기사의 잔해에서 현석이 가져갈만한 건 역시 심장이었다.

    흑기사의 심장은 명치 부분에 있었는데, 새까만 구슬같은 모양이었다. 크기는 어린아이 주먹만 했는데, 형태가 완벽하게 고정되지 않아 만질 때마다 물컹거리며 모양이 변했다.

    현석은 흑기사의 몸에서 심장을 꺼낸 다음 그것을 멀리 던져 버렸다.

    던지는 방향도 신경을 써야만 한다. 괜히 마수들이 있는 쪽으로 던지면 새로운 마수들이 이쪽으로 몰려올 테니까 말이다.

    [흑기사의 심장]

    [흑철갑옷으로 이루어진 흑기사를 움직이게 하는 힘과 마력의 원천. 흑마법의 재료로 쓰인다. 켈리움이나 마정석의 정제 효율을 높일 수 있다.]

    그것이 흑기사의 심장에 대한 설명이었다.

    이것은 마정석을 정제할 때 쓰이는 재료였다. 그 얘기는 마력의 정수를 정제할 때도 쓸 수 있다는 뜻이기도 했다.

    실제로 등급이 낮은 마력의 정수를 정제할 때 흑기사의 심장을 쓰면 레인보우 엘릭서를 만들 수 있는 확률이 올라간다.

    그러니 현석에게 있어서는 상당히 중요한 재료 아이템이었다.

    현석은 모든 흑기사로부터 심장을 뽑아냈다.

    그걸 지켜보고 있던 임형석이 질린 얼굴로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 지겨운 짓을 잘도 하는구나. 나 같으면 두어 개 하다가 때려 쳤을 텐데.”

    현석은 피식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컨테이너 박스를 아공간에서 꺼내, 그 안에 흑기사의 심장을 모두 넣었다.

    “자, 이제 다음 지역으로 가죠.”

    현석은 아이템을 정리한 다음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이제부터가 이 마계에서의 진짜 싸움의 시작이었다.

    이곳은 마족도 마족이지만 특이하면서도 강한 마수가 잔뜩 살고 있었다.

    웬만한 던전에서는 보기 어려운 마수들이 여럿 존재했다.

    흑기사도 그 중 하나였다. 흑기사가 일반 던전에서 아예 안 나오는 건 아니지만 거의 로또 맞을 확률에 가까울 정도로 만나기 어려운 마수였다.

    흑기사뿐 아니라 곧 만나게 될 마수 역시 일반 던전에서는 아예 볼 수 없는 놈이었다.

    사실 현석은 그놈에게 볼일이 있었다.

    회귀 전에도 만난 적이 있는 마수였다. 그때도 이 마계에 왔었으니까.

    하지만 그때는 그저 까다롭고 무서운 마수라는 인식밖에 없었다.

    결국 그 마수의 벽을 넘지 못하고, 아니, 그 마수와 함께 나타난 마족의 벽을 넘지 못했다.

    마계 정벌에 실패한 것이다. 무수한 동료가 죽어 나갔다. 하지만 그럼에도 도망칠 수는 있었다.

    만일 그 마족이 끝까지 쫓아왔다면 거의 몰살에 가까운 피해를 입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 마족은 마치 활동지역이 정해지기라도 한 것처럼 어느 순간 원래 자리로 돌아가 버렸다.

    그렇게 간신히 살아 돌아왔다.

    그리고 나중에 더 성장해서 다시 오자고 다짐을 했다.

    하지만 결국 다시 오진 않았다. 다시 올 정도로 성장하기 전에 죽음을 맞이했으니까.

    사실 그 마수가 다시 떠오른 것은 마력의 정수를 발견했을 때였다.

    왜 그랬는지는 모른다. 그때는 그저 우연이라고 치부했다. 하지만 지금 생각하면 그저 단순히 우연이라고만 말하기에는 좀 애매한 구석이 있었다.

    당시 현석이 받은 느낌은 마력의 정수와 그 마수 사이에 어떤 중요한 연결 고리가 있는 듯했다.

    그래서 그때부터 이곳을 염두에 두고 있었다.

    현석은 냉정하게 현재의 상황을 파악했다. 그리고 과연 그 마수를 상대할 수 있을지를 계산했다.

    충분히 가능했다. 현석은 지금 혼자가 아니라 임형석이라는 괴물과 함께였으니까.

    “왠지…… 두근두근한데?”

    임형석이 이를 드러내고 웃으며 중얼거렸다. 온몸이 찌릿찌릿한 느낌에 임형석의 투기가 확 달아올랐다.

