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두눈 뜨고 레벨업-123화 (123/326)

< 던전 클리어 >

필립은 모든 힘을 폭발시켜 전장을 빠져나왔다. 그리고 잠깐 멈추고 호흡을 조절했다.

일단 잠깐 숨 돌릴 틈이 필요했다. 그렇게 다시 힘을 모아야 무사히 도망칠 수 있을 테니까.

그렇게 한 차례 숨을 고르고 다시 발에 마력을 모아 폭발시키려는 순간, 누군가 그의 목덜미를 콱 움켜쥐었다.

“컥!”

필립은 발에 모았던 마력이 훅 뿜어져 나가는 걸 느꼈다. 그의 몸이 허공에 붕 떴다.

하지만 원하는 방향으로 가진 못했다. 그렇게 얻은 추진력으로 허공을 날아 마수들이 가장 많이 밀집된 지역으로 향했다.

“이런 미친!”

필립의 표정이 구겨졌다. 그는 바닥에 착지함과 동시에 사방으로 검을 휘둘렀다.

콰가가가가가각!

핵이 부서진 마수들이 속절없이 무너졌다. 하지만 그건 근처에 있던 몇몇 마수들일 뿐이었다.

아직 이곳엔 마수들이 무진장 많았다.

필립은 이를 갈았다.

‘대체 어떤 놈이!’

하지만 그놈이 누군지 찾을 시간도 여유도 없었다. 아니, 그런 생각을 할 틈도 없었다.

이제 자잘한 마수들은 하나도 남지 않았다. 다들 강한 놈들만 남았기 때문에 상대하기가 너무나 버거웠다.

게다가 이젠 동료들도 없다.

필립의 얼굴이 점점 암담한 절망으로 물들어갔다.

그리고 그 순간 레드드래곤 길드가 나타났다.

푸슝! 푸슝!

콰가가가각!

“대열 유지해! 한 놈이라도 죽으면 가만 안 둔다!”

한중현의 외침과 함께 마수들이 말 그대로 파도에 휩쓸리는 모래성처럼 쓸려 나갔다.

레드드래곤 길드가 강한 것도 있지만, 난입하기 전에 충분한 계획을 세우고, 대열을 유지한 채 기습에 가까운 공격을 했기에 그 효과가 극대화 된 것이다.

하지만 이들만으로는 절대 이 상황을 해결할 수 없었다. 이걸 해결하려면 피닉스의 발을 묶어야만 했다.

정신없이 마수들을 향해 단검을 휘두르는 와중에도 필립은 피닉스 쪽을 힐끗 쳐다봤다. 그리고 그의 눈이 경악으로 물들었다.

단 한 명이 피닉스를 붙잡고 있었다. 아니, 그냥 발만 묶고 있는 정도가 아니라 피닉스를 상대로 압도적인 힘을 보여주고 있었다.

‘피닉스가 저렇게 약한 마수였나?’

필립의 뇌리에 순간적으로 그런 생각이 들 정도로 피닉스가 제대로 힘도 못 쓴 채 쭈욱 밀려나고 있었다.

어느새 피닉스가 베이스캠프에서 떨어져 나갔다. 그러자 이곳에 있는 마수들의 힘이 확연히 약해졌다.

피닉스 주변에 있는 불의 마수들은 훨씬 강한 힘을 낸다. 일종의 패시브 버프였다.

하지만 필립은 별로 그 효과를 누리지 못했다.

체력이 바닥났다. 그리고 주변에 모여든 마수의 수가 오히려 더 늘어났다.

“으아아아아!”

필립은 괴성에 가까운 기합을 내지르며 사방을 휘저었다. 마수들이 마구 부서져 나갔다. 진짜 생명력까지 끌어다가 쓰는 기분이었다.

그런데도 마수의 수는 줄어들지 않고 오히려 늘어나고 있었다.

‘대체 이게 뭐야!’

지원군이 도착했는데 왜 더 힘들어진단 말인가. 게다가 피닉스가 사라지면서 마수들의 힘이 확연히 줄어들었는데 말이다.

