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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눈 뜨고 레벨업-104화 (104/326)
  • < 피라밋 암시장 2 >

    “그게 진짜 너였어?”

    렉스턴 에너지가 테러당한 사실은 모르는 사람이 없었지만, 거기에서 뭔가 중요한 문서와 아티팩트가 탈취당했다는 소식은 별로 알려지지 않았다.

    그런 특별한 정보를 알고 있는 이 암시장의 노인 역시 평범한 사람은 절대 아니었다.

    “무슨 말씀하시는지 모르겠군요. 물건부터 살펴보시죠.”

    노인은 현석이 쏟아 놓은 물건들을 일일이 살폈다. 그러면서 눈살을 찌푸렸다.

    “이거…… 렉스턴 에너지에서 나온 것이 확실한데…….”

    그런데 뭔가 좀 애매했다. 노인이 알기로 렉스턴 에너지가 도둑맞은 것은 대표이사실의 금고에 있던 모든 것들이었다.

    그러니 그게 걸맞은 대단한 아티팩트나 최소한 특이하거나 특별한 아티팩트여야 했다.

    한데 여기 있는 아티팩트들은 비록 굉장하긴 하지만 그 정도까지는 아니었다.

    “이걸 뭐라고 해야 할지…….”

    벌써 가격은 대충 나왔다. 그리고 이걸 어떻게 팔아치울지도 머릿속으로 훤히 그려졌다.

    렉스턴 에너지는 보통 회사가 아니었다. 그러니 평소보다 훨씬 더 공을 들여야 한다.

    “높은 가격을 쳐주기는 힘들어. 알지?”

    “돈은 금으로 받겠습니다.”

    노인이 눈살을 찌푸렸다.

    “금? 바라는 것도 많군. 좋아. 미스터 황의 부탁을 받고 온 사람한테 야박하게 굴 수는 없지. 거기까지는 해주지. 대신 수수료는 칼같이 제할 거야.”

    생색은 있는 대로 내면서 정작 수수료까지 챙겨가고 있으니 헛웃음이 나왔다. 하지만 아무리 수수료가 붙어도 따로 돈을 받아 그걸로 금을 사는 것보다는 대금을 금으로 받는 것이 훨씬 나았다.

    “그렇게 해주십시오. 그리고 물건 몇 개 봐도 되겠습니까?”

    노인이 묘한 표정을 지었다.

    “가격 협상도 안 하고?”

    “확인해서 이상하면 나중에 다시 찾아오면 되지 않습니까. 어차피 장소도 뻔한데.”

    “허어. 그런 협박을 아무렇지도 않게 하는 무서운 놈일세.”

    노인은 그렇게 말하며 종이에 뭔가를 적어 내밀었다.

    모든 물품을 처리한 가격을 적은 것이다. 그걸 확인한 현석이 피식 웃었다.

    “설마 절반으로 후려치실 줄은 몰랐습니다.”

    “절반? 이게 어떻게 절반이야? 렉스턴 에너지가 어디 보통 회사인 줄 알아? 거기 걸 처리하려면 들어가는 공이 얼마나 대단한 줄 몰라서 이래?”

    “그거 다 감안해도 절반 아닙니까. 아무래도 제가 어디서 왔는지 잊으신 것 같군요.”

    노인의 얼굴이 사정없이 일그러졌다.

    “하여간 미스터 황이랑 얽히면 사기를 칠 수가 없다니까. 그래도 절반은 너무 심해! 30%만 추가하는 걸로 하지.”

    현석이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하시죠.”

    너무 시원하게 허락하니 노인이 좀 더 불러볼걸 그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이내 고개를 저었다.

    분위기를 보니 황노인과 그냥 잘 아는 사이가 아니었다. 제자까지는 아니어도 일에 깊이 관여된 사이가 분명했다.

    그런 놈들은 계산이 아주 확실하다. 아마 지금 흔쾌히 고개를 끄덕인 것도 뭔가 다른 계산이 들어간 게 분명했다.

