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대지의 갑주세트 4 >
건물로 들어간 현석은 마지막으로 고개를 돌려 임형석의 모습을 확인했다.
이번에 임형석이 얻은 대지의 갑주 세트는 정말로 훌륭했다.
사실 어느 정도는 저걸 얻을 수 있지 않을까 기대하고 이곳 피라밋 암시장에 오긴 했다.
하지만 진짜 얻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진 않았다.
그러기에는 피라밋 암시장이 너무 컸고, 또 저 물건은 마력을 감추고 있기에 앞에서 집중해서 보지 않으면 금방 알아차리기도 어려웠으니까.
물론 현석에게는 심안이 있으니 굳이 집중은 필요 없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찾는 것이 거의 불가능하다는 건 너무나 당연한 일이었다.
한데 그걸 발견한 것도 모자라 거저에 가깝게 얻었으니 정말 운이 좋았다. 게다가 저걸 가진 상점이 암시장의 주인인 블러디퀸의 가족이라니.
덕분에 좋은 장비도 얻고, 블러디퀸과의 인연도 생겼다.
블러디퀸이 아주 믿을 만한 사람은 아니었지만, 최소한 거래 중에 뒤통수치는 사람은 아니었다.
만일 수시로 남 뒤통수나 치는 사람이었다면 이후 20년 가까이 되는 세월을 암시장의 선두주자로 살아남지 못했을 것이다.
‘슬슬…… 사용법에도 익숙해지고 있는 것 같고.’
이 정도면 이 던전에 들어온 목적은 다 이뤘다고 봐도 된다. 물론 저기 바닥에 널려 있는 제국 병사의 장비들도 상당한 부수입을 안겨줄 것이다.
‘저 정도만 해도 요즘 고레벨 플레이어들이 쓰는 웬만한 장비보다는 나을 텐데.’
물론 고레벨 중에서도 특별한 사람들은 저보다 훨씬 뛰어난 장비를 쓰겠지만, 좀 어설픈 고레벨이 쓰는 장비보다는 훨씬 대단할 것이다.
“후우. 그럼 진짜 싸움을 시작해 볼까?”
현석은 목을 이리저리 돌려 몸을 가볍게 푼 다음 빠르게 안쪽으로 들어갔다.
건물 1층은 넓은 홀이었고, 그 중앙 뒤쪽에 커다란 원형 계단이 있었다.
그 계단을 통해 위로 계속 올라갈 수 있고, 원형 계단 가운에 있는 봉으로 위에서 아래로 내려갈 때는 단숨에 쭉 내려갈 수 있도록 만들어져 있었다.
현석은 계단을 따라 빙글빙글 돌며 달려 올라갔다.
마지막 남은 거대한 마력의 적은 최상층에 있었다. 한데 그곳에서 움직이지 않고 있었다.
깨어난 건 분명했다. 고요히 잠들어 있던 거대한 마력이 활발하게 움직이기 시작했으니까.
한데 그 마력의 소유자는 아직도 그 자리에 그대로 있었다.
사실 이 건물 안에 있는 그 누구보다 빠르게 마력을 깨우고 안정시켰음에도 가만히 있었다.
그 점이 좀 이상하긴 했다. 그래서 처음에는 혹시 함정은 아닌가 했다.
한데 현석의 감각에 딱히 이상한 점이 잡히지 않았다. 정말로 그냥 가만히 있을 뿐이었다.
그래도 이상한 건 이상한 거니 최대한 긴장의 끈을 팽팽하게 유지하며 조심해서 올라갔다.
이내 최상층에 도착했다.
최상층은 1층의 홀과 마찬가지로 한 층을 통째로 쓰는 구조였다.
정말 아무것도 없었다.
그 중심에 누군가가 서 있었다. 그가 바로 거대한 마력의 주인이었다.
그는 다른 병사나 지휘관과는 달랐다.
병사나 지휘관은 장비를 착용한 그림자 인간이었다. 한데 저자는 그런지 아닌지 알 수가 없었다. 온몸이 단단한 강철갑옷으로 빈틈없이 메워져 있었으니까.
현석은 그를 보며 자신이 지금까지 잘못 생각했다는 걸 깨달았다.
그는 이 거대한 마력의 주인이 아니었다.
마력의 주인은 따로 있었다. 그는 그 마력을 그저 품고 있을 뿐이었다.
아니, 품었다기보다는 봉인이라고 하는 게 더 어울리리라. 그는 그 마력이 활성화되지 않게 막고 있었다. 자신의 모자라는 마력을 이용해서 말이다.
“넌…… 누구지?”
놀랍게도 그가 말을 걸어왔다. 현석은 그에게 다가가다가 걸음을 멈췄다.
“그러는 넌 누구지?”
“난…… 제3기사단 소속 선임기사 암부스다.”
“암부스? 선임기사라고? 거기서 뭘 하고 있는 거지?”
암부스는 잠시 침묵을 지켰다. 현석은 그가 말을 안 하고 싶어서 안 하는 게 아니라 내부에서 들끓는 마력을 안정시키느라 혼신의 힘을 다하고 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암부스의 마력 컨트롤 능력은 대단하긴 했지만 그렇다고 저 거대한 마력을 자유자재로 다룰 수 있을 정도는 아니었다.
