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변화 1 >
칼슨은 피곤한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그는 소파에 기대 앉아 머리를 뒤로 젖히고는 눈을 감았다.
피로가 몰려와 금방이라도 잠들 것만 같았다.
하지만 잠들어선 안 된다. 아직 할 일이 너무 많았다. 그걸 모두 정리하기 전에는 쉴 수 없었다.
“한국 쪽은 어떻게 됐지?”
칼슨의 질문에 옆에 있던 비서가 얼른 대답했다.
“사신 길드가 완벽하게 무너졌습니다. 승냥이 떼들이 달려들어 아직도 뜯어먹고 있습니다.”
“허탈하군. 우리랑 선이 닿은 길드가 또 어디 있지?”
“두 군데 정도 있습니다만…… 별 의미는 없습니다. 새로운 길드를 만들어도 무방할 정도로 관계가 옅습니다.”
칼슨은 짜증이 확 일어났다.
“대체 추경훈 그 미친놈은 왜 그딴 짓을 벌인 거지?”
“당시의 그를 본 사람들의 증언에 의하면…… 제정신이 아니었다고 합니다.”
“당연히 제정신이 아니겠지. 제정신이었다면 작전을 펼치겠다고 100킬로가 넘게 이동한 놈이 다시 돌아와서 그딴 짓을 벌일 리가 없잖아!”
비서는 입을 다물었다. 사실 더 할 말이 없었다. 추경훈이 왜 그랬는지는 아직도 미스테리였다.
누군가의 사주를 받았다고 하기에는 그 행적이 너무 이상했다. 그는 자신의 모든 것, 심지어 목숨까지 던졌다.
한데 추경훈은 딱히 따로 남긴 것 자체가 없었다. 결혼도 하지 않았고, 오직 자신의 영달을 위해서만 살아왔다.
그런 사람은 자기 자신을 가장 소중하게 여긴다.
한데 목숨을 버려? 절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래서 더 미스테리고 말이다.
“추광열은? 그때 그놈도 같이 갔다고 하지 않았어?”
“갑자기 자기만 버려두고 가벼렸답니다. 그래서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고 합니다.”
말은 맞다. 하지만 칼슨은 추광열이 분명히 뭔가를 감추고 있다고 여겼다.
어쨌든 이래서야 추경훈을 영입한 것 자체가 최악의 선택이 된 셈이었다.
그를 영입함으로 인해 한국에 댔던 선이 끊어져 버린 거나 다름없으니 말이다.
칼슨은 잠시 고민했다.
안 그래도 한국 쪽은 이제 손을 떼려고 했다. 사신 길드 정도만 남기고 말이다.
사신 길드에 칼슨이 바란 것은 그리 큰 게 아니었다.
한국을 포기하지 않았다는 의미 정도가 다였다. 한데 그나마도 이제 무너져 버렸다.
“어쩔까요? 새 조직을 구성해 볼까요?”
칼슨은 고개를 저었다.
“됐다. 이제 한국 쪽에서는 당분간 손을 떼.”
“하면…….”
“인도와 중국 쪽으로 지원을 돌려. 그쪽부터 해결한 다음 한꺼번에 치고 들어가는 게 낫겠어.”
그 말을 들은 비서가 조심스럽게 자신의 의견을 말했다.
“아예 이참에 한국 쪽은 다 잘라내 버리시는 게 어떻습니까? 어차피 DM케미칼 쪽도 정리가 끝나지 않았습니까.”
하지만 칼슨은 단호히 고개를 저었다.
“한국 쪽에 아주 중요한 게 하나 남아있어.”
“중요한 거 말입니까?”
“그래. 그건 절대 포기할 수 없는 거지.”
비서는 그 포기할 수 없는 게 무엇이냐고 묻고 싶었지만 그러지 않았다. 왠지 물어선 안 될 것 같은 분위기가 물씬 풍겼기 때문이다.
“그럼 일단 그렇게 조치하겠습니다. 따로 지시하실 사항은 없으십니까?”
“추광열.”
칼슨의 말에 비서가 고개를 끄덕였다. 설명은 들을 필요도 없었다.
“좀 더 자세히 조사해 보겠습니다. 그쪽 방면의 전문가를 파견하겠습니다.”
“추광열의 뒤를 캐다가 의심스러운 게 나오면 즉시 보고해.”
“예. 그렇게 하겠습니다.”
칼슨은 아직 추광열 쪽 일을 포기하지 않았다. 한국은 잠시 포기하겠지만 아무리 그렇다 하더라도 이건 마무리 할 생각이었다.
대충 한국 쪽 일을 정리한 칼슨은 굳은 표정으로 물었다.
“미카엘은? 아직도 연락이 없나?”
“예. 없습니다.”
“대체 갑자기 어딜 간 거야? 찾아보긴 했어?”
“예. 아직도 찾고 있습니다. 하지만 아시다시피…….”
