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두눈 뜨고 레벨업-119화 (119/326)
  • < 불의 대지 3 >

    “이동합니다.”

    그롬 길드 마스터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플레이어들이 버스에 올라탔다.

    그롬 길드의 플레이어들은 일사불란한 움직임을 보여줬다.

    반면 레드드래곤 길드의 플레이어들은 일제히 한중현을 바라봤다. 한중현은 만족스럽게 씨익 웃고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우리도 출발한다.”

    그제야 레드드래곤 길드가 버스에 올라탔다.

    현석은 가장 마지막으로 차에 올랐다. 그 전에 렉스턴 에너지에서 온 필립 일행을 끝까지 살폈다.

    물론 대놓고 보진 않았다. 현석에게는 굳이 그렇게 하지 않고도 그들을 살필 수 있는 많은 방법이 있었으니까.

    어쨌든 모든 플레이어와 던전을 클리어를 진행하는 동안 외부에 대기하며 도와줄 일반인들까지 다 하니 무려 다섯 대의 버스를 꽉 채웠다.

    다섯 대의 버스가 차례차례 출발했다. 그들의 목적지는 당연히 피닉스가 나오는 던전, 불의 대지였다.

    현석은 버스를 타고 가면서도 신경은 온통 필립 일행에게 두었다.

    그들의 대화는 물론이고 마력의 흐름과 흔들림을 통해 몸짓까지 확인했다.

    덕분에 엄청난 심력과 정신력이 소모되었지만, 현석은 오히려 이번 기회를 수련의 일환으로 삼았다.

    그렇게 모든 일행이 던전이 있는 곳에 도착했다.

    그롬 길드의 플레이어들이 가장 먼저 움직였다. 그들은 던전 앞에 도열해 서서 마스터의 명령을 기다렸다.

    마치 군대 같은 모습이었다.

    반면 레드드래곤 길드의 플레이어들은 비교적 자유로운 분위기였다. 하지만 그렇다고 산만하지는 않았다. 다들 긴장감을 유지한 채 마음가짐을 가다듬으며 서 있었다.

    누군가 간이 단상을 가져와 설치했다. 그러자 그롬 길드 마스터가 거기에 올라가 좌중을 슥 둘러봤다.

    어쨌든 이번 사냥의 주체는 그롬 길드였다. 그렇기에 전체적인 계획도 그들이 세웠다.

    작전의 세부 사항은 모든 플레이어들에게 전달되었다. 그리고 어제 하루 쉬는 동안 다들 작전을 충분히 숙지했다.

    하지만 사냥이라는 것이 큰 작전대로 이뤄지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아마 막상 안에 들어가면 무수한 변수들이 작용해 계획과는 많이 어그러진 방향으로 사냥이 진행될 확률이 높았다.

    하지만 그렇더라도 처음에 계획을 세부적으로 잘 세워 놓는 것과 그렇게 하지 않은 것에는 엄청난 차이가 있었다.

    그롬 길드 마스터는 좌중을 몇 번이나 둘러보고는 천천히, 하지만 힘 있게 말했다.

    “피닉스 사냥을 시작하겠습니다. 일단 들어가자마자 안전지대를 찾아 베이스캠프를 설치하는 데 모두 힘을 모아주십시오.”

    그롬 길드 마스터는 그렇게 말하고 그롬 길드 플레이어들 쪽을 보며 눈짓을 했다.

    그러자 그롬 길드가 움직였다.

    그들이 모두 던전으로 들어가자, 레드드래곤 길드도 움직였다.

    그롬 길드 마스터는 마지막까지 남아 있었다. 렉스턴 에너지에서 나온 필립 일행과 함께.

    “표정이 너무 가벼운 거 아닌가? 아무리 쉬워도 작전은 작전이야.”

    필립의 말에 그롬 길드 마스터가 빙긋 웃었다.

    “내가 웃고 있다고 해서 가벼운 마음가짐이 아니라는 건 자네가 더 잘 알 텐데?”

    “그럼 다행이고. 한국 쪽에서 아주 난리야. 레드드래곤 때문에 기를 못 펴서 계획에 차질이 이만저만 아니라더군.”

    “걱정할 거 없네. 레드드래곤이 얼마나 대단한 놈들인지 모르지만 이 던전은 그리 만만한 곳이 아니야.”

    “누구보다 내가 더 잘 알지.”

