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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눈 뜨고 레벨업-120화 (120/326)

< 불의 대지 4 >

한중현은 오명국의 의견을 그대로 받아들였다. 은신이나 추적 등에 재능이 있는 플레이어 세 명을 남겨 베이스캠프를 감시하도록 지시했다.

그들 역시 생존이 걸렸다는 걸 알기에 잠시도 방심하지 않고 제대로 감시할 것이다.

레드드래곤 길드는 그렇게 남쪽으로 길을 떠났다.

현석은 일행의 가장 뒤에서 신중하게 뒤따라갔다. 아마 분명히 저쪽에서 이쪽에 뭔가 수작을 부릴 것이다.

그걸 미리 알아차린다면 막을 수 있을 것이고, 그렇지 않다면 상당한 피해를 각오해야 할 것이다.

렉스턴 에너지는 현석도 충분히 겪어봤다. 아예 안 하면 모를까, 일단 하기로 한 이상 어설픈 수작을 준비하진 않았을 것이다.

현석이 가장 신경 쓴 것은 남은 세 명의 플레이어였다.

그들이 남았다는 사실이 적의 귀에 들어가선 안 된다. 한 가지 다행스러운 건 던전 내에서는 통신이 어렵다는 점이었다.

아직까지는 직접 사람이 움직여서 소식을 주고받을 수밖에 없었다.

아니면 다른 특별한 신호를 만들어서 멀리서도 시각적으로 확인이 가능하게 하거나.

하지만 그렇게 하면 플레이어들만 보는 게 아니라 마수들도 그걸 볼 수 있다.

마수들에게 나 여기 있소 하고 위치를 광고하는 셈이니 위험 부담을 안아야 한다.

그러니 그런 신호는 이곳 불의 대지에서는 아마 쓰지 않을 것이다.

규모가 엄청나게 크고, 서식하는 마수의 수도 어마어마하니까.

아차 하는 순간 도저히 어떻게 할 수 없을 정도로 많은 마수가 몰려들 수도 있었다.

그렇게 되면 어떤 준비를 했건 끝장이었다.

그런 상황이니 감시역을 보냈건, 또 뭔가 수작을 부리려는 자들을 보냈건, 중간에 차단을 해버리면 당분간 그롬 길드 측에서도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전혀 알 수가 없다.

던전은 무슨 일이 있어도 이상할 게 없는 공간이다. 마수들의 습격을 받아 죽을 수도 있지 않겠는가.

더구나 소수로 움직이는 플레이어들은 더더욱 위험한 법이다.

그런 가능성이 있기에 현석이 중간에 적의 끄나풀을 제거해 버린다 해도 그게 적이 알아차려 벌어진 일이라고 단정할 수가 없다.

그리고 그것은 이쪽도 똑같이 적용된다.

그래서 현석은 최소한 이쪽에서는 그런 일이 벌어질 가능성을 최소로 줄이고자 했다.

현석은 우선 따로 떨어진 세 플레이어 주변에 몸을 숨겼다. 그리고 상황을 지켜봤다.

아니나 다를까, 그롬 길드에서 보낸 게 분명한 플레이어들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현석은 숨어서 그들의 이동경로를 확인해봤다. 그들 중 두 명이 이쪽으로 오고 있었다.

‘남아 확인하길 잘했군.’

만일 그냥 내버려두고 갔다면 분명히 걸렸을 것이다.

그렇게 되면 이들을 남겨둔 의미만 사라지고, 레드드래곤 쪽에서 뭔가 눈치를 챘다는 사실만 적에게 알려주는 꼴이 된다.

현석은 숨어 있는 세 플레이어에게 천천히 다가갔다. 저쪽에서 움직이는 플레이어는 아예 보이지도 않았다.

몸을 제대로 은신하는 최고의 아티팩트를 장비하고 있음이 분명했다.

하지만 현석에게는 안 된다. 마력으로 확인하는 것도 그렇고, 아무리 은신을 해봐야 최근 급격히 높아진 심안에 다 걸려들게 되어 있었다.

현석의 눈에는 투명한 글씨로 쓰여진 그들의 이름이 움직이는 모습이 분명히 보였다.

현석의 등장에 레드드래곤의 세 플레이어는 깜짝 놀랐다. 하지만 프로답게 기척이나 소리를 내지는 않았다.

