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금화 2 >
“좋아. 난 이 금화를 걸지. 그럼 넌?”
현석은 망설이지 않고 지난번에 추광열이 잃었던 팔찌를 꺼냈다. 네 번째 증표였다.
그걸 본 추광열의 눈이 번득였다. 오점을 회수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다. 그걸 놓칠 추광열이 아니었다.
“좋아. 그럼 그림? 숫자?”
현석이 씨익 웃으며 추광열을 쳐다봤다. 그걸 고르는 게 의미가 있을까?
하지만 굳이 그런 말을 해서 추광열에게 경각심을 심어줄 필요는 없었다.
“숫자.”
현석은 아무렇게나 말하고는 동전에 집중했다. 동전의 설명을 읽은 순간, 추광열이 왜 이 게임을 선택했는지 알아차렸다.
추광열은 다른 플레이어에 비해 마력 컨트롤 능력이 훨씬 뛰어나다.
금화에 섞인 켈리움은 마력 전도율이 엄청나게 높은 금속이다. 그렇기에 당연히 마력에 민감하게 반응한다.
더구나 특별한 패턴으로 새겨져 있으니 마력을 더욱 받아들이기 쉬운 형태가 되었을 것이다.
‘즉, 마력만 제대로 컨트롤하면 허공에서 자유자재로 움직일 수 있다는 뜻이지.’
추광열은 씨익 웃으며 허공으로 동전을 높이 튕겨 올렸다.
금화가 빠르게 팽그르르 돌면서 높이 치솟아 올랐다. 그리고 정점에 올랐을 때, 회전력이 줄어들면서 빠르게 아래로 내려왔다.
그때부터 추광열은 마력을 움직였다. 아니, 그러려고 했다.
“응?”
추광열은 너무 당황해서 자신도 모르게 소리를 내고 말았다. 마력이 제대로 컨트롤 되지 않았다. 마치 뭔가에 막히기라도 한 것처럼 동전이 말을 듣지 않은 것이다.
툭!
그러는 사이 동전이 바닥에 떨어졌다.
숫자 17이 위로 올라가 있었다.
추광열은 인상을 쓰며 마력을 움직여봤다. 뭔가 거북한 느낌이 들며 마력이 힘겹게 움직였다. 그러다가 막힌 둑이 무너지기하도 하듯 갑자기 마력이 콸콸 흘러갔다.
‘이런 젠장!’
추광열의 얼굴이 사정없이 일그러졌다. 무슨 문제인지는 몰라도 일시적으로 마력 흐름이 막혀 있었다.
어쩌면 컨디션 문제일 수도 있었고, 그것도 아니면 몸에 무슨 이상이 있었는지도 모른다.
아니면 환경적인 요인이 있었을지도 모른다.
어쨌든 중요한 건 그게 아니었다.
“이건 고맙게 받지.”
추광열은 바닥에 떨어진 동전을 집어 드는 현석을 무시무시한 눈으로 노려봤다.
이대로 끝낼 수는 없었다.
“기다려.”
동전을 주워 주머니에 넣는 척 하며 아공간에 던져 넣은 현석이 추광열을 쳐다봤다.
또 무슨 용건이 있느냐는 듯한 표정으로 말이다.
추광열이 막 새로운 내기를 걸려는 찰나, 추경훈이 나서서 그의 어깨를 잡았다.
“형님, 이러실 시간 없습니다.”
추경훈의 말에 그제야 정신을 차린 추광열이 잠시 망설이며 이를 악물었다.
하지만 추경훈의 말이 옳다는 걸 너무나 잘 알기에 이쯤에서 내기를 접을 수밖에 없었다.
“오늘은 여기까지만 하지. 하지만 조만간 내가 찾아갈 테니 기다려. 그때는 아주 탈탈 털어주지.”
추광열이 이를 갈며 현석을 노려봤다.
하지만 현석은 추광열 쪽은 아예 쳐다보지도 않았다. 현석의 시선은 추경훈에게 꽂혀 있었다.
