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세 번째 원정 2 >
“이거…… 뭔가 좀 거북한데?”
임형석은 고개를 이리저리 꺾으며 몸을 풀었다. 그리고 호흡을 상당히 조심스럽게 했다.
공기에 뭔가 이상한 게 섞여 있는 느낌이었다. 아니, 온몸을 짓누르는 거대한 무언가가 있었다.
그게 움직임이나 호흡을 계속 방해했다.
“마계라서 그런 겁니다. 여긴 어둠 성향이 없는 사람은 살기 어려운 곳입니다.”
“어둠 성향? 나도 그리 깨끗하고 밝은 놈은 아닌데?”
“그런 식으로 성격이나 마음이 어두운 사람을 말하는 게 아니라 속성을 말하는 겁니다. 아마 플레이어가 아니라서 모르실 겁니다.”
“하여간 그놈의 플레이어들이 세상을 다 망쳐놓고 있다니까.”
임형석은 그렇게 투덜거리며 주위를 둘러봤다.
“그런데 여기 뭐가 있긴 있는 거냐?”
근처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게다가 사방이 황무지였다. 이것만 봐서는 뭔가 있을 것 같지가 않았다.
“빨리 싸우고 싶은데…….”
임형석은 주먹을 쥐었다 폈다 하며 주위를 다시 한 번 살폈다. 그의 눈이 연신 번득였다.
“저 쪽으로 조금만 더 가시죠.”
현석은 황무지 한쪽을 손으로 가리키며 말했다. 정말 이곳은 황무지 밖에 없는 곳이었다.
심지어 지평선까지 보였다.
무거운 공기와 분위기가 마계라는 걸 알려주고 있을 뿐, 그게 아니었다면 마계인지 아닌지도 구분하지 못했을 것이다.
하지만 여기에 마수와 마족이 살고 있다는 건 확실했다. 현석은 사방으로 마력을 뻗어 그것을 확인했다.
하지만 아무리 돌아다녀도 마족이나 마수의 기척이 걸려들지 않았다.
‘어딘가에 숨었나?’
만일 숨었다면 어디 숨었을까? 사방이 황무지로 쫙 깔린 곳에서 숨을 데가 어디 있겠는가. 답이 너무나 뻔했다.
현석은 마력의 방향을 아래로 돌렸다.
마력을 땅 아래로 밀어 넣는 건 생각보다 쉽지 않았다. 이곳이 마계이기 때문이다.
마계는 모든 것에 어둠의 마력이 깃들어 있다. 그 어둠의 마력을 뚫고 자신의 마력을 적셔야 하는 것이다.
처음에는 힘들었지만 일단 한 번 요령을 터득하고 나니 그 뒤로는 쉽게 마력을 아래로 퍼트릴 수 있었다.
그렇게 아래쪽을 탐사하며 황무지 곳곳을 돌아다녔다.
기대에 찬 눈으로 현석을 따라다니던 임형석은 결국 자리에 주저 앉았다. 아무리 따라다녀 봐야 당분간 싸울 수 있을 것 같지가 않아서였다.
현석이 돌아보자 임형석이 손을 휘휘 내저었다. 혼자 가라는 듯이.
“나중에 성질부리시면 안 됩니다.”
“성질부릴 일이 없을 것 같은데?”
“그 말, 꼭 기억하십시오.”
현석은 그렇게 말하고 혼자서 휘적휘적 걸어갔다.
그 뒷모습을 가만히 바라보던 임형석이 결국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에이, 젠장. 하여튼 사람 쉬는 꼴을 못 봐.”
임형석을 서둘러 현석을 따라갔다.
“야, 이놈아! 같이 가자!”
이내 다시 하나로 뭉친 두 사람은 계속 걸어 다녔다. 딱이 어디를 정하고 움직인 게 아니라 여기저기 그냥 마음 내키는 대로 다녔다.
아니, 임형석이 보기엔 딱 그랬다.
하지만 현석이 의미 없이 이 안을 돌아다닐 리 있겠는가. 현석은 지금 마력을 퍼트려 마족이나 마수를 찾고 있었다.
아마 틀림없이 지하에 있을 테니 지하를 넓고 깊에 확인하면 된다.
그저 숲 같은 곳에 숨은 놈들을 찾는 것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난이도가 높았다.
하지만 이렇게 촘촘한 그물을 그리는 것처럼 구석구석 다니는데 마수나 마족의 흔적을 발견 못 하고 그냥 지나칠 수는 없었다.
현석은 걸음을 멈추고 눈을 빛냈다.
역시 예상했던 대로 땅속에 숨어 있었다. 그것도 아주 깊은 땅속에.
“슬슬 시작해 볼까요?”
현석의 말에 임형석이 뚱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봤다. 대체 그게 무슨 생뚱맞은 소리냐는 듯이.
하지만 현석은 그런 임형석의 반응에 전혀 아랑곳하지 않고 계획대로 일을 진행했다.
일단 발과 다리에 마력을 집중했다. 막대한 마력이 발에 모였고, 종아리와 허벅지에 그 절반쯤 되는 마력이 모였다. 그리고 나머지 마력은 허리에 모여들었다.
