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불의 대지 1 >
“이쪽입니다!”
오명국이 크게 손을 흔들었다. 주변에 있던 사람들이 일제히 오명국의 시선을 따라 고개를 돌렸다.
현석은 자신을 안내하던 사람을 앞질러 오명국에게 다가갔다.
오명국 옆에는 익숙한 얼굴의 사내가 서서 씨익 웃고 있었다.
“오랜만입니다.”
손을 내민 사내는 한중현이었다. 현석은 반사적으로 한중현의 정보를 확인했다.
‘112레벨!’
한중현은 무려 112레벨이었다. 미친 듯이 목숨을 내던지고 사냥했다더니 정말 대단한 레벨을 만들었다.
아마 한중현보다 더 레벨이 높은 사람은 한국에서 추광열 빼고는 없을 것이다.
‘지금쯤 한 120가까이 되었으려나?’
100레벨이 넘어가면 성장이 엄청나게 더뎌진다. 게다가 10레벨마다 마치 철벽이라도 쳐 놓은 것처럼 성장의 장벽이 나타난다.
즉, 한중현은 지금 110레벨에 나타나는 성장의 장벽을 넘었다는 뜻이다.
그리고 예상컨대 추광열은 두 번째 성장의 벽에서 멈춰 있을 것이다.
그건 결코 넘기 쉽지 않은 벽이니까.
사실 성장의 벽은 위로 올라가면 올라갈수록 더욱 넘기가 힘들어진다.
특히 150레벨의 벽은 단절이라고 따로 불릴 정도로 지독했다.
현석은 과거에 그 모든 것을 다 뛰어넘은 경험이 있었다.
하지만 그런 현석도 200레벨에는 이르지 못했다. 거기에는 단절을 넘어서는 벽이 존재한다고 하는데, 겪지 못했으니 알 수 없었다.
‘그럴 때를 대비해 레인보우 엘릭서가 있는 거지.’
레인보우 엘릭서는 따로 기적의 물약이라 불렸다. 그 지독한 성장의 벽까지 넘어설 수 있게 해주는 약이었으니까.
다만 단절이라 불리는 벽은 그저 물약 한 번 먹는 것만으로 넘을 수는 없었다.
150레벨의 벽은 열 개의 엘릭서를 동시에 마시면 넘을 수 있다. 대신 죽음에 준하는 극심한 고통을 견뎌야만 한다.
어쨌든 한중현의 레벨과 스탯을 확인한 현석은 내심 고개를 끄덕였다.
이 정도면 사냥에 방해는 되지 않을 테니까.
현석은 나머지 플레이어들의 정보도 대충 확인했다. 다들 레벨이 90에 근접했다. 게다가 90레벨을 넘은 사람도 둘이나 있었다.
‘원래 레벨과 재능이 높은 사람들을 불렀다지만 대단하긴 하군.’
이 정도면 류지혜 일행과 비슷한 수준이었다. 물론 그쪽은 특수한 스킬을 갖고 있으니 레벨로 단순비교하는 건 별 의미가 없었지만 말이다.
어쨌든 수준을 확인하고 나니 한중현이 저렇게 자신만만한 표정을 짓고 있는 것도 이해가 갔다.
하지만 피닉스 사냥은 자신감만으로 할 수 있는 게 아니었다.
냉정히 따지면 여기 있는 플레이어들은 제대로 된 사냥 교육을 받은 다음, 현석의 명령에 따라 빠릿빠릿하게 움직이지 않으면 그저 사냥에 방해만 될 뿐이었다.
하지만 지금 그 얘기를 해봐야 아무도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다. 심지어 완벽한 현석의 편이라 할 수 있는 오명국조차 난색을 표할 것이다.
그러니 지금은 그냥 가만히 있는 편이 나았다.
나중에 다들 알게 될 것이다. 이대로는 절대 피닉스를 사냥할 수 없다는 사실을 말이다.