주변을 급히 확인한 필립은 원인을 알 수 있었다. 레드드래곤 길드에서 마수들을 적극적으로 사냥하지 않고 있었다.

그들은 자신들의 안전을 최우선으로 생각해 외부에서부터 차근차근 마수들을 처리하고 있었다.

당연히 그렇게 밀린 마수들이 필립에게 몰려들었다. 마치 마수를 이쪽으로 모는 듯한 효과가 자연스럽게 생긴 것이다.

“그만 둬! 여기도 사람 있다고!”

필립의 외침이 레드드래곤 길드에 닿았다. 그들을 가장 앞에서 이끌던 한중현이 필립을 힐끗 쳐다봤다.

필립은 그 순간 일이 잘못되었다는 걸 깨달았다. 한중현의 눈빛이 너무나 차가웠기 때문이다.

한중현은 필립에게서 고개를 돌리고 자기 할일에 다시 집중했다.

필립의 얼굴에 절망이 어렸다.

그렇게 베이스캠프 마수 정리가 끝났다. 그리고 필립의 목숨도 끝났다.

* * *

현석은 피닉스를 끌고 일행과 멀리 떨어졌다. 잡는 건 금방이지만, 피닉스가 소멸하는 순간 터지는 화염 충격파 때문에 일행에 피해를 줄 수도 있기에 거리를 둔 것이다.

고작 하루 만에 나타난 피닉스는 역시나 별 거 없었다. 게다가 그롬 길드와 치열하게 싸웠기 때문에 마력과 열기도 많이 줄어든 상태였다.

고작 그 정도 힘밖에 남지 않은 3등급 피닉스가 현석을 당해낼 수 있을 리 없다.

현석은 거리가 떨어지자마자 피닉스를 향해 달려들었다.

굳이 바람을 이용해 불을 날려 버릴 필요도 없었다. 화염이 줄어든 피닉스의 핵이 너무나도 명확하게 느껴졌다.

현석의 검에 서리가 내려 앉았다. 냉기 속성이 발휘된 것이다. 현석은 거기에 더 많은 마력을 불어 넣었다.

마력을 잘 조절해 냉기를 더욱 크게 부풀렸다. 현석의 검이 새하얀 빛을 뿜어내기 시작했다. 냉기가 극도로 응축되어 빛을 산란시키기 시작한 것이다.

그렇게 냉기로 똘똘 뭉친 진마검을 든 현석은 피닉스의 불꽃 안으로 몸을 던졌다.

피닉스의 불꽃이 현석의 몸을 덮쳤다가 마치 바위를 만난 냇물처럼 양옆으로 갈라져 흘러지나갔다.

화염 피해를 입히긴 했지만 정면으로 불꽃을 맞고 있다는 걸 생각하면 없는 거나 다름없는 피해였다.

현석은 그렇게 몇 걸음 안으로 파고든 다음 검을 내질렀다.

치이이익!

쩌엉!

주변 열기가 순식간에 타올랐다 사그라졌다. 그리고 검끝이 정확히 핵의 중심을 찔렀다.

핵이 순간적으로 새하얗게 얼어붙었다가 주변 열기로 인해 산산이 부서졌다.

쨍!

마치 유리 깨지는 듯한 소리가 났다.

화르르륵!

피닉스가 마지막 불꽃을 피워올린 후 그대로 사라졌다. 소멸한 것이다.

이제 이 던전 안 어딘가에 있는 불꽃에서 다시 살아날 것이다.

던전의 코어를 그대로 내버려 둔다면 말이다.

현석은 부서진 핵의 잔해를 뒤적였다. 작은 마정석 하나가 조각들 사이에 섞여 있었다.

어제 얻은 것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작았지만 그래도 담긴 마력은 엄청난 고농축 마정석이었다.

아마 마력 측정을 해보면 1만은 가뿐히 넘어갈 것이다. 그 정도로 귀한 마정석이었다.

그러니 피닉스의 던전이 그렇게 중요한 취급을 받는 것이다. 피닉스로부터 얻은 마정석은 다른 마수의 마정석에 비해 차원이 다를 정도로 거대한 마력이 잔뜩 농축되어 있었다.

