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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눈 뜨고 레벨업-96화 (96/326)
  • < 마무리 >

    50명의 흑기사단은 여전히 쌩쌩했다. 마력을 대부분 소진했지만 탈력할 정도는 아니었기에 충분히 움직일 여력이 있었다.

    다만 더 이상 싸울 수는 없었다.

    물론 명령을 내린다면 싸우겠지만 현석은 굳이 그럴 필요도 이유도 느끼지 못했다.

    50명의 흑기사단은 네 명의 플레이어를 꽁꽁 묶어 어깨에 메고 산을 내려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현석이 가장 뒤에서 그들을 따라갔다.

    산 아래에 내려가니 이미 정리가 대충 끝나 있었다.

    기절한 플레이어들을 한데 모아 뒀는데, 진대호만 따로 떼어서 관리했다.

    임형석은 현석이 나타나자 묘한 표정으로 바라봤다.

    “대체 이게 어떻게 된 일이냐? 저놈들 뭐야?”

    임형석은 꼭두각시가 된 흑기사단을 보며 눈살을 찌푸렸다. 아무리 봐도 제정신이 아닌 놈들이었다.

    “네가 저렇게 만든 거지?”

    현석은 대답하지 않았다. 굳이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는 일 아닌가.

    임형석은 굳은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이제 저들은 어떻게 할 셈이냐?”

    기절한 자들을 비롯해 산에서 이쪽을 지켜보던 자들까지 있었다.

    아마 그냥 돌려보내면 반드시 후환이 있을 것이다. 그렇다고 다 죽여 버릴 수도 없지 않은가.

    임형석은 상당히 심란한 표정이었다.

    그 역시 올바르게만 살아오진 않았다. 하지만 이런 일은 상상도 해본 적 없었다.

    사람을 꼭두각시로 만들어 부려먹다니.

    현석은 임형석에게 신경을 쓸 겨를이 없었다. 흑기사단이 깨어나려 하고 있었으니까.

    현석이 쓴 방법은 영원히 지속되지 않는다. 시간 제한이 있는 수법이었다.

    그러니 이럴 때 써먹을 명령은 딱 하나뿐이었다.

    “모두 누워서 잠들어라.”

    마력과 의지를 담은 현석의 명령이 떨어지자 놀랍게도 50명의 흑기사단이 일제히 자리에 누워서 눈을 감았다.

    그리고 그대로 곯아 떨어졌다.

    다들 황당한 눈으로 그 광경을 바라봤다. 어떻게 이 정도로 사람을 조종할 수 있단 말인가.

    새삼 두려운 마음이 들었다. 가만 생각해보면 현석에 대해 제대로 아는 게 하나도 없었다.

    현석은 일행의 분위기가 달라졌다는 걸 이미 알아차렸다. 하지만 거기에 대해 일언반구도 꺼내지 않았다.

    자신은 그저 행동하고 보여줄 뿐이었다. 판단은 각자가 알아서 하는 것이고 말이다.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다들 뭐라고 말을 꺼내야 할지 몰라 망설이기만 했다.

    현석이야 원래 여기에 대해서는 한 마디도 할 생각이 없었고 말이다.

    그 침묵을 깬 것은 류혜연이었다.

    그녀는 현석에게 가만히 다가가 손을 잡아주었다.

    현석이 살짝 놀란 눈으로 그녀를 쳐다봤다. 류혜연은 최대한 부드럽게 미소 지어주었다.

    “힘들면 좀 기대도 돼요. 혼자서 모든 걸 할 수는 없잖아요.”

    현석은 이 뜬금없는 말에 류혜연을 물끄러미 쳐다봤다. 하지만 왠지 마음 한구석이 따스해지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힘들지 않다. 지금은 이들의 처리를 결정해야 돼.”

    물론 현석은 벌써 어떻게 처리할지 생각해뒀다. 원래는 그냥 그대로 하면 된다. 한데 왠지 그 얘기를 여기서 꺼내기 싫었다.

