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젤리웜 1 >
부우우웅!
듣기 좋은 엔진음과 함께 차가 출발했다.
현석과 임형석은 뒷자리에 나란히 앉아 있었다. 블러디퀸은 운전석에서 운전을 하며 룸미러를 통해 현석과 임형석의 모습을 자주 확인했다.
“좋은 데 가시나 봐요?”
블러디퀸이 지나가듯 물었다. 그녀의 눈은 별처럼 반짝반짝 빛나고 있었다. 그녀의 눈빛에는 호기심이 가득했다.
아까 현석이 한 말은 그녀도 분명히 들었다.
그리고 그 말을 들은 임형석의 반응도 두 눈으로 똑똑히 확인했다.
아까 현석이 위험한 곳에 간다고 얘기했을 때, 블러디퀸의 머릿속에 떠오른 건 당연히 던전이었다.
한데 임형석이 차문을 닫으며 같이 가자는 듯 말하는 바람에 혼란이 찾아왔다.
임형석은 플레이어가 아니다. 웬만한 플레이어보다 훨씬 강하긴 하지만 말이다.
그러니 임형석이 던전에 들어갈 수 있을 리 없다. 그렇다면 던전이 아닌 위험한 곳에 간다는 건데, 그게 어디를 말하는 건지 떠오르는 것이 없었다.
‘차라리 전쟁터에 간다고 하면 이해를 하겠지만…….’
한국에는 전쟁터 못지않게 위험한 곳이 있긴 하다. 하지만 지금 차를 타고 가는 방향은 남쪽이었다.
한국에서 가장 위험한 곳에 가려면 북쪽으로 가야하지 않겠는가.
블러디퀸은 자신의 질문에 아무도 대답하지 않자, 잠시 침묵을 지키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
“혹시 암벽등반이라도 하시려는 건 아니죠?”
일정 레벨 이상의 플레이어에게 암벽등반이라는 건 정말 의미 없는 일이었다.
그들의 몸은 맹수처럼 날렵하고, 바닥나지 않는 체력을 가졌으며, 강력한 힘까지 있었다.
그리고 블러디퀸이 보기에 임형석은 그런 높은 레벨의 플레이어보다 오히려 더 대단했다.
그러니 그 두 사람이 암벽등반으로 위험해지려면 에베레스트 정도는 가야 하지 않을까?
“암벽등반은 무슨. 그딴 건 손가락만으로도 가능하지.”
임형석이 허세를 부리듯 말했다. 하지만 그게 허세가 아닌 진실이라는 걸 현석은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발을 디디지 않고 손가락만 이용해서 절벽을 타고 오르는 것이 가능한 플레이어가 몇이나 되겠는가?
하지만 임형석은 할 수 있다.
물론 블러디퀸은 그 말을 농담으로 받아들였다.
“아하하하하! 정말 재미있네요. 그럼 암벽등반은 아니겠고…… 대체 어딜 가는데 그렇게 위험하다고 하는 거죠? 정말 궁금한데요?”
“비밀입니다.”
현석의 단호한 말에도 블러디퀸은 그저 미소만 지었다.
“대체 어떤 대가를 지불해야 그 비밀을 들을 수 있는 거죠? 우리 가는 동안 간단한 거래를 해볼까요?”
현석은 입을 다물었다. 거래하기 싫다는 뜻이었다.
사실 일반인을 던전으로 데리고 들어갈 수 있다는 사실은 굉장한 정보였다.
물론 일반인이 던전에 가서 특별히 할 수 있는 일은 없겠지만 말이다.
임형석처럼 강한 일반인은 거의 없다고 보면 된다. 임형석이 유일한 특이 케이스였다.
그러니 일반인이 던전에 가서 뭘 할 수 있겠는가.
하지만 그래도 그게 가능한 것과 그렇지 않은 것은 하늘과 땅 차이였다.
차츰 방법을 개발해서 일반인이 할 수 있는 일을 찾아낼 수도 있지 않겠는가.
플레이어의 수는 그리 많지 않다. 요즘 점점 많아지는 추세라고는 하지만 그래도 일반인과 비교하면 거의 없는 거나 마찬가지였다.
한데 만일 일반인이 던전에 갈 방법이 생긴다면 어떻게 되겠는가.
클리어가 어려운 던전을 물량으로 부술 수 있게 된다.
게다가 뛰어난 연구자들이 던전에 직접 들어가 연구를 진행할 수도 있다.
만일 제대로 공개된다면 무궁무진한 쓰임새가 나올 것이다.
“거래도 안 하실 건가요?”
현석은 그 대답 대신 다른 말을 했다.
“여기서 세워주시면 됩니다. 다 왔으니까요.”
“예? 여기서요?”
블러디퀸이 당황했다. 여긴 서울의 번화가였다. 위험한 곳에 간다더니 왜 여기에 왔단 말인가.
“아, 제가 너무 말을 많이 해서 불편하셨나보군요. 알았어요. 조심하죠. 그러니 굳이 여기서 내리실 필요는 없어요.”
블러디퀸의 말에 현석은 고개를 저었다.