그렇게 마력 분배를 한 현석은 발을 들었다가 강하게 바닥을 내리 찍었다.
그와 동시에 마력이 땅으로 쏟아져 들어갔다.
쿠웅!
둔중한 울림이 울리며 사방으로 충격파가 퍼져 나갔다. 정말로 강렬한 일격이었다.
하지만 땅으로 파고든 마력의 힘에는 비할 바가 아니었다.
마력의 파동이 땅을 타고 깊이 들어갔다. 위에서 만든 진동을 고스란히 담아 아래로 가져간 것이다.
“뭐 하는 거냐?”
“어르신도 하고 싶으면 해도 됩니다.”
“내가 왜?”
임형석은 그렇게 물었다가 뭔가가 떠올랐다는 듯 눈을 크게 떴다.
“아하! 이제 알겠다. 흐흐흐흐. 이 음흉한 놈.”
임형석은 심호흡을 했다. 그리고 단전의 기를 이용해 발을 높이 들었다가 바닥을 찍었다.
쿠웅!
현석과 아주 비슷한 방식이었다. 다만 마력이 아니라 임형석의 기가 움직였다는 것만 다를 뿐이었다.
“후우. 아무래도 난 한 방 이상은 못 날리겠는데? 나중에 싸우려면 일단 회복부터 해둬야지.”
임형석은 그렇게 말하고는 그 자리에 주저 앉아 지그시 눈을 감았다.
마계에는 어둠의 힘이 가득했지만 그렇다고 보통 기운이 아예 없는 건 아니었다.
심지어 빛의 힘도 일부지만 섞여 있었다.
임형석은 그 중에서 깨끗한 기운만 쏙쏙 골라서 받아들였다. 그렇게 모은 기운을 단전으로 보내 차곡차곡 쌓았다.
그의 얼굴에 앞으로 있을 싸움에 대한 기대감이 진득하게 떠올랐다.
현석은 임형석을 힐끗 쳐다보고는 다시 아래쪽에 신경을 집중했다.
신호를 보냈으니 반응이 올라올 것이다. 현석은 땅속 깊은 곳에 있는 놈들을 계속해서 살폈다.
또 한편으로는 어느 정도 깊이에 넓게 마력을 퍼트려 어디서 뭐가 올라오더라도 미리 알 수 있게 조치를 취했다.
‘온다!’
드디어 놈들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아마 멀쩡한 상태는 아닐 것이다.
방금 현석과 임형석이 한 발 구르기는 그냥 대충 힘만 준 게 아니었다.
파괴력을 기에 담아서 내려 보냈다. 아마 거기 제대로 걸려든 놈들은 엄청난 충격을 받았을 것이다.
그리고 지금 마구 올라오고 있는 저놈이 아마 가장 큰 타격을 받은 것이 분명했다.
그러니 저렇게 광분해서 미친 듯이 땅을 파고 올라오는 것 아니겠는가.
꽈드득!
“꾸웨에에엑!”
마수 한 마리가 땅을 파고 올라와 모습을 드러내자마자 분노가 가득 담긴 포효를 토해냈다.
그놈의 생김새는 두더지를 꼭 닮았다. 하지만 두더지라기엔 지나칠 정도로 거대했다. 집채만 했다.
현석은 그대로 달려가 반쯤 몸을 드러낸 두더지의 배에 강렬한 일격을 먹였다.
꽈득!
진마검이 두더지의 배를 깊숙하게 가르고 들어갔다. 그리고 그 안에서 마력의 폭발이 일어났다.
꽈앙!
두더지 한 마리가 산산조각 났다.
“야, 이놈아! 그걸 네놈이 죽이면 어떡해!”
언제 일어났는지 임형석이 발끈해서 방방 뛰었다. 하지만 현석은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아마 임형석도 이제 저럴 시간이 없게 될 테니까.
사방에서 두더지들이 불쑥불쑥 솟아났다. 하나같이 강렬한 마력을 품고 있는 마수들이었다.
“으하하하! 다 나한테 덤벼!”
임형석이 크게 웃으며 달려들었다.
현석은 그런 임형석을 내버려두고 날카롭게 벼린 감각을 동원해 사방을 훑어봤다.
두더지 마수는 비록 강력하긴 하지만 상대하기 어렵지 않았다.
땅에서 갑자기 솟아나오며 공격하는 방식이 까다로운 건데 저렇게 한꺼번에 등장하면 오히려 상대하기가 편했다.
이런 싸움을 하기 위해서 일부러 저들을 도발해 올라오게 만든 것이다.
하지만 저놈들은 에피타이저에 불과했다. 진짜는 아직 등장하지도 않았다.
그리고 언제 등장하는지도 알 수 없었다. 기척이 전혀 없었다. 하지만 분명히 존재했다.
그렇지 않다면 현석의 등줄기가 이렇게 끊임없이 서늘하게 식을 리가 없으니까.
‘뭐지? 은신형 마족인가?’
아마 마수는 저 두더지들이 전부인 것 같았다. 마계라고 반드시 마족이 있으란 법은 없지만 현석은 여기 마족이 분명히 있을 거라 믿었다.