현석은 그들을 조용히 이끌었다. 일단 마주치지 않게만 하면 된다.

이곳에서 저들을 처리하기엔 베이스 캠프와의 거리가 너무 가까웠다.

최소한 한두 시간 거리는 떨어진 다음에 처리해야 정보가 제대로 전해지지 않을 것이다.

세 플레이어는 현석이 이끄는 대로 두 말 않고 따라갔다. 이들의 태도는 처음과 좀 달라져 있었다.

현석이 이번에 얼마나 큰 도움이 되고 있는지 다들 알고 있었다.

불의 마수들을 처리할 장비까지 제공하고, 또 그롬 길드의 시커먼 속을 까발려주었다.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고마워해야 하는데, 이렇게 뒤에 남아 자신들이 들키지 않게 지켜주기까지 하니 더더욱 대단해 보였다.

현석은 적당한 자리에 세 플레이어를 데려다 놓은 다음 주변을 면밀히 살피며 시간을 보냈다.

그롬 길드에서 보낸 플레이어들이 상당히 멀어졌다. 현석은 그제야 그곳을 떠났다.

“이제부터 원래 하려던 대로 감시하면 됩니다.”

현석의 말에 플레이어들이 진심을 담아 말했다.

“감사합니다. 무운을 빕니다.”

현석은 빙긋 웃어주고는 신속하게 떠났다.

플레이어들은 한동안 현석의 뒷모습을 바라보다가 결연한 표정으로 조심스럽게 이동을 시작했다.

이제 본격적으로 감시를 시작할 때가 되었다.

* * *

현석은 빠르게 그롬 길드 플레이어들을 쫓아갔다. 그들의 수는 모두 여덟이었는데, 각각 둘씩 짝을 지어서 따로 움직이고 있었다.

일단 베이스캠프와 거리가 떨어져야 한다. 현재 베이스캠프는 그롬 길드가 장악하고 있었다.

던전에 들어온 플레이어의 수는 그롬 길드가 레드드래곤 길드의 세 배에 달했다.

레벨이야 레드드래곤 쪽이 높았지만 그래봐야 상위 레벨들과 비교하면 큰 차이가 나지는 않는다.

그러니 저들은 나름대로 북쪽으로 작전을 나가면서도 베이스캠프를 충분히 장악할 수 있었다.

현석은 한 시간 정도 그들의 뒤를 그저 쫓기만 했다.

‘영리한 놈들이군.’

네 팀이 일정한 거리를 두고 이동했다. 거리가 멀긴 하지만 서로 눈으로 확인할 수 있을 정도였다.

만일의 사태가 벌어졌을 때, 눈으로 확인하고 상황에 대비하기 위함이었다.

이런 식이면 저들을 동시에 쓰러뜨리지 않으면 곤란하다. 아니면 알아차리지 못하는 사이에 차례차례 쓰러뜨리거나.

각각 옆에서 이동하는 팀은 눈으로 볼 수 있지만 하나 걸러 움직이는 팀을 볼 수는 없었다.

만일 다들 보이는 정도로 붙어 갔다면 오히려 처리가 쉬웠을 것이다. 하나하나 쫓아가 처리하면 되니 말이다.

현석은 일단 두기로 하고 저들을 앞질러갔다.

어차피 한 고비는 넘겼다. 이쪽 감시자를 들키지 않았으면 된 거 아닌가.

저들에게 계속 신경을 쓰고 있다가 나중에 레드드래곤 길드까지 함께 움직여 단숨에 처리해 버리면 된다.

현석은 빠르게 내달려 레드드래곤 일행과 합류했다.

역시나 이번에도 가장 먼저 발견하고 맞아준 사람은 오명국이었다.

“어딜 다녀오십니까? 걱정했습니다.”

“뒤에 쫓아오는 놈들이 있다.”

그 말에 오명국이 크게 당황했다. 감시역으로 남겨둔 플레이어들이 걱정되었기 때문이다.

“일단 우리 쪽 사람들이 들키지 않게 대피시켰으니 그쪽은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그 말을 들은 오명국이 가슴을 쓸어내렸다. 그리고 새삼스러운 눈으로 현석을 바라봤다.

‘대체…… 대체 어떻게 이럴 수가 있지?’

