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세 번째 원정 1 >
[마계108지역]
그것이 화이트홀의 이름이었다.
‘108? 너무 숫자가 큰데?’
회귀 후 현석은 두 번 마계에 다녀왔다. 그리고 각 지역을 완벽하게 소탕했다.
그때 세웠던 가정 중 하나가 숫자가 적을수록 더 강한 마족이 나온다는 거였다.
이번 마계를 확인해보면 그 가설을 좀 더 입증할 수 있게 될 것이다. 물론 숫자가 이렇게 큰 걸 보니 아닐 가능성이 높아졌다.
어쩌면 이 숫자는 그저 단순한 구분일지도 모른다.
어쨌든 지금 당장 마계에 들어갈 생각은 없었다. 마계는 마계다. 짧은 시간에 해결하긴 쉽지 않을 것이다. 그러니 충분한 준비가 필요했다.
‘하긴…… 준비야 이미 끝난 거나 다름없긴 하지.’
현석은 아공간 안에 항상 몇 년은 먹고 살 수 있을 정도의 식량과 생필품을 보관하고 있었다.
그러니 당장 가도 그만이다. 싸움에 필요한 장비도 마찬가지로 언제든 꺼낼 수 있었다. 물론 지금은 투명 던전을 클리어 하기 위해 왔으니 장비를 착용 중이기도 했고.
던전에서 나오는 각종 재료를 이용해 만든 소모품이 문제인데, 그것 역시 재고가 아직 넉넉했다.
특히 간이 힐링포션은 제법 많이 준비해뒀다. 또한 만일의 사태에 대비해 임형석을 치료할 수 있는 재료들도 제법 많이 준비했다.
그러니 당장 마계에 가도 사실 상관은 없었다.
‘일단…… 상의나 해볼까?’
현석은 그렇게 생각하며 건물에서 나갔다. 별로 상의가 필요할 것 같진 않았지만 말이다.
밖으로 나온 현석은 병사들이 떨어뜨린 장비로 이루어진 언덕을 볼 수 있었다.
그리고 임형석은 그 꼭대기에 양팔을 자신의 무릎에 대고 앉아 현석을 가만히 내려다보고 있었다.
척 보기에도 뭔가 있어보이는 멋진 모습이었다. 하지만 그런 건 보통 사람에게나 통하는 거고 현석의 반응은 임형석의 기대와는 많이 달랐다.
“그거 하려고 장비 모아서 그렇게 쌓아두신 겁니까?”
임형석이 머쓱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더니 이내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투덜거렸다.
“하여간 귀여운 맛이 없어. 나이도 어린놈이 어른이 뭘 하면 손뼉도 치고 그래야지. 에잉. 괜히 힘만 뺐네.”
현석은 그런 임형석을 보며 빙긋 웃었다. 그러면서 혹시 다친 데는 없나 확인해봤다. 지극히 멀쩡했다.
“장비는 어떻습니까? 제법 괜찮죠?”
장비 얘기를 하니 임형석의 얼굴에 환한 웃음이 피어났다.
“아주 내 맘에 쏙 든다. 딱 나를 위해 만든 장비 같아. 플레이어들은 다 이런 걸 입고 싸우나?”
“그 중에서도 아주 특별한 겁니다. 아마 어르신한테 그보다 더 맞는 장비 구하기가 쉽지 않을 겁니다.”
“그래? 그렇단 말이지?”
임형석의 입이 귀에 걸렸다. 그는 정말 아이처럼 좋아했다.
대지의 갑주세트는 현석의 말대로 그야말로 누군가 임형석을 위해 만들어 줬다고 해도 믿을 수 있을 정도로 상성이 잘 맞았다.
“그럼 장비 수거하겠습니다.”
현석은 아공간에서 컨테이너박스 하나를 꺼냈다.
그걸 본 임형석이 눈을 빛냈다.
“허어. 참. 정말 신기하단 말이야. 대체 그 큰 게 어디 들어가 있다가 나오는 건지…….”
임형석이 장비를 한데 모아둔 덕분에 생각보다 금방 모든 장비를 컨테이너 박스 안에 넣을 수 있었다.
현석이 그렇게 장비를 싹 수거하자, 임형석이 다가와 물었다.
“저 안에 진짜 강한 놈 하나가 있었던 것 같은데, 네놈이 해치운 거냐?”
현석이 고개를 저었다.
“잘못보신 겁니다.”
“잘못보긴 뭘 잘못 봐? 간만에 소름이 쫙 돋을 정도였는데. 혼자 그런 놈 독식하니 즐겁더냐?”
그 많은 병사와 지휘관을 골로 보내 놓고도 더 강한 적에 대한 갈망과 질투를 보여주는 임형석의 모습은 그야말로 질릴 지경이었다.
하지만 현석은 그런 모습을 보면서도 그저 빙긋 웃었다.
‘정말…… 한결같은 분이긴 해.’
그리고 회귀 전에는 그 한결같음으로 인해 죽음을 맞이해야만 했다.