“왜? 나한테 볼일이 남았나? 또 사기라도 치게?”
추경훈도 사실 현석에게 금전적이나 육체적 손해를 본 게 없기에 그저 짜증나고 괘씸하기만 할뿐 딱히 복수를 해야겠다는 생각을 한 건 아니었다.
그저 창고를 돌아다니며 안에 있는 물건을 골라서 살 수 있게 해준 것밖에 없었으니까.
사실 방식이야 어쨌든 추경훈이 나서서 판매한 것이기에 그건 나름대로 그의 성과이기도 했다.
더구나 오랫동안 방치되고 있던 재료들을 잔뜩 팔아치웠기 때문에 당시 관리센터에서 제법 괜찮은 평가를 얻기도 했다.
하지만 그래도 당한 건 당한 것이기에 기분이 좋지는 않았다. 다시 그런 어설픈 사기에 당할 생각도 없었고 말이다.
“제안할 게 하나 있어서.”
“제안?”
추경훈이 피식 웃었다.
“내가 왜 네 제안을 들어야 하지? 아니, 그보다 너 내 앞에 다시 나타날 때 각오는 하고 온 건가?”
현석은 추경훈에게 한 발 다가갔다.
그리고 그 순간 추경훈은 머리가 어질어질해졌다. 아찔한 향기가 콧속으로 빨려 들어오는 듯했다.
‘이게…… 뭐지?’
순간 비틀거릴 뻔했던 추경훈은 억지로 균형을 잡았다. 그리고 정신을 차렸다.
추경훈은 고개를 휘휘 저었다. 그러자 정신이 좀 더 또렷해졌다.
“그래서 무슨 제안을 하겠다는 거지?”
추경훈의 말에 지금까지 옆에 서서 지켜보던 추광열이 깜짝 놀라 그를 바라봤다.
‘이놈이 갑자기 왜 이래?’
이렇게 갑작스러운 태도 변화라니. 추광열은 반사적으로 현석을 바라봤다. 현석이 뭔가 이상한 짓을 하지 않았다면 추경훈이 갑자기 이럴 리 없었다.
“너…… 무슨 짓을 한 거야?”
현석은 피식 웃으며 추광열을 쳐다봤다.
“대화 중인 거 안 보이나? 나랑 얘기하고 싶으면 순서를 기다려.”
그러자 옆에 있던 추경훈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추광열을 바라보며 말했다.
“맞습니다, 형님. 조금만 기다려 주시죠.”
추광열은 어이가 없어 멍하니 추경훈과 현석을 번갈아 바라봤다.
더 끼고 싶지도 않아졌다. 그는 아예 코웃음을 치며 뒤로 몇 발 물러났다. 하고 싶은 대로 하라는 듯이 말이다.
애초에 추경훈에게 큰 애정이 있는 것도 아니었으니 이러다가 무슨 꼴을 당하건 별로 상관도 없었다.
추광열의 시선은 다시 현석에게로 향했다. 그의 머릿속은, 과연 어떤 게임을 골라야 자신이 내기에서 이길 수 있을지로 꽉 채워졌다.
그렇게 잠시 딴 생각을 하고 있는데 추경훈이 갑자기 돌아서서 50명의 부하들에게 버스에 타라고 명령을 내렸다.
추광열은 퍼뜩 정신을 차렸다. 그는 현석을 아쉬운 눈으로 한 번 보고는 버스로 향했다.
한데 그런 그를 추경훈이 막아섰다.
“형님, 전 서울로 돌아갑니다.”
“뭐? 그게 무슨 소리야?”
추광열은 어처구니가 없었다. 지금 이들이 움직이는 건 절반 이상이 계약 때문이었다.
그것도 사신 길드와 맺은 계약이 아니라 미국의 렉스턴 에너지와 맺은 계약이었다.
사신 길드는 조금도 안 무섭지만, 렉스턴 에너지는 그렇지 않았다.
그곳은 심지어 추광열뿐 아니라 세계 제일의 플레이어인 라이언조차도 무서워 하는 곳이었다.
