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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눈 뜨고 레벨업-121화 (121/326)

< 역관광 1 >

베이스캠프를 감시하던 세 플레이어는 조심스럽게 몸을 숨긴 채, 그곳에서 멀리 떨어지기 시작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사방에서 그롬 길드의 플레이어들이 베이스캠프로 모여들고 있었으니까.

어느 정도 떨어진 그들은 서로를 바라보며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어쩌지?”

“어쩌긴 뭘 어째. 일단 본 것만 보고해야지.”

그들이 지금 할 수 있는 일은 기다리는 것뿐이었다. 남쪽으로 향한 레드드래곤 길드가 지금 어디쯤 있는지, 또 지금 뭘 하고 있을지 전혀 알 수 없었으니까.

그런 그들 사이로 누군가가 불쑥 나타났다.

깜짝 놀라 뒤로 빠르게 물러난 세 사람이 어이없으면서도 황당한 표정을 지었다.

나타난 사람은 현석이었다.

하지만 그런 표정도 잠시, 그들은 자신이 본 얘기를 일단 현석에게 해 주었다.

그들이 보기에 이 일을 한중현에게 전해줄 수 있는 사람은 현석이 유일했다.

얘기를 모두 들은 현석이 눈을 빛냈다.

“초록색 액체가 든 병이라고요?”

“예. 상당히 큰 병이었는데, 안에 초록색 액체가 가득 들어 있었습니다.”

“너무 멀어서 무슨 얘기를 하는지는 못 들었는데, 그걸 계속 보면서 얘길 한 걸로 봐서 뭔가 있긴 있는 모양입니다.”

현석은 그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어쩌면 일이 좀 더 쉽게 풀릴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만일 자신이 생각한 그것이 맞다면 말이다. 마침 타이밍도 딱 좋지 않은가.

“세 분은 이제 이쪽 방향으로 쭉 이동하시면 됩니다.”

“예? 더 감시하지 않아도 됩니까?”

“내 생각이 맞다면…… 아마 여기 있으면 정말 위험해질 겁니다.”

현석의 말에 세 사람은 왠지 모를 한기가 들어 몸을 부르르 떨었다.

뭔가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이쪽으로만 계속 가면 됩니까?”

현석은 고개를 끄덕였다.

“중간에 마수를 만나도 굳이 싸우지 말고 되도록 피하거나 숨을 수 있으면 숨는 게 좋을 겁니다.”

“어차피 싸울 생각도 없었습니다. 저희 셋 만으로 상대할 수 있을 만한 마수도 별로 없는 것 같고…….”

이곳에 남은 세 사람은 전투보다는 은신이나 추적에 능한 사람들이었다.

그러니 한두 마리 정도의 마수야 만나서 싸워볼 수도 있겠지만, 그 수가 조금만 더 늘어나도 최대한 몸을 사려야만 했다.

“채현석 씨는…… 여기 남으시는 겁니까?”

현석은 그 물음에 고개를 끄덕이며 눈을 빛냈다.

세 플레이어는 현석의 눈이 왠지 섬뜩하다는 생각이 들어 입을 다물었다. 더 이상 뭐라고 할 말이 없었다.

“그럼…… 저희는 이만 가보겠습니다.”

세 플레이어가 조심스럽게 이동을 시작하자, 현석은 미련없이 몸을 돌려 베이스캠프 쪽으로 걸어갔다.

이곳에서 베이스캠프는 그리 멀지 않았다.

‘일단…… 그 초록빛 액체부터 확인해야 돼.’

지금쯤 그롬 길드의 플레이어들도 아마 대부분 베이스캠프에 모여 있을 것이다.

그들은 첫 번째 정찰이 끝나고 복귀하고 있다고 했다. 아마 복귀 시간을 잘 맞춰뒀을 것이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함정 발동 타이밍을 맞추기 어려울 테니까.

베이스캠프 근처에 도착한 현석은 상황을 면밀히 살피며 조금씩 가까이 다가갔다.

역시 예상했던 대로 그롬 길드의 플레이어들 대부분이 이곳에 모여 있었다.

