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블러디퀸 >
“아니, 내가 그렇게 무섭게 생겼나? 나는 나름대로 잘 생겼다고 생각했는데.”
임형석은 거울을 보며 얼굴을 이리저리 돌려 확인했다.
“이렇게 사내다운 얼굴 찾기가 어디 쉬운 줄 아나.”
투덜거림 속에 짜증이 섞여 있었다.
아까 자신의 웃음을 보고 오줌을 지린 사내 때문에 기분이 정말 안 좋았다.
사실 그 사내는 여러 가지 일이 복합적으로 작용해 오줌을 지린 거였지만, 임형석이 보기엔 그의 미소가 무서워서 그런 걸로밖에 안 보였다.
현석도 옆에서 살짝 동조했다.
“무서워도 계속 웃으시는 게 더 보기는 좋습니다. 아예 무표정하면 그냥 무섭기만 한 게 아니라서요.”
“뭐? 너 그게 무슨 뜻으로 하는 얘기냐?”
“말 그대로의 뜻입니다.”
표정 하나 안 변하고 말하니 농담인지 진담인지 구분도 가지 않았다.
“네놈이 농담을 할 리는 없으니 진심이렷다? 아까 네놈이 이긴 걸로 착각하는 모양인데 막판에 충격파만 터졌어도 눕는 건 네놈이었어! 알아?”
“충격파에 대비하고 있었습니다.”
“대비하긴 개뿔이! 내 앞차기가 다음에 준비되어 있었거든? 충격파로 바늘구멍만 한 빈틈만 만들어져도 넌 끝났어!”
“앞차기도 예상하고 있었습니다.”
“웃기시네! 그걸 어떻게 예상해? 네놈이 내 머릿속에라도 들어갔다 왔어?”
“그 자세에서 나올 수 있는 공격이 앞차기밖에 없었으니까요.”
“아니야! 박치기도 할 수 있었어!”
“안 될 겁니다. 오히려 시야를 잃어서 제 반격에 당했겠죠.”
“진짜 그런지 여기서 한 판 더 붙어볼까?”
현석은 대답하지 않고 화장실에서 나갔다.
“도망치는 거냐?”
임형석은 마지막으로 거울을 한 번 힐끗 확인하고는 서둘러 현석의 뒤를 따랐다.
“도망치는 거냐니까!”
화장실에서 나온 현석은 근처에 있는 벤치에 앉았다. 임형석도 한바탕 소리라도 치고 나니 기분이 좀 풀렸는지 그 옆에 앉았다.
“그나저나 이 얼굴 어쩌냐? 여권이랑 얼굴 다르면 비행기 못 타는 거 아냐?”
“못 탈 겁니다.”
그냥 못 타는 걸로 끝나는 게 아니라 진짜 큰 문제가 될 수도 있었다.
“그럼 어쩌게? 비행기 날개에 매달려서라도 갈까?”
“아마 하늘 높이 올라가면 숨을 못 쉬어서 떨어질 겁니다.”
“그럼 어쩌자고? 바다에 뛰어들어서 헤엄이라도 칠까?”
임형석이 답답한 표정을 지었다. 그 표정 깊은 곳에는 미안함이 살짝 섞여 있었다.
사실 마계에서 현석과 한 판 붙지만 않았어도 이런 꼴이 될 일은 없었다.
현석과 싸우다보니 너무 흥이 났을 뿐이었다.
싸움이 더 격렬해졌고, 주고받는 공방이 더욱 지독해졌다.
그 과정에서 얼굴에 했던 변장이 망가져 버렸다.
막사에서 검은 병사들과 싸울 때도, 또 마계에서 마수와 마족들을 족칠 때도 망가지지 않은 변장이었다.
그러니 현석과 얼마나 치열하게 싸웠는지 알 수 있었다.
“도와줄 사람을 찾아봐야죠.”
“도와줄 사람? 그런 사람이 있었어?”
현석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미 한 번 만났지 않습니까. 아마 도와줄 겁니다. 그래야 친구로 남을 수 있을 테니까.”
현석이 그렇게 말하며 한쪽을 쳐다봤다.
그곳에는 놀란 표정을 지은 신사, 웨인이 서 있었다.
“제가 여기 있는 걸 어떻게 아셨습니까?”
웨인은 믿을 수가 없었다. 자신의 은신은 그저 단순히 몸을 감추는 기술이 아니었다.
그건 아주 특별한 스킬이었다.
지금까지 그 어떤 플레이어도 깨뜨리지 못한 걸 현석은 단번에 깨뜨렸다.
대체 어떻게 그런 게 가능하단 말인가.
웨인은 새삼스러운 눈으로 현석을 바라봤다. 어쩌면 자신이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대단한 레벨의 플레이어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현석은 대답대신 그저 웨인을 가만히 쳐다보기만 했다. 그의 은신 스킬이 대단하긴 했지만, 마계에서 겪은 정찰 마족보다는 못했다.