한데 그런 렉스턴 에너지와의 계약을 무시하겠다니. 지금 제정신이란 말인가.
“너 대체 왜 이래? 정신 안 차릴 거야?”
추경훈이 피식 웃었다.
“저 제정신 맞습니다. 전 서울로 가서 사신 길드를 박살 낼 겁니다. 우릴 이 지경으로 밀어 넣은 것들에게 복수라도 한 칼 날려야 하지 않겠습니까?”
“뭐?”
추광열은 순간 온몸에 소름이 쫙 돋았다. 그는 고개를 휙 돌려 현석을 노려봤다.
그가 그러는 사이 추경훈이 버스에 올라탔다. 추광열이 급히 잡으려 했지만 그럴 수가 없었다.
어느새 현석이 그의 앞을 가로막은 채 손가락 사이에 금화를 끼워 이리저리 돌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 금화를 본 순간 추경훈의 평정심이 깨졌다.
그리고 버스가 출발했다.
이제 진짜 버스는 떠났다. 추광열은 차분히 마음을 가라앉히며 현석을 노려봤다.
계약을 이행하지 못하게 되었으니 아마 좋은 결말을 맞지는 못할 것이다.
아니, 그럴싸한 이유를 만들면 된다.
어차피 자신만 따로 떨어져 나왔다. 혼자 천외천의 수뇌부를 기습하는 건 무모한 짓이니 작전을 다시 세워야 한다.
‘아니면 지시를 새로 받거나.’
추경훈만 버리면 모든 것이 순조롭다. 물론 약간의 제재는 받겠지만 말이다.
“그럼…… 이제 우리 사이의 문제를 해결할 일만 남았군.”
추광열은 그렇게 중얼거리며 현석을 노려봤다.
“너…… 대체 뭐야?”
현석은 그런 추광열을 보며 씨익 웃었다. 왠지 추광열이 커다란 선물보따리를 들고 다니는 흰 수염 할아버지처럼 보였다.
* * *
사신 길드의 마스터인 최종욱은 이제나 저제나 하며 추경훈의 연락만 기다리고 있었다.
이번 기습은 실패할 수가 없었다. 하지만 세상 모든 일이 그렇듯 100% 장담해선 안 된다.
만일 기습하는 추경훈 일당에게 벼락이라도 떨어져 다 죽어 버리면 아무리 완벽한 작전을 세웠어도 실패하는 것 아닌가.
물론 그럴 리 없겠지만 말이다.
어쨌든 최종욱은 자신의 사무실에서 초조한 표정으로 서성이고 있었다.
던전관리센터 중심에서 길드와 기업 중심으로 플레이어 세상이 개편되면서 참 많은 것이 달라졌다.
그리고 그 달라진 점을 이용해 최종욱은 여기까지 올라왔다.
너무 급격히 변했기 때문에 사실 길드들은 대부분 질서나 규칙이 없었다.
가끔 중소길드 사이에서는 칼부림도 심심치 않게 난다고 들었다.
물론 대놓고 하진 않지만 목격자도 제법 많고, 소문도 많았다.
최종욱은 그런 상황 자체가 싫었다. 지금까지는 말이다.
그는 렉스턴 에너지라는 줄을 잡아서 그리 치열하지 않게 여기까지 올라왔다.
그러니 막무가내로 경우 없이 힘만 앞세워 모든 것을 얻으려 드는 야만적인 놈들이 마음에 들 리 없었다.
하지만 역시 그건 남이 했을 때의 얘기고, 내가 하면 로맨스인 법이다.
이번 천외천 길드 기습이 딱 그랬다.
아마 예전 같으면 이런 식으로 일을 처리하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기습을 결정했다.
딱 한 번 눈 감으면 앞으로 얼마나 승승장구 할 수 있을지가 훤히 보였기 때문이다.
꽝!
최종욱은 갑자기 들려온 굉음에 깜짝 놀라 고개를 번쩍 들었다. 그리고 서둘러 창가로 다가가 밖을 확인했다.