그리고 렉스턴 에너지에서 나온 필립과 그 일당의 모습도 보였다.

아무리 현석이 대단해도 저렇게 플레이어들이 바글바글한 곳에 은밀히 들어가 중앙에 있는 물건을 확인할 수는 없었다.

저곳은 사방이 뚫려 있어서 몰래 숨어들어가는 것이 애초에 불가능한 장소였다.

게다가 그롬 길드의 플레이어들이 어찌나 많은지 눈이 미치지 않는 곳이 없었다.

물론 같은 편인 척하고 그냥 들어가 보는 것도 한 가지 방법이긴 했지만 현석은 굳이 그렇게까지 할 필요가 없었다.

일단 베이스캠프 중앙에 있는 초록색 액체가 가득 들어있는 병은 멀리서도 눈으로 확인이 가능했다.

한데 병이 하나가 아니었다. 초록색 병 옆에 붉은 색 병도 함께 있었다.

아무래도 세 플레이어들이 이곳을 떠난 다음 따로 가져온 병 같았다.

어쨌든 그 정도면 충분했다. 현석의 심안이 최고조로 발동되었다.

[광마진액]

[마수페로몬]

광마진액은 현석도 잘 아는 물건이었다. 사냥보다는 테러를 목적으로 개발된 물질로, 실제로 쓰인 건 몇 번 안 되지만 그때마다 심각한 임팩트를 남긴 아이템이었다.

현석도 광마진액을 직접 본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아마 던전 외부에서 활성화 시켜 병에 담고 밀봉했을 것이다. 일단 저 뚜껑이 열리고 나면 답이 없다.

특히 이렇게 뜨거운 마력이 넘실대는 던전은 광마진액의 효과가 극대화 된다.

현석은 혹시나 하는 마음에 심안에 집중해 광마진액의 설명을 확인했다.

[주변 마력을 타고 사방을 장악해 마수들을 광포화 상태로 만든다. 광마진액을 마신 마수는 향의 근원을 찾이 사라질 때까지 미쳐 날뛰며 주변 모든 것을 철저히 파괴한다.]

역시 그 광마진액이 맞았다. 저 병이 깨지는 순간, 이 던전, 불의 대지는 지옥으로 변할 것이다.

이 안의 모든 마수들이 미쳐 날뛸 테니까. 던전에 있는 마수 외의 존재들이 모두 사라질 때까지 피와 광기로 넘실거릴 것이다.

‘저걸 그냥 깨뜨리면 진짜 답이 없을 텐데?’

현석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저건 던전을 미치게 만든다. 그렇게 되면 던전 안에 있는 그롬 길드도 절대 무사하지 못한다.

게다가 저들은 아직 피닉스가 한 번 죽었다는 사실을 모른다.

이 와중에 피닉스까지 미쳐 날뛰면 아마 한 명도 살아 돌아가지 못할 것이다.

현석의 의문은 옆에 있는 붉은 병을 확인하며 풀렸다.

[마수의 본능을 자극해 끌어들인다. 향의 근원에 대한 탐욕을 자극해 마수를 유혹한다.]

일단 저걸로 던전 안의 모든 마수를 이곳으로 모은 다음 마수진액이 담긴 병을 깨뜨릴 작정인 것이다.

‘그럼 저격수도 있을지 모르겠군.’

아마 분명히 준비했을 것이다. 레드드래곤 길드가 이곳에 도착한 즉시 저 두 개의 병을 동시에 깨뜨려야 하니까.

이 계획에서 가장 중요한 점은 일단 두 개의 병을 깨뜨린 다음 잠시 밖에 나가 기다려야 한다는 것이다.

같이 안에 있으면 자칫 함께 휘말려 큰 피해를 입을 수도 있으니까.

즉, 저들은 아직 작전을 시작할 준비가 안 되어 있다. 절대 출구를 찾을 수 없을 테니까.

현석은 씨익 웃었다. 생각보다 훨씬 간단하게 일이 풀렸다.