    “거래는 이쯤 마무리 하고 물건 좀 구경해도 되겠습니까?”

    노인이 손을 휘휘 내저었다. 마음대로 하라는 뜻이었다.

    현석은 얼른 밖으로 나가 미리 찍어 두었던 재료들을 툭툭 꺼내 테이블 위에 올렸다.

    물건을 정리하고 뒤따라 나온 노인이 그런 현석을 묘한 눈으로 바라봤다.

    “별 걸 다 사가는군.”

    노인은 현석이 고른 물건들을 쭉 보다가 몇 개를 손가락으로 짚으며 물었다.

    “이것들은 대체 어디 써먹는 거냐?”

    현석이 씨익 웃었다.

    “정보를 날로 드시려고 하시는군요.”

    노인이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계산이 빠른 놈이야. 이러려고 가격 흥정을 안 한 거였어.”

    노인은 정말로 궁금했다. 현석이 괜히 저 물건들을 사려고 한 게 아니라는 건 눈빛이나 태도만 봐도 알 수 있었으니까.

    “쓸 만한 정보라면 수수료 빼주지.”

    현석이 피식 웃었다.

    “조건을 다실 거면 됐습니다.”

    쓸 만한 정보인지 아닌지 판단하는 주체가 노인이다. 그러니 별 거 아니라고 말하면 그만이었다.

    물론 이 노인은 그럴 사람이 아니었다. 정보에 대한 값어치는 아주 정확히 지불하는 사람이었다.

    노인이 잠시 생각에 잠겼다. 그 사이 현석이 말을 이었다.

    “아직 확실치 않아서 사실 물으셔도 딱히 할말이 없습니다. 뭔가를 좀 연구해 보려고 하는 거니까요.”

    “연구?”

    “정제에 관한 연구입니다.”

    그 말을 들은 노인이 눈을 빛냈다.

    던전에서 출토되는 물건 중에 정제를 할 만한 건 마정석뿐이었다.

    즉, 마정석 정제 연구를 하고 있다는 뜻 아닌가.

    “뭐 아는 건 좀 있고?”

    “아직 맨땅입니다.”

    그 말에 노인의 관심이 급격히 식었다. 하지만 속까지 그런 건 아니었다.

    앞으로 노인은 현석을 주시할 것이다.

    현석이 이곳 피라밋 암시장에서 무엇을 사든 그 정보는 고스란히 노인의 귀로 들어가게 될 것이다.

    현석도 그걸 알았지만 별로 상관없었다. 어차피 그게 뭔지, 또 왜 사는지 알 수 있는 방법 자체가 없을 테니까.

    “언제 준비됩니까?”

    “금으로 대금을 지불해야 하는데, 금방 될 줄 알았어? 내일 다시 와.”

    현석이 씨익 웃으며 근처 의자에 앉았다.

    “거래가 완벽하게 끝나기 전에는 자리를 뜨지 말라고 하시던데. 아닙니까?”

    노인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결국 상점에 있는 금이란 금은 모조리 박박 긁어서 현석 앞에 내려 놓았다.

    그러고도 모자라 근처 상점에 연락해 금을 잔뜩 빌려야만 했다.

    현석은 금을 모두 챙긴 다음 꾸벅 인사하고 밖으로 나갔다.

    그런 현석의 등을 보며 노인이 중얼거렸다.

    “렉스턴 에너지보다 더 지독한 놈.”

    그 말을 들은 현석이 빙긋 웃었다.

    * * *

    임형석은 정신없이 야시장을 돌아다니고 있었다. 그에게는 이곳에서 보는 모든 것이 생소하고 신기했다.

    던전 관련 물품들만 파는 시장을 그가 본 적이나 있겠는가.

    현석을 만나기 전까지는 던전과 관계될 일이 전혀 없을 거라고 여기며 살아왔다.