일단 정찰 마족은 마력까지 감췄는데, 웨인은 스킬에 쓰이는 마력의 미약한 흐름은 감추지 못했다.
숙련도가 올라가면 그것도 감출 수 있게 될 것이다. 물론 아직 그 정도 숙련을 쌓으려면 멀었지만 말이다.
웬인은 머쓱한 표정으로 말했다.
“물론 해드릴 수 있습니다.”
현석은 그 말에 대꾸하지 않았다. 말에 묘한 뉘앙스가 섞여 있었다.
“그런데 궁금한 게 하나 있습니다.”
“말해줄 수 없습니다.”
웨인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뭐가 궁금한지 묻지도 않았는데 다짜고짜 거절부터 하다니.
“조건을 걸 생각이면 그냥 돌아가시죠.”
웨인은 할 말을 잃고 입을 다물었다. 그제야 현석이 처음 했던 말이 떠올랐다.
현석은 처음에 친구라는 단어를 입에 담았다.
확실히 친구 사이에 조건을 건다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긴 했다.
친구가 비밀을 지키고 싶다면 지켜주는 게 도리이기도 했고.
“일단…… 퀸부터 만나보시죠. 답은 그때 드리겠습니다.”
웬인의 말에 현석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임형석을 쳐다봤다.
시종일관 프랑스어로 진행된 대화였기에 임형석은 전혀 알아듣지도 못하고 끼지도 못했다.
그래서 답답하던 차였는데, 현석이 이렇게 쳐다보니 반가운 생각마저 들었다.
“뭐래? 도와준대?”
“일단 따라오랍니다.”
“그래? 그럼 가야지.”
임형석도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설사 상대가 함정으로 이끄는 거라 해도 환영이었다. 무슨 일이 있어도 몸 하나 빼낼 자신이 있었다.
물론 무슨 일이든 장담해선 안 되고, 또 긴장감을 잃어서도 안 된다.
임형석은 웨인을 따라 성큼성큼 걸으며 가슴에 착용한 대지의 갑주세트를 쓰다듬었다.
이걸 얻고 부터 자신감이 훨씬 강해졌다.
‘정신 바짝 차려야지.’
그 자신감이 득이 될지 해가 될지 당장은 알 수 없다. 하지만 정신을 차리고 있으면 득이 되게 만들 수 있으리라.
임형석이 힐끗 시선을 돌려 옆에서 나란히 걷고 있는 현석을 바라봤다.
자신감이 더 강해졌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현석과 함께 있는데 무슨 일이 생기겠는가.
임형석이 생각하기에 현석은 다른 플레이어들과는 전혀 달랐다.
‘저놈은 그냥 단순한 플레이어가 아니야.’
그래서 더더욱 믿음직스러웠다.
‘아오, 하필 그때 왜 충격파가 안 터져서!’
갑자기 아까의 싸움이 떠올랐다. 임형석은 웨인을 뒤따라가며 가벼운 주먹질을 허공에 날리기 시작했다.
퉁! 퉁! 퉁! 퉁! 퉁!
허공에 작은 충격파가 연이어 생겨났다.
임형석의 입가에 작은 미소가 떠올랐다. 이렇게 시간을 아껴가며 수련할 수 있다는 건 아주 자그마한 그만의 행복이었다.
* * *
“이렇게 금방 다시 만나게 될 줄은 몰랐네요. 부탁할 게 있다고요?”
“꼭 들어주지 않아도 됩니다. 생각해보니 더 확실하게 도와줄 사람이 떠올랐으니까요.”
“그 사람이 누군지는 모르지만 여기 이집트 안에서 저보다 더 제대로 도와줄 수 있는 사람은 없을 걸요?”
블러디퀸은 자신만한하게 말했다.
그게 사실이었으니까. 설사 이집트의 대통령이나 총리가 도와준다고 해도 블러디퀸보다 확실하지는 않을 정도였다.
블러디퀸의 피라밋 암시장은 그저 플레이어 세상에만 영향을 미치는 게 아니었다.
그들이 가진 무시무시한 정보력은 정말로 큰 무기였다.
“어쨌든 얘기를 계속해보죠. 뭘 도와드리면 되는 거죠? 아, 대가는 필요 없어요. 당신과는 친구가 되어야 한다고 여기서 계속 아우성이네요.”
블러디퀸이 손가락으로 자신의 머리를 톡톡 두드리며 빙긋 웃었다.
그저 감만으로 친구가 되겠다는 뜻이었다.
현석은 그걸 거절하지 않았다. 블러디퀸과 친구가 된다면 상당히 큰 힘이 되어줄 테니까.
특히 그동안 현석의 약점 중 하나였던 해외에서의 정보력을 크게 보강할 수 있었다.
“한국으로 돌아갈 여권이 필요합니다.”