‘딱 저런 형태의 마력만 봉인할 수 있게 자신의 마력을 변형시켰군.’
암부스의 마력이 변형된 채 그렇게 거대한 마력을 봉인하듯 억누르고 있었다.
하지만 봉인된 마력의 힘 자체가 너무 커서 아무리 그렇게 한다 해도 암부스의 능력으로는 역부족이었다.
“난…… 이곳 막사를 지키는 수호자, 암부스다. 넌 누구지? 소속은?”
다시 정신을 차린 암부스가 물었다.
현석은 그 말에 대답을 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그저 입을 다물고 있었다.
사실 암부스는 대화를 할 만한 상태가 아니었다. 그가 정상이 아니라는 건 다음에 한 말로 바로 알아차렸다.
“넌…… 누구지?”
현석이 묘한 표정으로 암부스를 쳐다봤다.
“난…… 제3기사단 소속 선임기사 암부스다.”
했던 말을 반복하고 있었다. 방금 한 말을 잊은 건지, 아니면 저 말밖에 할 수 없는 건지는 모르지만 정상이 아니라는 건 확실했다.
‘그럼…… 저 안에 있는 마력을 조사해볼까?’
현석은 암부스에게 다가갔다. 암부스는 다시 말을 이어갔다.
“난…… 이곳 막사를 지키는 수호자. 마계의 문을 막고 있다.”
현석이 걸음을 멈췄다.
“마계를…… 막고 있다고?”
“그렇다. 하지만 이제 한계에 봉착한 것 같군. 날…… 도와줄 수 있나?”
“도와달라고?”
“마계의 문이 열리면 이곳은 모조리 마계로 변한다. 광기에 물든 마족들이 세상에 흘러나갈 거야. 어떻게든 그것만은 막아야 한다.”
암부스는 마치 마지막 생명을 불사르는 듯했다.
“난…… 내 병사들을 지키기 위해 내 몸을 희생했다.”
거기까지 말한 암부스가 다시 침묵으로 돌아갔다. 마력이 꿈틀거리고 있었다.
‘병사들을 저지경으로 만든 게 마계 탓이로군.’
병사들이 이미 마계의 힘에 물들어 마수로 변했다는 사실을 암부스는 아직 모르는 듯했다.
현석은 암부스에게 다가가 그의 배에 손을 올렸다.
“도와주지.”
이건 감이었다. 왠지 이대로 마계의 문이 열리게 두면 안 될 것 같은 감 말이다.
현석은 손바닥을 통해 자신의 마력을 약간 흘려 넣었다. 그리고 그걸 통해 암부스 내부에서 꿈틀거리는 거대한 마력을 컨트롤했다.
‘이거…… 쉽지 않은데?’
마력이 너무 거대했다. 하지만 컨트롤이 불가능한 건 아니었다. 문제는 그걸 어떤 방식으로 어떻게 컨트롤 하느냐였다.
뭘 어떻게 해야 마계의 문을 닫을 수 있는지 알 수 없지 않은가.
그 와중에도 마력은 꿈틀거리며 암부스의 몸을 벗어나려 안간힘을 쓰고 있었다.
현석은 서둘러 암부스의 마력을 확인했다. 그것이 이 거대한 마력을 지금까지 붙잡고 있었으니 뭔가 힌트가 될 거라 여긴 것이다.
“빙고.”
예상이 맞았다. 암부스의 마력패턴과 흐름은 유동성이 전혀 없었다. 딱 맞춰진 상태로 정해진 형태로 정해진 길만 흐르고 있었다.
그것이 바로 이 거대한 마력을 억누를 수 있는 마력 운용 방식이었다.
현석은 마력의 주인이라는 타이틀까지 가졌다. 게다가 그걸 끊임없이 수련해 더 높은 경지에 이르렀다.
그런 현석이 이렇게 단순한 형태의 마력 흐름을 파악하지 못할 리 없지 않은가.
현석은 자신의 마력을 더욱 많이 안으로 밀어 넣었다. 그리고 암부스의 마력에 자신의 마력을 덧씌웠다.
암부스의 마력이 지극히 자연스럽게 현석의 마력에 녹아들었다.
그리고 새로운 방식으로 거대한 마력을 억누르기 시작했다.
현석은 암부스 내부에 있는 거대한 마력의 정체를 금세 파악할 수 있었다.
마계의 문 같은 게 아니라 진짜 마계 그 자체의 마력이었다. 마계를 가득 채우고 있는 어둠의 마력이 거기에 있었다.
꿈틀거리던 마계의 마력이 다시 잠잠해졌다.
하지만 현석은 방심하지 않았다. 더 많은 마력을 불어 넣어 그것을 더욱 단단하게 고정시켰다.
몇 번이나 봉인을 겹겹이 씌운 다음에야 현석은 암부스의 배에서 손을 뗐다.
쉽지 않은 작업이었지만, 또 대단히 어려운 작업은 아니었다. 다만 새로운 방식의 마력 운용법을 시도했기에 뭔가 미약한 깨달음이 있었다.