    그러니 이곳에서 보는 모든 것이 신기하기 그지없었다. 별의 별 희한한 뿔이나 발톱, 그리고 풀과 열매, 심지어 희한한 빛을 내는 돌멩이까지 팔고 있었다.

    그러니 그저 길을 걸으며 상점 밖에 진열해 놓은 것만 보면서 가는데도 시간 가는 줄 몰랐다.

    그렇게 돌아다니다보니 어느새 처음 현석과 함께 있던 곳에서 아주 멀리까지 와 버렸다.

    피라밋 암시장은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넓었다.

    그러니 길에 신경 쓰지 않고 돌아다닌 임형석으로서는 다시 원래 자리로 돌아간다는 건 엄두도 못 낼 일이었다.

    하지만 그는 걱정하지 않았다.

    “이놈이 일 끝나면 알아서 찾으러 온다더니 왜 안 와? 아직 일이 덜 끝났나? 그냥 따로 떨어지길 잘했군.”

    만일 이렇게 오랫동안 일을 보는데 아무 할 일도 없이 멍하니 서 있기만 한다면 어쩌겠는가. 아마 아주 미쳐버렸을 것이다.

    임형석은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어디 또 볼 만한 게 없나 살펴보는 것이다.

    그러던 그의 눈에 수많은 무구를 쫙 깔아놓고 파는 곳이 보였다.

    상당히 커다란 상점이었는데, 상점 바깥 좌판에도 무구가 잔뜩 있었고, 상점 안에도 엄청나게 많은 무구가 진열되어 있었다.

    “호오. 이게 그 아티팩트인지 뭔지 하는 건가?”

    임형석의 호기심을 한껏 자아내는 물건들이었다. 그는 먼저 좌판의 물건들을 쭉 살폈다.

    죄판에 있는 것들은 대부분 커다랬다. 웬만한 사람은 들기도 버거울 것 같은 양손검이나, 양손도끼, 그리고 사람 키보다 더 커 보이는 사각방패도 있었다.

    “이건 갑옷인가?”

    가슴을 완벽하게 감싸는 강철 갑옷도 보였다. 그 옆에는 하체를 감싸는 강철 갑옷이 있었는데, 아마 세트로 파는 듯했다.

    “뭐…… 튼튼해 보이긴 하네. 그래봐야 주먹 한 방이지만.”

    임형석은 이 정도 갑옷은 주먹 한 방에 우그러뜨릴 자신이 있었다.

    자신 같은 강자를 상대할 때는 이런 갑옷은 오히려 손해다. 철판이 우그러지면서 살을 파고들 테니까.

    “뭘 그렇게 관심있게 보십니까?”

    임형석은 갑자기 옆에서 들려온 소리에 순간 화들짝 놀랐다. 하지만 억지로 안 놀란척 하며 고개를 돌려 확인했다.

    언제 다가왔는지 현석이 나란히 서서 물건을 확인하고 있었다.

    “남자는 맨주먹이라고 하셨던 거 같은데.”

    “안사, 안사! 그냥 신기해서 구경한 거야! 구경!”

    현석은 임형석의 반응에 빙긋 웃었다.

    “사도 됩니다. 그 정도 돈은 있으니까요. 하지만 하나를 사더라도 제대로 된 걸 사야하지 않겠습니까?”

    임형석은 제대로 된 걸 산다는 말에 귀가 솔깃했다.

    “여기 그런 게 있어?”

    현석은 고개를 저었다.

    “제가 보기에 여긴 없습니다.”

    임형석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지금 누굴 놀리는 건가?

    “쓸 만한 건 저쪽에 있습니다.”

    “응? 저쪽?”

    임형석은 현석이 손가락으로 가리킨 쪽을 바라봤다. 길이 끝없이 이어져 있었고, 그 길 양옆에 무수한 상점이 늘어서 있었다.

    그래서 정확히 어딜 가리키는 건지 알 수 없었다.