임형석은 현석을 위해 분노해주고 싸워준 몇 안 되는 사람 중 하나였다.
어쨌든 그건 이제 다시 벌어지지 않을 일이다. 현석은 임형석을 보며 말했다.
“그 소름 돋게 만든 놈이랑 말 몇 마디하고 끝났습니다.”
그 말에 임형석이 반색했다.
“그럼 아직 그놈이 남아 있는 게냐? 허어, 이놈이 이제 제법 사람이 되었구나. 날 위해 그런 배려도 할 줄 알고.”
“죽었습니다.”
임형석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날 놀리려고 이러는 건 아닐 테고…… 하고 싶은 말이 뭐냐? 사람 답답하게 하지 말고 얼른 말해봐.”
“그가 죽으면서 남긴 것이 있습니다. 이제부터 거길 한 번 가보려고 하는데, 어떠십니까?”
“위험한 곳이냐?”
“소름 돋는 놈들이 꽉 차 있을 겁니다.”
임형석의 얼굴이 더없이 밝고 환해졌다.
“당연히 가야지. 어디냐? 당장 안내해!”
현석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고는 돌아서서 다시 건물로 향했다.
왠지 건물 색이 처음보다 더 밝아진 것 같았다. 아니, 더 밝아졌다. 게다가 깨끗해졌다.
그것도 눈에 띌 정도였다. 게다가 아직 끝이 아니라 진행 중이었다.
“어라? 뭔가 좀 이상한데? 그렇지 않으냐?”
임형석도 그걸 느꼈는지 걸음을 멈추고 건물을 바라봤다. 위험한 적과 싸우는 거야 언제든 환영이지만, 저런 이해할 수 없는 장소에 들어가 개죽음 당하는 건 아무리 임형석이라도 두려웠다.
샤아아아아!
사방이 더 밝아졌다. 현석은 그제야 이곳이 원래 다른 투명 던전과는 좀 달랐다는 걸 깨달았다.
좀 더 어둡고 뭔가 음침한 느낌이 섞여 있었다. 원래는 말이다. 한데 그 이상한 점들이 싹 날아가고 있었다.
현석은 그 원인 무엇인지 대충 짐작할 수 있었다.
‘마계화가 진행 중이었군.’
그 차이를 파악하고 나니 원인과 결과를 좀 더 명확하게 추측할 수 있었다.
이곳은 이미 마계화가 진행 중이었다. 한데 그 입구를 현석이 제대로 틀어막으면서 원래의 모습을 되찾은 것이다.
“가시죠.”
현석이 다시 걸음을 옮겼다. 그러자 임형석이 떨떠름한 표정으로 물었다.
“들어가도 괜찮은 거 맞나? 갔다가 괜히 이상한 데 갇히거나 그런 거 아니지?”
물론 현석은 대답해주지 않았다. 그리고 임형석도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두 사람은 건물 안으로 들어가 최상층으로 이동했다.
허공에 떠 있는 화이트홀이 보였다.
사방에 남은 마계의 잔재는 서서히 농도가 옅어지고 있었다. 화이트홀이 빨아들이거나 하는 건 아니었다.
그저 이 던전 자체의 자정능력인 듯했다.
예전에는 그 자정능력으로도 어쩔 수 없을 정도로 많은 마계의 기운이 흘러나왔다는 뜻이다.
‘어쩌면…… 예전에 내가 죽은 다음에 세상에 한 차례 격변이 일어났을 수도 있겠어.’
왠지 그런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어쩌면 이번에 자신이 과거로 되돌아오면서 뭔가 변화가 생겼을 수도 있겠다는 예감이 아주 어렴풋이 들었다.
현석은 상념을 털어내고 화이트홀로 걸어갔다. 그리고 고개를 돌려 임형석을 보며 다시 한 번 확인했다.
“여긴 마계입니다. 정말 가실 겁니까?”
임형석이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이름 한 번 살벌한 게 마음에 드는구나. 물 마시고 뛰어들면 되는 거지?”
임형석은 얼른 마력수를 달라고 듯 손을 내밀며 손을 마구 까딱였다.
현석은 피식 웃으며 마력수가 든 물통을 꺼냈다.
이제 든든한 동료와 함께 하는 세 번째 마계 원정이 시작될 것이다.
현석의 가슴이 평소와 달리 살짝 두근거렸다.
* * *
금발의 중년 여인이 테이블에 놓인 찻잔을 들어 그것을 우아하게 입으로 가져갔다.
“어떻게 됐나요? 좀 알아봤나요?”
그녀의 말에 옆에 조용히 서 있던 신사가 대답했다.
“1차 조사는 끝났습니다. 아무래도 위조 여권인 것 같습니다.”
“위조여권이라고 단정하는 것도 아니고 그런 거 같다니, 웨인답지 않은 대답이네요.”
중년 여인, 블러디퀸의 말에 신사, 웨인은 정중히 허리를 숙이며 말했다.
“상당한 수준의 정보조직이 개입되어 만든 여권으로 보입니다.”
