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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눈 뜨고 레벨업-103화 (103/326)
  • < 피라밋 암시장 1 >

    임형석은 복도를 걸어가는 내내 감탄을 감추지 못했다. 아니, 이곳은 복도라기보다는 터널에 더 가까웠다.

    “그러니까 이게 피라밋 지하까지 연결되어 있다 이거지?”

    터널은 엄청나게 길었다. 그리고 그 끝이 보이지 않았다. 크게 휘어져 있어서 아무리 눈이 좋은 사람이라도 일정 거리 이상은 확인이 불가능했다.

    게다가 군데군데 느낌이 이상한 곳이 있었다. 함정이나 무기가 숨겨져 있음이 분명했다.

    임형석은 가는 내내 그런 이상한 느낌을 주는 부분을 하나도 빠짐없이 응시하고 지나갔다.

    “그런데 여기 원래 1층 아니었나? 그런데 지하로 이어진다고? 흐음…….”

    임형석은 걸어가며 고개를 갸웃갸웃했다. 그러더니 눈을 빛내며 고개를 끄덕였다.

    “아주 조금씩 아래로 내려가는 길이구나.”

    이곳 터널은 아래로 경사지어 있었다. 한데 그것이 워낙 티나지 않을 정도라서 평평한 것처럼 보였다.

    이는 아주 감각이 예민한 사람이라도 알아차리기 어려울 정도로 미미했다.

    물을 흘려 봐도 아마 파악하기가 쉽지 않을 것이다. 그 정도로 경사가 약했다.

    아니, 어떤 부분은 오히려 경사가 위로 향할 때도 있었다. 평균적인 경사가 아래로 이어지는 것일 뿐이었다.

    그러니 그걸 알아낸 임형석의 감각이 얼마나 대단한지 알 수 있다.

    “이거 이대로 지하까지 이어지려면 아주 오랫동안 걸어가야 할 거 같은데?”

    임형석이 투덜거리기 시작했다. 비행기까지 타고 이렇게 멀리 왔는데 별로 위험한 일도 없이 계속 걷기만 한다는 사실에 불만을 쏟아냈다.

    “대체 언제 도착하는 거야? 싸울 놈들이 있긴 한 거야? 여기도 플레이어가 좀 있나?”

    현석은 그 시끄러운 와중에도 묵묵히 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임형석은 그런 현석의 태도도 걸고 넘어졌다.

    “내말 안들리냐? 사람이 말을 하면 대꾸를 해야지. 아하, 그러니까 넌 짖어라 난 사람말만 듣겠다, 뭐 이런 거냐?”

    현석이 걸음을 빨리했다. 그러더니 이내 뛰기 시작했다.

    “어쭈? 이놈이 도망을 쳐? 거기 서라!”

    임형석도 뛰기 시작했다. 하지만 현석과의 거리는 점점 벌어지기만 했다.

    “아니, 저놈이 무슨 치타 고기를 씹어 먹었나, 왜 이리 빨라?”

    물론 임형석은 걱정하지 않았다. 빠른 놈들은 지구력이 없는 법이다. 하지만 임형석은 점점 더 속도를 높이면서도 몇 시간이고 달릴 자신이 있었다.

    그가 생각을 고쳐먹은 건 달리기 시작한 지 한 시간이 지난 후였다.

    현석은 빠를 뿐 아니라 지구력도 엄청났다. 덕분에 거리는 더 벌어졌다.

    “후욱! 후욱! 에잉. 알았다, 알았어! 입 닥치고 있으면 될 거 아니냐! 이놈아! 같이 가자!”

    그렇게 외친 임형석은 채 5분도 되기 전에 현석을 만날 수 있었다.

    임형석은 황당하면서도 질린 눈으로 현석을 바라봤다.

    “독한 놈.”

    물론 그걸로 끝이었다. 거기서 한 마디만 더 하면 조금 전과 똑같은 상황이 된다는 걸 피부로 느낄 수 있었기 때문이다.

    “가자, 가. 이제 슬슬 다 와 가긴 한 게냐?”

    “지금처럼 두 시간만 더 가면 됩니다.”

    “뭐? 두 시간? 그것도 지금처럼? 그럼 차라리 차를 타지 왜 이렇게 온 거야!”