“이런 걸 두고 제 꾀에 제가 넘어간다고 하는 거지.”

현석은 그렇게 중얼거리며 비수로 쓰기 위해 따로 챙겨둔 바위두더지의 손톱을 꺼냈다.

바위두더지의 손톱은 저런 유리를 깰 때 특히 효과적이다. 또한 날아갈 때 소리가 나지 않아 중간에 차단당할 염려도 확연히 줄어들고 말이다.

현석은 가벼운 마음으로 일단 붉은 병을 노리고 바위두더지의 손톱을 던졌다.

소리없이 공기를 가르고 날아간 바위두더지의 손톱이 붉은 병을 정확히 때렸다.

쨍!

마수페로몬의 향이 주변 마력에 확 스며들었다. 그리고 단숨에 던전 전체로 퍼져 나갔다.

그저 공기를 타고 날아가는 향과는 전혀 달랐다. 그야말로 순식간에 페로몬 향이 던전을 장악했다.

우르르르르르.

던전이 뒤흔들리는 듯했다. 진짜 땅이 흔들리는 게 아니라, 던전을 채운 마력이 불길하게 흔들리고 있었다.

“이게 뭐야! 누가 이걸 깼어!”

누군가의 외침이 울렸다. 그리고 저 멀리서부터 날아오는 무수한 불덩이들이 보였다.

“일단 피해!”

던전의 모든 마수들이 이쪽으로 몰려올 것이다. 당장은 괜찮겠지만 마수들 때문에 초록병이 깨지기라도 하면 그야말로 끝장이었다.

현석은 그들의 외침을 들으며 두 번째 손톱을 던졌다. 이번에도 소리 없이 날아간 바위두더지의 손톱이 병을 박살 냈다.

쩡!

병이 깨지며 외부 마력에 닿은 초록빛 액체가 그대로 증발해 버렸다.

던전 안의 마력이 몽땅 스며든 것이다.

그걸 본 그롬 길드 플레이어들의 얼굴이 사색으로 변했다.

“뭐, 뭐야!”

“습격이 분명해! 저게 날아와서 병을 깼다고!”

“도망쳐!”

난리가 났다. 일단 베이스캠프를 벗어나야 한다. 마수들은 본능적으로 이곳으로 달려올 것이다. 광기에 젖었을 테니 더 빠르고 난폭하게 움직일 것이다.

그리고 그 와중에 보이는 모든 것을 파괴할 것이다.

현석은 숨어서 그걸 지켜보며 조용히 뒤로 물러났다.

이제 레드드래곤 길드 쪽으로 이동할 때가 되었다. 분명히 도움이 필요할 테니까.

‘뭐…… 그래도 저놈들 보다야 덜 위험하겠지만.’

그롬 길드가 있는 베이스캠프는 그야말로 혼란의 도가니였다.

사방에서 불길이 넘실댔고, 불에 휩싸인 마수들이 미쳐 날뛰며 마구 불을 뿜었다.

그리고 수백 명의 플레이어들이 그런 마수를 상대로 이를 악물로 싸웠다.

‘자기들은 충분한 대비를 했군.’

저들도 현석이 준비한 것과 비슷한 장비를 준비했다. 강력한 바람을 이용해 마수의 핵을 드러나게 만드는 방식으로 싸우고 있었다.

이래저래 역겨운 놈들이었다.

현석의 감각에 뭔가 거대한 마력이 느껴졌다. 고개를 돌려 확인해 보니 저 멀리서 거대한 불의 새가 날갯짓을 하며 낮게 날아오고 있었다.

피닉스였다.

물론 고작 3등급 피닉스에 불과했고, 어제 죽었다가 부활하는 와중이었기에 그보다도 더 못했다.

하지만 그럼에도 충분히 거대했고, 품은 마력은 무시무시했다.

현석은 씨익 웃고는 빠르게 그곳을 벗어났다.

* * *

“이런 젠장! 갑자기 이놈들이 왜 이래!”

“거기 막아! 진형 확실히 유지하고!”