    필립은 그렇게 대답하며 이를 부득 갈았다. 그의 부하들도 이 던전에 들어가 멋모르고 설치다가 절반 이상이 죽었다.

    그러니 레드드래곤 놈들도 같은 꼴이 될 것이다.

    “하여간 멍청한 놈이 조직을 이끌면 밑에 애들만 고생이라니까. 설마 삼현 그룹을 누가 장악하고 있는지 모르는 건가?”

    “모르니까 미끼를 덥석 물었지.”

    한중현은 모르고 있지만 삼현 그룹은 이미 사신 길드를 지원하기로 계약까지 되어 있었다.

    그리고 이번 일은 그 계약의 선물 같은 거였다.

    한중현의 배다른 형제들이 힘을 모아 준비한 선물 말이다.

    그들에게는 여전히 한중현의 존재가 껄끄러웠다.

    그들은 자신들에게 위협이 될 일말의 가능성이라도 존재한다면 이렇게 치우는 것이 옳다고 믿는 자들이었다.

    “그런데 이렇게 해놓고 정작 피닉스를 못 잡으면 말짱 꽝이야.”

    “걱정하지 말게. 피닉스를 상대할 방법을 이미 찾아 놨으니까.”

    “하긴, 저 시커먼 아가리에 몇 명을 제물처럼 갖다 바쳤는데, 이제 슬슬 공략법을 알아낼 때가 되긴 했지.”

    두 사람의 대화는 그 뒤로도 조금 더 이어졌다. 하지만 대부분 시시껄렁한 잡담에 가까웠다.

    “그럼…… 다들 기다릴 테니 우리도 슬슬 들어가 볼까?”

    “그러지.”

    두 사람이 던전으로 들어갔다.

    그러자 던전이 있던 곳에서 한 사람이 천천히 걸어나왔다. 현석이었다.

    현석은 분명히 던전을 지나쳐서 나타났다. 마치 플레이어가 아닌 일반인처럼 말이다.

    이건 생각보다 고도의 기술이었다. 하지만 회귀 전에는 최상급 플레이어들이 수련의 수단으로 써먹던 방법이기도 했다.

    고도의 마력 컨트롤 능력을 키우면 던전과 닿는 부분의 마력을 완벽하게 없애 마치 일반인처럼 반응하게 하는 것이 가능했다.

    현석이 한 것이 바로 그것이었다.

    던전 입구인 검은 소용돌이가 빛을 투과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이용해 그냥 지나친 다음 아무도 알아차리지 못하게 은신한 것이다.

    굳이 그렇게까지 한 이유는 바로 그롬 길드 마스터와 필립 때문이었다.

    두 사람의 분위기가 왠지 최대한 늦게 안에 들어가려 하는 것 같아서였다.

    그리고 덕분에 의심을 확신으로 바꿀 수 있었다.

    현석은 의미심장한 표정으로 던전에 들어갔다.

    세상이 휘리릭 뒤바뀌었다.

    * * *

    “이쪽입니다!”

    한 플레이어가 손을 번쩍 들고 외치자, 다들 그쪽으로 향했다.

    그곳에 정말 베이스캠프를 차리기 딱 좋은 자리가 있었다. 이제 주변을 정찰해 특별한 마수가 없는지 확인해야 한다.

    수많은 플레이어들이 각각 팀을 이뤄 사방으로 흩어져 수색과 정찰을 시작했다.

    1시간에 걸친 꼼꼼한 확인을 통해 주변에 아무 마수도 서식하지 않는다는 결론을 내렸다.

    그 뒤로는 더욱 빠르게 진행되었다. 수십 개의 간이 막사가 생겨나고, 주변에 무수한 알람과 트랩을 설치했다.

    그리고 정찰조를 편성해 수시로 주변을 감시하도록 했다.

    혹시라도 있을지 모를 마수의 침입을 미연에 알아내 막기 위한 조치였다.

    어쨌든 그렇게 대충 막사가 완성될 무렵 그롬 길드 마스터와 필립이 등장했다.

    그들은 마치 처음부터 함께 있었던 것처럼 자연스럽게 막사들을 둘러보며 어우러졌다.

    하지만 그들은 이곳에 도착한 지 고작 10분도 되지 않았다. 대부분의 시간을 다른 데서 보내고 왔다.

    그리고 그들이 무엇을 하고 왔는지 아는 사람이 또 한 명 있었다.

    현석은 두 사람을 서늘한 눈으로 쳐다보다가 이내 몸을 돌려 레드드래곤 길드가 있는 쪽으로 향했다.