    말이 끝나기 무섭게 저 멀리서 차 소리가 들려왔다.

    부우우웅!

    작은 소형차였는데, 복도가 워낙 넓어 차가 왕복하는 정도는 충분히 소화가 가능했다.

    임형석은 잠시 고민했다.

    ‘저 차를 잡아, 말아?’

    주먹을 쥐었다 폈다 하며 고민하는 임형석의 눈에 차가 보였다. 제법 빠른 속도이긴 했지만 잡으려면 충분히 잡을 수 있었다.

    ‘좀 부서지긴 하겠지만, 그럼 물어주면 되는 거 아냐?’

    임형석이 현석을 힐끗 쳐다보고 생각을 이어갔다.

    ‘저놈 돈 많잖아.’

    임형석이 갑자기 머리를 쥐어뜯기 시작했다. 그가 언제 이런 종류의 고민을 해봤겠는가. 생전 처음 하는 고민에 머리가 터질 것 같았다.

    결론적으로 그의 고민은 쓸데없었다. 차가 지나가지 않고 현석과 임형석 앞에 멈춘 것이다.

    “세상에, 거기까지 걸어가시는 거예요?”

    차에서 중년 여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열린 창문을 통해 보니 우아하게 생긴 금발의 여인이 운전대를 잡고 있었다.

    “뭐라고 하는 거냐? 저거 영어 아니지?”

    영어도 아랍어도 아니었다. 여자가 쓰는 말은 프랑스어였다.

    “여기까지도 엄청나게 멀었는데! 괜찮으신 거예요? 아무리 플레이어라도 힘들 거 같은데!”

    여자의 호들갑에 현석이 대답했다.

    “괜찮습니다. 그냥 가시죠.”

    임형석이 프랑스어를 알았다면 펄쩍 뛸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한 현석은 이내 관심없다는 듯 고개를 돌려 버렸다.

    하지만 여인은 쉽게 포기하지 않았다.

    “그러지 말고 타세요. 어차피 두 자리 남으니까요. 두 분 딱 태우면 되겠네요. 남은 거리가 제법 되니까 그냥 걸어가시면 오늘 중에 도착하지도 못할 거예요. 그곳의 밤은 정말로 무섭답니다.”

    말은 알아듣지 못하지만 분위기로 대충 상황을 때려맞춘 임형석이 현석을 보며 물었다.

    “뭐라는 거야? 지금 타라고 한 거 맞지? 자리 두 개 남는다잖아. 안 타면 오늘 중으로 못 도착하고. 아냐?”

    말도 못알아들었으면서 어떻게 저리도 정확히 유추할 수 있을까.

    현석은 결국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잠시 신세 좀 지겠습니다.”

    현석과 임형석은 뒷자리에 탔다.

    소형차였기에 덩치 큰 임형석이 타기에는 상당히 비좁았지만, 그래도 좋다고 히죽 웃었다.

    앞자리에는 중후한 인상의 신사가 앉아 있었다.

    “그럼 인사는 차차 하기로 하고 가실까요?”

    부우우웅!

    차가 출발했다. 아무도 없는 길이었기에 제법 속도를 낼 수 있었다.

    이 정도 속도면 두 시간 정도 걸릴 것이다.

    “자, 이제 슬슬 밟아볼까요?”

    순간 중년 여인의 눈이 번득이더니 갑자기 차가 굉음을 토해내기 시작했다.

    구아아아아아아앙!

    차가 총알처럼 튀어나갔다. 겉보기에는 그저 소형차였는데, 속은 그렇지 않은 모양이었다.

    뒤에 탄 임형석은 깜짝 놀라 눈을 동그랗게 떴다. 하지만 이내 신나는 표정으로 사방을 둘러봤다.

    이내 그들은 피라밋 암시장으로 들어섰다.

    * * *

    “참 좋은 사람들이네.”

    임형석은 손을 흔들며 멀어지고 있는 중년 커플을 보며 흐뭇한 표정으로 말했다.

    차를 얻어 탄 덕분에 채 30분도 되지 않아 도착했다. 정말 무시무시한 속도로 달려왔다. 속도계를 힐끗 확인하니 시속 300킬로를 넘나들며 여기까지 왔다.