마정석을 집어든 현석은 바닥에 흩어져 있는 불꽃들을 향해 검을 몇 차례 휘둘렀다.

후웅! 후웅! 후웅!

바람이 일어나 불꽃을 꺼 버렸다. 이 불꽃은 다 정리하는 게 좋다.

굳이 피닉스가 빨리 부활하게 할 필요는 없지 않은가.

정리를 모두 마친 현석은 베이스캠프 쪽으로 천천히 걸어갔다.

현석이 베이스캠프에 도착했을 때는 그쪽도 이미 정리가 다 끝난 뒤였다.

죽은 사람들은 시체도 못 남겼다. 불꽃으로 이루어진 마수에게 당해 죽었으니 재밖에 남지 않는 게 당연했다.

사람은 그렇게 잿더미가 되었지만 그들이 착용하고 있던 장비는 제법 멀쩡한 게 많았다.

그렇게 쓸 만한 장비들도 따로 먼지를 털어 한쪽에 쌓아뒀다.

이제 코어만 찾아 부수면 이번 일정은 끝난다.

현석은 베이스캠프에 들어가자마자 한중현과 오명국을 찾았다.

오래 찾을 필요도 없었다. 그들이 알아서 현석 쪽으로 달려왔으니까.

“피닉스는 어떻게 됐습니까? 하긴, 물어보나 마나군요.”

“정말 대단하십니다.”

두 사람의 말에 현석은 고개를 돌려 아티팩트가 쌓인 곳을 쳐다봤다.

“저 장비를 어떻게 할까 고민 중입니다. 그냥 놓고 가자니 아깝고, 갖고 나가자니 밖에 있는 그롬 길드원들에게 반납해야 할 것 같고…….”

“저것도 내가 알아서 처리하죠. 우선 코어부터 찾아야 합니다. 시간이 많지 않습니다.”

한중현과 오명국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 던전의 마수는 빠르게 리젠되는 모양이었다.

현석이 그런 걸 어떻게 알고 있느냐고 한 번쯤 의문을 가질 법도 한데, 두 사람은 그런 의문은 아예 떠올리지도 않았다.

두 사람은 이제 반쯤 맹목적으로 현석을 따르고 있었다.

“코어도 출구처럼 어려운 곳에 있으면 어쩌죠?”

“그럴 일은 없을 겁니다. 다만, 코어를 부수는 게 쉽지 않을 겁니다. 일단 찾으면 섣불리 부수려 하지 말고 모두 그쪽으로 모으는 걸로 하죠.”

“알겠습니다.”

한중현과 오명국은 서둘러 길드원들에게 지시를 내렸다. 다들 사방으로 흩어져 뛰어갔다.

모든 마수를 정리했으니 홀로 다녀도 위험할 일은 없었다.

“두 분은 안 가십니까?”

“예? 아, 예. 가, 가야죠.”

한중현과 오명국은 잠시 당황했지만 이내 고개를 끄덕이고는 각자 다른 방향으로 흩어졌다.

이제 베이스 캠프에는 현석 혼자 남았다. 현석은 아티팩트가 쌓인 곳으로 가서 컨테이너 박스를 꺼냈다. 그리고 그 안에 아티팩트를 모조리 담았다.

“그럼…… 코어를 찾아볼까?”

현석은 멀리 가지 않았다. 코어는 바로 근처에 있었다. 이곳 베이스캠프 바닥이 바로 코어였다.

아마 다들 사고의 틀에 갇혀서 설마 바닥이 코어일 거라고는 생각도 못했을 것이다.

현석은 베이스캠프 중앙에 있는 코어로 향했다. 일단 확인이 필요했다. 역시 코어가 맞다. 이젠 흩어진 일행을 다시 모을 차례였다.

“찾았다!”

현석은 자신의 외침을 마력에 실었다. 그의 목소리가 던전 전역에 울려 퍼졌다.

“베이스캠프로 모여!”

이렇게 마력에 목소리를 담아 던전 전역에 보내는 건, 지금으로부터 10년 쯤 후에는 흔히 쓰이는 기술 중 하나였다.