    이제부터 저놈들에게 역으로 한 방 먹일 수 있는 방법을 구상해야 한다.

    “어디 갔었습니까? 한참 동안 찾아다녔습니다.”

    현석이 나타나자마자 오명국이 후다닥 달려와 물었다. 그는 현석에게 지옥훈련을 받은 뒤로 급격히 재능을 꽃피워 상당한 레벨을 쌓을 수 있었다.

    하지만 현석이 보기에 오명국은 다른 플레이어들에 비해 좀 모자랐다.

    처음에야 레드드래곤 내에서도 레벨이 높은 편이었겠지만 이젠 점점 뒤쳐지고 있었다.

    물론 오명국의 능력은 레벨이 아닌 다른 데 있으니 별로 상관은 없었지만 말이다.

    “우리 길드의 막사가 저쪽으로 배정되었습니다. 절 따라오시지요.”

    오명국은 현석에게 정말로 많은 신경을 썼다. 그가 판단하기에 이번 사냥의 핵심이 바로 현석이었다.

    현석은 오명국과 함께 막사로 걸어가며 준비 상태를 확인했다.

    “일단 물과 얼음에 관련된 아티팩트를 있는 대로 모아오긴 했습니다.”

    물이나 얼음 속성을 가진 아티팩트는 생각보다 흔치 않았다. 더구나 무기에 그런 속성이 깃든 경우는 더 드물었다.

    “바람에 관계된 건 없나?”

    “예? 바람이요?”

    오명국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불과 바람이 만나면 확 타오를 텐데 웬 바람 타령이란 말인가.

    “이곳에 있는 마수들은 불과 핵으로 이루어져 있다. 바람으로 일순간 불을 날려 버리고 드러난 핵을 부수면 끝이야.”

    현석처럼 마력 감지 능력이 뛰어난 플레이어라면 굳이 바람 따위 필요 없이 감각만으로 핵을 부술 수 있다.

    하지만 다른 플레이어들에게 그런 걸 기대할 수는 없었다. 마수의 몸을 뒤덮은 불 자체가 마력을 담고 있어서 마력으로 뭘 감지해내는 것 자체가 거의 불가능했으니까.

    그러니 그 불을 찰나의 순간이나마 날려버릴 수 있을 정도로 강력한 바람이 있으면 아주 유용했다.

    기본적으로 마수의 몸을 뒤덮은 불은 마력으로 이루어져 있기에 웬만한 바람으로는 아예 반응도 하지 않는다.

    그러니 바람 자체에 마력이 깃들어 있거나, 그 자체를 싹 무시할 정도로 강력한 바람이 필요했다.

    오명국은 멀뚱한 표정으로 입을 다물고 현석을 바라봤다. 설마 그런 식으로 사냥할 수 있을 거란 생각은 아예 못했다.

    하지만 이제 와서 그런 걸 준비할 수는 없었다. 아직 출구가 어디 있는지도 파악 못했지 않은가.

    그러니 다시 나가서 가져올 수도 없는 노릇이다.

    오명국은 난감한 표정으로 다시 걸음을 옮겼다. 일단 막사로 돌아가 한중현을 비롯한 주요 간부들을 모아서 논의해 봐야 할 듯했다.

    그렇게 막사에 도착한 오명국은 그롬 길드에서 온 플레이어를 발견했다. 그는 한중현과 뭔가 얘기를 나누고 있었다.

    오명국은 뭔가 싸한 느낌이 들어 후다닥 달려가 한중현 옆에 섰다.

    마침 그롬 길드에서 온 사람이 본론을 막 얘기하려던 참이었다.

    “저희가 북쪽을 맡을 테니 레드드래곤에서는 남쪽으로 진출하시면 됩니다. 일단 마수를 싹 소탕하는 방향으로 사냥을 진행하기로 결정했습니다.”

    한중현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거야 당연하다.

    “그리고 사냥한 마수의 소유는 사냥한 길드가 갖는 걸로 결정했습니다. 동의하십니까?”

    그것 역시 미리 얘기가 되었던 부분이기에 한중현은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작전 시작은 1시간 뒤입니다. 베이스캠프는 저희 그롬 길드에서 책임지기로 했으니 모든 플레이어를 이끌고 가셔도 됩니다.”

    “그럼 그럽시다.”