    너무나도 평온한 얼굴로 가속 페달에서 발을 떼지 않고 운전을 하는데, 아마 평범한 사람이 뒤에 탔다면 오줌이라도 찔끔 지렸을 것이다.

    직진 도로가 아니라 조금씩 휘어지는 도로였기에 아차하는 순간 벽을 쭉 긁으면서 박살이 날 수도 있었다.

    가끔 그런 아찔한 순간이 있었지만 그럼에도 여인의 표정은 조금도 달라지지 않았다.

    다만 옆에 앉은 신사만 움찔움찔 몸을 떨었을 뿐이었다.

    어쨌든 덕분에 편하고 빠르게 왔으니 임형석이 그들에게 고마워하는 것도 당연한 일이었다.

    임형석은 주위를 둘러봤다.

    한쪽에 주차장이 있었다. 어마어마한 수의 고급차들이 주차장을 꽉 메우고 있었다.

    암시장은 그 주차장 너머에 있었다.

    “저기가 거기냐?”

    임형석은 그쪽으로 성큼성큼 걸어갔다. 겉으로는 아무렇지도 않은 척하고 있었지만 사실 속으로는 엄청나게 놀란 상태였다.

    이곳은 지하였다. 한데 지하라는 느낌이 전혀 들지 않았다. 워낙 밝아서였다.

    그리고 규모가 어찌나 큰지 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였다. 이런 데에서 물건을 찾는다고? 멋모르고 오면 헤매기만 하다가 끝날 것이다.

    그들은 주차장을 지나 암시장 입구에 섰다. 어마어마한 수의 상점이 쭉 늘어서 있었고, 그 사이로 엄청난 인파가 바글거렸다.

    “저게 다 플레이어는 아니겠지?”

    수가 적으면 임형석도 일일이 구분할 수 있겠지만, 너무 많아서 기운을 정확히 파악할 수가 없었다. 수많은 기운들이 서로 복잡하게 얽혀서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절반 정도가 플레이어고 나머지는 일반인입니다.”

    임형석은 혀를 내둘렀다.

    “그런 것도 미리 조사하고 온 게냐?”

    미리 조사한 게 아니라 그냥 눈에 보이는 거였지만, 현석은 굳이 거기에 대해 구구절절 설명하지 않았다.

    지금 중요한 건 여기 플레이어가 몇 명이나 있느냐가 아니라 여기서 뭘 구할 수 있고, 또 어떻게 가진 물건들을 팔아치울 수 있느냐니까.

    “길은 알고 있는 게야?”

    임형석의 물음에 현석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고는 계속 걸음을 옮겼다.

    현석이 도착한 곳은 즐비한 상점들 중에서도 가장 작고 볼품없는 곳이었다.

    하지만 이런 암시장에서 상점의 규모로 내실을 파악하는 것처럼 멍청한 일은 없었다.

    그리고 작다고 우습게보다간 정말 큰 코 다칠 수도 있었다.

    “돌아다니면서 구경이나 하셔도 됩니다.”

    현석의 말에 임형석이 못마땅한 눈으로 바라봤다.

    “그러다가 길 잃어버리면 네놈이 날 찾아오기라도 할 거냐?”

    “어디 있든 찾을 수 있으니 걱정 마시고 둘러보시죠.”

    “허어. 이놈 봐라? 너 설마 위치 추적기 같은 거 나한테 붙여둔 게냐?”

    현석이 피식 웃었다. 그런 게 왜 필요한가. 임형석이 가진 기운은 그 누구보다 크고 특이한데. 그냥 가만히 둘러보기만 해도 어디 있는지 훤히 알 수 있었다.

    이곳 암시장이 비록 규모가 상당하긴 하지만 고작 이 정도 넓이에서 임형석을 잃어버릴 일은 없었다.

    “그런 거 아니니까 걱정 마시고 다녀오시죠.”

    임형석은 떨떠름한 표정으로 현석을 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여기 따라 들어가봐야 딱히 도움 될 일도, 또 할 일도 없었다.

    “싸울 일 생기면 혼자 다 먹지 말고 얼른 나 불어야 하는 거, 알지?”

    임형석은 그 뒤로도 몇 번이나 당부를 하고는 멀어져갔다. 그리고 마치 어린애로 돌아간 것처럼 신이 나서 사방 곳곳을 헤집고 돌아다녔다.