이런 현석을 볼 때마다 지독한 위화감이 느껴진다. 저게 어떻게 스물한 살이란 말인가.

그래서 현석이 자신에게 하는 하대가 너무나 자연스럽게 느껴지는 건지도 모른다.

“몇 놈이나 쫓아오고 있습니까?”

“여덟. 한꺼번에 처리하지 않으면 곤란해질지도 몰라.”

“그럼…….”

“달고 가다가 나중에 적당한 시점에 처리해야지. 너무 늦지 않게.”

“예. 그렇게 보고해 두겠습니다.”

현석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앞으로 이동했다. 일행의 가장 앞에는 한중현이 가고 있었다.

한중현은 언제나 선두에서 가장 먼저 달려가 싸우는 스타일이었다.

현석은 한중현 옆으로 다가갔다.

“이 던전에서 제일 먼저 해야 할 일은 출구를 찾는 겁니다.”

갑자기 다가와 말을 툭 던진 현석의 모습에 한중현은 살짝 당황했다. 하지만 이내 그가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이해했다.

“확실히…… 그렇군요.”

이제 여기서의 일은 피닉스를 사냥하는 것만 남는 게 아니다. 던전 클리어가 문제가 아니라, 그롬 길드와의 싸움에서도 승리해야 한다.

그롬 길드는 레드드래곤 길드를 박살 낼 계획까지 치밀하게 짜 왔는데, 그들의 일정이나 지시에 맞춰 움직여줄 필요는 없었다.

아니, 그래선 안 된다. 이쪽도 철저하게 그들이 세웠던 계획을 이용해야 한다.

“그럼 인원을 나눠서 출구를 찾아야겠군요.”

현석이 고개를 저었다.

“출구는 내가 찾겠습니다.”

한중현의 눈이 화등잔만 해졌다.

“혼자서 말입니까?”

현석이 고개를 끄덕였다. 출구를 찾는 거야 아무것도 아니다. 패턴이야 정해져 있으니까.

“그쪽은 쫓아오는 감시자를 처리하십시오.”

“감시자? 그롬에서 감시자까지 보냈습니까?”

현석은 아까 오명국에게 한 설명을 다시 한 번 차근차근 해주었다. 이번엔 좀 더 상황을 자세히 말해주었다. 왜 한꺼번에 처리해야 하는지까지 말이다.

한중현은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건 제가 알아서 하겠습니다.”

한중현의 눈빛이 독해졌다. 자신들을 죽이기 위해 작정한 놈들이다. 굳이 살려둘 이유가 없었다.

“그럼 전 출구부터 확보해 두겠습니다.”

현석은 그 말을 남기고 일행에서 떨어져 나갔다. 이미 생각해둔 장소가 두 군데 있었다.

아마 찾는 데 시간이 그리 많이 걸리지는 않을 것이다.

‘출구를 찾고 나면…… 저쪽을 한 번 흔들어 줘야겠지.’

이미 피닉스를 잡는 건 염두에도 두지 않았다. 피닉스는 이미 잡은 거나 다름없었으니까.

현석은 고개를 힐끗 돌려 레드드래곤 길드 쪽을 살펴봤다. 움직임이 살짝 부산해지고 있었다.

‘시작하려는 모양이군.’

현석은 이제 그쪽으로는 신경을 끊었다. 한중현이나 오명국은 바보가 아니다. 그들은 훌륭한 플레이어였고, 또 뛰어난 리더이기도 했다.

아마 그롬 길드의 감시자들은 흔적도 없이 사라질 것이다.

현석은 빠르게 자신이 처음 생각했던 장소로 향했다. 그의 속도는 어마어마하게 빨랐다.

게다가 달리는 것보다 더 빠른 속도로 마력을 움직이고 있었다.

그의 움직임이 만들어내는 마력의 흐름을 강제로 중화시키며 가는 중이었다.

그건 현석에게 있어서도 새로운 도전이었다. 또한 새로운 수련법이기도 했다.

이렇게 사방이 들끓어 오르는 불의 대지라는 던전 안에서만 할 수 있는 수련 말이다.

현석이 지나간 자리에는 그저 고요한 마력만이 남아 있었다. 마치 아무것도 지나가지 않은 것처럼.