그때 나서도 충분하다. 물론 그때도 최대한 피해를 줄일 방법을 미리 강구해 둬야겠지만 말이다.
현석은 오랜만에 즐거운 기분이 들었다. 아마 굉장히 스릴 넘치고 재미있는 사냥이 될 것 같았다.
‘뇌룡을 사냥할 때보다 더 재미있을 것 같은데?’
현석은 그런 생각을 하며 한중현의 인사를 받아주었다. 한중현은 현석을 마치 가족처럼 대해주었다.
한중현은 한 번 마음을 주면 절대 배신하지 않는 사람이었다. 그래서 현석이 선택한 것이기도 했다.
하지만 레드드래곤 길드의 모든 플레이어가 호감만 가진 건 아니었다.
아무리 한중현과 오명국이 현석을 좋아해도, 아니, 오히려 그래서 더 고깝게 보는 사람도 있었다.
물론 절반 이상은 그저 길드의 조력자 정도로 여기고 별 감정이 없었다.
“일단 비행기부터 탄 다음에 차근차근 얘기를 나눠보도록 하죠.”
한중현의 말에 현석은 고개를 끄덕이고 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잠시 후, 그들은 러시아의 NNC그룹에서 보낸 전용기를 타고 하늘로 날아올랐다.
* * *
블라디보스톡 공항에는 그롬 길드에서 보낸 안내인이 레드드래곤 일행을 기다리고 있었다.
“어서 오십시오. 환영합니다.”
안내인은 약간 과하다 싶을 정도로 친절하게 일행을 안내했다.
그롬 길드와 함께 가야 할 피닉스 던전은 블라디보스톡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었다.
그래서 일단 블라디보스톡에서 모이기로 했다.
당연히 그롬 길드의 플레이어들은 먼저 와서 기다리고 있었다.
레드드래곤 길드를 이끄는 사람은 오명국이었다. 한중현은 이런 일에는 별로 관심이 없고 오직 싸움과 성장에만 관심이 있었기에 나서지 않고 뒤로 물러나 있었다.
그리고 당연히 현석은 아직 일행에 제대로 녹아들지 못하고 살짝 떨어진 채 홀로 다녔다.
일단 안내인은 모든 일행을 미리 준비한 버스에 태웠다.
“일단 던전 근처의 호텔로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미리 예약까지 마쳤으니 오늘은 푹 쉬시면서 컨디션 조절을 하시면 됩니다. 필요하신 게 있다면 제게 연락만 주시면 무엇이든 준비해 드리겠습니다.”
안내인이 의미심장한 표정으로 그렇게 말했다.
실제로 그들이 원하는 모든 것을 대령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그것이 술이든 여자든 마약이든 원하기만 하면 바로 준비가 가능했다.
그롬 길드의 뒤를 봐주는 NNC그룹은 손잡은 마피아가 둘이나 있었다.
그들을 이용하면 정말 상상을 초월하는 짓까지 할 수 있었다. 안내인은 그 정도는 얼마든지 할 수 있는 권한을 받은 상태였다.
그렇기에 은근히 그들이 좀 과한 요구를 했으면 하고 바라는 중이었다.
덕분에 자신도 이런 힘에 잠깐이나마 취해 볼 수 있으니 말이다.
어쨌든 일행은 호텔에 도착했다.
호텔에 대충 짐을 풀어 놓은 일행은 각자의 방식으로 쉬기 시작했다.
하지만 현석은 그렇게 쉴 생각이 전혀 없었다.
현석이 호텔 로비를 지나 밖으로 나가려는데, 안내인이 다가왔다.
“어디 가시는지 말씀해주시면 바로 모시겠습니다.”
안내인의 뒤로 그의 부하직원으로 보이는 자들이 십여 명이나 있었다. 아마 그들 중 하나를 붙여 주려는 모양이었다.
안내인은 그렇게 물으며 통역을 찾았다. 한데 현석 근처에는 통역이 없었다.
그가 잠깐 당황하는 사이 현석이 입을 열었다.