“진짜 다 온 거 맞습니다. 여기서 내리죠.”
현석은 그렇게 말하고 차에서 내렸다. 임형석도 현석을 따라 내렸다.
블러디퀸도 차에서 내렸다. 하지만 두 사람을 쫓아갈 수는 없었다.
“정말…… 까칠하네.”
블러디퀸은 그렇게 중얼거리며 전화기를 꺼냈다. 꼭 자신이 따라갈 필요는 없었다.
그녀는 피라밋 암시장의 주인이었다. 그리고 세계의 정보를 주무르는 사람이었다.
그녀가 부리는 사람 중에는 한국에서 활동하는 사람도 제법 많았다.
그리고 서울에는 특히 더 많았다.
* * *
“이럴 거면 아예 처음부터 따로 가지 그랬어?”
임형석이 퉁명스럽게 말하자, 현석이 그를 쳐다봤다. 물론 걸음을 멈추지는 않았다.
현석이 보기에 블러디퀸은 쉽게 포기할 만한 사람이 아니었다. 아마 사람을 붙일 것이다.
그렇다면 누군가 따라오기 전에 사라져 버리는 게 최고였다.
“왜 그렇게 생각하십니까?”
“분위기가 그랬잖아.”
“그런 거 아닙니다.”
현석은 그렇게 말하며 비좁은 골목으로 들어갔다. 아무리 번화가라고 해도 으슥한 골목은 존재하는 법이다.
현석은 골목 중간에서 걸음을 멈추며 물병을 내밀었다.
임형석의 얼굴에 황당함이 어렸다.
“정말 여기야?”
“마시면서 점프하시죠. 저기 표시된 곳까지.”
현석이 손가락으로 위를 가리켰다. 3미터쯤 위에 까만 페인트로 그린 듯한 작은 선 하나가 가로로 그어져 있었다.
임형석은 인상을 구겼다. 하지만 불가능한 건 아니었기에 시키는 대로 했다.
꿀꺽, 꿀꺽.
마력수를 마시면서 무릎을 살짝 굽혔다가 위로 튀어 올랐다. 마치 포탄이라도 쏘는 것처럼 위로 쭉 올라갔다.
정확히 까만 선이 표시된 곳에 도달했을 때, 거짓말처럼 임형석의 몸이 사라졌다.
현석은 주위를 한 번 살피고는 점프해서 투명 던전 안으로 들어갔다.
아마 이번 던전에서는 임형석도 자신도 고생 좀 할 것이다.
잠시 후, 동네 양아치처럼 생긴 남자 두 명이 근처에 나타났다.
“이쪽으로 간 거 같지 않아?”
“아닌가본데? 다음 골목인가봐.”
“조금 더 일찍 왔어야 하는데. 일단 난 이 골목을 따라서 나갈 테니까 넌 다음 골목으로 가.”
“오케이.”
대답한 사내가 다음 골목으로 달려갔고, 남은 사내가 골목 안으로 들어갔다.
두 사람은 빠르게 움직이면서도 꼼꼼하게 주위를 살피며 이상한 점을 머릿속에 차곡차곡 담았다.
하지만 결국 아무리 근처를 돌아다녀도 별다른 성과가 없었다.
그리고 그대로 보고할 수밖에 없었다.
그들의 보고를 들은 블러디퀸의 눈이 번득였다.
“정말…… 보통 사람이 아니야. 하긴 그렇게 대단한 사람과 함께 다니는데 보통 사람일 리가 없지.”
블러디퀸의 입가에 진득한 미소가 맺혔다.
“역시…… 내가 사람 보는 눈 하나는 끝내주지. 줄을 아주 잘 잡은 거 같지?”
그녀는 아무 성과가 없어서 오히려 더 기분이 좋아졌다.
다시 차에 탄 블러디퀸은 천천히 차를 출발시켰다. 아직 시간은 많다. 한국 지부를 만들려면 제법 오랜 시간이 필요할 테니까 말이다.
* * *
“여기는 뭐 하는 데냐?”
“도시죠.”
“그거야 내가 보기에도 그래 보인다만…….”
두 사람은 높은 언덕 위에 서 있었다. 던전 입구가 언덕 위에 있었다.
그리고 그곳은 던전의 풍경이 한눈에 들어오는 자리이기도 했다.
언덕 아래로 거대한 도시가 보였다. 엄청난 규모의 성벽이 도시 전체를 둘러싸고 있었고, 도시 중심에 상당히 높이 치솟은 성이 있었다.
현석은 이 던전에 들어오기 전에 읽은 제목을 떠올렸다.
[도시 켈드레인]
이곳은 켈드레인이라는 도시였다. 가운데 있는 성은 도시를 다스리는 영주가 살던 곳이었으리라.
회귀 전에 여기 왔을 때는 저런 광경은 보지 못했다. 그저 옆에서 얘기하던 것만 들었을 뿐이었다.
그때 들은 이야기를 토대로 구성한 광경과 지금 이렇게 실제로 직접 보는 광경은 정말 달랐다.