굳이 이런 수련을 하면서 빠르게 달리는 이유는 당연히 마수들 때문이었다.

이렇게 마력이 움직이지 않으면 마수들도 뭐가 지나갔는지 알아차리기가 어렵다.

현석이 기척까지 가리고 있기에 아주 지척에 있는 마수가 아니라면 절대 알아차릴 수 없었다.

그렇게 현석은 첫 번째 자리에 도착했다. 그리고 허공에 떠 있는 검은 소용돌이를 확인할 수 있었다.

한 번에 출구를 찾아낸 것이다.

이제 이 출구를 확보할 차례였다. 아무도 쓰지 못하게 말이다.

현석의 입가가 슬쩍 올라갔다. 그롬 길드가 당황하는 모습을 떠올리니 절로 웃음이 나왔다.

‘어디…… 같이 즐겨 보자고.’

* * *

그롬 길드의 마스터는 빠르고 정확하게 지시를 내렸다. 그롬 길드의 플레이어들은 군인 출신이 많았다.

그들은 마스터의 지시에 따라 일사불란하게 움직였다.

일단 베이스캠프에 함정을 마련했다.

그 함정은 렉스턴 에너지에서 온 필립이 선물로 주었다.

“정말 신기하군. 이런 걸 다 만들다니 말이야.”

“약한 던전을 클리어 해야만 하는 상황에서 시간을 대폭 절약해주는 아주 특별한 물건이지.”

그것은 유리병 안에 든 초록빛 액체였다.

그저 색깔만 예쁜 액체 같지만 실상 그것은 마수를 끌어당기는 힘이 담긴 무시무시한 물질이었다.

유리병의 뚜껑만 열어도 그 향기가 마력을 타고 사방으로 뻗어 나갈 것이다.

그러면 이 던전 안의 모든 마수들이 이곳으로 몰려올 것이다. 심지어 피닉스까지 말이다.

게다가 마수들의 상태가 광기에 물들 것이다.

레드드래곤 길드에게 주는 그롬 길드와 렉스턴 에너지의 조촐한 선물이었다.

그롬 길드는 멀리서 그 광경을 지켜보다가 적당한 시점에 나설 계획이었다.

약효가 떨어지고 레드드래곤 길드가 전멸하면 아마 마수들을 상대하기 적당한 상태가 될 것이다.

미쳐 날뛰다가 광기가 빠져나간 마수들은 평소보다 훨씬 약해질 테니까.

“부디 잘 버텨줬으면 좋겠는데 말이야.”

이 작전의 핵심은 레드드래곤 길드였다. 그들이 오래 버티면 오래 버틸수록 그롬 길드의 피해가 줄어들 것이다.

광기에 빠진 마수들이 레드드래곤 길드를 모조리 죽이고 나면 주변 다른 생명체들에게로 눈을 돌릴 테니까 말이다.

‘그래서 출구를 빨리 찾아야 하는 거지.’

레드드래곤 길드가 너무 빨리 무너진다 싶으면 얼른 밖으로 피해야 한다.

어차피 적당한 시간을 두고 다시 들어가면 쉽게 던전을 클리어할 수 있는 건 마찬가지였다.

다만 시간이 좀 더 걸릴 뿐이었다.

‘시간을 끌면 마수들이 서서히 힘을 되찾으니 피해도 커질 테고 말이야.’

그롬 길드의 마스터는 속으로 그런 생각을 하며 피식 웃었다. 어쨌든 그놈들 덕분에 이 던전을 좀 더 손쉽게 클리어할 수 있게 되었다.

“그나저나…… 출구 찾으러 간 놈들은 대체 왜 이렇게 안 오는 거야?”

그롬 길드 마스터는 그렇게 투덜거리며 주위를 둘러봤다.

그롬 길드의 모든 플레이어들이 사방으로 흩어져 출구를 찾는 중이었다. 아마 조만간 다들 돌아올 것이다.

시간을 미리 정해두고 다들 복귀하도록 지시를 내려뒀다.

각자 이동한 방향이 다르니 당연한 조치였다.

그들이 복귀하면 진짜 작전이 시작될 것이다. 그롬 길드 마스터는 베이스캠프 중간에 놓인 유리병을 보며 잔혹한 미소를 지었다.

< 불의 대지 4 > 끝

ⓒ 김강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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