칼슨이 인상을 구기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놈이 마음먹고 숨으면 절대 못 찾지. 알았어. 미카엘 쪽은 그 정도로 마무리 해.”
“예. 알겠습니다.”
“이번에 킹 등급 던전에 도전할 팀은 정해졌나?”
“예. 라이언이 도와주기로 했습니다.”
“라이언?”
칼슨이 눈살을 찌푸렸다.
라이언은 세계 제일의 플레이어다. 하지만 아직 칼슨의 영향력 밖에 있는 놈이었다.
“그놈은 영 마음에 안 드는데…….”
“그래도 가장 확실한 카드입니다. 지속적으로 접촉하면 결국 우리 쪽으로 오지 않겠습니까?”
결국 칼슨도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그는 비서가 내민 명단을 쭉 확인했다. 그리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대로 진행해.”
비서가 인사하고 물러갔다.
칼슨은 여전히 소파에 등을 기댄 채였다.
“아직 킹 등급도 제대로 클리어하지 못해서 허우적대고 있으니…….”
칼슨은 답답해졌다. 그러다보니 마음이 조급해졌다.
그는 몸을 일으키며 고개를 저었다.
“조급할 필요는 없지. 아직 시간은 많으니까.”
칼슨은 억지로 마음을 차분히 가라앉혔다.
“차라리 한국 놈들이 그걸 빨리 발견했으면 좋겠군.”
한국에서 손을 뗀다고 해도 길드를 만들거나 활동을 크게 하지 않겠다는 거지 정말 관계를 딱 끊어버리는 건 아니었다.
한국의 정치권이나 던전관리센터 쪽에는 꾸준히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뇌물도 상당히 많이 제공했고 말이다.
아마 그것이 발견되면 그 정보가 바로 이쪽으로 날아올 것이다.
그 이후에 얼마든지 처리할 수 있다.
이쪽에는 그 누구보다 강력한 힘이 있으니까.
생각을 긍정적으로 바꾸고 나니 조금 표정이 좋아졌다. 칼슨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책상으로 향했다.
“그럼 일을 마무리 해볼까?”
* * *
현석은 퀸급 던전 생성지역에서 나왔다.
팀 메인퀘스트는 첫 번째 던전을 완벽하게 클리어했다. 나머지 던전을 클리어 하라고 지시하고는 나온 것이다.
현석이 순서를 정해준 이유가 있었다.
난이도 순으로 도전하게 한 것이다. 첫 번째 던전을 클리어 했다고 바로 다섯 번째 던전으로 들어가면 낭패를 면치 못할 것이다.
그 사이에는 메울 수 없는 격차가 있었다.
그리고 그 순서대로 클리어하면 끝없이 던전 도전이 가능했다.
이곳 던전 생성지역의 던전은 다시 생겨나는 주기가 짧지 않았다. 하지만 그 주기를 줄일 수 있는 방법이 있었다.
그게 바로 저 순서를 지키는 것이다.
저 순서대로 던전을 없애면 다시 첫 번째 던전이 생기고, 그 뒤로 던전을 클리어 할 때마다 다음 던전이 생겨난다.
그런 식으로 무한하게 던전 클리어를 반복할 수 있는 것이다.
아마 다섯 번 정도 반복하면 조금 익숙해질 것이다. 그 전에 긴장을 놓으면 크게 다칠 수도 있다.
그에 대해서는 류지혜에게 몇 번이나 반복해서 강조해 두었다.
류지혜는 역시 뛰어난 리더였다. 그녀는 무리 없이 팀을 이끌어 더욱 성장시킬 것이다.
조만간 팀 메인퀘스트가 세계 제일의 팀이 될 거라는 사실은 의심할 여지가 없었다.
현석은 동굴에서 나와 근처를 위장했다.
당분간 발견될 일이 없는 곳이긴 했지만 그래도 혹시 모르니 조심해서 나쁠 건 없었다.
이곳은 무인도였다. 무인도에 있는 숲에 감춰진 동굴을 누가 발견할 수 있겠는가.
하지만 그걸 누군가는 발견했고, 그래서 현석이 회귀 전에 이런 던전 생성지역이 공개된 것 아니겠는가.
이곳이 발견된 건 지금으로부터 3년쯤 후다. 하지만 공개된 건 발견하고 나서 10년 후였다.
그리고 이번에는 아마 이 던전을 다시 발견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이미 이 무인도는 현석의 것이 되었으니까.
이 포인트는 다른 어떤 것들보다 중요했다.
다섯 개의 블랙홀 때문이 아니었다. 아직 일행에게 절대 접근하지 말라고 신신당부한 두 개의 화이트홀 때문이었다.
그리고 한 개의 투명 던전은 덤이고 말이다.
현석은 투명 던전에 붙어있던 이름을 떠올렸다.
[제국전쟁의 중심지]
제국전쟁의 중심지. 딱 이름에 어울리는 곳이었다.