“던전에 한 번 가보고 싶다.”
“오! 러시아어를 아주 능숙하게 하시는군요. 던전에 가 보고 싶으시다고요? 바로 안내해드리겠습니다.”
안내인이 뒤에 있는 부하직원들에게 눈짓을 하니 그 중 한 명이 부리나케 달려와 현석 앞에 섰다.
“제가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현석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몸을 돌려 호텔에서 나갔다. 안내하기 위해 따라온 사내가 서둘러 현석을 앞질러갔다.
“제가 차를 가져오겠습니다. 잠시만 여기서 기다려 주십시오.”
그는 황급히 달려가 주차장에서 차를 끌고 와 호텔 로비 앞에 세웠다.
현석이 차에 타자, 차가 출발했다.
사내의 운전 실력은 상당했다. 차는 빠르게 목적지를 향해 달려갔다.
던전은 호텔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었다.
던전 근처를 거대한 철조망과 콘크리트 담장으로 둘러 놨는데, 아마 저 안에 들어가면 각종 편의시설이 간이로 만들어져 있을 것이다.
“다 왔습니다.”
사내는 차에서 내려 현석을 담장에 유일하게 난 문으로 데려갔다.
문은 제법 컸다. 그리고 총을 든 사내들이 지키고 있었다. 검은 양복을 입은 사내들이었는데, 분위기가 절대 군인이나 평범한 경비원은 아니었다.
아마 마피아이리라.
물론 현석은 신경 쓰지 않았다. 어차피 상관 없는 일이고, 관여 하고 싶지도 않았다.
안으로 들어가니 던전의 모습이 보였다.
여타 다른 개별 던전과 전혀 다르지 않았다. 브론즈 등급의 크기였고, 회전 속도도 느렸다.
하지만 저 안에 들어가면 상상을 초월하는 광경이 펼쳐져 있을 것이다.
현석은 일단 던전의 이름부터 확인했다.
[불의 대지]
이름은 생각보다 많은 정보를 내포하고 있다. 불의 대지라는 이름을 보니 저 안이 얼마나 뜨거울지 짐작할 수 있었다.
현석은 던전에 천천히 다가갔다.
그러자 안내하던 사내가 따라가며 조심스럽게 물었다.
“설마…… 혼자 들어가시려는 건 아니죠?”
현석이 걸음을 멈추고 고개를 돌려 사내를 쳐다봤다.
“그럼 안 됩니까?”
“안 되는 건 아닙니다만…… 굉장히 위험합니다.”
현석은 담담하게 사내를 쳐다봤다. 사내는 플레이어가 아니었다. 그러니 안이 진짜 위험한지 아닌지 확인조차 못해봤을 것이다.
“안에 들어갔던 사람 중에 멀쩡히 나온 건 반도 안 됩니다.”
“깊이 들어가지만 않으면 될 겁니다. 입구가 어디 도망가는 것도 아닌데.”
“그게…… 도망간답니다.”
사내의 말에 현석이 눈을 반짝였다. 이런 얘기는 아직 듣지 못했다.
사실 회귀 전에는 입구가 달라지는 던전도 자주 가봤다. 심지어 현석은 입구를 이동시킬 수도 있지 않은가.
“던전 입구가 사라진단 뜻입니까?”
“예. 저도 듣기만 한 거라서 정확히는 모릅니다만, 일단 들어가면 나오는 출구가 없다고 합니다.”
지금까지 던전 공략을 한두 번 시도하진 않았을 것이다. 그렇다면 그에 대한 정보도 분명히 존재한다.
“출구의 위치를 정리해 놓은 정보가 있습니까?”
“있다고 들었습니다. 다만…… 지금 그 정보는 그롬 길드의 마스터께서 갖고 계십니다.”
현석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다시 던전으로 향했다.
사내가 기겁을 하며 현석을 붙잡았다.
“제가 말씀 드렸지 않습니까, 위험하다고.”
“괜찮습니다.”