“하여튼 진짜 여권은 아니라 이거죠?”
“진짜 여권은 맞습니다. 다만, 그 안에 있는 인물이 이제 이 세상에 없을 확률이 높을 뿐입니다.”
“그러니까…… 죽은 사람의 여권이란 말인가요?”
“그럴 확률이 높습니다만 아직 거기까지 확인하지는 못했습니다.”
“2차 조사가 마무리되면 그것도 나오겠군요.”
블러디퀸은 찻잔을 테이블에 내려놓고는 고개를 돌려 웨인을 바라봤다.
“표정을 보니 내가 왜 이렇게까지 신경을 쓰나 이해하지 못하는 모양이로군요.”
“죄송합니다.”
웨인이 고개를 숙이며 사과했다. 하지만 블러디퀸은 고개를 저으며 미소 지었다.
“죄송이라니 당치 않아요. 제가 말씀 드렸죠? 웨인은 언제나 제가 하는 일에 의문을 갖고 있어야 한다고. 그래야 실수를 최소로 줄일 수 있지 않겠어요?”
“기억하고 있습니다.”
“웨인의 마음 충분히 이해해요. 사실 저도 아직 확신이 없으니까요. 그저…… 감이랄까요?”
웨인의 표정에 떠오른 의문이 더 짙어졌다. 그가 아는 블러디퀸은 절대 감에 의해 움직이는 사람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사실 처음부터 이상하긴 했다. 암시장에 오는 길에 그들을 차에 태운 것부터가 한 번도 없던 일이었는지라 얼마나 당황했는지 모른다.
그때 그 표정이나 감정을 그들에게 들키지 않으려 얼마나 애썼는지 모른다.
한데 그것도 모자라 나중에는 굳이 그들이 있는 곳에 찾아가 불미스러운 일을 해결해주고 거래까지 성사시켰다.
물론 결과적으로 특별한 마력감지기를 얻었으니 이득을 본 셈이긴 했다.
하지만 그들에게 준 특혜가 너무 대단했다. 모든 수수료를 면제해 주다니. 그건 그저 거래만 해 달라고 이쪽에서 고개를 숙이고 들어가는 셈 아닌가.
“그래서 그들은 지금 뭘 하고 있나요?”
웨인의 얼굴이 살짝 창백해졌다. 그는 다시 고개를 숙이고 사과할 수밖에 없었다.
“죄송합니다.”
“설마 놓쳤나요?”
“아직 암시장을 빠져나간 건 절대 아닙니다. 그쪽 CCTV에는 지나간 흔적이 없습니다. 그리고 그쪽을 감시하는 녀석들도 발견하지 못했습니다.”
“그렇다는 건 암시장 안에 있는데 못 찾고 있다는 거잖아요?”
그게 더 문제다. 암시장을 완벽하게 장악하지 못했다는 의미가 되니까 말이다.
“그게…… 이상합니다. 저는 우리 암시장을 완벽하게 장악했다고 자부합니다. 한데 그들의 흔적을 찾을 수 없습니다.”
블러디퀸은 그 말을 들으며 잠시 생각에 잠겼다.
확실히 웨인이 저렇게까지 자신할 정도로 암시장 장악력은 대단했다. 분명히 모든 암시장을 감시할 수 있는 시스템을 완성해 뒀을 것이다.
“그럼…… 답은 뻔하네요.”
블러디퀸의 말에 웨인이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마침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으니까.
“암시장 외곽으로 나간 모양입니다. 한데…… 거긴 정말 아무것도 없는데 왜 갔을까요?”
블러디퀸의 눈이 반짝반짝 빛났다.
“그걸 이제부터 알아봐야죠. 남은 인력 있죠?”
“30명 정도 돌릴 수 있습니다.”
“샅샅이 훑어보세요. 뭔가를 찾으면 좋고, 아니어도 상관없어요. 중요한 건 그들을 다시 찾는 거예요. 아시겠죠?”
“명심하겠습니다. 하지만 외곽이 워낙 넓어서 30명으로는 한계가 있다는 점, 이해해 주시기 바랍니다.”
블러디퀸이 빙긋 웃었다.
“물론 이해해야죠. 그래도 꼭 찾았으면 좋겠네요. 아예 이참에 그쪽에 CCTV를 여러 대 설치해 볼까요?”
“차라리 그 돈으로 시장을 좀 더 확장하고 무기를 강화하는 편이 나을 것 같습니다. 그쪽 지역은…… 그쪽 나름대로 쓰임새가 있으니까요.”
“그건 그렇죠. 그럼 가서 일 보세요.”
웨인이 정중히 허리 숙여 인사하고 밖으로 나갔다.
블러디퀸은 다시 찻잔을 들어 마시며 눈을 빛냈다.
“정말이지…… 이렇게 가슴 떨리게 만든 사람은 참으로 오랜만이야.”
차를 한 모금 후룩 마신 그녀의 입가에 진한 미소가 맴돌았다.
< 세 번째 원정 1 > 끝
ⓒ 김강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