    “다들 원래 가려던 곳으로 가라. 여긴 내가 정리하고 갈 테니까.”

    현석의 말에 임형석이 피식 웃었다.

    “장난하나? 이놈들 팔다리 꺾어놓은 건 나야. 내가 책임이나 회피하고 다닐 사람으로 보여?”

    그의 말에 기다렸다는 듯이 양세희와 류지혜도 거들고 나섰다.

    “맞아요. 저도 지분이 꽤 될 걸요? 제 방패에 맞고 나가 떨어진 놈들이 얼마나 많은데요.”

    “전 목을 따버릴 걸 그랬나봐요.”

    현석은 지금 이들이 왜 이러나 하는 생각이 들어 그저 입을 다물고 모두를 돌아봤다.

    그런 현석을 류혜연이 안쓰러운 눈으로 바라봤다.

    “이 사람들 살려두실 생각 없으시죠?”

    현석은 담담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다들 그런 현석을 한동안 가만히 바라보기만 했다. 한 가지 확실한 건, 현석의 반응은 절대 평범하지 않다는 점이었다.

    그 침묵을 깬 건 임형석이었다.

    “흥. 피와 칼이 난무하는 던전 시대에 인간적인 게 더 이상한 거지. 나도 책임진다. 이놈들 때문에 나나 내 주변 사람들이 다치는 건 나도 원치 않아.”

    임형석이 단호히 말하자, 다들 고개를 끄덕였다.

    현석은 그런 일행을 둘러보며 잠시 그대로 서 있었다. 이제야 저들이 뭘 하고 있었는지 알아차렸다.

    저들에게도 마음을 단단히 다질 시간이 필요했던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자신에 대한 배려에서 나온 행동이었다.

    이럴때 뭘 어떻게 해야 할지 현석은 알 수 없었다. 현석이 한 행동은 아주 단순했다.

    텅!

    아공간에서 컨테이너 박스 하나를 꺼내는 것이었다.

    다들 놀라 입이 쩍 벌어졌다. 대체 지금 무슨 일이 벌어진 건지 이해하는 데 시간이 제법 걸렸다.

    “지, 지금 저걸 어디서 꺼내신 거죠?”

    현석은 대수롭지 않게 대답했다.

    “아공간. 직접 테스트해본 적은 없지만…… 이 안에 들어가면 아마 다 죽을 거다.”

    현석은 그렇게 말하고는 컨테이너 박스 안으로 기절한 플레이어들을 모조리 쓸어 넣었다.

    남은 사람은 진대호와 산에서 잡아온 네 사람뿐이었다.

    컨테이너 박스가 아공간 안으로 사라졌다. 다들 그 모습을 심난한 표정으로 바라봤다.

    이제 뭔가 돌이킬 수 없는 강을 건넌 기분이 들었다. 그건 특히 세 여인이 더 심했다.

    상대적으로 임형석이나 양동욱의 후배인 운전수는 좀 덜했다.

    어쨌든 직접적으로 죽인 건 아니라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문득 임형석은 심각한 눈으로 현석을 바라봤다.

    ‘대체 어떤 과거를 겪으면 저렇게 될 수 있지? 정상인 것 같으면서도 정상이 아니야.’

    임형석이 보기에 현석은 적으로 판명난 사람에게는 일말의 자비도 없었다.

    이용할 수 있을 만큼 최대한 이용한 다음 처단한다. 임형석이 판단하기에는 그랬다.

    ‘아무래도…… 같이하는 데에는 시간이 많이 필요하겠어.’

    그건 임형석뿐 아니라 나머지 다른 사람도 마찬가지이리라. 그들과 현석은 너무나 달랐으니까.

    “자, 이제 이놈을 깨워볼까?”

    임형석은 상념을 털어내며 손가락 마디를 두두둑 꺾었다. 그의 시선은 여전히 기절한 채 누워 있는, 아니, 기절한 척 하고 있는 진대호에게 향해 있었다.