“제가 안 괜찮습니다. 당신에게 무슨 일이 생기면 전 죽습니다.”
비유적 표현이 아니라 아마 정말로 죽을 것이다. 사내의 얼굴에 떠오른 공포를 보면 분명했다.
하지만 현석도 안에서 확인할 것이 분명히 있었다. 그래야 레드드래곤 길드의 생존률을 높일 수 있지 않겠는가.
현석은 고개를 힐끗 돌려 던전까지의 거리를 가늠했다. 그리고 고개를 한 번 끄덕인 다음 그곳을 향해 그대로 점프했다.
사내가 어어 하는 사이 현석의 몸이 던전으로 쏙 빨려들어갔다.
사내의 얼굴이 사색으로 변했다.
그는 그 자리에 주저앉아 망연자실한 표정으로 던전만 하염없이 바라봤다.
* * *
던전에 들어간 현석은 사방에서 몰려오는 지독한 열기에 눈살을 찌푸렸다.
만일 보통 플레이어가 여기 들어오면 이 뜨거움에 깜짝 놀랄 것이다. 하지만 현석에게 이 정도 열기는 그저 덥기만 할뿐 별다른 위해를 주지 못했다.
주위를 둘러봤다. 역시 입구는 없었다. 하지만 현석은 걱정하지 않았다.
이런 종류의 던전을 몇 번이나 겪어봤다. 입구가 달라지는 던전에는 몇 가지 패턴이 존재했다.
얼핏 보면 무작위인 것 같지만 실제로는 정확한 규칙이 존재했다.
현석은 일단 마력을 퍼트리며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다른 건 몰라도 외부에서 안으로 들어오면 무조건 처음 시작은 이 자리가 될 것이다. 그러니 이 주변 정찰이 가장 중요했다.
사방에서 뜨거운 마력이 느껴졌다. 마수들이었다.
‘불고양이들이로군.’
이 안에 주로 있는 마수가 불고양이인 모양이었다. 하지만 이렇게 광활한 던전에 주력 마수가 그거 하나일 리 없었다.
‘불까마귀!’
불까마귀들도 보였다.
현석은 굳이 그 마수들과 싸우지 않았다. 최대한 마력을 감추고 이동했다.
저놈들은 한 번 싸움이 시작되면 모조리 몰려오는 습성이 있었다.
지금 현석의 목표는 근방의 마수들을 파악하고 안전장치 몇 개를 마련해 놓는 것이었다.
주변을 샅샅이 살피며 마수의 분포를 확인한 현석은 문득 이 던전의 왕이라 할 수 있는 피닉스를 한 번 보고 싶었다.
‘지금 내가 일대일로 싸우면 과연 이길 수 있을까?’
피닉스는 뇌룡보다 더 강한 마수였다. 하지만 뇌룡을 상대할 때의 현석과 지금의 현석은 확연히 달라졌다.
현석은 류지혜를 버퍼로 각성시키면서 가로막은, 혹은 앞으로 가로막을 예정인 벽 몇 개를 단숨에 부숴 버렸다.
이제 남은 건 단순 레벨업뿐이었다.
그러니 피닉스와도 한 번 붙어볼 만하지 않을까?
현석은 그런 생각을 하다가 피식 웃었다.
‘말도 안 되는 생각을 하고 있군. 혼자 피닉스랑 싸우는 미친 짓을 지금 해선 안 되지.’
현석은 할 일을 서둘러 마쳤다. 그리고 출구를 찾았다.
출구를 찾는 건 어렵지 않았다. 마수들에게 들키지 않고 이동하느라 시간이 좀 걸린 걸 빼면 아주 순조로웠다.
“이걸…… 어째야 하나…….”
현석은 난감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하지만 목소리와 달리 표정과 눈빛에는 기대감과 약간의 희열이 맺혀 있었다.
출구를 막고 있는 거대한 마수가 현석의 눈앞에 이글이글 타오르고 있었다.
< 불의 대지 1 > 끝
ⓒ 김강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