“응? 저놈들 대체 뭐지?”
사신 길드 빌딩 근처에 왠지 사람들이 많이 모인 것 같았다. 척 보기에도 플레이어들이었다.
그리고 눈에 익은 놈들이 몇 보였다.
최근 사신 길드를 견제하던 중소 길드와 삼족오 길드 소속의 플레이어들이었다.
최종욱은 갑자기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온몸에 소름이 쫙 돋으며 눈동자가 정신없이 흔들렸다.
그리고 그 순간 사무실 문이 산산조각 났다.
꽈앙!
사방으로 비산하는 문의 잔해들 틈으로 기괴하게 일그러진 웃음을 머금고 있는 추경훈의 얼굴이 보였다.
최종욱은 더 생각할 것도 없이 바닥을 발로 찍었다.
쿵!
그가 서 있던 자리가 덜컹 열렸다. 최종욱은 아래로 쑥 내려갔다.
순식간에 3층을 내려간 최종욱은 다급히 문을 열고 복도로 나갔다.
이미 사신 길드 건물 내부는 아수라장으로 변해 있었다.
광기에 물든 50인의 플레이어들이 사방에서 날뛰는 중이었다.
물론 사신 길드의 저력은 고작 이 정도에 무너질 만큼 얕지 않았다.
하지만 그 순간 밖에서 눈치만 보고 있던 플레이어들이 우르르 안으로 몰려들어왔다.
최종욱은 창문을 통해 그 상황을 고스란히 지켜보고는 허탈하게 웃었다.
“하여간…… 규칙도 질서도 경우도 없는 미친 것들이 날뛰는 세상에 무슨 미래가 있겠어.”
딱 한 번 눈을 감았는데, 그것이 비수가 되어 돌아왔다.
할 말이 없었다. 최종욱은 가만히 서서 자신의 무기를 꺼냈다.
장비도 착용하지 않고 정장을 입고 있었기에 제대로 싸울 상태가 아니었다.
하지만 그래도 발버둥은 쳐봐야 하지 않겠는가.
최종욱의 뒤로 추경훈이 나타났다. 추경훈은 다섯 플레이어를 이끌고 있었는데, 다들 피로 목욕이라도 한 듯 온통 시뻘겠다.
그걸 본 최종욱이 혀를 찼다.
“쯧쯧. 이래서야 플레이어랑 깡패랑 뭐가 달라?”
물론 추경훈은 그런 말에 대꾸할 상태가 아니었다. 이미 피를 본 시점에서 눈이 돌아가 날뛰고 있었다.
최종욱은 자신에게 달려드는 추경훈을 보며 뭔가 좀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거…… 할 만한데?’
생각보다 강하지 않았다. 그나마 다섯 플레이어가 함께 달려들어서 좀 곤란했지만 딱딱 맞아 떨어지는 정교한 협공도 아니었기에 그럭저럭 버틸 수 있었다.
그래서 더 안타까웠다.
‘장비를 제대로 착용했으면 이길 수도 있을 것 같은데…….’
무기만으로 저들을 상대하는 건 아무리 상대의 상태가 정상이 아니라 해도 그리 쉽지만은 않았다.
싸움이 길어지며 최종욱의 상황이 점점 악화되었다.
물론 플레이어들도 하나둘 목숨을 잃어갔다.
최종욱은 마지막까지 남은 추경훈이 광기에 젖어 침을 질질 흘리며 달려드는 걸 보며 자신도 여기까지라는 생각이 들었다.
짙은 절망감이 온몸을 휘감았다.
여기까지 쌓아온 모든 것이 마치 모래성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날 사신 길드가 정체불명 괴한들의 테러를 받았다는 기사가 세상을 장식했다.
그리고 그렇게 무너진 사신 길드를 중심으로 수많은 이권 조직들이 분주히 움직였다.
그리고 그 모든 상황을 만들어낸 양동욱은 한 발 떨어진 곳에서 가장 중요한 알맹이들에 눈독을 들이고 있었다.
< 금화 2 > 끝
ⓒ 김강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