이렇게 규모가 큰 던전에서 코어를 찾을 때 써먹기 위해 개발한 기술로, 플레이어에게 가장 유용한 기술 열 가지 중 하나였다.

잠시 후, 다들 놀란 얼굴로 헐레벌떡 달려왔다.

“코어를 찾았다고요? 그것도 베이스캠프에서?”

다들 믿기지 않는다는 듯 흔들리는 눈빛으로 현석을 바라봤다.

만일 이렇게 모였는데, 아니라고 말하면 얼마나 허탈하겠는가.

다행히 현석은 그러지 않았다. 그저 손가락으로 바닥을 가리켰을 뿐이었다.

모두의 시선이 바닥으로 향했다. 그리고 묘한 눈으로 바닥을 살피더니 다들 허탈한 표정을 지었다.

“설마 코어가 바닥에 있을 줄이야.”

“이런 경우도 있군요.”

역시 던전에 대해서는 아직 모르는 게 너무 많다.

다들 이제 어떻게 할 거냐는 듯 현석을 바라봤다. 그러다가 한중현은 문득 그 많던 아티팩트들이 몽땅 사라졌다는 걸 알아차렸다.

“아티팩트가!”

한중현은 놀란 눈으로 아티팩트가 있던 자리와 현석을 번갈아 바라봤다.

“제가 치운 거 맞습니다. 나중에 적당히 나누죠.”

한중현은 멍하니 현석을 바라봤다. 사실 아티팩트야 모두 현석이 가져도 상관없었다.

한데 그 짧은 시간에 그 많은 아티팩트를 모두 치우다니.

“아, 그러고 보니 아공간 아티팩트를 갖고 계셨죠?”

하지만 그걸 이용한 건 아니라는 사실을 한중현은 물론이고 오명국도 알고 있었다.

그 아티팩트에 대해서는 한중현도 제법 잘 알고 있는데, 쌓였던 모든 아티팩트를 담기에는 용량이 모자랐다.

그들은 현석의 허리춤에 매달린 작은 가방을 힐끗 쳐다봤다. 아까 바람 펄스가 나오는 장비를 담아왔던 아공간 아티팩트였다.

현석은 그렇게 모두의 시선을 느끼며 코어로 다가갔다.

“다들 좀 물러나시죠.”

현석의 말에 모두 뒤로 후다닥 물러났다. 제법 거리가 떨어지자, 현석은 살짝 무릎을 굽히고 앉아 코어에 손바닥을 갖다 댔다.

화르르륵!

강렬한 불꽃 기둥이 코어에서 치솟아 올랐다.

다들 깜짝 놀란 눈으로 불기둥을 바라봤다. 멀리 떨어져 있는데도 뜨거운 열기가 느껴졌다.

아마 근처에 있었다면 대부분 화상을 면치 못했을 것이다.

하지만 현석은 그 불기둥 안에 있는데도 멀쩡했다.

“대체…… 뭘 어떻게 하면 저 정도로 강해지는 거야?”

한중현이 멍하니 중얼거렸다.

그리고 세상이 유리 깨지듯 깨져 버렸다.

쩡!

강렬한 마력의 파동이 느껴졌다. 이곳에 있던 모든 플레이어들은 자신의 레벨이 오르는 걸 분명히 느꼈다.

이 정도로 강하고 분명한 느낌이 오는 걸 보면 몇 레벨이 한꺼번에 오른 게 틀림없었다.

세상이 사라지고, 던전 입구가 있던 공간에 살아남은 모든 플레이어들이 서 있었다.

한중현은 황급히 던전 입구가 있던 자리를 바라봤다.

역시나 그곳에 아티팩트 하나가 둥둥 떠 있었다.

불꽃이 안에 갇혀 있는 커다란 수정구슬이었다.

모두의 시선이 현석에게로 향했다.

현석은 천천히 다가가 아티팩트를 손에 쥐었다.

쩡!

강력한 마력 파동이 사방을 휩쓸고 지나갔다.

던전을 클리어했다. 아주 완벽하게.

< 던전 클리어 > 끝

ⓒ 김강현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