    한중현은 통역이 전해주는 말을 듣고는 그렇게 말했다. 플레이어 중에서 통역사를 구하기가 상당히 어려웠기에 통역 실력이 그리 뛰어나진 않았다.

    하지만 어차피 이젠 말 섞을 일도 별로 없으니 상관없었다.

    그롬 길드 플레이어가 돌아가자, 한중현은 오명국을 보며 물었다.

    “데려왔습니까?”

    “예. 사냥 떠나기 전에 잠깐 회의를 해야 할 것 같습니다.”

    “회의?”

    “예. 마수 사냥법에 대해서 논의가 좀 필요합니다.”

    한중현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오명국은 괜한 소리를 할 사람이 아니라는 걸 알기에 그가 좀 더 설명할 때까지 기다려주었다.

    오명국은 서둘러 현석에게 들은 설명을 자세히 해 주었다. 모든 설명을 들은 한중현의 표정이 심각해졌다.

    “그게 사실이라면…… 회의 해봐야 시간낭비 아닙니까? 어차피 준비하지 않은 물건인데.”

    그때 언제 다가왔는지 현석이 입을 열었다.

    “준비했습니다.”

    그 말에 한중현과 오명국이 반색하며 현석을 바라봤다.

    현석은 대답대신 작은 가방을 열고 그것을 뒤집었다. 안에서 길쭉한 파이프 같은 것들이 와르르 쏟아졌다.

    “이게 뭡니까?”

    “바람총입니다. 바람을 펄스로 발사하는 장치입니다. 적용 범위가 좁긴 하지만 제법 강력해서 아마 마수들한테도 효과가 있을 겁니다.”

    한중현은 그 말에 그걸 들고 허공에 쏴 보았다. 쏘는 법도 아주 단순했다.

    푸슉!

    강력한 바람이 쏟아져나갔다. 한중현의 눈이 예리하게 빛났다.

    그는 크게 고개를 끄덕이고는 고마운 표정으로 현석을 바라보며 말했다.

    “상당한 위력이군요. 주신 장비는 일단 고맙게 받겠습니다. 나중에 이에 대한 보답을 반드시 할 일이 있을 겁니다.”

    현석은 빙긋 웃어주었다. 이런 말은 자주 들어두면 좋다. 특히 한중현한테는 말이다.

    그는 이런 고마움과 은혜를 절대 잊지 않는 사람이니까.

    이제 슬슬 출발준비를 하려는 한중현에게 오명국이 조심스럽게 말했다.

    “왠지…… 느낌이 이상합니다.”

    “느낌이 이상하다고요?”

    “이번 사냥…… 아무래도 조심하는 편이 좋을 것 같습니다.”

    “그게 무슨 말입니까?”

    “그저 기우이면 좋겠지만…… 일단 우리 측 인원은 베이스에 남기지 않았으면 합니다.”

    한중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어려운 일은 아니다. 어차피 베이스캠프는 저쪽에서 봐주기로 했으니까.

    하지만 이어진 오명국의 말에는 정말 표정을 굳힐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몇 명을 따로 빼서 베이스캠프를 감시했으면 합니다.”

    “여길 감시하자고요? 몰래?”

    “예. 조심해서 나쁠 건 없으니까요.”

    한중현이 잠시 고민했다. 그때 현석이 오명국의 의견에 힘을 실어주었다.

    “아마 그렇게 하는 게 좋을 겁니다. 저도 느낌이 안 좋은데다가…… 들은 말도 좀 있으니까요.”

    “들은 말?”

    현석은 주변을 확실히 확인하고는 아까 그롬 길드 마스터와 필립의 대화를 전해주었다.

    한중현의 얼굴에 섬뜩하리만치 차가운 미소가 떠올랐다.

    “이거…… 정말 일이 재미있게 돌아가는군요. 지금 하신 말씀…… 정확한 겁니까?”

    현석이 고개를 끄덕이자, 한중현은 나직이 한숨을 내쉬었다.

    “후우. 이거야 원…… 한 순간도 발 뻗고 잘 날이 없군요. 아무튼…… 이렇게 계속 신세만 지고 도움만 받아 죄송스럽기도 하고 고맙기도 하고…… 마음이 참 복잡합니다.”

    현석이 씨익 웃었다.

    “나중에 다 갚으면 됩니다.”

    한중현도 그 미소에 답하듯 마주 웃어주었다.

    “반드시 갚을 겁니다. 열 배, 백 배로.”

    < 불의 대지 3 > 끝

    ⓒ 김강현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