    현석은 부드러운 눈빛으로 그런 임형석을 가만히 쳐다보다가 이내 표정을 지우고 상점 안으로 들어갔다.

    그리 넓지 않았지만, 아니, 비좁은 편이었지만 벽을 빼곡히 채운 것들은 모조리 던전에서 나온 재료들이었다.

    아티팩트는 없었지만 안에 잘 보관해 놓은 것이 분명했다. 안쪽에서 거대하게 뭉쳐진 마력이 느껴지고 있었으니까.

    현석은 재료들을 슥 훑어봤다. 혹시 마력의 정수가 있나 해서였다.

    ‘이것 봐라?’

    예상을 초월하는 결과가 나왔다. 이 작은 상점 안에 마력의 정수가 무려 20개가 넘게 있었다.

    ‘빨리 일을 마무리하고 암시장을 둘러봐야겠군.’

    확실히 세계에서 제일 큰 암시장다웠다. 마력의 정수만 사 모은다면 다소 바가지를 쓰더라도 손해가 아니었다.

    레인보우 엘릭서가 개발된 이후에는 하나하나의 값어치가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올라갈 테니까 말이다.

    물론 그 전에 그걸 정제된 형태로 만들거나 새로운 보관법을 찾아내는 것이 더 중요했지만 말이다.

    ‘그래. 보관법이 따로 있는 게 분명해. 한데 그걸 어떻게 찾지?’

    던전에서 나온 것에 대한 모든 답은 던전에 있다.

    현석은 슬슬 화이트홀을 탐사할 때가 된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던전 생성지역에 있는 가짜 화이트홀 말고 개별로 존재하는 진짜 화이트홀 말이다.

    현석이 이런저런 고민과 생각에 잠겨 있을 때, 안쪽에서 누군가 나타나 다가왔다.

    “이렇게 지나가다 들어오는 손님은 오랜만인데? 그래, 뭘 찾으러 오셨나?”

    나타난 사내는 황노인과 비슷한 나이로 보이는 남자였다. 그리고 황노인과 마찬가지로 플레이어가 아닌 보통 사람이었다.

    “한국 종로에서 소개받고 왔습니다.”

    현석의 말에 노인이 하얀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미스터 황 말하는 건가?”

    “네. 실력 있는 곳이라더군요.”

    “그럼, 그럼. 여기 피라밋 안에서 내가 최고지.”

    “좀 많이 위험한 물건입니다.”

    현석은 미리 주의를 줬다. 자신 없으면 포기하라는 뜻이었다. 추적에 걸리면 이곳 암시장도 무사하지 못할 것이다.

    “왜? 렉스턴 에너지라도 털었어?”

    노인이 그렇게 말하며 키득거리고 웃었다. 농담 삼아 한 얘기지만 그 안에는 많은 정보가 담겨 있었다.

    렉스턴 에너지가 털렸다는 사실을 노인이 알고 있다는 것, 그리고 그들이 무섭고 지독한 놈들이라는 것도 충분히 인지하고 있다는 사실을 농담에 섞어 말해준 것이다.

    현석은 그런 노인을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 정도면 해볼 만했다. 어쨌든 이쪽에도 끈 하나 남겨둬서 나쁠 건 없었으니까.

    종로 암시장의 정보력은 국내에선 따를 자가 없지만 해외로 가면 많이 뒤쳐진다.

    보아하니 이 노인을 잘 알아두면 해외쪽 정보를 얻을 때 제법 도움이 될 듯했다.

    ‘양동욱이 알아서 하겠지.’

    현석은 양동욱의 능력을 믿었다. 그라면 충분히 이 노인으로부터 제대로 된 거래를 이끌어낼 수 있으리라.

    “여기에 물건 내놔도 됩니까?”

    노인이 씨익 웃었다.

    “그건 곤란하지. 여기선 위험한 물건 함부로 보이면 골로 가. 그러니 이쪽으로 와.”

    현석은 노인을 따라 상점 안쪽에 마련된 공간으로 들어갔다.

    상점보다 오히려 그곳이 더 컸다.

    현석은 그 공간 한가운데 준비한 가방을 들어 뒤집었다.

    그걸 보는 노인의 눈이 경악으로 물들었다.

    < 피라밋 암시장 1 > 끝

    ⓒ 김강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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