저기는 회귀 전에 들어갔다가 바로 나와버린 던전이었다. 그리고 다시는 도전하지 않겠다고 다짐했던 곳이다.
하지만 그건 회귀 전의 일이고 이번에는 충분히 준비해서 저곳을 완벽하게 클리어할 계획이었다.
물론 준비하는 데에도, 또 클리어하는 데에도 시간이 엄청나게 오래 걸리겠지만 말이다.
저곳에 들어가면 곧장 달려드는 무수한 병사들을 상대해야 한다.
한데 그 병사 하나하나의 실력이 엄청나다. 당시에야 심안이 없으니 병사의 레벨을 제대로 측정할 수는 없었지만 다들 최소 120은 넘는 듯했다.
그래야 그 정도 강함이 말이 되니까.
레벨 120이 넘는 병사 수천 명이 달려든다고 생각하면 얼마나 아찔한가.
그때 약간만 판단이 늦었거나 행동이 늦었어도 아마 들어갔던 플레이어가 전멸했을 것이다.
판단을 빨리 했는데도 절반이 나오지 못하고 죽었으니까.
현석은 왠지 그 투명던전을 반드시 클리어 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건 운명같은 예감이었다.
‘어쩌면…… 황궁에 갈 수 있게 될지도 모르지.’
지금까지 현석이 운명이라는 예감이 들었던 모든 것이 황궁과 관계있었으니까.
그런 생각을 하며 던전에서 나온 현석은 일단 양동욱을 찾아갔다.
양동욱은 요즘 엄청나게 바빴다. 하는 일이 점점 늘어나 몸이 열 개라도 부족하다고 투덜거리곤 했다.
물론 말은 그렇게 하지만 표정이나 눈빛을 보면 그렇게 행복해 보일 수가 없었다.
무인도에서 배를 타고 나가 육지의 선착장에 도착하자, 운전수가 기다렸다는 듯이 달려와 현석을 맞이했다.
현석은 그런 대접을 받는 것이 제법 익숙해졌다.
최고급 세단에 몸을 실은 현석은 양동욱에게 달려가는 내내 편안히 쉬며 마력 컨트롤을 수련했다.
* * *
“오셨습니까? 잠깐만 기다려 주십시오. 이것만 확인하겠습니다.”
현석이 고개를 끄덕이며 소파에 앉았다.
양동욱은 그런 현석을 바라보며 어색하게 웃었다.
“보고할 내용이라서 마지막 점검 중입니다.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현석은 그런 건 별로 신경 쓰지 않는 스타일이었지만, 굳이 그렇게 하겠다는데 말릴 사람도 아니었다.
사실 양동욱도 현석의 스타일을 다 알지만 일부러 이런 식으로 대했다. 긴장을 잃기 않기 위함이기도 했고, 현석이 자신의 보스라는 걸 잊고 설치지 않기 위함이기도 했다.
굳이 하지 않아도 될 변명을 한 양동욱은 최대한 빨리 일을 마무리 하고는 현석 앞에 앉았다.
“렉스턴 에너지가 한국에서 발을 빼고 있습니다.”
그 말에 현석이 눈을 빛냈다.
“대신 그 여력을 인도와 중국에 쏟고 있습니다.”
현석은 생각에 잠겼다. 회귀 전에는 과연 어땠었는지를 떠올려본 것이다.
“사업을 접은 건 아니겠지?”
“그럴 리가요. 사업은 오히려 더 확장했습니다. 성장 가능성이 충분한 것들이니까요. 하지만 그 외에 플레이어와 관계된 모든 것을 철수하는 중입니다.”
“사신 길드 말고도 선이 닿은 길드가 두 군데쯤 더 있을 텐데?”
현석은 예전 K나이츠 길드를 정리하는 와중에 그 사실을 알게 되었다. 당연히 그걸 양동욱에게 얘기했고, 양동욱도 신중하게 그들을 감시해왔다.
“제일 먼저 그들과의 선부터 끊더군요.”
현석이 눈을 빛냈다. 그 얘기는 정말로 렉스턴 에너지가 한국에서 철수한다는 뜻이었다.
‘한국에서 철수하고 인도와 중국으로 간다고? 거기에 뭐가 있는 거지?’
렉스턴 에너지가 인도와 중국에 관심을 가진다는 건 거기에 분명히 뭔가가 있다는 뜻이었다.
“인도와 중국에 뭐가 있는지 알아볼 수 있나?”
현석의 물음에 양동욱이 씨익 웃었다. 이제 자신은 예전과는 다르다는 듯한 미소였다.
“당연합니다. 저, 이제 세계적으로 노는 사람입니다. 으하하하!”
크게 웃는 양동욱의 뇌리에 블러드퀸과 임형석의 모습이 스쳐 지나갔다.
< 변화 1 > 끝
ⓒ 김강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