어쩌면 이 작은 깨달음이 나중에 뭔가 큰 선물을 가져다줄지 모른다는 예감이 잠깐 스쳐 지나갔다.
어쨌든 현석은 작업을 마무리 하고 한 발 뒤로 물러나 암부스를 쳐다봤다.
그때까지 미동도 않고 있던 암부스가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철컹.
암부스가 한 발 앞으로 걸었다. 처음에는 좀 삐걱거렸지만 점차 움직임이 자연스러워지더니 이내 부드럽게 걷기 시작했다.
그렇게 움직인 암부스가 현석 앞에 다가가 섰다.
“네 덕분에 내 오랜 염원을 이룰 수 있게 되었다.”
“염원?”
현석은 암부스의 오랜 염원이 마계의 문을 닫는 것이라 생각했다. 아마 엄청나게 오랜 시간을 마계의 문과 싸워왔을 테니까.
“사실 네가 우리 공간에 들어오는 바람에 균형이 깨졌다. 그게 아니라면 내 안에 봉인된 어둠의 힘이 이렇게 흔들렸을 이유가 없으니까.”
현석은 그제야 암부스를 만날 때부터 느꼈던 그 이상한 위화감의 정체를 알 수 있었다.
암부스의 몸에 봉인된 마계의 문은 현석이 아니었다면 분명히 열렸을 것이다.
그리고 이 투명 던전의 잠김 상태를 봤을 때, 그것이 외부로 표출되었을 확률이 높았다.
하지만 만일 그랬다면 회귀 전에 분명히 이에 대한 어떤 정보나 소식, 혹은 소문이라도 현석의 귀에 들어왔어야 한다.
한데 그런 것이 전혀 없었다.
그래서 이상했는데, 그 모든 것은 이 투명 던전에 들어온 사람이 없다면 애초에 벌어지지 않았을 일인 것이다.
현석이 그런 생각을 할 때 암부스가 말을 이었다.
“하지만 결국 시간이 더 지나면 마계의 문이 열렸을 것이다. 애초에 내 힘으로 마계의 문을 봉인한다는 건 쉽지 않은 일이었으니까.”
“그런가? 그럼 굳이 미안해하지 않아도 되겠군.”
“오히려 내가 감사할 일이지. 내 오랜 염원이 이뤄졌으니까.”
암부스는 그렇게 말하고 잠시 뜸을 들이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
“내 소원은 영원한 안식이다.”
“죽고 싶었단 말인가?”
“단, 내 안의 어둠을 완벽하게 봉인한 뒤에 말이다.”
암부스는 드디어 그 염원을 이뤘다. 그의 몸 안에 봉인된 마계의 문을 완벽하게 닫았다.
이제 굳이 그의 의식이 남아있지 않아도 다시 마계의 문이 열리는 일은 없을 것이다.
누군가가 강제로 열지 않는 한.
암부스가 고개를 돌려 밖을 바라봤다. 이곳은 최상층인 데다가 사방에 커다란 창문이 쭉 달려 있어서 외부 광경이 너무나 잘 보였다.
지금까지는 그쪽까지 시선을 둘 여유가 없었는데, 모든 일이 해결되고 나니 자연스럽게 바깥 풍경이 눈에 들어왔다.
암부스가 씁쓸한 어조로 중얼거렸다.
“결국…… 다들 끝났구나.”
암부스는 다시 시선을 돌려 현석을 똑바로 바라봤다.
“내게 영원한 휴식을 선물해줘서 고맙다. 작지만 보답을 해주지.”
그 말을 끝으로 암부스의 몸이 검은 가루가 되어 흩어졌다.
파삭!
방안이 검은 가루로 꽉 찼다. 그것은 이내 검은 연기가 되어 밖으로 나갔다.
이내 방안에는 아무것도 남지 않았다. 다만 암부스가 서 있던 자리에 황금으로 빛나는 카드 한 장이 놓여 있었다.
현석은 그것을 집었다. 정말로 금으로 된 카드였다. 그리고 표면에는 복잡한 문양이 새겨져 있었다.
현석은 그 문양이 마력패턴이라는 걸 어렵지 않아 알아볼 수 있었다.
뭐에 쓰는 카드인지는 확인해 보면 안다.
[출입증-황궁에 출입할 수 있는 권한을 가진 증명서]
그걸 본 현석의 눈이 빛났다. 이걸 언제 어떻게 써먹어야 할지는 알 수 없지만, 분명히 요긴하게 쓸 데가 있을 것 같았다.
현석이 카드를 확인하고 있을 때, 암부스가 서 있던 자리에 마력이 소용돌이치기 시작했다.
현석은 그걸 보고는 몇 발 뒤로 물러났다.
처음 보는 현상이었지만, 지금 어떤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는 충분히 예상할 수 있었다.
고오오오오!
마력의 소용돌이가 점점 크고 강해졌다. 그리고 새하얗게 물들기 시작했다.
그것은 이내 하얀색 마력의 소용돌이가 되었다.
화이트홀이 열렸다.
< 대지의 갑주세트 4 > 끝
ⓒ 김강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