    “틀림없이 강한 놈이 있어. 이런 쪽으로 내 감은 틀린 적이 없으니까 확실해.”

    임형석의 말을 들은 현석은 또 감탄했다.

    아직 그 마족의 마력조차 느끼지 못했다. 기척이나 기세는 당연히 없었다.

    그런데도 임형석은 본능적으로 그 마족의 존재를 느끼는 모양이었다. 정말 싸움 자체에 특화된 사람 다웠다.

    “맞습니다. 아마 굉장히 강한 놈일 겁니다.”

    “그래? 그거 기대되는군.”

    “죽을지도 모릅니다.”

    “바라던 바다. 난 싸우다 죽을 거야. 병들어 죽거나 자다가 어이없이 죽지 않아. 차라리 강한 놈과 죽도록 싸우다 죽으면 폼은 좀 나잖아?”

    그렇게 말하며 씨익 웃는 임형석의 모습은 정상으로 보이진 않았다.

    현석은 대꾸하지 않고 걸음을 빨리했다. 어서 그 마수를 보고 싶었다.

    그렇게 얼마나 걸었을까. 임형석의 눈이 커다래졌다.

    “어? 저게 뭐야?”

    저 멀리서 뭔가가 꾸물꾸물 기어오고 있었다.

    “벌레 같은데?”

    두 사람은 어느새 걸음을 멈추고 다가오는 벌레들을 지켜보고 있었다.

    현석은 그 벌레들을 보자마자 긴장감을 끌어올렸다.

    “슬슬 그 강력한 놈이 나타날 겁니다.”

    “그래?”

    임형석이 환하게 웃으며 주먹을 꽉 쥐었다. 나름의 전투태세였다.

    현석은 다가오는 벌레를 살폈다. 마족은 임형석에게 맡기고 자신은 저 벌레들에 집중할 생각이었다.

    벌레들은 몸이 투명했다. 그리고 움직일 때마다 몸체가 흘러내렸다. 물론 흘러내린 몸은 다시 아래에서 흡수되듯 몸으로 되돌아가기 때문에 바닥에 흘리는 몸은 없지만 말이다.

    끈적끈적한 액체로 이뤄진 듯한 거대한 벌레였다.

    현석은 벌레의 정보부터 확인했다.

    [젤리웜-몸체가 특별한 젤리로 이뤄진 마수. 핵을 제거하지 않으면 죽지 않는다. 젤리로 이뤄진 몸체를 유지하는 모든 힘과 마력이 핵에서 나온다.]

    기본적으로는 흑기사와 비슷한 방식으로 힘을 얻어 살아가는 마수였다.

    하지만 싸움 방식이나 모양은 전혀 달랐다.

    저 젤리웜은 느릿느릿 움직이긴 하지만 공격은 정말 무시무시했다.

    젤리를 창처럼 만들어 쏘아대니까 말이다.

    젤리의 창은 몸체를 이룬 젤리와 달리 날카롭고 단단했다. 당연히 거기에 맞으면 상당한 피해를 입는다.

    게다가 더 무서운 건 그렇게 따로 떨어져 나간 젤리 조각은 일정 시간 동안 마력을 품은 채 움직인다는 점이었다.

    회귀 전 여기에 왔을 때, 그렇게 은밀히 움직이던 젤리 조각에 얼마나 많은 동료들이 당했는지 모른다.

    “저놈들은 제가 맡습니다. 어르신은 곧 나타날 강한 놈을 맡아주십시오.”

    임형석이 씨익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염려 놔라. 내가 아주 그냥 박살을 내 버릴 테니까. 이렇게 말이야.”

    임형석은 그대로 몸을 돌리며 주먹을 휘둘렀다.

    꽈득!

    강렬한 충돌음이 울렸다.

    임형석의 얼굴에 환한 미소가 떠올랐다. 그의 뒤쪽에 나타난 온몸이 새까만 인간이 손바닥으로 주먹을 막아낸 채 서 있었다.

    그의 몸에서 진득한 마력이 스멀스멀 흘러나왔다.

    “자, 그럼 신명나게 싸워볼까?”

    임형석의 주먹과 발이 눈부신 속도로 움직였다.

    꽈과과과광!

    보기에도 듣기에도 치열한 싸움이 시작되었다.

    그리고 그 순간, 현석은 젤리웜을 향해 빠르게 달려가고 있었다.

    < 젤리웜 2 > 끝

    ⓒ 김강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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