“굉장하긴 한데…… 저기가 그렇게 위험한 곳이긴 해?”
임형석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말을 이었다.
“아무리 봐도 별 거 없어보이는데…….”
“별 거 없습니다.”
“뭐?”
임형석이 인상을 팍 쓰며 현석을 쳐다봤다. 하지만 그게 다였다. 그는 현석이 괜한 일을 하지 않는다는 걸 알기에 다시 고개를 돌려 도시를 내려다봤다.
“텅 빈 도시입니다. 잘 뒤져보면 제법 쓸 만한 것들도 많이 있겠죠.”
말은 그렇게 했지만 실제로는 별로 남은 게 없는 도시였다.
마치 도시에 살던 사람들이 재물이나 물건을 챙겨 피난이라도 간 것처럼 말이다.
잘 뒤져보면 간혹 아티팩트가 나오기도 하고, 또 보석이나 금붙이가 나오기도 한다.
하지만 도시의 규모에 비하면 그런 물건을 찾는 게 너무 어려웠다. 굳이 보물을 찾아다니는 건 별로 효율적이지 않는 일이었다.
그리고 설사 건질 만한 게 많다 하더라도 지금의 현석에게는 관심 밖의 일이었다.
현석은 저 아래에 있는 성에 시선을 집중하고 있었다.
“우린 저 성에 갈 겁니다.”
“가운데 있는 거?”
현석이 고개를 끄덕였다.
“저 성도 딱히 위험해 보이지 않는데?”
임형석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저 도시에서는 아무런 투기나 살기나 악기가 느껴지지 않았다.
그저 텅 빈 공허함만이 느껴졌다. 보통 저런 곳에는 정말 아무것도 없는 법이다.
“위험한 건 없지만, 위험한 곳으로 가는 통로는 있죠.”
“아하. 지난 번 그런 거 말이구나. 하얀 소용돌이?”
임형석도 피라밋 암시장에서 마계에 다녀온 경험이 있기에 대번에 현석이 하는 말이 무슨 뜻인지 알아차렸다.
하지만 그럼에도 시큰둥한 표정은 그대로였다.
“그때도 별로 크게 재미있지는 않았는데…….”
그렇게 중얼거리던 임형석이 눈을 반짝였다.
“난 예전에 그 벼락 꽝꽝 때리던 용 잡을 때가 제일 재미있었던 거 같은데, 거기 또 가면 안 되나?”
“다시 생기려면 몇 달 더 기다려야 합니다.”
“젠장.”
임형석의 투덜거림을 들으며 현석은 발을 내디뎠다.
현석과 임형석은 빠르게 언덕을 내려가 도시 안으로 들어갔다.
도시를 둘러싼 성벽에는 네 개의 커다란 문이 있었는데, 네 개의 문이 모두 활짝 열려 있었다. 아무나 다 들어오라고 말하는 듯했다.
두 사람은 문으로 들어가 도시를 관통하는 대로를 걸었다.
아무런 인기척이 없으니 참으로 을씨년스러웠다.
“나 먼저 가도 되지?”
임형석은 참을 수 없다는 듯 대로를 따라 성을 향해 달려갔다. 엄청난 속도였다.
현석은 굳이 속도를 높이지 않고 천천히 걸어갔다.
어차피 임형석은 가봐야 혼자서 들어가지도 못한다. 마계로 가는 화이트홀을 통과하려면 현석에게 마력수를 받아야 할 테니까.
아니나 다를까, 성 안으로 들어간 임형석이 투덜거리면서 현석을 기다리고 있었다.
“아, 좀 빨리 와! 기다리다가 늙어 죽겠다!”
싸움에 안달 난 임형석의 태도에 현석은 빙긋 웃었다. 정말 한결같은 사람이다.
성문을 통과해 안으로 들어가니 거대한 화이트홀이 딱 보였다.
화이트홀의 크기가 어찌나 큰지 성문 안으로 들어오고 나니 성의 모습이 보이지가 않았다.
모든 시야를 가릴 정도로 거대한 화이트홀이었다.
“이렇게 큰 것도 있는 모양이지? 아마 이놈이 제일 큰 놈일 거 같아. 그렇지?”
현석이 고개를 저었다.
“더 큰 것도 있습니다.”
“뭐? 이거보다 더 큰 게 있다고? 어디에? 또 이런 곳에?”
현석이 고개를 저었다.
“사막에요.”
“사막?”
임형석이 궁금해 했지만 현석은 마력수가 든 물병을 내밀었다.
그것을 받아드는 임형석의 얼굴이 환해졌다. 그리고 그의 온몸에서 투기가 발산되기 시작했다.
“드디어 싸움이구나!”
임형석은 현석이 말릴 새도 없이 마력수를 벌컥벌컥 마시며 화이트홀에 뛰어들었다.
현석은 임형석과 거의 동시에 화이트홀로 들어갔다. 굳이 시간차를 둬서 위험을 감수할 이유가 없었으니까.
현석이 들어간 화이트홀의 위에 [마계 5지역]이라는 이름이 떠 있었다.
< 젤리웜 1 > 끝
ⓒ 김강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