    * * *

    현석은 신기한 눈으로 일행을 지켜봤다. 아까 있었던 일 이후로 묘한 공감대가 형성되어 있었다.

    그들은 한마음 한뜻이 되어 모여 있었다.

    ‘면허는 좀 나중에 따야겠군.’

    현석은 그 공감대 안에 운전수까지 포함된 걸 보며 그렇게 생각했다.

    면허를 따더라도 굳이 운전수를 돌려보낼 필요는 없으니 그냥 두기로 한 것이다.

    진대호를 심문해서 얻은 건 짐작을 확신으로 바꾼 것뿐이었다.

    역시 K나이츠 길드 위에 거대한 조직이 있었다. 그리고 각국에 K나이츠 길드와 비슷한 역할을 하는 길드가 존재했다.

    마치 그 거대조직의 지부 같은 느낌이었다.

    그리고 그 지부는 하나가 아니었다.

    진대호는 자신의 뒤를 봐주는 조직에 대해 조금도 아는 게 없었다.

    그저 몇 명 만나봤고, 그들이 DM케미칼과도 뭔가 관계가 있는 것 같다는 얘기만 했다. 그조차도 확신이 없었다.

    진대호가 이렇게 서둘러 현석을 잡으러 온 것도 조직의 지시가 내려왔기 때문이었다.

    ‘마력수를 원한다고 했지?’

    그 조직에서 마력수를 원한다고 했다. 그것도 아주 강력하게 말이다.

    그나마 다행인 건 마력수를 만든 것이 현석이라는 사실을 아직 위에 보고하지 않았다는 점이었다.

    진대호는 현석을 잡아 세뇌를 하고 가둬 마력수를 만드는 기계처럼 써먹을 계획을 갖고 있었다.

    강도 높은 심문의 와중에 나온 얘기였다.

    진대호는 그 뒤에 현석을 실험체로 써먹을 계획까지 갖고 있었다. 또한 이미 몇몇 플레이어를 잡아 실험체로 써먹었다는 자백까지 받아냈다.

    덕분에 일행의 죄책감을 약간이나마 덜어낼 수 있었다.

    오늘 모인 플레이어들은 그 일의 공범이나 다름없었다. 현석을 잡아 어떻게 할 거라는 계획 자체를 모두 알고 참여했으니까.

    어쨌든 진대호에게 얻은 쓸 만한 정보는 그게 다였다.

    그리고 나머지 네 사람에게 얻은 정보도 그와 비슷했다.

    놀랍게도 그들 역시 거대 조직의 아래에 있는 길드였다. 얘기를 맞춰보니 진대호가 말한 그 조직과 같은 조직이 분명했다.

    K나이츠 길드는 이제 힘을 모두 잃은 거나 다름없었다. 길드마스터인 진대호가 죽었고, 길드의 가장 큰 기둥이었던 흑기사단이 사라졌으니까.

    남은 길드원이 아직 많지만 그들은 그야말로 K나이츠 길드의 덩치를 부풀리기 위한 평범한 플레이어들이었다.

    아마 그냥 내버려두면 K나이츠 길드와 같은 역할을 하는 다른 길드에 의해 흡수되어 버릴 것이다.

    이런 건 그냥 내버려 두면 안 된다. 생각을 정리한 현석은 일단 전화기를 꺼냈다.

    * * *

    “예? 벌써 상황 종료라고요?”

    양동욱은 당황한 표정으로 벌떡 일어났다.

    그는 지금 어두컴컴한 지하실에 숨어 있었다. 상황이 끝날 때까지 지낼 준비가 철저히 되어 있는 장소였다.

    한데 문을 따고 들어오자마자 나가야 하다니.

    일단 한 번 써먹은 장소는 다시 쓰지 않는 것이 양동욱의 불문율이었기에 이곳은 이제 버려야 한다.

    양동욱은 신경질적으로 머리를 벅벅 긁었다.

    ‘한 시간만 일찍 끝내지!’