그리고 그 마족은 지금 모습을 감추고 호시탐탐 기회를 노리는 중이리라.
현석의 눈에 정신없이 싸우는 임형석의 모습이 들어왔다.
‘나보다는 저쪽을 기습하는 게 더 편하긴 하겠군.’
그런 생각이 들자마자 현석은 눈에 마력을 집중했다. 그리고 심안을 최고조로 발동시켜 임형석 주변을 확인했다.
무수한 [바위두더지]의 이름과 설명이 보였다. 그리고 그 사이에 희미해서 하마터면 놓칠 뻔한 이름도 함께 섞여 있었다.
[정찰 마족]
[투명화 능력을 쓸 수 있는 마족. 투명화 능력을 쓰면 모든 기척과 흔적이 사라진다. 공격을 하거나 받기 전까지 투명화가 유지된다.]
그놈은 임형석 바로 뒤에 있었다. 마력을 얼마나 품고 있는지도 확인할 수가 없었다.
현석이 막 임형석에게 조심하라고 외치려는 순간, 한창 앞에 있는 두더지의 얼굴을 두 주먹으로 마구 두드리던 임형석이 갑자기 뒤로 팔을 휘둘렀다.
부웅! 빠악!
마족의 투명화가 단숨에 풀리며 뒤로 날아갔다. 모습을 드러내니 마족의 마력을 파악할 수 있었다.
‘별로 강한 놈은 아니로군.’
투명화 능력만 아니면 정말 아무것도 아닌 놈이었다. 현석은 일단 저놈을 잡기로 결정했다.
현석의 몸이 빠르게 이동해 어느새 마족의 뒤를 잡았다.
마족은 막 다시 투명화 능력을 쓰려는 찰나였다. 하지만 현석의 손이 조금 더 빨랐다.
꽈득!
“꾸웍!”
마족이 기괴한 소리를 내며 몸을 파드득 떨었다. 엄청나게 놀란 모양이었다.
“잡고 있으면 투명화 못 쓰지?”
“키에에에엑!”
마족이 기괴한 비명을 내질렀다. 현석은 마족이 동료를 부른다는 걸 직감적으로 알아차렸다.
‘하나가 아니었나보군. 그나마 다행이야.’
마족은 많이 잡으면 잡을수록 좋다. 특히 이런 특수능력을 가진 마족은 레벨업에 제법 큰 도움이 된다.
임형석은 잠시 현석 쪽을 힐끗 쳐다봤다. 하지만 이내 다시 두더지들 잡는 데 집중했다.
그가 판단하기에 안 보이는 마족 보다는 덩치 크고 힘도 좋은 두더지가 훨씬 싸울 만한 가치가 있었다.
그리고 저 마족은 이미 한 대 때렸다. 손맛이 별로였다. 너무 허약해서 두어 대 맞으면 죽어 버릴 것 같았다.
‘떼로 몰려나오면 좀 재미있긴 하겠네.’
안 보이고 기척도 없는 놈들이 잔뜩 몰려오면 그놈들과 싸우는 재미가 제법 괜찮을 것이다.
하지만 보아하니 그럴 것 같지가 않았다.
이럴 때는 그냥 두더지나 잡는 게 남는 장사다.
임형석이 두더지에 집중하는 사이 현석은 마족의 목을 움켜쥐고 천천히 싸움터를 벗어나기 시작했다.
여기서 싸울 필요는 없었다. 임형석은 임형석 대로 싸우고 자신은 자신 대로 싸우는 게 낫다. 서로 싸움이 얽히면 복잡하고 위험해지니까.
“키에에에엑!”
마족은 끊임없이 괴성을 내질러 동료를 불렀다. 몇 놈이나 올지 모르지만 절대 방심해선 안 된다는 건 알겠다.
현석은 적당한 곳에서 자리를 잡고 섰다.
그리고 감각을 예리하게 다듬었다. 하지만 아무 기척도 느껴지지 않았다. 하지만 다들 다가오고 있음이 분명하다. 몇 놈인지는 몰라도.
정말 기척과 흔적을 감추는 능력만큼은 어떤 존재보다 뛰어난 듯했다.
이런 놈들을 야수 같은 본능으로 잡아낸 임형석이 새삼 대단해 보였다.
현석은 손에 쥐고 있던 마족의 목을 그대로 부러뜨렸다.
우드득!
마족은 그것만으로는 절대 죽지 않는다. 현석은 마족을 바닥에 던지며 진마검을 내질렀다.
꽈득!
마족의 심장이 박살 났다. 그러자 강렬한 마력의 파동이 느껴졌다. 마족이 죽은 것이다. 얻을 게 있나 확인해 봐야 하지만 그건 나중 일이다.
현석은 진마검을 가만히 늘어뜨린 채 감각을 날카롭게 벼렸다.
다가오는 기척을 읽을 수는 없지만 상대할 방법이 아예 없는 건 아니었다.
현석의 마력과 기세가 물처럼 고요해졌다.
마치 폭풍전야 같은 긴장감이 짙게 내리깔렸다.
< 세 번째 원정 2 > 끝
ⓒ 김강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