레드드래곤 길드는 갑자기 미쳐 날뛰는 마수들 때문에 진땀을 빼고 있었다.

하지만 큰 피해를 입지는 않았다. 마수들의 행동이 어딘가 좀 이상했기 때문이다.

일단 마수들은 어딘가로 이동 중이었다.

레드드래곤 길드와 미친 듯이 싸우는 마수들은 그 중간에 걸린 놈들이라 할 수 있었다.

싸움의 권역에서 어느 정도 떨어진 곳을 지나는 마수들은 마치 보이지도 않는다는 듯 그냥 지나쳐갔으니까.

하지만 그럼에도 마수의 수가 워낙 많고 목숨을 불태워 싸우는 듯 미쳐 날뛰었기 때문에 상대하기가 정말 쉽지 않았다.

한중현은 마수들 못지않게 미쳐 날뛰었다.

다른 플레이어들은 2인 1조가 되어 한 명이 현석이 준 장비를 이용해 강력한 바람을 내뿜으면, 나머지 한 명이 드러난 핵을 공격하는 방식으로 싸웠다.

하지만 한중현은 혼자서 사방을 휘저으며 싸웠다.

그의 검은 바람 속성이 깃들어 있었다. 휘두를 때마다 강력한 검풍이 사방을 갈기갈기 찢었다.

그리고 그 검풍은 당연히 마력을 기반으로 만들어졌기에 불의 마수들에게도 잘 통했다.

물론 타격을 주지는 않았다. 아니, 오히려 불길을 더 크게 키웠다. 하지만 그 와중에 핵이 드러났다.

한중현은 빠르고 정확한 공격으로 단숨에 핵을 부숴 마수를 죽였다.

그렇게 위험해 보이는 동료들을 구하러 마구 날뛰다보니 점점 체력이 바닥나고 있었다.

‘이대로는 쉽지 않겠는데?’

한중현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갑자기 던전이 이렇게 변한 것이 어쩌면 그롬 길드의 수작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어 기분이 더 가라앉았다.

어쨌든 그렇게 한 차례 마수들이 파도치듯 지나갔다.

한숨 돌리려는 한중현의 눈에 저 멀리 또 한 떼의 마수들이 보였다.

이번에는 지금까지 상대하던 놈들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크고 무시무시한 마수들이었다.

불멧돼지 떼였다.

한중현과 레드드래곤 길드의 플레이어들은 일순 암담한 눈으로 그걸 바라봤다.

얼핏 보기에도 백 마리는 되어 보였다. 저들의 돌진력을 보니 아마 부딪히면 다들 통구이가 되어서 튕겨나갈 것 같았다.

‘저걸 어쩌지? 탱커들로 막아야 하나? 과연 막을 수 있을까?’

한중현이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 옆에서 누군가가 말했다.

“뭐 하고 있습니까? 피하지 않고.”

한중현이 놀란 눈으로 고개를 돌려 옆에서 말한 사람을 확인했다. 현석이었다.

“저들의 목표는 여기가 아니니까 돌진 경로에서만 벗어나면 됩니다. 서두르시죠.”

현석의 말에 모든 레드드래곤 길드원들이 일제히 달려갔다.

꽈르르르르릉!

마치 벼락이라도 치듯 달려가는 불멧돼지 떼가 아슬아슬하게 레드드래곤 길드를 스쳐 지나갔다.

몇 마리가 걸리긴 했는데, 그건 현석이 나서서 가볍게 처리해 버렸다.

한중현을 비롯한 레드드래곤 길드원들은 한시름 놓았다는 듯 한숨을 푹 내쉬었다.

그리고 타이밍 좋게 나타나 자신들을 구해준 현석을 바라봤다.

“이제 얼마 안 남았습니다. 저쪽으로 가죠.”

현석이 앞장서 걸어가자, 다들 묘한 눈으로 그의 뒷모습을 보다가 천천히 따라갔다.

불의 대지에서의 뜨거운 사냥이 슬슬 막바지로 접어들고 있었다.

< 역관광 1 > 끝

ⓒ 김강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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