    임형석은 현석이 가리킨 쪽으로 성큼성큼 걸음을 옮겼다.

    “뭐 하냐! 안내 안 하고!”

    현석은 빙긋 웃으며 임형석을 앞질러 걸어갔다.

    두 사람이 도착한 곳은 참으로 허름한 상점 앞이었다. 임형석의 얼굴이 또 한 번 일그러졌다.

    “꼭 이렇게 다 쓰러져가는 데로 가야하는 거냐?”

    현석은 당연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원래 이런 데가 진짜입니다. 아까처럼 화려한 상점은 어설픈 사람을 후려치려고 만들어 놓은 곳이죠.”

    “뭐? 어설퍼?”

    임형석은 뭐라고 하려다가 입을 꾹 다물었다. 솔직히 말하면 어설픈 거 맞다. 아직 이쪽으로는 경험이 전혀 없으니 말이다.

    “그래서 뭘 봤는데?”

    “일단 들어가시죠.”

    현석이 상점 문을 열고 들어갔다.

    내부도 단출했다. 무구 몇 개가 벽에 걸려 있는 게 전부였다.

    안에는 덩치가 산만한 사내가 앉아 있었다. 상체를 다 드러내고 있었는데, 거대하고 단단한 근육이 불끈거렸다.

    임형석이 그 사내를 보며 묘한 표정을 지었다. 그렇게 잠시 관심을 주다가 이내 흥미가 식었다는 듯 고개를 돌려 주변을 둘러봤다.

    처음에는 사내가 제법 싸움 좀 할 것 같아서 관심을 뒀는데 자세히 살피니 겉만 부풀렸지 내실이 전혀 없었다.

    저런 놈은 진짜 싸우면 손가락 하나로도 죽여 버릴 수 있었다.

    “아무리 둘러봐도 내가 쓸 만한 건 안 보이는데…….”

    현석은 임형석의 말에 손가락을 들어 천장을 가리켰다. 임형석이 고개를 들어보니 천장에도 물건이 매달려 있었다.

    가죽으로 만든 흉갑과 손가락이 없는 가죽장갑이었다. 그리고 가죽 부츠도 있었다.

    “나보고 저런 걸 입으라는 거냐?”

    임형석이 못마땅한 표정을 지었다. 아무리 봐도 저걸 입으면 움직임이 불편해 제대로 싸우지 못할 것 같았다.

    하지만 현석은 임형석의 의견따윈 깨끗이 무시하고 앉아있는 사내에게 물었다.

    “저거 얼맙니까?”

    사내가 씨익 웃었다. 그 미소에 깃든 탐욕과 야비함이 현석에게 고스란히 보였다.

    “5천만 달러.”

    5천만 달러면 500억 원이 훨씬 넘는 거액이다. 아무리 아티팩트라고 해도 터무니없이 비싼 가격이었다.

    현석이 피식 웃으며 다시 물었다.

    “전부 다해서?”

    사내가 고개를 저었다.

    “하나에 5천만씩 세 개니까 1억5천.”

    현석이 피식 웃었다. 그리고 임형석을 보며 말했다.

    “그냥 가죠.”

    현석이 그냥 나가려 하자, 사내가 벌떡 일어나 입구를 막았다.

    그걸 본 임형석이 눈을 빛내며 현석을 바라봤다. 그 눈빛이 지금 싸워도 되느냐고 묻는 듯했다.

    현석은 고개를 젓고는 사내를 쳐다봤다. 그러자 사내가 예의 야비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에이, 한 번에 가면 쓰나. 흥정을 해야지. 이런 물건 보기 힘들다는 거 알지?”

    현석이 피식 웃었다.

    “암시장에서 아티팩트도 아닌 물건을 보는 게 진짜 오랜만이긴 하네.”

    그 말에 사내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 피라밋 암시장 2 > 끝

    ⓒ 김강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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