“여권이라…… 왜 굳이 변장까지 해서 여길 왔죠? 사실 조사를 좀 했는데…… 그럴 필요가 별로 안 느껴지던데 말이에요.”
“시간도 없고 귀찮아서요.”
“예?”
블러디퀸은 상상을 초월하는 현석의 대답에 잠시 멍해졌다. 하지만 이내 크게 웃었다.
“아하하하하하! 정말 재미있는 분이로군요. 좋아요. 흔쾌히 도와드리죠.”
블러디퀸은 그렇게 말하고는 이번엔 임형석에게 시선을 돌렸다.
“한데 이쪽 분은…… 프랑스어를 잘 못하시는 모양이네요. 아랍어도 그렇고. 혹시 영어는 하시나요?”
블러디퀸은 순식간에 언어를 바꾸며 같은 말을 반복했다.
놀랍게도 영어는 물론이고 일본어와 중국어까지 구사했다. 하지만 아쉽게도 한국어는 하지 못했다.
“이런, 표정을 보니 다른 말은 아예 못 하시나보군요. 뭐, 상관없어요. 다음에 볼 때는 제가 한국어를 공부해 놓도록 하죠.”
“한국어를 공부한다고요?”
현석은 잠시 놀란 표정으로 블러디퀸을 보다가 이내 고개를 돌려 임형석을 쳐다봤다.
임형석은 여전히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멀뚱멀뚱 눈만 꿈뻑이고 있었다.
“왜요? 친구를 위해 언어 하나 익히는 게 그리 놀랄 만한 일인가요?”
블러디퀸은 우아한 미소를 머금으며 말을 이었다.
“제가 언어를 익히는 능력이 제법 뛰어나답니다.”
그녀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 말했지만, 현석은 뭔가 묘한 분위기를 느꼈다.
하지만 이내 상념을 털어버렸다. 분위기가 무슨 상관인가. 그저 블러디퀸이 이쪽에 호의를 가졌고, 친구가 될 확률이 높다는 걸 확인했으면 됐다.
더불어 여권 문제가 말끔히 해결되었다.
중요한 건 그런 것들이다.
“호의 감사드립니다.”
그걸로 대화는 끝났다. 블러디퀸은 끝까지 현석과 임형석이 그곳에서 뭘 했는지 묻지 않았다.
그녀는 이렇게 다시 만나 서로의 호감을 확인한 것만으로 충분히 만족했다.
“나중에 한국에 놀러갈 일이 있으면 안내를 부탁드려도 될까요?”
블러디퀸은 임형석을 보며 그렇게 물었다.
“지금 뭐라고 하는 거냐?”
임형석은 말을 못 알아듣는 게 이렇게 답답할 줄은 몰랐다. 지금까지 여기 있으면서 한 번도 그런 생각이 안 들었는데 갑자기 가슴이 너무나 답답해졌다.
‘이거 프랑스어라도 배워야 하나?’
물론 진짜 배울 생각은 없었다. 그런 생각이 들 정도로 답답했다는 뜻이다.
현석은 블러디퀸이 해준 말을 한 자도 틀리지 않게 정확히 번역해주었다.
그 말을 들은 임형석이 눈을 번쩍 뜨며 말했다.
“한다고 해! 당연히 해야지! 언제 온대?”
임형석의 반응을 확인한 블러디퀸이 우아하게 웃으며 말했다.
“조만간 갈게요.”
임형석은 감으로 그 말을 알아들었다. 그래서 웃으며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아주 끝내주는 순댓국을 먹여주지.”
현석은 임형석의 말을 들으며 과연 저 여자가 순순히 순댓국을 먹을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금세 지워 버렸다.
지금 중요한 건 그런 게 아니었으니까.
“여권은 언제 주실 수 있습니까?”
현석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웨인이 다가왔다. 그리고 정중한 자세로 두 개의 여권을 내밀었다.
여권을 확인한 현석이 묘한 표정을 지었다.
“얼굴이…… 다르군요.”
웨인이 빙긋 웃으며 말했다.
“우리 쪽 분장사의 실력도 만만치 않습니다.”
현석은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큰 암시장을 운영하는 사람이라 그런지 일처리가 아주 확실했다.
* * *
현석과 임형석은 비행기에 올랐다. 비행기에 타기 직전, 임형석은 뭔가 미련이라도 남은듯 고개를 돌려 뒤를 확인했다.
그리고 저 멀리 블러디퀸이 서서 손을 흔드는 모습을 보고는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임형석은 손을 한 번 흔들어주고는 힘차게 비행기 안으로 들어갔다.
물론 그 와중에도 남은 한 손으로는 끊임없이 충격파 만드는 연습을 하고 있었다.
퍽퍽퍽퍽퍽!
임형석의 손가락 끝에서 작은 공기의 파동이 연신 만들어지고 있었다.
< 블러디퀸 > 끝
ⓒ 김강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