    여기 들어온 지 딱 한 시간 됐다. 양동욱은 잠시 여길 다시 써먹어도 되지 않을까 고민했다. 물론 고개를 젓는 것으로 생각을 끝냈다.

    아직 전화도 마무리가 안 됐다. 양동욱은 전화기 너머에서 들려오는 말에 집중했다.

    “예. 그 부분은 그냥 믿고 맡기시면 됩니다. 뒤탈 안 나게 아주 깔끔히 처리해 놓겠습니다.”

    양동욱은 만면에 웃음을 가득 머금었다. 이 장소를 버려야 한다는 일 따위는 까맣게 잊었다. 아니, 신경 쓸 필요도 없었다.

    드디어 일다운 일을 하나 하게 생겼는데, 지금 이까짓 지하실이 문제인가.

    양동욱은 전화를 끊고 서둘러 지하실에서 나갔다.

    밝은 햇빛이 그를 반겨주었다. 그는 손바닥을 비비며 씨익 웃었다.

    “K나이츠 길드라고 했지? 자아, 이걸 어떻게 요리해 줄까나.”

    K나이츠 길드의 중심이 싹 증발해 버렸으니 그곳을 털어 먹는 건 일도 아니었다.

    게다가 필요한 정보는 싹 전달받았다. 이건 양동욱 입장에서는 땅 짚고 헤엄치기나 다름없었다.

    “문제는…… 진짜 은밀하게 해야 한다는 거지.”

    사신 길드와 수라 길드를 조심하라고 했다. 그들과 K나이츠 길드 사이에 뭔가 관계가 있다니 말이다.

    게다가 뒤에 거대 조직이 도사리고 있을 거라니 어설프게 했다간 진짜 큰일 날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런 위험이 있어야 재미있는 작업이 되지 않겠는가.

    양동욱은 피가 끓어올랐다.

    “일단…… 상황을 혼란에 처박아 버려야겠는데?”

    이쪽은 K나이츠 길드에 대한 주요정보를 알고 있다는 커다란 이점이 있었다.

    그러니 아예 비밀스러운 승냥이들을 잔뜩 끌어들여서 판 자체를 진흙탕으로 만들어 버리는 게 나았다.

    양동욱의 입가에 즐거운 미소가 떠올랐다.

    “진짜 재미있어질 거야.”

    * * *

    “뭐냐? 왜 나만 여기로 데려온 거야?”

    임형석이 현석을 보며 불만 가득한 표정으로 투덜거렸다.

    세 여인은 새로운 던전으로 향했다. 운전수가 장소를 알고 있으니 그저 차에 타고 있기만 하면 다음 수련 던전에 안전하게 도착할 수 있을 것이다.

    임형석은 원래 그녀들과 함께 그곳에 가서 혹시 있을지 모를 상황에 대비하고자 했다.

    한데 그럴 수가 없었다.

    상당히 기대하고 있었기에 이렇게 따로 빠져나오니 불만이 생길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현석이 손가락으로 가리킨 곳을 보고는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지금 두 사람은 산꼭대기에 있었는데, 바로 옆 산에 수많은 사람들이 돌아다니는 중이었다.

    그 중심에 대충 지은 듯한 거대한 목조 건물이 하나 있었다. 얼핏 보기엔 창고로 쓰기 위해 지은 것 같았다.

    “저기 뭐가 있을 것 같습니까?”

    “난 그것보다는 저 주변에 있는 사람들이 더 신경 쓰이는데?”

    그 사람들은 하나같이 총을 들고 있었다. 척 보기에도 장난감이 아니라는 건 분명했다.

    임형석의 입가에 사나운 미소가 맺혔다.

    “이거…… 또 재미난 일을 꾸미고 계시는구만? 역시 따라오길 잘했어.”

    조금 전까지 왜 데려왔냐고 불평불만을 쏟아내던 것이 떠올라 현석이 피식 웃었다.

    현석의 시선이 허름한 목조건물로 향했다.

    저기에 던전이 있다.

    < 마무리 > 끝

    ⓒ 김강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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